지난번 소호헌을 소개하면서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에 대한 글을 소개했더니 그동안 우리 지역에 있던 ‘소호헌’과 ‘대구 서씨’에 대해 흥미 있게 읽었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이참에 ‘홍지모당’에 대해서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본관을 풍산으로 하는 ‘풍산 홍씨’도 안동과의 인연은 뿌리 깊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기에 이번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시조 지경의 10세손 모당 홍이상이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에 뽑혀 학문을 연마한 후 대사성,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여섯 명과 손자 열한 명을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그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영은 공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계원을 포함한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풍산 홍씨를 더욱 빛나게 하여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란 말이 나오게 했다. 시조의 묘소는 안동시 풍천면 신성포 오산당에 있다.
정자로 올라가서 바라본 정경, 낙동강의 지류인 광산천의 흐름이 아름답다.
풍산 홍씨가 풍산에 정착할 당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안동시립박물관 학술총서 10권인 『안동의 지명유래』를 발간하기 위하여 현지 조사를 할 때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고 해서 ‘큰마’, ‘대촌’, ‘대방촌’이라 부르는 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의 동쪽에 있는 산은 ‘고들봉’이라 불렀고, 그 앞의 들을 ‘고들봉들’이라 했다. ‘고들봉’의 동쪽에 신성초등학교가 있고 서원마의 동쪽 긴 골짜기 마을은 ‘장곡’, ‘장골’이라고 했다. 이 마을의 서쪽 뒷산에 홍씨의 묘지가 여러 개가 있었는데, 촌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처음 홍씨가 입향했던 먼 옛날, 홍씨들은 이름을 떨친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해 가산을 털다시피 하면서 나라 안의 유명한 지관은 모두 불러 극진하게 접대했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천하의 명당으로, 정승 판서가 쏟아질 자리이지만 하관 때에는 맏상주가 죽고, 소상 때는 둘째 상주가 죽으며, 대상 때에는 셋째 상주가 죽어야 하는 터인데, 그래도 그곳에 묘를 쓰겠느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는 것. 그러나 홍씨 상주들은 설마 하며 그 자리에 묘를 쓰겠노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묘를 쓰고는 해마다 삼 형제가 차례로 죽었다고 하며, 그 뒤 상주의 유복자가 대성하고 여러 형제를 둬서 자자손손 큰 인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안동에 남아 있는 풍산 홍씨 유적지, 창암정(蒼巖亭)
안동시 풍천면 신성리에 있는 창암정은 풍산 홍씨 2세 조인 홍애(洪崖) 홍간(洪侃)이 동래 현령 재임 시에 건립한 정자로 알려져 있다. 선생의 출생년은 미상이나 타계한 때는 고려조 충렬왕 30년(1304)이다. 2000년 10월 정자 아래에 선생의 시를 적은 시비 ‘창암정운(蒼巖亭韻)’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蒼巖亭韻 창암정에서
江畔釣魚穿細柳 강가에서 고기 잡아 버들에 꿰고 隴頭收秫䭾嬴牛 밭두렁에 차조 거둬 소 등에 실었어라 歸來自詫生涯足 돌아와서 스스로 내 삶에 만족하니 催釀黃花賞九秋 국화주 재촉하여 가을 경치 즐기려네
이 시로 미루어보아 창암정은 홍애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고증할 자료와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정자 주변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역대로 많은 사람들이 시를 지어 읊었는데 모두 25개의 크고 작은 현판이 게판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말아 아쉬움을 더한다.
정자에서 바라본 정경, 광산천 건너 오른편에 풍산 홍씨 영산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창암정의 내력은 1994년 11월 풍산 홍씨 대종회 명의로 게판된 창암정 중수기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수기에 의하면 ‘홍애공이 정자를 지은 후 화재로 소실되어 한 칸의 모옥(茅屋)을 지어 여러 해를 내려왔다. 그 후 영조 25년(1749)에 세계(世契)가 중심이 되어 경향 각지 제종인(諸宗人)들의 협조를 받아 1년 남짓 공사 끝에 복원하였다. 이듬해인 1750년 3월 정자 아래 명사(明沙)에 후손들이 운집하여 중건 잔치를 성대히 했다. 1962년, 1981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고 1994년 6월 4일 중수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홍낙성(洪樂性)이 영조 22년(1746)에 썼다. 당호는 정자를 엮은 바위와 산세를 견주어 창암이라 붙였다.
고려 말의 문신인 홍간(洪侃, 생년 미상~1304)의 자(字)는 평보(平甫) 또는 운부(雲夫)이고 호는 홍애(洪崖)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풍산 홍씨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의 아들이다. 원종 7년(1266)에 문과에 급제한 뒤 비서윤을 거쳐 도첨의사인 지제교에 이르렀다. 뒤에 원주의 주관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로 인해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문에 능하였고 시의 격조가 청아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제현의 "역옹패설"에서는 “그가 시 한 편을 지어낼 때마다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가 그의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저서로는 12대손 홍방이 여러 시집에 실린 것을 모아 엮은 "홍애집(洪崖集)" 1책이 있다.
풍산 홍씨 시조 홍지경 묘소, 창암정에서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계유사마동방계회도(癸酉司馬同榜契會圖)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계회도이다. 계(契) 또는 회음(會飮)이라고도 불리는 ‘계회’는 조선 사대부들의 모임으로 관아에 재직하는 관리들이나 과거에 함께 합격한 동기생들이 특정한 날에 한 장소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곤 하던 모임이다. 이런 계회에는 특정 관아 관료들의 모임과 독서 모임, 문중의 모임 또는 과거 합격 동기생들의 모임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런 모임이 있는 날에는 모임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를 ‘계회도(契會圖)’라고 한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서로 잊지 말자는 회상 자료로 삼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의 기념사진과 같은 의미가 있다.
‘계회도’는 당시 사대부들의 관직 생활을 통한 동료의식과 문사적 풍류 의식을 보여줄 뿐 아니라, 좌목(座目, 참석자 명단)에 기록된 참석자들의 인적 사항을 통해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계회도’는 기년작(記年作, 제작연대 표기)이 드문 조선 초·중기의 회화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계유사마동방계회도는 작자미상으로 크기는 가로 27cm, 세로 36cm이고 종이에 먹으로 그렸다. 이 그림은 계유년(癸酉年, 1573년)에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30년 후인 1602년(선조 35) 10월 16일, 안동도호부에서 계회를 갖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사마시는 진사와 생원을 뽑는 시험이고, 동방이란 함께 합격한 사람, 즉 동기를 일컫는다. 따라서 ‘계유사마동방계회’는 1573년의 사마시에서 진사와 생원으로 뽑힌 사람들의 ‘동기회’인 셈이다. 사마시에서는 생원과 진사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을 선발한다. 이 모임은 당시 안동도호부사로 있던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의 제안으로 1602년 10월 16일에 안동도호부 관아에서 열렸다. 이 회합에는 관직에 있던 7명과 관직이 없었던 8명이 모였는데, 경상도 출신이 주였지만 서울과 전라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참가하였다. 그림에는 모두 17인이 묘사되었는데, 한 사람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시발(李時發, 1569~1626)로 추정되는데, 이시발의 아버지 대건(大建, 1550~ ? ) 역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확인할 길이 없다.
사마시는 조선 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로 소과(小科)라고도 한다. 관리 임용을 위한 문과(대과, 大科)와는 성격이 달랐다. 생원・진사 두 시험 중에 진사시를 먼저 하고, 하루 지난 뒤에 생원시를 치르기 때문에, 흔히 진사시를 감시초장(監試初場)이라 하고, 생원시를 감시후장(監試後場)이라 하였으며, 이때 한 사람이 생원·진사 두 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서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림을 살펴보면 관아의 별채 앞에 친 천막 아래 안동부사 홍사군의 모친을 중심으로 참석자들이 왼편에는 사모관대 즉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와 관복을 입은 사람들 9명으로 당시 벼슬에 비춰보면 안동부사 홍이상, 경주부윤 이시언, 신령현감 채길선, 비안현감 유위, 영주군수 이람, 전 대구부사 김구정, 함양군수 고상안, 성주목사 신경진, 종사랑 금복고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선비들이 평상시에 입던 겉옷인 도포와 흑립(검은 갓)을 쓴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있다. 8명이 앉아 있으나 참석자 명단을 살펴보면 생원 윤의정, 진사 이종강, 생원 유인옥, 생원 김승복, 진사 권눌, 생원 이희백 등 6명이고 나머지 2명은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주위에는 따라온 시종, 곁에서 시중드는 관기와 이 모습을 구경하러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 주변의 건물과 산천을 묘사하였다.
이 모임의 이름을 찾다 보니 여러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시발의 문집 '벽오유고'에는 '화산홍사군동방회(花山洪使君同榜會)', 홍이상의 '모당집(慕堂集)'에는 '계유사마방중회(癸酉司馬榜重會)', 권눌의 '매헌유고'에는 '계유동년방회(癸酉同年榜會)', 윤의정의 '지령선생문집'에는 '방회(榜會)'로 나오는데 경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쓰고 있는 '계유사마동방계회(癸酉司馬同榜契會)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이 모임의 발문은 다음 해인 1603년 3월에 경상도 순찰사인 이시발이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유사마동방계회(癸酉司馬同榜契會)
‘동방(同榜)이란 같은 해에 급제한 사람을 말하며 모두 형제 같은 친분이 있다. 때때로 만나 좋은 정분을 나누며 정의(情義)가 돈독해야 하지만 세상살이 바빠서 만나고 헤어짐이 정상적일 수 없었다. 성균관에서 한번 이별하고 나서는 친구들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 사마시를 볼 당시에 많은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화산(花山, 안동) 홍사군(홍이상)과 월성(月城, 경주) 이영윤(이시언) 모두 이름난 재상으로 영남 지역(남번, 南藩)의 태수가 되어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 가운데 지금 영남지역 밖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7명이고, 영남 지역에 살면서 다행히 아무 탈이 없는 사람이 또한 8, 9명이니, 어찌 이때 한번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나의 돌아가신 부친께서도 이들과 함께 급제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이시발의 부친 이대건李大建, 1550~1574). 불초한 내가 외람되게 지금 이곳 경상도의 순찰사가 되었으니, 이 일을 듣고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어찌 즐겨 돕지 않겠는가? 도내에 계시는 제공(諸公)들이 기일을 지정하여 안동에 다 모였는데, 만난다는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으로 또한 호남의 두 상사(上舍)도 있었다. 그날이 바로 임인년(1602, 선조 35) 10월(맹동孟冬) 16일(기망旣望)이었다. 안동에는 호수, 정자, 공관(호루공관湖樓公館)등이 경치가 좋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홍이상 안동부사의 관아(아정衙庭)에 자리를 만든 것은 부사가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수천 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단란하게 모여 삼십 년 동안 겪었던 슬픔과 기쁨을 시원스레 풀며 저녁까지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였다. 또 촛불을 밝히고 마루에 올라 백발의 대부인(자친-慈親)에게 절하고 춤추니 고을의 늙은이들은 기쁜 얼굴로 모여 바라보며 모두 감탄하고 말하기를, "인간세상의 성대한 일이로다." 하였다.
아, 대부인이 강녕하여 십여 명의 동기들 앞에서 축수를 받으니, 홍이상 같은 이는 참으로 인간의 왕성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로다. 불초(이시발)같이 외로운 사람은 이번 모임에서 제공들이 질병이 없는 것을 보니 어찌 돌아가신 부친 생각에 가슴 아파하고 울먹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인하여 써서 기록하노라. 만력 계묘(癸卯 1603, 선조 36) 3월(모춘暮春) 상한에 가선대부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순찰사 월성 이시발은 삼가 발문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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