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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Scene 21. The Requiem /만가(輓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잡아가면서, 익숙
하지 않은 문양들이 지호의 시야에 어슴푸레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눈 앞에 펼쳐진 낯설은 문양은 화려하게 장식된 천의 일부분 같은 모
습이었다. 한 가운데서부터 사방으로 펼쳐져 나간 화려한 천들은 고풍
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막 동이 터오려는 듯,
새벽 어스름 속에 보이는 낯선 문양을 따라 잠시 시선을 움직이던 지
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후."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듯 나른했다. 기(氣)를 수련한 이
후론 전혀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가슴을 메워오는 슬픔에 지
호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래도…… 꿈이라서 다행이야.
격한 감정은 나른한 온 몸에 잔 물결을 남기고는 천천히 물러갔다. 지
호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악몽이었다. 지금도
그 슬펐던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져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지
호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런데……
지호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굴러 떨어졌다.
어디부터가 꿈인거지?
새벽 어스름이라고 생각했던 여린 빛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고풍스런
자태를 뽐내던 문양들도 천천히 그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지호의 눈
에 들어오는 것은 회색빛 어두움뿐이었다. 그리고 잠시후, 지호는 문
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가주(家主)는 휘장이 둘러쳐진 커다랗고 화려한 침대가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뒤 따라온 두명의 장로들
이 마저 방에 들어서자 문은 등 뒤에서 조용히 닫혔다.
침대의 휘장은 지금은 양쪽으로 걷혀 있어서 그 가운데 상체를 일으키
고 앉아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얼굴에 긴 흉터가 가로지르고
있는 단발머리의 청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막 방 안으로 들어선 가주와 장로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 옆에 짧은 머리를 한 예쁜 아가씨 한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가주와
장로들 쪽을 보고 앉아 있었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네, 지호군."
가주는 천천히 침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부드러운 얼굴로 말을 걸
었다. 침대 위에 앉아있던 지호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주 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몸은 좀 어떤가?"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나온 것은 옆에 앉아있던 아가
씨, 리니아 쪽이었다.
"저분들은……"
리니아의 시선은 가주의 뒤쪽을 향해 있었다. 가주는 뒤를 돌아보았
다. 그와 함께 들어온 장로 두명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주는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쉽게 대답했다.
"아아. 가문(家門)의 주인(主人)에게 올리는 예일 뿐이니 신경쓰실 것
없소. 아가씨."
"가문의 주인…… 아아."
리니아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주인이라는 말은 곧 '
가주(家主)'라는 뜻이니까.
"그보다……"
가주는 잠시 지호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그저 대꾸를 하고 있지 않을
뿐, 상태가 나쁘다거나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지호군과만 할 얘기가 있는데 자리를 좀 비켜주지 않겠소?"
리니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일어났다. 리니아가 방을 나가자 가
주는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장로들에게 말했다.
"자네들도 이제 됐네. 지금은…… 형편이 아니시니……"
무릎꿇고 있던 두명의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가주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방 안에는
여전히 대답없는 지호와 가주, 둘만이 남게 되었다. 가주는 지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지호에게 내밀었다.
"유품(遺品)은, 이것뿐일세."
지호는 고개를 돌려 가주가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작은 것
이 가주의 손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색의 조금 큰 반지
였다. 불빛을 받아 광택을 내고 있는 그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정교한 문양들이 빼곡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지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약간 쉰듯한 탁한 목소리가 지호의 상
태를 말해주는 듯 했다.
"오직 직계만이 계승할 수 있는 가문의 증표(證票)일세. 그녀는 이걸
끼고 있지는 않은 듯 하더군. 목걸이로 옷 안에 걸고있던 걸 찾아냈
네."
가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자네한테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가주는 말끝을 흐렸다. 고대유적 안에서 지호와 렌이 같이 있던 것을
보았던 가주 나름의 배려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
었다. 그러나 지호는 가주의 손 위에 놓인 검은 반지위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흠칫
지호는 손가락 끝이 반지에 닿자 잠깐 움찔했다. 그러나 곧 그의 손은
검은 반지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렌은…… 지금 어디에……"
가주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보겠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너무나도 환한 햇빛에 아이리스는 가늘게 눈을 떴다. 시야 가득 들어
오는 것은 오직 환한 빛뿐이었다. 눈을 찡그리며 손으로 빛을 조금 가
리자 그제서야 눈 앞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창 가
득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자신이 있는 곳이 허름한 방의 지저분한 침대 위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리스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창으로 들어
오는 햇살만이 조명의 전부인 낡은 방. 예전에 자주 보았던 전형적인
주점에 딸린 숙소의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리스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냄새나는 침대 위에 아
무렇게나 엎드려 있었다. 한 손에는 그녀의 연검이 이리저리 휘어진
채로 쥐여 있었는데, 아직도 채 굳지않은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이건 뭐지?
연검에 묻은 피를 보며 아이리스가 눈쌀을 찌푸렸다.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혼자 있는 건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것
은 카르나스의 진영을 나온 후 이곳 저곳을 미친듯이 헤메고 다녔다는
것뿐.
으윽.
머리가 빠개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입에서 나는 냄새로 보아서는 술을
과음한 것 같았다. 아이리스는 일어나서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물로
간단하게 얼굴을 낭었다. 그리고 한쪽에 놓여 있는 천을 들어 세심하
게 연검에 묻은 피를 닦아낸 아이리스는 손을 들어 이리저리 검을 휘
둘러 보았다.
휘릭, 휘리릭.
아이리스의 손에 들린 연검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리저리 공중
에서 춤을 추며 번쩍거렸다. 그 공기를 찢는 소리가 아이리스의 기분
을 조금 풀어주었다. 가볍게 손을 휘둘러 연검을 집어넣은 아이리스는
일어나서 옷차림을 조금 매만진 후 방 문을 열었다.
탈칵.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무언가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복도를 통해 들려왔
다.
"그래, 그 녀석 사람구실은 좀 할 수 있을 것 같나?"
"글쎄, 모르지 뭐 재수없으면 어디 한 군데 병신이 될지도 모르지만,
언뜻 보기론 그렇게까지 되진 않을 것 같더군. 하지만 아무래도 앞으
로 다시 거들먹거리진 못하겠지. 평소에 영주만 믿고 눈에 뵈는게 없
더니 당해도 싸지, 당해도 싸."
"그래도, 우리한테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제놈이 저승사자인 줄도 모르고 괜히 추근댄
결과인데. 게다가 그놈, 앞으로 제대로 힘쓰기 어려울걸. 크크큭."
"그래도 어제 그 여 검사는 정말 섬뜩했어. 사람을 그렇게 개 잡듯이
……"
갑자기 말소리가 뚝 끊어졌다. 아이리스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다가
주점 안에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고개를 돌렸고 머
쓱하니 대화를 중단했다. 아이리스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주점
안에 비어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시려우?"
주인인 듯한 사람이 천으로 손을 닦으며 다가와 물었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젓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물하고…… 스프나 조금 가져다 주세요."
"그러시우."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리려 했다.
"잠깐만요."
아이리스의 말에 주인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주인의 눈은 무슨 일이
냐고 묻고 있었다.
"제가 묵었던 방값, 얼마죠?"
"필요없수다."
주인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저…… 식사를 마친 후에 곧 떠나주기만 하면 되오."
아이리스의 의아한 표정을 뒤로하고 주인은 몸을 돌리며 혼잣말인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런 곳에 오래 있을 사람도 아닌 것 같으니……"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아이리스는 주점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흘낏
흘낏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복잡한 느낌들을 담고있는 그들의 시선에
서는 한결같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철벅. 철벅
떠드는 말 한마디 들리지 않는 주점에 걸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구석에서 가무잡잡 얼굴의 젊은 여자가 커다란 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
고 있었다. 그녀도 아이리스를 힐끔 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
보다 더 자주.
아이리스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과 바닥을 번갈아 왕복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걸레질 하고 있는 바닥에 선명한 것은 검붉은
핏자국 이었다.
욱.
신물이 올라왔다. 자신에 대한 짙은 혐오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치
욕지기처럼 기어 올라왔다. 기억이 제대로 안 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상대도 되지않는 사람들을 연검까지 빼어들고 저런 식으로 화풀이를
해 댔다는 것이 다름아닌 자신이라는 것에 울고싶을 정도로 화가 났
다.
"여기……"
음식을 가져온 주인이 아이리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움찔해서는 조용
히 내려놓고 가버렸다. 방금 끓인 듯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스프 냄새
가 아이리스의 코 끝을 간질었지만 아이리스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
았다.
"갔나?"
주방에 들어갔던 주인이 나와서 주점 안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물었다.
"갔네."
대답한 것은 아까 주인과 말을 나누던 마을 사람이었다. 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타부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주인은
아이리스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김이 오르
고 있는 스프가 자신이 내려놓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인생살이, 누구나 다 힘들고 그런 게지."
주인이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조금씩 흔들리는 낡은
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까 앉아있던 여인의 환한 금발처럼 보였
다. 여러가지 냄새로 찌든 주점 안에 스프의 구수한 냄새 한줄기가 떠
돌아 다녔다.
* * *
싸늘한 바람이 불어 리니아의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리니
아는 고개를 돌려 복도 한쪽으로 면한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깊어
가는 겨울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새벽녘의 차가운 날씨에 정원의 나무
들도 을씨년스럽게 가지를 움츠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겨울…… 인가?
이미 겨울이 짙은지도 오래였지만 리니아는 새삼 새벽 어스름 속에 보
이는 정원에서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
이 맑았다.
지호, 넌 지금 어디쯤 있니? 북부산맥은 여기보다 훨씬 추울텐데……
"리니아 아가씨."
옆에서 들린 나지막한 소리에 리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꽤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 본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게 옷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리니아의 한걸음 뒤에 서 있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그들의 모습은 본가의 사람들과도,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도 달랐다.
마치 군대의 제복같은 옷이랄까. 그들은 리니아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
이며 말을 이었다.
"섀도우 밸런스가 리니아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리니아 아가씨' 이것이 본가에서 리니아의 정식 호칭이었다. 가주와
장로회는 리니아를 티에라 가문의 후계로서 정식으로 본가의 새로운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명목상 본가의 구성은 두개의 가문에서
세개의 가문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저주받을 가문이라 불리우던 티에라 가문이 본가에 합류하는 것에 대
해 일부 혼란이나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문의 주인
된 자, 한 사람의 가문을 잇는 자의 뜻이라는 말 앞에 장로회 전원은
침묵했다.
현재 새로 구성된 장로회가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친
가주성향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가문의 주인된 자의 뜻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티에라 가문의 본가 합류가 그들
의 현실적 이익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요소도 분
명히 있었지만.
"아가씨……"
뒤에 섰던 사람이 다시한번 나즈막히 그녀를 부르자, 리니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리니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먼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 아래 그녀가 가장 보고싶은 누군가가 있
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그녀를 보고싶어할까?
리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살짝 실소(失笑)를 머금었다. 아마도 그럴린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는 한 그런 것에 가장 둔하고 바보스러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미 다른 사람을 마음 가득 담아두고 있는 사람
이니까. 이제는 경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가죠."
리니아는 짧게 말을 내뱉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 섰던
두 사람도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새벽 어스름 속에 리니아는 섀
도우 밸런서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도 그녀 앞에는 많은
결정해야 할 문제들과 정보들이 쌓여 있을것이다. 어느것 하나도 소홀
히 할 수 없는.
리니아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소.
지호가 떠나고 난 후, 가주가 전해주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지호는 리니아를 보지도 않고 떠났다. 그러나 지호가 리니
아를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 만으로 리니아는 만족하기
로 했다.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지호는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그의 건강한 얼굴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기다림은 충분히 보상
받고도 남을 테니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어.
리니아의 눈동자가 새벽 어스름 속에 반짝 빛을 내었다.
첫댓글 즐독하엿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호의여자들이 몇명인지^^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