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동영상...플레이를 시켜서 아래 투브에서 확대화면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음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도시이기는 하나 순탄하게 도시가 형성되어 발전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서구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지기도 했었고 문명화가 덜 되어 있었으며 표트르 대제의 뒤를 잇는 황제들의 능력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표트르 대제의 취지와 반대대는 행위를 일삼아서 페테르부르크의 발전과 러시아의 발전을 방해하기도 했었다.
1715년 러시아의 수도로 결정되어 1918년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가기까지의 200여년 동안 로마노프 왕조의 15명의 왕과 여왕들이 있었으나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황제는 표트르 1세와 예카테레나 2세로 표트르 대제와 예타테리나 대제로 불리운다.
예카테레나 여제..... 정권을 기 위해서 많은 군인들과 귀족들과 외교관을 연인으로 두었는데 그 중에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 된 사람들도 있었고 그 당시의 명망이 있고 유능한 장군들과 장교들은 다 연인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카테레나가 남편에게 반기를 들 때 오를로프 장군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여제를 도왔다고 ...
예카테레나 2세는 독일(당시는 프로이센)의 몰락한 귀족의 출신으로 표트르 3세의 배우자로 영입되어 왔으나 남편인 표트르 3세가 무능하자 그를 축출하고 자신이 여제(女帝)된 사람이다. 황제가 후궁을 두는 것처럼 공식적으로 자신의 정부(情夫)들을 두고 지냈다고 한다. 야심이 컷던 만큼 많은 치적을 쌓아서 러시아가 유럽의 열강들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국력을 신장하여서 러시아의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유럽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정치적으로도 국민들의 자유와 기본권에 대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때였으므로 어느 나라나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골몰하였으며, 러시아 또한 농노제도의 폐해나 유럽의 귀족들과 달리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없는 무책임하고 무능한 귀족들의 행태로 인해서 젊은 장교들이 항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1812년 60만 명으로 러시아를 침공해서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모스크바를 잃는다고 해서 러시아를 잃는 것은 아니다’ 라는 쿠투초프 장군의 청야작전으로 인해서 에 3만 명만 파리로 돌아가게 되었고 1813년 라이프치니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뒤 1814년에 파리에 입성하게 된다. 이 때 러시아의 장교들이 서구의 문화와 그들의 사상을 배워오게 되고 러시아의 무능한 황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은 그들이 1825년 러시아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여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으나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대작인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전쟁과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배경이 된 소설로 톨스토이가 시베리아의 유배지에까지 가서 그들의 유배지에서의 그들의 삶을 취재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였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관한 내용만 쓰고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내용은 조금 시작하다가 죽는 바람에 못쓰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왕실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라스푸틴이라는 요승을 끌여들여 국정을 파탄내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고 결국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서 왕정이 종식되고 공산주의가 시작되게 되는데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은 1918.7.16일 우랄산맥의 유배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로마노프 왕가는 300여 년 동안 14대의 왕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유럽처럼 입헌군주제를 받아 들였더라면 지금도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1991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대조를 통한 DNA 검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져서 성당에 안치 되었다고 한다.
역사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아르미타주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오니 5시 반으로 비원이라는 한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니 6시 반이다. 우리가 유람선을 탄 곳은 구글지도에 보니 운하처럼 생겼는데 폰탄카 강이라고 나온다. 폰탄카 강에사 유람선을 타고 30여분 동안 네바 강까지 가서 피터엔 폴 요새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로 한 시간의 코스이다.
저녁을 먹은 비원이라는 한식 집
하루에 한끼는 한식을 먹었던 것 같다.
이곳의 날씨는 맑다가도 비가 오기 때문에 항상 우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유람선을 타는 코스가 이곳과 덴마크 두 곳이 있는데 둘 다 옵션으로 되어 있다. 친척이 몇 년 전에 우리와 같은 코스로 다녀왔는데 유람선을 타는 것이 재미가 없다고 해서 어디를 빼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두 군데 다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는데 유람선을 타면서 드는 생각이 이런 유람선을 타면서도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운하처럼 보이는 폰탄카 강 이곳에서 유람서늘 탄다.
운하와 운하로 도시가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26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리가 400개가 넘는다고....
뒷편에 보이는 하늘색 지붕의 돔이 러시아정교회 삼위일체 교회이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들
관공서 같아 보이는 이 건물을 가이드가 설명을 하지만 기억할 수 없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고유한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덴마크는 덴마크 고유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유람선은 한 번만 타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제 다시 또 유람선을 타러 오겠는가.... 기왕 여행을 왔으면 옵션가격이 비싸더라도 관광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혹시 이 코스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두 군데의 유람선을 반드시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변이 보이는 건물과 사람들이 확실히 모스크바와는 다른 느낌이다. 모스크바를 하루 머물고 와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곳은 사람들이나 건물들이나 유럽과 같은 느낌이 난다.
배위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바람을 맞더라도 구경을 더 하겠다는 사람이고 실내로 들어가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소위 유람선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나 다를 재미 있어 한다. 유람선을 타면 어디에서나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캔맥주와 간단한 안주 그리고 체리를 나누어 준다. 이제 이틀이 지났다고 얼굴도 익고 해서 건배도 같이 하게 된다.
네바강 쪽으로 나가니 표토르 대제가 만든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가 보이고 건너편 칼리닌스크 지구의 강변에 있는 광고탑에 삼성과 기아자동차의 광고탑이 보인다. 외국 땅에서 보는 우리기업의 광고탑을 보면 반가운 것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네바강에서 다시 운하쪽으로 들어오는 길이고 바깥에 비가 와서 실내로 들어와 있는 일행들
사람들....
이곳이 선착장이다.
지붕이 아름다운 성당
배를 타기 위해서 만들어진 운하 선착장..도시가 만들어질 때 만들었겠지...
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유람선 관광을 끝내고 페테르부르크의 관광을 끝내고 푸시킨 시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서 내일은 핀란드를 거쳐서 스웨덴으로 가게 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성 이삭 성당이 있어서 잠깐 멈추어서 기념사진만 찍는다.
이삭성당
성 이삭 성당은 황금만 100킬로 이상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삭 대성당은 네 번째 지어진 성당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1707년에 표트르 1세에 의해서 섬에 세워져서 나무가 썩어서 1727년에 두 번째성당을 지었으나 1735년에 벼락을 맞아서 훼손되어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서 세 번째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40년 만인 180년에 완성하였으나 더 큰 성당을 짓기를 원한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서 1812년에 짓기 시작해서 1858년 5.30 표트르 대제의 생일날 완공하였는데 단일 예배당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습지대를 매립해 세워진 도시였기 때문에 거대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는 토대를 다져야 하는데 땅을 파서 물을 퍼내고 길이 6.5m, 두께 26~28cm의 나무 말뚝 10,762개를 수직으로 박는 기초 공사에는 5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한편 성당의 파사드(정면)에 세워질 48개의 원기둥은 핀란드에서 채석한 화강암 원석을 바지선에 실어 운송해온 것을 사용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25톤에 달했으며, 이 기둥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데에만 3년 가까이 걸렸고(1828~1830) 매끄럽게 연마하는 데 다시 4년여가 더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신성한 건물을 짓는데 동물의 힘을 빌릴 수가 없다고 하여 인력으로만 건물을 짓는데 4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성당의 돔 안에 관광객들이 들어가서 시내를 둘러본다....
이 건물이 돔에 올라가면 페테르부르크가 다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고 하는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구경을 하지 못했으나 그 위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는 관광객들도 있다. 앞에는 니콜라이 1세의 거대한 청동기마상이 서 있다.
니콜라이 1세의 청동기마상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기에 보이는 성당
본래는 이렇게 생긴 모습이라고....삼위일체 성당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데 예술작품 같다.
러시아 성당이 맘에 드는 것이 다양하게 건축되어졌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페테르부르크에는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을 닮은 피의 성당을 비롯하여 러시아 박물관, 유수포프 궁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예카테레나 궁전 등 수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서 도시의 문화재군들이 있는 곳들이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2008년에 부산과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피의 성당의로 본래 이름은 그리스도의 부활 성당이며 알렉산드르 2세가 자신의 아버지인 알렉산드 1세가 총에 맞아 죽은 자리에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카테레나 궁전이 외부모습
예카테레나 궁의 호박방...새로 만들어진 방이라고...
예카테레나 궁은 1756년에 건축되었는데 표트르 1세의 황후인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으로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으며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한다.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고...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가 1999년부터 다시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고 한다.
시간만 있다면 위에 언급된 문화재들은 볼 가치가 충분한 것들이지만 본래 주된 여행의 목적지가 노르웨이고 러시아는 경유만 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 욕심을 내는 것은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 적인 생각으로는 노르웨이 일정을 하루 줄이고 이곳에서 하루를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욕심일 뿐... 언제 시간이 있어서 여기를 또 오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유럽과 분명히 다른 곳이지만 유럽과 같은 매력이 있는 도시로 시간이 나면 다시 방문해서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곳이다.
첫댓글 확대한 사진으로 댜시 게재하였습니다.
맞아요, 여행가서 옵션때문에 못 볼경우가 있는데
가급적이면 다 봐야 후회하지 않더라구요
외국에 나가서 우리나라 기업 광고판을 보면 반갑지요
데카브리스트 난의 실패로 이르쿠츠크 등 시베리아로 귀양가게 됩니다..
똑똑한 이들이 이르쿠츠크를 동양의 파리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그동안의 선입감을 완전히 바꾸게 한 생테부르크였습니다.
멋진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