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이 대사를 보면, 누구나 힘 있고 강한 어조의 북한 여성 아나운서를 떠올릴 것이다. 그녀는 바로 북한의 간판 아나운서 리춘히(68). 그런데 그녀가 최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 국영 조선중앙TV에서 김정일 총서기의 동정 등 중요 보도를 담당하는 그녀가 10월 19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50일 이상 TV에 출연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주요 언론이 라디오프레스(RP)의 기사를 받아 일제히 보도했다.
힘있는 어조로 뉴스를 읽는 것으로 유명한 리춘히는 '인민방송원'과 '노동영웅'의 칭호를 가진 북한의 '간판' 아나운서다. 그녀가 이 정도 장기간에 걸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리춘히는 10월 19일 밤의 정기 뉴스에서, 러시아 타스 통신의 서면 인터뷰에 대한 김정일 총서기의 답변을 읽은 것을 마지막으로 출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 리춘히
혹시 탈북해서 곧 TV조선에서 " 100만개의 태양이 비추는 아우라가 넘치는 박근혜 대표는...(억센 북한 억양으로...) "
할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북한의 우상화나 남한의 어버이연합등 보수꼴통들의 박빠 해바라기나 오십보 백보입니다.
심지어 박근혜가 북한을 방문했을때 공치사였긴 했겠지만 김정일이 박근혜 칭찬하더군요..
꼴통 조선일보도 이런 기사를 내놓았더군요.그러고서 붕어빵 머리인가..아우라 발성을 하고 있으니....
위키리크스 美외교전문 공개
- ▲ 지난 2002년 5월 방북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좌)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우) /조선일보DB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2일 공개한 2008년 11월 13일자 주한 미대사관의 전문에 따르면 북한 김정일은 2002년 5월 방북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우리 둘 다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들이니, 선친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과 김정일이 2002년 나눴던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정일은 박 전 대표에게 "선친들(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일성 전 주석)이 평화롭고 통일된 한반도를 위한 맹세를 담아 서명한 7·4공동성명을 이행하길 원한다"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했다.
박 전 대표가 김정일에게 국군포로, 이산가족, 금강산 댐 사업 등 논의돼야 할 의제 목록을 건네자, 김은 "이런 의제들【� 두 나라가 진전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김 위원장이 북한 경제에 대해 매우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고, 중국 상하이 푸동에서 목격한 경제 발전에 놀란 것 같았다"며 "그래서 내가 김 위원장에게 '북한 경제를 위한 최선의 길은 북한이 (중국과 같이) 신뢰할 만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박 전 대표는 스티븐스 대사에게 "2002년 7월 경제개방을 선언한 김 위원장은 진정한 변화를 원하는 것 같이 보였다"며 "그러나 그해 가을 북핵 개발 프로그램이 밝혀지면서 경제개방 기회가 중단됐다"고 말했다.
끔찍합니다. 독재를 위해선, 서로 손을 잡을수도 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한과 북한 모두 독재로 걸은거 아시는지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한은 국가 주석제. 남한은 유신체제.그런말이 많이 돌았습니다.
ㆍ오는 3월 게이오대 정년퇴임
“일본이 만 35년간 한반도를 지배한 역사는 부정할 수 없지만, 일본인이 한반도의 통일에 공헌할 수 있다면 미래의 한·일관계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입니다.”
일본 게이오(慶應)대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65·사진)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열린 18일 오후 도쿄 미타(三田) 캠퍼스 강의실. 노교수는 오는 3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나의 한국 연구 40년’을 주제로 마련한 강연을 이 같은 말로 끝맺었다.
한반도 연구를 40년간 계속한 끝에 ‘일본 내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은 노교수의 마지막 호소는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한국·일본인 학생들과 양국의 지인들에게 크게 울려퍼진 듯했다.
오코노기 교수가 처음 ‘한국(조선)’이라는 말을 자기 인생에 끌어들인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인 1967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지도교수이자 중국 연구자인 이시카와 다다오(石川忠雄) 교수가 학부 논문 제목을 미리 정하라고 해서 불쑥 ‘중국의 조선(한국)전쟁 참전’을 연구하겠다고 한 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셈이다.
이런 경위로 일본 지식인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던 한국과 북한에 관심을 두게 됐고, 72년 8월에는 ‘연세대-게이오대 교환학생 프로그램 1호’로 2년간 한국에 유학했다.
“한국에 도착하기 직전인 7월에 남북한이 갑자기 공동성명을 발표하더니 한국에는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북한에는 국가주석제가 시작되더라고요. 그때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비슷한 일이 한반도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더군요.”
이후 81∼82년 미국 하와이대와 조지워싱턴대 유학을 거쳐 작성한 박사논문이 그의 대표작인 <한국전쟁-미국의 개입 과정>(86년)이다.
이후 일본 내 대표적인 한반도 연구자로 명성을 떨치며 ‘3김(金)’ 등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인을 두루 만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의 아이디어를 내는가 하면, 제2기 한·일역사 공동위원회 일본 측 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을 잇는 활동을 했다. 이런 공로 덕에 게이오대는 한국 연구에 관한 한 일본 대학 중 도쿄대와 함께 ‘양대 학맥’으로 꼽히기에 이르렀다.
오코노기 교수는 “남은 인생도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을 연구하는 데 바치고 싶다”고 밝혔다.
둘다 장기집권에 종신집권에 틀을 만들었죠.당시 서로 겉은 욕하지만.. 속은 서로 장기 집권하기 위해
반대파를 휩쓸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가능성있죠.
김일성은 국가주석제 이전에 마지막 반대파인 갑산파를 숙청했고.. 박정희는 3선개헌과 유신체제 공고화로 야당뿐 아니라
여당내 박정희 반대파도 숙청했죠.
중앙정보부 지하 고문실로 끌고가 소위 족쳤습니다. (야당뿐 아니라 공화당내 소장파까지..)
말이 안될것 같지요?
독재자는 독재자끼리 통합니다.. 서로 집권을 위해서는 자기 국민들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고...
사상이 공산주의든 극우든..
다음 사진 보면 알겁니다.
1941년 소련 침공전에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폴란드를 둘이서 사이좋게 찢죠.
애국 폴란드 장교들은 카틴 숲에서 스탈린의 소련군들이 학살하구요.
나중에 독일의 소련침공으로 서로 돌아서지만..
이때 모습 보면 독재자들이 얼마나 사이 좋았는지 아실겁니다. (나치와 소련)
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는 소련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 서 있는 사람 중 왼쪽에서 셋째가 독일 외무부 장관
리벤트롭, 넷째가
스탈린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獨蘇不可侵條約),은 1939년에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상호불가침을 목적으로 조인한 조약으로, 조약에 서명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롭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941년에 나치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 전쟁이 벌어져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세계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를 증오한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독일에서 집권하자마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독일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하여 강제로 해산시키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불태우는등 자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세력들을 탄압했고 소련도 나치 독일을 소련을 크게 위협하는 자본주의 파시즘세력으로 생각하여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약체결국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
- 조악체결국의 한 쪽이 제 3국의 공격을 받으면 상대방 조약 체결국은 조약을 체결한 나라를 공격한 제3국을 일절 원조하지 않는다.
- 조약체결국 쌍방은 상대를 적대하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다.
- 조약 체결국 사이에 생긴 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편집] 독일과 소련의 협력
서방 연합국은 소련과 연합하여 히틀러의 나치 독일[1]을 제지하려 했고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때의 독일과 같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하는 사태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을 소련으로 보내 1939년 8월 23일에 모스크바에서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이유는 스탈린이 믿을 수 없는 서방 연합국과 동맹을 맺기보다는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이 소련에 더 이익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조약에서 동유럽을 독일과 소련이 각각 분할하기로 하는 비밀 의정서를 만들었다.[1][2] 폴란드 동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루마니아 북부의 베사라비아는 소련의 영향권에 두기로 인정받았다.[2] 1939년 9월 두 번째 밀약에서 리투아니아도 소련의 몫으로 추가되었다.[3]
1939년 9월 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여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에 독일의 요청으로 1939년 9월 17일에 폴란드를 침공[4]:43[5] 한 소련군은 폴란드의 동부지역을 점령하고 1940년 6월에 발트해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세 나라와 루마니아의 부코비나와 벳사라비야를 점령하여 소련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나 독소불가침조약은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독일과 소련이 전쟁을 시작하며 폐기되었다.
첫댓글 저 분 안 늙어요 ~ 신기 하다는!
종편채널 삭제 안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