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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5:8
주의 손에 한 잔이 있으니 그 포도주는 붉고 완전히 혼합되어 있도다. 그가 그것을 쏟으시니 지상의 모든 악인들이 그것의 찌끼를 짜 마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4:10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양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이 글에서 혼합, 섞는 것과 분리, 성별의 의미의 기초만을 설명하려 합니다.
오늘날 이단과 이단교리들의 대부분은 "극단적 성별주의"에서 오기보다는 "극단적 혼합주의"에서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성별이라고 불리는 집단들은 거기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만 실패하지만 극단적 혼합주의는 수많은 사람을 패배시키기 때문에 해악이 더욱 큽니다.
비난하는 주체도 다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성별되어 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별되어 사는 것"은 거처를 산 속으로 옮겨서 움막을 짓고 타인과 접촉하지 않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로마카톨릭이나 동방정교에서 소위 "봉쇄 수도원"에 평생 갇혀서 사는 수도사 같은 삶이 성별의 전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성별을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어쨋든 남과 달라 보이고 이색적으로 보일 뿐더러 세상의 때가 덜 묻어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성별이란 행동할 때 나타나는 성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언행은 불신자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면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지 항상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모든 할 말을 끝까지 다 해버리거나 모든 감정을 끝까지 다 분출하거나 화를 끝까지 내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조심하고 경계하는 언행과 생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절제이고 성별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그런 절제를 아주 고깝게 여기고 잘난 체 한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은 전혀 잘 난 체 하는 부류가 아님에도 잘난 척 하는 인간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별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복음증거)에서 나타나며 성경에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도 말씀했습니다. 이 향기를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이 향기를 내는 자라야 성별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주 완벽하게 교회 출석과 기도회 출석을 하고 헌금에 빠지는 것이 없으므로 성별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믿음은 사실상 파선 직전인데 그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희안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기면서도 그리스도인은 의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복음 증거에 전혀 관심도 없고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으면 앞에서는 칭찬해 주는 척 하면서, 아 당신은 정말 열린 마음을 가진 교인이시군요, 현대적이십니다...아부를 하면서 뒤에서는 경멸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대로 하지 않는 저 위선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인고 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별된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정말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도 세상에도 쓸모없는 잉여로운 존재로 살다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이 글의 주제는 믿음과 행위를 섞는 것을 말하려 함이므로 주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의 다수, 교인들의 절대 다수는 이 말의 심각성에 대해서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이단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처음과 끝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일부 진리입니다.
이단들은 성경을 믿는 것 같이 말하지만 자세히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성경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교회에 옮겨서 적용한다면 많은 교회가 복음을 잘 전하지만 결론을 반성경적으로 끌고 가서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 던져 버립니다.
이 말은,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목사들도 있고, 그 거짓목사들을 비방하면서 또 자신의 거짓교리를 전하는 자칭 거룩한 자들도 있는데 그들과 비난당하는 그들 모두가 함께 속아서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신뢰하거나 사람의 말을 신뢰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나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수백가지로 해석이 갈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해서 누가 더 주석을 잘 쓰는지 그것을 보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대개 영적으로 생명력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아닌 종교 서적들, 코란경이나 불경 같은 것들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책들이기에 그 책들 자체는 별볼일이 없고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계속해서 주석들을 붙여 가면서 "새로운 해석" "새로운 관점"을 끊임없이 들고 나와서 자신이 더 잘난 선생이라고 제시하고 사람들을 따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팔만 대장경이라는 쓸모없는 사람들의 철학 나부랑이가 있고 모슬렘에도 주석가들, 선생들이 있으며 성경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탈무드를 비롯해서 많은 전통과 주석서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종교로 분파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1차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성경을 믿는 사람 중에서 "말로만"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과 진짜로 성경을 믿는 사람, 그렇게 나뉩니다.
말로만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런 사람이 안 될 것이며 그런 사람들의 모임으로부터도 조심하고 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쉽게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에 차이를 안 두셨다면 수많은 사람이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둘, 즉 명목상 믿는다는 자와 진짜로 믿는 자의 차이점을 현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의 입술의 고백은 서로 다르고 그들의 행실도 다릅니다.
명목상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이 말씀은 이 이유때문에 믿을 수 없고, 저 말씀은 저 이유 때문에, 이 말씀은 너무 고대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곤란하고 저 말씀은 너무 성차별적이므로 거부한다, 그런 식이 됩니다. 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하지만 나는 나한테 마음에 드는 말씀을 그 중에 "취사선택"하여 믿을 것이다, 이것이 "명목상 믿음"의 실체입니다.
교단교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제가 위에 설명한 "취사선택" 믿음의 다른 말입니다. 성경에 교단교리라는 것은 없고 단지 성경의 "교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미 교단교리에 입맛을 들여 놓고 있고 당신은 저런 스타일로 믿어라, 나는 이런 스타일로 믿을게.. 당신은 구원이 죽을 때까지 불확실하다고 믿어라, 나는 확실하다고 믿을께 그런 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있어서는 철학자처럼 유보하고 한번 봅시다,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확실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이질적인 차이점이 매우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라면 반드시 규명하고 모순을 찾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래 그래 다 좋아, 차이점은 덮어두자고, 형제애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다 함께 서로 사랑하자"로 끝내는 게 아닙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바벨탑"입니다. 차이점은 동료애로 극복하고 하나의 이상을 놓고 전진하자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이상은 세계 단일 종교(교회)인데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이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가증한 것입니다. 끈덕지게 이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들 때문에 주님께서는 번번히 심판하셔야 했고 그때마다 잠시 사람들은 회개하는 척 했지만 또다시 비밀리에 그 일들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바빌론 신비종교"이며 "로마카톨릭"이며 "에큐메니칼 개신교"입니다.
"개신교"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믿음의 간극 차이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쟁취해야 하며 현재 구원은 불완전하다는 믿음을 제시합니다.(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다수)
사실은 이 그룹(알미니안)에는 로마카톨릭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들도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번 구원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며 구원을 얻기 위해 종교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은 거짓교리로 밝힙니다.
이들 중에 칼빈주의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구원의 보장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단지 강령에 나오기 때문에 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보장의 의미가 신약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규명할 수 있는지 공부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흔히 피상적으로 오인하듯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둘 다 색깔이 흐려졌고 혼합되어서 이제는 누가 칼빈주의고 누가 알미니안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구원파 집단은 칼빈주의를 가르치면서 알미니안적 구원관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가 무엇인지 도저히 모르게끔 서로 섞였기 때문에 "내가 믿는 이 믿음"이 어디서 출처했는지 알기 위해서 누구에게 물어봐야 될지 혼란스럽습니다. 성경에 물어보고 확인해 보면 자기들이 왜 틀렸는지 분명히 알텐데 그것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조차도 성경적으로 확신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가세하면 혼란을 절망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마귀의 신비의 묘약, "신비주의"입니다. 성경에 "신비주의"에 대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큰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신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바벨론 종교의 특색은 각종 신비들입니다. 로마카톨릭의 성사들은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종교들의 입문 의식도 "신비롭습니다". 그들의 신비는 사람들의 정상적 지각을 기망하고 흐려서 자기들이 믿도록 하는 그 가증하고 어리석은 교리를 의심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끔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종교적"이면서 "신비"를 추구합니다. 좋은 의미에서 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체질이 잡혀 있지만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마귀적으로 깊이 빠질 수 있는 민족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 많은 "신비종교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으며 기독교 또한 그런 유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너무 물질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인도의 썬다 씽 같은 과거 지도자도 그렇게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신비주의(바벨론 신비종교)는 더 마귀의 강력한 도구가 되어서 특히 지금 시대에 많은 혼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비주의"인데 중국의 워치만 니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분명히 구원은 "교리"로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구원을 어떻게 하면 받는다, 그런 사실이 "교리"로서 규명되어 있고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맞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학습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감정이 개입되고 경험도 들어갑니다. 수학공식처럼 조건만 대입하면 자동으로 결과가 산출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감정이 있고 경험을 중시하며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도 "거의 받아들이다가" 거부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복음을 거의 믿었으나 거부한 사례에 대해서 사도행전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법정에서 복음을 전해서 코너로 몰아붙였으나 빠져나간 "아그립파 왕" 같은 인사입니다. 거의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의 수긍할 수 있으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고백입니다. 아그립파처럼 거의 받아들일 뻔 했으나 의지로 거부한 사람들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네가 나를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구나" 이 말은 오늘날 수많은 불신자들이 복음 전도자 앞에서 "참 좋은 말씀입니다" "정말 감명깊은 설교에요" "한번 집에 가서 생각해 보지요" "지금은 바빠요" "참 훌륭한 일 하시네요" 이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내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한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이렇게 구별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거짓 목사들이 거짓목사들을 대항해서 일어났습니다. 소위 말해 "번영신학"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들에 들고 일어난 "겅견한 목사"들이 복음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지요.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배우지 말고 그들의 말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소위 번영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잘 되고 부자된다"는 거짓말도 하면서 "예수 믿으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참말도 같이 전합니다. 전자는 거짓말이지만 후자는 참말입니다. 어떻게 한 샘에서 쓴물과 단물이 같이 나올 수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말이 예수믿고 구원받으라는 참말을 짓눌러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마약같기 때문에 그것만 신뢰하기 때문에 후자는 들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이 가증한 것입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지 않고 섞었기 때문에, 바로 무시무시한 바벨론 신비종교의 원칙, "혼합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목사를 비판하는 거짓 목사들은 왜 또 거짓목사가 된 것인가요. 그들은 버릴 것을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버려서는 안되는 믿음까지 같이 바꾸고 버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뭔가 행위가 있어야만 된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엿장수 마음대로), 교회출석이라 하든, 헌신 봉사라 하든, 새벽 기도라 말하든, 뭐라 하든간에 그런 것이 없으면 결국 "구원 못 받는다"고 가르치면 그게 "행위 구원"이고 "다른 복음"인데 그것을 가르치면서 나는 "거룩한 믿음"이라고 말하면 곤란한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나는 성별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성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보편적 믿음과 일치하는 아주 현저히 "카톨릭적 믿음 고백"입니다. 사실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카톨릭과 똑같은 고백을 한다는 증거를 종종 드러냅니다. 자유주의 목사들만 로만 칼라를 선호하고 교회에 카톨릭적 장식들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거짓 목사들도 카톨릭을 은근히 도입합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과 행위를 섞고 행위구원과 믿음구원을 동일시하게 만들어서 마침내 성도들로 하여금 둘을 완벽히 구분 못하게 만듦으로써 완벽한 영적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쓴물과 단물이 섞여 나오다가 나중에는 지독한 독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근처에만 가도 분별이 되는데 일단 거기 젖어든 사람은 분별력을 상실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짓 종들은 "신비주의"를 빈번히 사용하고 "우리만 받는 계시", "우리만의 영적 조명"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이 규명하기 어렵게 됩니다. 모든 신비주의는 악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좋아보일지 몰라도 열매는 결국 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리적인 결말입니다.
모든 종교인은 신비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인은 행위구원적입니다. (단번 구속, 영원한 구속은 믿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인은 혼합주의적입니다. (종교는 연합할 수록 좋은 것이다)
여기서 로마카톨릭과 바빌론 신비종교의 코드가 맞다는 것이 나오고 개신교 또한 종교개혁 성경을 믿지 않는 것과 배교로 인해서 이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모든 교회는 결국 "이신칭의"의 믿음까지 던져 버리고 철저히 카톨릭적 7성사 교리와 일치하게 변조될 것입니다. 그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직설적으로 추구하는 것인가(WCC 무리), 현혹해서 서서히 끌어들이나(신비주의파들, 행위구원파) 그 차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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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정말 시대적 영안으로 보시는것같습니다.
예리하고 정확한 말씀에 의한 진단같습니다.
그런데...거듭나고 변화된 삶, 주님(말씀)을 믿고 따르는,
순종하는 참 믿음에 관해 약간 더 설명해주셨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느낌도 듭니다^^
자주 듣고 배우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으나 저 또한 소경임이 분명합니다
ourdailybread님께 이러한 영적분별과 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