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명의 형제 중 셋 째로 태어난 조지 웨아(본명: 조지 마네 오본 오스만 웨아)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
웨아는 15세 때 당시 3부 리그 소속의 지역 클럽인 영 서바이어즈 유소년팀에서 처음엔 골키퍼로 출발을 했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골 넣는 거에 흥미를 느껴 포오드로 전향을 했다. 포오드로 변신한 웨아는 탁월한 득점 능력을 발휘하며 두 개 클럽을 거쳐 86년에 라이베리아 최고의 팀인 인비심블 일레븐에
입단했다.
인비심블 일레븐에서도 웨아의 득점 행진이 계속 되자 카메룬의 톤넬 야운데에서 웨아를 끌어 들였다. 웨아로서는 첫 해외 진출이었다. 웨아는 톤넬 야운데에서 1시즌을 보낸 뒤 88년 프랑스 AS모나코로
이적했는데 이 때부터 조지 웨아가 세계 축구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웨아는 AS모나코에서 아센 벵거 감독의 섬세하고 자상한 지도 덕에 창조성 풍부한 플레이를
마음 껏 펼치며 그 이듬 해 아프리카 연간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91년 팀에 컵우승을 안겼고, 92년에는 유럽 위너스컵 결승까지 진출시켰다. 웨아는 AS모나코에서 4시즌 동안 102시합/47골이라는 훌륭한 기록을 남긴 후 92-93시즌에 파리 상제르망으로 팀을 옮겼
는데 파리 상제르망에서도 팀의 핵으로서 활약하며 리그 우승 및 컵우승(95년)을 차지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조지 웨아가 프랑스 리그를 평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센 벵거 감독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아센 벵거는 AS모나코 시절 조지 웨아에게 특유의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게끔 멍석을 깔아 줬고, 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웨아가 95년 유럽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을 때 '이 영광을 아센 벵거 감독에게 바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웨아는 벵거 감독을 존경하고 또 그 은혜에 늘 감사하고 있다.
조지 웨아는 95년(95-96시즌) 이태리의 명문 클럽인 AC밀란으로 이적했다.
이 때 웨아는 이미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기에 SERIE-A에서의 성공은 예견되어 있었다. 당시 웨아는 '세계 최고의 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지오와 함께 AC밀란에 입단 했는데 초기에는 조금 고전을 했다.
그 이유는 '전술 주의자' 카펠로 감독의 수비적이고 딱딱한 축구에 적응을 못했기 때문에
'자유 주의자'인 웨아가 위축된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웨아의 단점 중 하나가 루드 굴리트
처럼 전술에 얽매일 경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웨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팀에 완전히 적응하며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자리를 꿰찼다.
그 당시 AC밀란에는 조지 웨아 외에 바지오, 시모네, 사비체비치, 렌티니 등 굵직굵직한 스타들이
공격진에 포진되어 있었는데 조지 웨아만이 붙박이였고 나머지 공격수들은 번갈아 가며 웨아의
파트너 역할을 했다.
95년 아프리카 선수 최초로 유럽 최우수 선수상 및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에도 선정된
웨아는 AC밀란 감독이 카펠로에서 타발레스-자케로니로 바뀌더라도 흔들림 없이 제 기량을 발휘했다.
'라이베리아의 흑표범‘으로 불리운 조지 웨아는 탁월한 신체적 조건을 갖고 있는 스트라이커로서
폭발적인 스피드+리드미컬한 드리블에 이은 돌파가 장기였다. 또한 뛰어난 헤딩력과 찬스 메이킹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상대 수비수들한테는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웨아는 AC밀란에서 투톱으로서 뿐 아니라 원톱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AC밀란
서포터들로부터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당시 조지 웨아의 플레이는 마르코 반 바스텐의 존재를 잊게
해줄 만큼 멋지고 위대했다.
AC밀란 시절 기억에 남는 골이 하나 있는데, 홈게임인 베로나戰에서 터뜨린 골이다.
그 게임에서 베로나가 코너킥한 볼을 수비에 가담해 있던 웨아가 AC밀란 페널티에이리어 내에서 볼을 잡게 됐다. 웨아는 키핑한 볼을 길게 내 차거나 동료에게 패스해 주지 않고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웨아의 돌파는 페인팅도 없는 거의 직선 돌파였다.
베로나 수비진이 웨아의 돌파를 막으려고 시도해 봤으나 탄력이 붙은 웨아를 멈춰 세우긴 불가능했다. 결국 웨아는 베로나 페널티 에이리어까지 치고 들어가 베로나 골키퍼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대로 슛을 때려 득점으로 연결 시켰는데 이 득점신은 웨아의 창조성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장면이었다.
AC밀란에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한 웨아는 4시즌 동안 두 차례의 리그 우승(95/96, 98/99시즌)을 경험했고, 이적 후 3시즌까지 연속으로 팀내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웨아는 AC밀란에서 통산 42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조지 웨아는 무릎 부상이 악화 되면서 빛을 잃기 시작 99-00시즌 도중에 잉글랜드 첼시로 렌탈 이적됐다. 웨아는 첼시에서 FA컵 우승에 공헌을 했으나 AC밀란에서는 웨아와 계약 경신을 하지 않았다. AC밀란 측은 웨아의 무릅 부상이 완쾌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결국 웨아는 주급(週給)2만 5천 파운드를 받기로 하고 맨체스터 시티로 팀을 옮겼는데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큰 활약을 못했다. 그 후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UAE 알 쟈지라에서 플레이한 뒤 2003년에
은퇴를 했다.
조지 웨아가 유럽 클럽팀에서는 화려한 실적을 남겼지만 라이베리아 대표로서의 실적은 그다지
화려하진 않다. 그 이유는 팬들께서도 다들 아시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웨아는 대표팀에서 경우에 따라 수비수로서도 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까......
그렇지만 웨아는 모국 대표팀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95년, 대표팀이 FIFA에 매년 지불해야 하는 5.000달러를 조지 웨아가 직접 지불했고, 대표팀 선수들
유니폼과 원정 시 비행기 티켓 구입 비용, 코칭 스탭 비용등을 모두 웨아가 지불했다.
웨아는 라이베리아 대표팀에서 선수-감독-스폰서 역할까지 하며 조국 축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조지 웨아 본인 뿐 아니라 전세계 축구 팬들 모두가 아쉬워 하는 것은 웨아가 월드컵에 단 한 차례도
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이베리아로서는 2002년 월드컵이 절호의 찬스였는데 당시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나이지리아에게 승점 1점 차로 뒤지며 통한의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다.
웨아는 운동 선수로는 매우 드물고, 특이하게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경험이 있다.
2005년 10월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40.9%의 지지율로 59.1%의 지지율을 얻은 여성 후보
엘렌 존슨 사리프에게 큰 차이로 패했다. 사실 웨아는 정치에 큰 꿈이 있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게
아닌 걸로 알고 있다.
웨아는 현역 시절 ‘정치는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정계(政界)에서는 정적(政敵)을 공격하고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게 맞질 않는다. 나는 많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싶다‘고 말을 해 왔으니까.....
그런 웨아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은 좀더 정직하고 깨끗한 정부가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을텐데 현실은 그의 마음 같지 않았다.
펠레(남미)-베켄바워(유럽)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선정된 조지 웨아!
필자가 볼 때, 아프리카 쪽 나라에서 조지 웨아를 능가하는 대형 스트라이커는 당분간 탄생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웨아는 현재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조지 웨아(George Weah )
국적: 라이베리아
나이: 1966년생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장: 185cm
소속팀: 영 서바이어즈(81/83)-폰란 캄파니(83)-마이티 바롤(84)-
인비심블 일레븐(85/87)-카메룬 톤넬 야운데(87/88)- AS모나코(88/92)-
파리 상제르망(92/95)-AC밀란(95/00)- 첼시(2000)-맨체스터 시티(2000)-
마르세유(2000/01)- UAE 알 쟈지라(01/03)
라이베리아 대표팀 데뷔: 1986년
A매치 기록: 65시합/10골
주요 타이틀 및 개인 타이틀
95-96시즌 리그 우승(AC밀란)
98-99시즌 리그 우승(AC밀란)
1989년 아프리카 최우수 선수상
1994, 95년 아프리카 최우수 선수상
1995년 유럽 최우수 선수상
1995년 세계 연간 최우수 선수상
1996년 FIFA 페어플레이상
Statistics
첫댓글 첼시에서도 뛰었내
역씨 나의 우상. ^^
나다..ㅋㅋ
첼시,멘시티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몰랐내요
벵거감독이 꼽는 자신의 최고의 걸작! 앙리 튀랑 쁘띠 비에라도 아닌 웨아~~~ AC 밀란에서 참잘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