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일까? 텔레비전이 거실 중간에 모셔져(!) 있으면 식구들 간에 대화도 방해하고 쓸데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 노출되고 독서할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등등의 이유로 여동생의 집엔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여동생이 마흔 살이 넘어 결혼해서
늦게 얻은 귀한 외동딸의 교육을 위해서 식구들이 합의하에 그러긴 하지만 불편해 하기도 합니다. 월드컵 축구나 아시안게임의 농구나 축구 결승전,
개콘 같은 프로를 집안에 텔레비전이 없다고 해서 안보고 살 수 만은 없습니다.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인데 그 또래 아이들의 대화에 끼려고 하면 개그 콘서트, 1박 2일, 진짜 사나이 같은 프로를 봐야 친구들과 대화가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월요일 학교에서 친구를 만나면
첫마디가 “어제 개콘 봤어?”라는 군요. 꼭 텔레비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조카는 이모네 집을 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카에게 이모네 집은 여러 가지가 충족되는 문화 망명지가 되는 듯합니다. 우리 집에만 오면 조카는 맘대로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조카는
여동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지만 나에게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카입니다. 분당에 있는 초등학교 전교 어린이 회장을 할 정도로 에너지 많고 똑똑한 아이인데 다른 애들이 다 보는
텔레비전은 맘껏 못보고 사는 걸 알기에 그가 보고 싶은 텔레비전을 싫건 보도록 우리 집에선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조카가 오면 텔레비전의 리모컨은 조카의 독차지가 됩니다. 여동생은 주로 책을 보지만 조카가 보는 프로를 함께 빠져서 보기도 합니다.
동생은 어린이가 보면 안 되는 프로를 가려서 보도록 잔소리를 하지만 맨 19금이고 15금이라서 애들이 맘 놓고 보게 할 프로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못 보게 한다고 아이들이 안 볼 수도 없는 것이고 애들도 알 거 다 아니까
그냥 보게 두라고 나는 말합니다.
밤에는 아예 거실에 자리를 펴주고 자든 밤새 텔레비전을 보든 조카네 식구가 알아서 하게 놔둡니다. 그들이
텔레비전을 밀린 숙제를 하듯이 보고 싶은 것을 채널을 돌려 볼 때 나는 자리를 피해 주는데 공휴일인 3일에는 나도 그들 모녀 사이에 끼어 앉아 영화를 얻어 봤습니다. 조카가 케이블채널을 돌려가며
이것저것 찾더니 영화를 보겠다고 했습니다. 케이블에서 개봉영화라도 만 원 정도만 결제하면 되니까 가족들이 모여서 보면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보다 경제적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이 크고 음향도 좋아서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 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볼만합니다. 조카가 고른 영화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오는 액션영화 익스펜더블입니다. 여자 아인데도 와일드 하고 액션영화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익스펜더블 나는 일 년에 영화는 고작 한두 편 보는 게 전부입니다. 그나마 좋은 음악영화가 있으면 보고 다른 장르의 영화는 거의 안봅니다. 영화도 잘 안보고 액션영화는 나의 관심 밖이라
익스펜더블이 시작하면 일어서려고 했는데 동생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쩌다 첫 장면을 보게 되었고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폭발이 일어나고 죽이는 모습이 잔인하고 무섭고 소름이 끼쳤지만 나도 모르게 그 긴장감에 빨려 들어가 재미있게 끝까지 봤습니다. 실로
몇 십 년 만에 보게 된 액션영화가 익스펜더블입니다. 20대엔 007 영화 시리즈를 보긴 했지만 요즘처럼 폭력적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폭력과 폭발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죽었는데 뭔지 모른 후련함이 있는 것을 보면 내 안에도 숨겨진 폭력성이 있나 봅니다.
▲ 비긴 어게인 두 번째로는 여동생의 요청으로 비긴 어게인을 봤습니다. 최신 영화라 만 원을 결재하고 봤는데 음악영화라서 음향이 좋은 영화관에서 봐도 좋았을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긴 어게인은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입니다. 녹음실이 없어서
거리에서 경찰에게 쫓겨 다니며 녹음을 했지만 그 의외성이 오히려 음악을 살리는 효과를 보는 내용이 감동이었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하기, 그게 성공요인이 된 것입니다. 음악은
꼭 소음이 없는 녹음실에서 좋은 장비로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음반을 만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낸 일인데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뉴욕의 뒷골목,
맨하탄. 엠파이어 빌딩, 브로드웨이 등 의외의 장소에서 녹음했습니다.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폰 등 첨단기계를 사용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녹음이 가능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기기들이
혹시 삼성제품이 아닐까 봤지만 영화 속 첨단 기기는 다 애플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차들이 지나가며 내는 거리의 소음이 섞이고
아이들의 노는 소리도 들어가고 삶의 잡음처럼 녹음에 들어간 소음들이 오히려 음악을 색다르게 하고 살린 것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어떤 골목에선 아이들이 소리치며 뛰어놀고 있어서 돈을 주어 다른 곳에 가서 놀라고 달래보지만 듣지 않자 아예 아이들을 끌어들여 즉석 코러스를 하게 합니다. 현대적인 요소와 기계를 사용했지만
노랫말도 정서적이고 결말도 따뜻해서 익스펜더블을 보면서 시끄러웠던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 발동이 걸렸는지 동생 가족이 돌아간 뒤에는 페인티드 베일을 봤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배경은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염병인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는 영화였습니다. 황금연휴에
집에서 세편의 영화를 몰아서 봤는데 액션영화도 좋고 음악영화도 좋고 로맨스영화도 좋았습니다. 우리 조카 덕분에 본 영화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동네에 한 두 집 밖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봐야할 프로가 있을 땐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 몰려가서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었습니다. 요즘엔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거의 없는데 조카는 이모네 와서 텔레비전을 몰아서 보고 살면서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없애고 산다고 해도
보고 싶은 건 보고 삽니다. 영화를 안 본다고 해도 이렇게 몰아서 보기도 하고 블로그 글을 통해서라도 다 보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본다고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