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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7장1~8절/하나님의 가족관
우리나라의 문화는 철저한 가족 중심의 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한국인의 모든 가치 가운데서 가장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효도의 가치일 것입니다. 한국인의 예절 가운데서 가장 중시한 예절이 있다면 그것은 가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예들이죠. 어른을 섬기는 일, 제사를 모시는 일, 형제 우애 하는 일, 가족과의 신의를 지키는 일 등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예절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들을 살펴보면 집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집안을 망칠 놈, 또 집안을 욕되게 하는 놈, 집안을 욕되게 하는 놈, 집안을 부끄럽게 하는 놈, 이렇게 집하고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통 문화는 다른 어떤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끈끈한 가족의 유대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또 가족에게서 느끼는 이런 정겨운 에너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한국인의 창조성과 근면성을 발달시켜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족 중심의 문화가 가진 일종의 순기능적 요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역기능적 요소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김경일이라는 분이 쓴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유교가 초래한 가족 문화, 가족 문화가 다시 우리 가운데 가져다 줄 수 있는 역기능적 요소들을 많이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상당한 부분 우리가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국의 효도 문화만 해도 그것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나치게 정과 마음에 호소하고 있기에 오늘날처럼 급속도로 발전하는 산업사회, 지식사회 속에서는 효율적인 필요에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서 가족 가운데 치매 환자가 발생했을 때 단순한 효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더 많은 의료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우리는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나 국가는 때때로 이것을 효도의 이름으로 가족에게만 떠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녀들의 활동영역이 제한되고, 우리의 모든 삶의 환경이 묶여 버릴 수가 있습니다. 효도도 필요하지만 전문적인 의료의 혜택이나 간호사들의 도움, 또 레크리에이션을 할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이 마련되어서 노인들이 치료받고 쉬면서 또 마음껏 활동하면서 동시에 자식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면 훨씬 더 이것이 실제적으로 노인과 자녀들에게 함께 도움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화기능이 떨어져 있는 노인과 그리고 펄펄 뛰는 손자들을 한 밥상에 앉혀 놓는 것만이 효도의 본질은 아닐지 모릅니다. 또 갈등을 겪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한 부엌 안에서 묶어 놓고 갈등을 인내하라고 촉구하는 것만이 효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아닐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경일씨는 조상 숭배의 기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가 조상을 아름답게 섬기자는 그런 의도에서부터 발상 된 것이 아니라 고대 중국 부족국가 시절에 조갑이라는 사람이 왕이 된 후에 정치적 동기에서부터 조상숭배의식을 발달시켰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족, 내 조상, 우리 조상이 네 조상보다 훨씬 더 낫다고 선전하기 위한 의도로 조상숭배의식이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이 한국에 건너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매우 다른 씨족이나 가족들을 향해서 배타적인 배타주의, 그리고 지역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은 우리가 간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사회 속에서는 이웃들과 열린 대화를 갖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족관은 어떤 것일까요? 성경은 어떤 가족관을 가르칠까요? 기독교인의 가족관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오늘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찾고 싶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하는 아브람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아브람이 가졌던 가족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쩌면 그의 가족관은 성경적 가족관을 대표하는 것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적 가족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비성경적 가족관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이지 않은, 비성경적 가족관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비성경적 가족관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족 우상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가족 무시주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 우상주의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셨던 명령이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떠남이 없이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가치체계,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있어서 떠남이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누가복음14장26절에 보시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자의 도리를 통해서 말씀하신 부모, 처자, 형제자매, 목숨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들이 바로 우리의 부모 그리고 처자, 형제자매 목숨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우리들이 이것들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들입니다. 왜 이것을 성경은 미워하라고, 떠나라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것은 문자 그대로 부모를 버리라는 뜻이 아니예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데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하나님의 선물 이예요.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누가 부모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없이 부모는 우리의 부모가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부모가 아니 쟎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내 사랑하는 아내, 남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자식들, 우리의 형제와 자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내 목숨, 하나 밖에 없는 목숨,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소중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에 몰두한 나머지 선물을 주신 그 분을 망각하기 시작할 때 선물이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선물이 우상으로 변질될 수가 있어요.
우상의 정의가 어떤 것입니까? 우상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 그것이 우상이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가 없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것,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는 내 부모, 자식, 처자, 형제 돌보는 것,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전형적 실례의 사건을 우리는 아브람의 생애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의 사건입니다. 아브람이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 얼마나 기막힌 아들이에요. 완전히 포기했지요. 나는 아들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아들을 받은 후에 아브람은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이삭을 바라볼 때마다 아브람은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기적의 선물,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 몰두해가면서 아브람은 서서히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망각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서히 이삭이 아브람의 삶에서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어느 날, 우상을 헐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가 있느냐?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바칠 수가 있느냐?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가져가시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얼마나 고뇌의 밤이, 고민의 밤이 지나갔을까요? 몇일 고민한 후에 아브람은 욥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거예요. 욥의 유명한 고백을 아시지요. 주신 분도 하나님,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드디어 제단에 올려놓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네 아들 바치지 않아도 돼. 내가 다른 어린 양을 제물로 준비했다. 이게 바로 우상의 사건 이예요.
아브람의 생애 속에서 우상을 제거하려는 사건, 하나님이 이삭을 가져가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미워하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같은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희 부모나 처자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그랬습니다(마10:37)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나 처자가 소중하다고 느낄수록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살 때, 이 소중한 존재들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족 우상주의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족 우상주의가 아닙니다.
동시에 기억할 것은 기독교는 가족 무시주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네 본토 친척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비 집도 떠나라. 아비도 떠나라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까지 왔습니다. 조카 롯도 따라왔던지 데려왔던지 하여튼 조카 롯도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순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이 아브람을 비난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이해하셨다고 생각해요. 비록 아브람이 온전한 순종을 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 마음에 안타까웠다 하셨을지라도 가족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을 가지고 아브람을 비난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는 너를 이해한다. 오늘 우리라고 쉽게 떠날 수가 있겠어요? 우리 핏줄이란 것, 얼마나 극복하기가 어렵습니까? 하나님은 벌써 이해하셨어요. 이해하신 정도가 아니예요. 하나님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존중하셨다는 증거를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7절에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 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가 이 말씀을 2절과 비교해 보시면 2절에서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누구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다시 갱신하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내가 너와 약속을 하겠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겠다. 그리고 너를 축복하고 번성케 하겠다. 그리고 내가 너와 언약을 맺자. 그런데 이것이 아브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만의 언약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세요. 왜냐하면 7절에 보시면 내가 내 언약을 세워 나와 너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언약을 세운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만의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포함한 언약이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 언약의 혜택이, 또 언약의 정신, 자식에게 계속해서 계승될 것을 기대하셨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7절의 마지막 부분에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누구의 하나님 이예요? 이삭의 하나님, 또 야곱의 하나님 그 자자손손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가족의 시스템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계승 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삶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에요. 신앙을 전승하고 축복도 전승하고 좋은 전통도 전승하고 가치도 전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하나님이 가족을 사용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지막 6일 최고의 정점 클라이맥스에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그들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가정이 탄생했어요. 이것으로 창조가 끝나요. 그리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부부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정을 통해서 자녀가 출생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시편 27편3절에 보시면 자식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기업. 바로 이러한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계승하기를 요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잘못하면 우상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도구도 될 수가 있지만 가정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을 때는 그 뜻을 계승하고 또 하나님의 믿음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족을 귀히 여기십니다. 기독교는 결코 가족 무시주의가 아닙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가 아파트에 많이 살지만 단독 주택으로 살아가는 상황에 있어서 집의 주변에 울타리가 있습니다. 울타리가 높은 것이 좋을까요? 울타리가 없는 것이 좋을까요? 둘 중에 선택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집에 사시겠습니까? 한 심리학자가 통계를 내어 그것이 정서에 끼치는 영향을 조사했습니다. 우리 집 주변에 울타리를 높이 해 놓았을 때 심리적으로 좋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왜냐하면 울타리를 높이 하면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폐쇄적이 됩니다. 우리는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폐쇄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대로 울타리를 아예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해요.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보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불안해해요. 그래서 제일 이상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낮은 울타리가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다는 통계를 글로 풀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지향하는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가족관, 이것은 성경적 가족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가족의 존재, 울타리가 있는 가족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족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어요.
첫째로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귀히 여기십시오.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참 귀히 여기십시오. 여기서 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단순히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적으로 가지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책임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구성원은 저마다 자기의 위치에서 가정을 향한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이라. 하나님의 숙제라는 말입니다. 숙제는 잘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청지기입니다.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남편의 자리에서, 아내의 자리에서 주부의 자리에서 가장의 자리에서 자식의 자리에서 저마다 가정을 향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은 그 책임을 다했습니다. 우선 이삭을 향한 책임을 다한 것은 물론이고 하갈이라는 계집종을 통해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자신의 책임을 다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창세기16장 10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게 하리라"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하나님이 축복하셨어요. 일단 태어난 그 아들을 축복하시고 아브라함을 보고 그를 잘 기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삭이 태어난 후에 이스마엘이 이삭과 지나친 갈등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은 그를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생명을 축복하십니다. 그도 하나의 민족이 되게 하리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은 직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조카 롯을 향하여서도 책임을 다합니다. 롯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롯을 구출합니다. 책임을 다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성경에 보시면 성경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가정을 향해서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옛날 이스라엘 문화에는 우선 신발을 벗겨요. 많은 사람 앞에서 신발을 벗겨요. 그 다음에 침을 뱉어요. 그리고 이 사람의 집 앞에다가 간판을 세워요. 신을 벗기 운 자의 집이라. 이것은 책임지기를 거절했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일단 가족의 구성원이 된 이상 하나님은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신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족을 향한 책임을 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맡겼다, 책임을 다하라. 그렇다면 가족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책임을 다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적 가족관의 두 번째는 나의 가족을 넘어서 더 큰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가족을 넘어서서 더 커다란 가족을 바라보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혹은 언약을 갱신하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름을 바꾸셨어요.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갱신하시면서 새 이름을 주십니다. 새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무슨 차이가 있어요? 우선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존경받을 만한 아버지.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이 한 가족 안에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여기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아브람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이 될 것을 기대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본래 아람어입니다. 아람어에서 이것은 모든 열국들의 아비, 많은 나라들의 아버지,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 이제 아브라함의 영향권은 한 가족 안에서만 존경받는 아버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에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열국들의 아버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된 거예요. 그는 아브라함, 열국들의 아버지가 되었어요. 이 메시지를 받는 순간 아브라함의 인생의 지평선이 넓혀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부르셨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창세기 12장 2~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라. 그들에게 축복된 존재가 되어라. 열국의 아버지가 되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이것이 비단 아브라함만을 위한 기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었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평선이 넓혀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족관이 넓어져야 합니다. 내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한평생 자기가족, 자기 자식 잘 먹이고 살리는 것, 그것만 하다 죽는 사람이 많아요. 그것을 좀 넘어서야 돼요. 다른 사람들도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급속도로 지구촌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족관은 너무나 좁아요. 우리들이 내 집, 우리 집이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우리 집 바깥의 일은 무관심한 존재들이 상당히 되어 왔어요. 집 안에서는 집안 정리 잘 하고 깨끗이 일을 잘하다 가도 공공시설을 쓸 때는 너무나 함부로 사용하여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큰 집을 생각해야 합니다. 크게 생각하면 이 사회도 우리의 집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내 집, 내 핏줄에 사로잡히다가 보니까 내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가족관을 갖고 계셨을까요? 마가복음 3장에 보시면, 바리새인, 또 서기관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뒤섞여 있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남께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33절) 이 질문을 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나 형제들은 굉장히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내 모친이니라.(35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 여기 큰 가족의 그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큰 가족의 그림. 우리도 이런 가족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내 가족에게만 집착하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큰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족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육신의 가정을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제대로 교육시키고 양육하고 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상, 하나님의 집으로 바라보고 내 주변에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식만 자식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큰 가족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 특별히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사랑이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따듯한 세상이 될까요?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예수님, 유대 땅에서 태어나 33년을 살다 간 젊은 예수, 그는 한국 사람이 아니라 유태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 성도라면 이제 나도 나와 관계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내 형제처럼 내 자매처럼 내 자식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큰 가족관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의 제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넓은 그림, 하나님의 가족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비전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