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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적셔진 그 땅의 흙(먼지 티끌 가루)을 취해 사람을 빚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니쉬마트 하임:호흡.바람)를 불어 넣으니 그 사람이 생령<히(하이 네페쉬 하야)>이 됩니다(창2:6~7).
'하이 네페쉬 하야'를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선 '프쉬케 조산'으로 번역했습니다. 신약에서는 '프쉬케 조산'을 산 영으로 번역했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자오) 영(프쉬케)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조오포이에오) 영(프뉴마)이 되었나니" 고전15 : 45
비록 같은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생기(니스마트 하임)를 받은 그 사람은 '하이 네페쉬 하야'이고 '니스마트 하임'없이 흙으로만 지음 받은 들짐승을 비롯한 각종 생물들은 '네페쉬 하야'로 기록되었습니다(창2:19절).
'니스마트 하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의 생기'라고 번역되었는데, 이 원어는 '생명'을 뜻하는 '하임'과 '휙'하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호흡'을 말하는 '네솨마'의 합성어입니다
"사람의 영혼(니스마트 하임)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히(베텐:생명,자궁)>을 살피느니라"잠20:27
여기서 육을 쫓지 않고 영(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혼을 영과 함께 써서 영혼이라 불렀는데 이 때의 영혼이 '니스마트 하임'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영,혼,육으로 보며 베드로 사도는 이미 거듭난 영이 되어 각지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믿음의 결국인 혼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벧전1:9).
거듭났음에도 장성한 그리스도인의 분량으로 자라려면 끊임없는 자기 부인,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집결소라 할 수 있는 자기 혼의 변화와 부인되는 과정 속에 자아의 파쇄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진리의 말씀을 날마다 먹고 먹어서 성령에 흠뻑 젖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길 바란다면 정녕 그렇습니다.
잠언에 쓰인 니스마트 하임의 기능은 사람의 깊은 속 ,곧 생명을 감지하고 알아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 생명을 잉태케 하는 영적 자궁으로서의 생명의 씨(말씀)를 수용하여 착상시키는 영적 여성성이 무엇인지 감지하는 자입니다.
이로써 창2:7절과 잠20:27절에 사용되어진 '니스마트 하임'을 묵상해보면 첫아담이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감지하고 알아보는 생명 가능체라는 것입니다
생명 가능체라는 언어를 굳이 사용함은 비록 살아 있는 존재이지만 아직 영생을 확보한 생명체는 아니라는 것을 어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하여 생명을 감지하며 알도록 지음 받은 첫아담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며 동경하는 갈망을 품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꽤 오래도록 첫아담은 육과 혼과 영의 모든 면에서 더이상 바랄게 없는 완벽한 완성체로 인식하거나 혹은 그렇게 추측하며 살아 왔습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면에서 처음을 사느라 우리보다 어쩌면 더 힘들지 않았을까?라고 단 한번의 재고도 없이 살아온 매몰참에 매몰된 우리들입니다.
말씀을 어떻해, 무엇을 들을지 스스로 삼가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바울이 첫아담은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예수의 표상이라고 했음에도 첫아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건 왜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당연히 영.혼.육이 모두 불멸의 완성체로 지어졌다는 결론은 환상과 몽환적인 잠꼬대일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얼마든지 인간의 시작을 작고 연약하고 부족한 상태이나,얼마든지 완성을 이룰 수 있는 가능태로 지을 수도 있다는 역발상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는 다시한번 처음부터 옛뱀이 성경을 인용하여 여자를 유인한 것처럼 뱀대가리들이 홍수처럼 내뱉는 하나님에 관한 모호하고 혼잡한 말들로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깊음 위에 드리워진 것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 어떤 시대보다 더 활발하게 그분의 몸된 교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창세기를 묵상하다보니 도무지 진도가 안나갑니다. 일상이 분주하여 시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는 이제껏 설교를 통해서 들었던 말씀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꼼꼼이 뒤지다 보니 도무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말씀이 창세기의 천지창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첫아담을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감지하여 알아 감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갈망케 하셨다는 것을 외부로 펼쳐 보여 준 것이 에덴 동산의 나무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8)."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를 나게 하신 곳은 첫아담의 일차적인 질료로 사용된 그 땅으로, 그 땅과 첫아담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성경도 땅을 사람 마음으로 비유하여 좋은 땅,옥토,길 가,묵은 밭,돌짝 밭,가시 밭등으로 말씀하십니다. 근데 첫아담에겐 그 땅의 흙이란 일차적인 질료외 니스마트 하임이란 이차적인 질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생명을 알아보는 생명의 갈망체가 된 것입니다
첫아담에게 있는 생명의 기운과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는 생명은 같은 것 같지만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있는 "생명"을 에덴 동산 중앙에 나게 하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로 깨달아 가기를 갈망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자꾸 먹고 먹다보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것은 첫아담의 깊은 마음 속에도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가 나게 하셨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나이가 어릴 때에는 생명의 귀함을 한 영혼이 온 우주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에 의존하여 지식적으로 알았다면 이제는 그 말씀이 지식이 아닌 내 호흡이 되어 매순간마다 말씀의 숨결을 들여 마십니다. 그리고 왜 그토록 한 생명체가 귀한 것인지 들여 마신 말씀의 숨결을 다 내뱉고 나면 이내 죽을 것 같은 한 찰나에 깨닫습니다.
들숨으로 사는가하면 날숨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이 반복적인 일상은 그야말로 날마다 그리스도(진리) 안에서 죽었다 다시 사는 영적 현상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그 땅이란 말씀을 그 사람으로,에덴 동산 중심을 그 사람 마음 중심으로 바꿔서 창2:9절을 읽으면 반론을 제기할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사람)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그 사람 마음)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9라고 한다면 반론을 재기할 개연성이 있을까요?
가능하다면 그렇지 않도록 모든 혀들이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묵상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간절히 구합니다.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와 연결되어서 쓴 것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로 히브리 문장의 특성상 주체가 되는 말을 먼저 쓰고 뒤에 나오는 말이 앞의 말을 수식해 줍니다.
그러니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좋은 나무가 있습니까? 이 말은 지상에 의인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말입니다. 지상에는 좋은 나무가 없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만 맺습니다. 지상에 좋은 말과 좋은 일만 하는 인격을 만난 적 있습니까?
본디 창2:9과 창2:16절에 나온 나무의 원어를 보면 둘 다 '콜 에츠'입니다. '콜'은 '모든 것'을 뜻하는 말로 명사이며 '예츠'는 '나무'로 명사입니다. 우리 생각에 모든 나무하면 '모든'이 나무를 수식해 주는 형용사일 것이지만 명사입니다.
개역개정은 모든 나무를 9절에서는 좋은 나무로,16절에서는 각종 나무로 번역한데다가 원문에는 없는 '열매'란 말까지 덧붙혀 '각종 나무의 열매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선악간의 유식한 지식으로는 도무지 나무를 먹으라는 말이 거슬리기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번역해 놓겠습니까?
어떻튼 진리는 모든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니 여기서 멈추고 묵상하려는 말씀에 집중하렵니다.
만일 내가 에덴 동산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를 바라보는 그 사람이였다면 나는 어떠했을까요?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군대용어로 미래형) 나는 모든 나무를 먹고 먹었을까요? 아니면 '임의로'라는 언어가 풍겨주는 느슨함속에 익숙해져서 아무 때나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자며 차일피일 미루었을까요?
아시다시피 동산 밖에는 노루 사슴이 뛰어 노는 에덴의 넓고 넓은 초원과 강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짐승들과 새들과 놀기도 바쁘고 온갖 꽃들을 구경하기도 바쁘고 강물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며 놀기도 바쁠 것이고 어두워지면 부부가 함께 밤 하늘의 별들을 세다 잠들면 어느새 동트는 일출을 보며 일어 났을 것입니다.
나도 다를 바 없어 정신없이 쏴돌아 다니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하이 네페쉬 하야(생령)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완전하게 알았을까요? 만일에 완전히 알았다면 굳이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군사용어로서 취사선택이 아닌 절대 명령으로서 모든 나무를 먹고 먹으라고 반복하시면서까지 강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역개정엔 '임의로'라고 했지만 원어에는 그런 말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의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먹으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한 강조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법은 빛이요,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6:23
모든 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진 명령(창2:16~17)은 지금껏 폐기되지 않고 생생하게 들려 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먹고 먹으라는 명령에 지금 순종하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연합된 영생체로 여기서부터 살아갑니다.
허나 불순종하면 생명을 감지하며 알 수 있는 '니스마트 하임'으로서의 영안이 닫히고 선악간에 지식만이 보이는 육안만이 밝아질 뿐입니다.
밝아진 육안은 필연적으로 자기 눈에 보기 좋고 탐스러운 열매(결과)에 연연한 자들이 되어 그것들을 따먹고 따먹는 욕망체들로 살아갑니다
생명의 원인(근원)인 생명(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창2:16절대로 모든 나무를 먹고 먹으라는 절대 명령에 순종하면 모든 나무란 존재를 먹는 것이 되어 종내는 그 존재로 인하여,그 존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 완성된 생명체,곧 영생체로 살 것이지만 이 모든 나무를 유기 방임하여 먹고 먹는 것을 게을리 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선악지식나무의 열매를 따먹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신 말씀이 창2:16~1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먹으면 굳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종교적인 욕망에 삼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먹으면 종내는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생명의 기운이 아닌 생명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인하여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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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또 뱀에 관해 묵상함은 뱀을 뜻하는 바 지혜와 간교함의 이중성과 사람 혼의 이중성이 닮아 있기 때문이고 뱀도 사람의 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 혼이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말씀과 명령)의 통제 아래 활동한다면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지만 말씀 밖에서 산다면 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중에 간교한 뱀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창3장에 출현한 뱀과 여자의 대화의 소재는 말씀임에도 둘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치 못합니다. 그 결과 뱀의 간교함은 사탄에게 인정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뱀이 사탄의 뜻을 성취했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의미에서 뱀처럼 지혜로울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의 간교한 지혜를 칭찬한 것은 아닙니다. 그 간교한 지혜를 칭찬했다면 굳이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가 뱀의 질문에 대답한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는 말씀을 왜곡시킨 겁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열매는 없고 그냥 모든 나무,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로만 나옵니다. 이는 원인(동기,마음)보다 결과(행위,업적)에 연연하는 인간을 바르게 책망하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포인트를 끄집어 주시려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포인트를 강조해 주십니다
"마12장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나무가 원인이면 열매는 결과입니다.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최초의 부부에게 기대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열매란 결과를 창출해 내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 자체,곧 말씀,원인,근원에 눈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순전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영적 생명에 관하여 눈뜨길 갈망하고 계십니다.
영의 소욕과 육의 소욕이 다툰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육신과 결탁된 혼의 갈망이 있듯 여호와 하나님의 영과 결탁된 영의 갈망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갈망은 최초의 부부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에 주목하여 살펴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 지식 나무가 나게 하시고 첫아담을 이끌어 그곳에 두고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해 지키냐면 모든 나무,생명 나무는 반드시 먹고 먹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시지 않습니까?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육신과 결탁된 혼적(육적)생명이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결탁된 영적 생명으로 구성된 이중체이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부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의 육신은 분명 돌보아 주어야 할 아기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연처럼 완성체로 지음 받았습니다. 허나 영적 생명은 완성된 생명체가 될 수 있도록 성장 가능한 발전체였습니다.
완성된 생명체를 이루는 길은 오직 그 땅에서 보기 좋고 아름다운 먹기에 좋은 나무,모든 나무인 생명 나무를 먹는 것뿐이었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먹고 먹으라는 절대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생명나무가 모든 나무도 되는 것은 그리스도 없는 인간들은 "Nothing"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계시면 아무 것도 아닌 죄인들도 그분과 한 몸을 이루어 "Everything"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형상,틀)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속사람의 비밀(모양,내용)이 풀어지게 됩니다.
이 속사람의 비밀을 여는 키가 곧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이시건만 이 키조차 비밀이라 함은 보편적인 모든 사람을 초청하셨지만 막상 초대에 응하는 자들은 여전히 적으니 세상 사람들에겐 여전히 비밀인 것입니다.
모든 나무이신 생명나무를 먹지 않은 불순종은 불가피하게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선악의 고리에 갇힌 인간은 숙명적으로 자신과 외부의 시선과 판단과 비판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같이 보이고자 온갖 경건의 모양으로 회칠한 자가 되어 이중 인격자로 살아 갑니다.
뱀의 지혜가 긍정과 부정의 이중성을 지닌 것처럼 사람의 혼도 이렇듯 이중성이니 이중 인격자로 사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남말이 아니라 내 말,내 모습을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창2:9절과 16~17절 말씀과 창3장의 뱀과 여자를 반복해서 묵상함은 묵상할 때마다 또 새롭고 새롭기 때문이며, 이 새로움이 주는 시선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창3:3절에서 여자는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함으로서 <모든>을 빼고 그냥 나무라 부릅니다.
이는 모든 나무이신 생명 나무에 관한 개념이 아예 실종된 걸 보여줍니다. 또한 분명 모든 나무는 먹고 먹으라고 두 번 강조하면서까지 먹어야 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도 자기 멋대로 희석,상대화시켜 나무의 열매로 둔갑시킵니다.
여자가 이 지경이 되려면 많은 시간들이 흐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뱀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 부부에게는 동산 중앙에 있는 모든 나무를 먹고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그녀는 모든 나무를 먹고 먹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쓴 것 같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죽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얼마든지 말씀을 먹고 먹어서 말씀과 연합한 영적 생명체로 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 안에서 공유한 자가 됩니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뱀과 전갈과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를 부여 받아 육신의 자아와 환경을 능히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여자는 지금 자신의 영안이 닫힌 줄도 모릅니다. 그녀는 뱀을 통해 역사하고 있는 사탄을 보지 못할뿐더러 또한 생명 나무도 선악 지식 나무도 보지 않고 나무의 열매만 보며 "하나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4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은 여자를 물었고 이제는 꿀꺽 삼키기만 하면 됩니다. 역으로 여자도 하나님 같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말을 꿀꺽 삼키기를 갈망합니다. 사탄은 생명나무가 아닌 선악 지식과 하나님을 연결시켜 하나님 같이 될거라 합니다.
사탄은 생명 귀한 줄 모릅니다. 이렇게 뱀에게서 사탄 냄새가 짙은 데에도 여자의 영안은 닫혀져서 사탄도 자신도 보지를 못합니다 . 이미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도 보지 못하니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드심은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창1:26~27).
진실로 사람에게 자신의 통치권을 내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만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자기 비움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고요한 떨림을 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 떨림은 세상 가치관으로 왜곡 오염된 "다스림"을 전복,돌파시킬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향해 불어
넣어주신 숨결의 진동일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다 비우면서까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정면 도전하려는 사탄이 뱀을 자기의 도구로 삼아 그 간교한 세치 혀로 인간의 통치권을 강탈해갑니다
"죽지 않을 것과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에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결국은 합법적으로 존귀와 영광의 관을 내준 셈입니다.
가슴을 치고 땅을 쳐도 이 억울함을 어찌 다 표현할까?만은 여자는 그런 것도 모르고 남편에게 주니 남편도 받아 먹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먹었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첫 아담은 마지막 아담의 그림자로서 아내와 같이 죄인의 자리로 내려 가기 위해서 먹었다 합니다.
무엇을 어찌 수용할지는 각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어린 생각이 어울리고 크면 장성한 생각이 어울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악과 먹은 아내는 더이상 순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뱀과 간음한 자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는 죄가 간음입니다. 이 간음은 행동 그 이상에 해당되는 사형죄로 들킨 순간 죽임을 당합니다.허나 성경은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명백하게 제시해 줍니다.
모든 인류는 누구라도 예외없이 뱀과 한 몸된 구제 불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셨던 것이 바알 하나님을 섬기는 음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독 간음에 관해서 만큼은 냉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5:28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와 결혼한 당사자는 그 자신의 순결 여부와 상관없이 간음한 자라는 말씀은 우리로 전반적인 사회의 현장 속에서 뿌리 내려야 할 으뜸 덕목이 "분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아담도 뱀과 간음한 자가 되니 두 사람의 몸 속에는 뱀,곧 마귀가 들어 와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근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가 아무런 죄책이나 후회없이 그에게도 선악과를 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였을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죽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에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아담은 결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뱀이 말한대로 그들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며 눈도 밝아졌습니다. 그런데,나는 왜 이 말을 자판기로 두드리는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드는 걸까요? 그것은 지금도 까마득한 그 때처럼 여전히 사탄이 주는 말대로 사람이 행하면 사탄이 한 말대로 되어지는 현상이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우린 타락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상태라 함은 뱀이 말한대로 죽지 않았으나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신 연고로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죽은 자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다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은 것은 무엇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감지하며 알 수 있는 생명의 기운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기운이 한 때 있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어 늘 욕망하며 갈망하나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차단되어 있으니 결국 죽은 것입니다.
첫아담이 뱀과 하나된 여자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느새 그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자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인간과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의 어떠함을 분별하기엔 우리 모두 첫아담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어떠함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