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및 장소: 2003년 7월 18일 서울 역삼동 YPC 프로덕션 사무실
질문: 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강성만(한겨레신문)
정리: 최지선, 신현준, 김승익
하나 마나 한 소리겠지만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단지 '대중가수'이기 이전에 '그룹 사운드 출신'이므로, '한국 록의 역사와 현재'를 다루는 우리의 기획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필의 선사(先史)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슈퍼스타와의 만남은 8월 30일에 있을 공연을 취재하기 위한 한겨레신문사와 동석해 본 인터뷰를 자리를 빌어 이루어졌다. 그가 스타로 등극하기 이전의 궤적들을 중점적으로 질문했고, 1980년대 이후는 '사실'보다는 간략하게 질문했음을 밝혀 둔다.
"제가 맡았던 건 기타예요. 그때 말로 '훠스트 기타'죠. 그때는 별 것 다 했어요": 기지촌 클럽과 미 8군 무대 시절
Q: 이번 공연이 '35주년 기념'이므로 35년 전으로 돌아가 조용필 님이 음악 활동을 시작한 시점부터 여쭙겠습니다. 먼저 성장기에 결정적으로 음악을 하게 만든 뮤지션이나 곡이 있다면?
- 기타를 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벤처스(The Ventures)의 영향이 크죠. "Shanghaied Twist"나 "Bulldog" 같이 기타 하나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들, 집에서 뚱땅거릴 수 있는 곡들을 치다가 동네 친구들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죠, 그때 베이스 기타 치는 친구가 미 8군하고 연결돼서, 앳킨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지방의 기지촌들을 돌았고 그게 발전해서 나중에 화이브 휭거스의 오디션을 보게 된 거죠.
Q: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소문 대한일보 건물 13층 스카이 라운지에서 첫 무대를 가지셨다는데 당시 그곳에서의 공연은 어떤 성격이었습니까?
- 그건 프로로 활동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고 아마추어일 때였죠. 누구 대신 잠깐 들어가서 기타 쳐 준 거예요.
Q: 앳킨스라는 이름은 쳇 앳킨스(Chet Atkins) 같은 컨트리 뮤지션들을 연상시킵니다. '조용필이 컨트리를 하다고 록을 했다'는 (아마도 부정확한) 신문 기사도 꽤 있습니다.
- 사실 그 이름은 당시 베이스 기타 치던 친구가 지었어요. 그 친구가 앳킨스라는 이름에 그렇게 애착을 갖더라구요. 그런데 사실 그때 앳킨스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습니까? 컨트리 노래라고 해봐야 쟈니 캐시(Johnny Cash)의 "I Want To Go Home" 밖에 안 했으니까요. 당시 미 8군 무대에서는 그 곡이 장병들의 향수를 달래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 곡을 안 하면 안됐어요. 마지막에 꼭 그런 노래 불렀죠.
Q: 그러면 1968년 3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가출하고 장파리로 들어간 시점부터 프로 연주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요?
- 프로로 음악생활을 시작했던 때는 1969년부터예요. 미 8군에서 등급을 메기는데, 저희는 싱글 A를 받았죠. 더블 A는 하사관 클럽에서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는 쪽이 주로 받았으니까. 그리고 나서 장파리에 있는 DMZ란 클럽에 들어갔어요. 이때가 화이브 휭거스였죠.
Q: 이후 화이브 휭거스엔 어떻게 발탁되셨나요? 이끌어 준 사람이 있다면?
- 그때 화이브 휭거스의 드러머가 같이 하자고 해서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때 이 팀이 거의 깨져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드럼, 기타, 베이스도 새로 들어왔고. 연습도 다시 하고 오디션을 본 뒤 의정부 쪽으로 가게 됐죠. (질문: 화이브 휭거스는 어느 회사 소속이었나요?) 화이브 휭거스는 화양 소속이었어요.
Q: 비슷한 시기에 장파리에서 활동했던 라스트 찬스나 데블스는 모르셨는지요? 또 용주골 파라다이스 클럽에 가서 첵 돌스에 합류했다고 하셨는데 데블스 멤버들도 파라다이스 클럽에 섰다고 증언하신 바 있습니다.
- 예. 라스트 찬스와 데블스는 파주 근처에서 같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희는 파라다이스 클럽이 아니고 주로 DMZ에서 무대에 섰어요.
Q: 이때 의정부 근처의 무대에 서다가 이태원으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 이전에 화이브 휭거스가 기지촌을 중심으로 활동하실 땐 오픈 밴드였나요, 아니면 하우스 밴드였나요?
- 그곳에 섰던 클럽들에는 우리밖에 없으니까 하우스 밴드로 선 것이나 다름없죠. 그때 저희가 싱글 A를 받았는데, 더블 A를 받는 경우는 인원수가 많고 서전트 클럽에서 하는, 흔히 패키지 쇼라고 부르는 경우에 받는 등급이죠. 하우스 밴드는 클럽에 주둔해서 하는 거지만, 우리는 로테이션으로 매일 달리 했어요. 예를 들어 의정부에 있는 공병부대, 사단, 그런 부대를 돌았죠.
Q: 그 때 포지션은 리드 기타인가요? 당시 기억나는 레퍼토리가 있다면 어떤 곡들이었죠?
- 제가 맡았던 건 기타예요. 그때 말로 퍼스트 기타죠. 그때는 별 것 다했어요. 그때 유행하던 비틀스(The Beatles)의 "I Want To Hold Your Hands"는 기본적으로 해야 되었고,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I Can't Get No)Satisfation", "Paint It Black" 같은 것도 했고,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조금 뒤에 "In-A-Gadda-Da-Vida"가 한창 유행했었죠.
Q: 화이브 휭거스에서 나오게 된 이유는? 데블스나 라스트 찬스처럼 그때 활동했던 다른 그룹들은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는데, 화이브 휭거스는 이 때 이후로는 활동이 없는 듯합니다.
- 하도 집에서 난리를 쳐서(웃음)... 제가 어머니, 아버지는 못 뵙고 집을 나왔는데 누이, 형들이 "이제 학교 다녀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해서 그만 두게 됐어요. 제가 나오고 난 이후로 다른 친구가 들어갔던 것 같은데 그 다음 화이브 휭거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Q: 그러면 화이브 휭거스에서 미 8군 무대에 섰다가 이후 김 트리오를 통해 일반 무대(국내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그 사이 동안의 조용필 님의 행적이 자세하지 않네요. 1970년 초 둘째 형이 신문광고를 보고 킹 클럽을 찾아와 역촌동의 누님 댁에 머물게 되었고, 대학교 재수를 하다가 다시 가출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없는 밴드에서 경기도 광주에서 연주했다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노래도 하기 시작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 그 사이가 바로 경기도 광주의 한 클럽에서 하우스 밴드로 있던 시기죠. 거기서 오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Lead Me On"을 부르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중요한 계기였죠.
Q: 조용필 님이 당시에 불렀던 "Lead Me On" 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록보다는 소울 쪽에 가깝게 들립니다.
- 화이브 휭거스를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음악 같이 하던 친구들이 "연습 겸해서 하는 하우스 밴드가 있는데 와서 좀 가르쳐 달라"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갑자기 기타 치는 친구가 군대 가는 바람에 내가 거기 붙잡혀서 며칠 봐주고 있었던 거죠. 그 때 한 병사가 자기 생일이 내일이라고 바비 블랜드(Bobby Bland)의 디스크를 가지고 와서 "내일 이 곡("Lead Me On")을 연주해 줄 수 있겠냐" 하더라구요. 그래서 밤새 그 곡을 연습해서 다음날 그 곡을 연주해 줬어요. 굉장히 좋아하던데... 하다 보니까 그런 노래가 우리에게도 정서적으로도 맞고 좋더라구요.
Q: 그때는 록이나 소울, 컨트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때였죠?
- 예. 왜냐하면 그때는 장병들이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고, 소수민족도 있고, 여러 가지였어요. 그래서 백인은 백인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라틴계는 라틴계대로 곡을 신청하니까 여러 가지를 안 해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Surfin' U.S.A."부터 아까 말한 레퍼토리들을 이것저것 다 연주했어요.
Q: 특별히 소울을 추구하신 것은 아니죠?
- 예. 그런 건 아니죠. 하다 보니까 소울도 하게 된 거죠. 하지만 제일 신나는 건 비틀스, 롤링 스톤스였어요. 그 다음에 퍼즈(fuzz)가 유행하면서 싸이키델릭 사운드의 곡들을 하기도 했죠.
"(김)대환 형이 와서 "야! 우리 한번 (최)이철이하고 멋있게 해 보자"고 해서 김 트리오를 하게 된 거죠": 김 트리오 시절 그리고 최초의 '가수왕'이 되다
슈퍼 그룹 김 트리오. 사진은 조선 호텔 투모로우에서의 연주 모습. 왼쪽부터 조용필(보컬, 기타), 김대환(드럼), 이남이(베이스).
Q: 1970년에 김대환 님을 만나서 김 트리오를 결성했다고 들었습니다. 소공동 국제호텔 레인보우 클럽으로 옮기고요. 그렇다면 그때 일반무대로 오시게 된 건데, 광주 이후에는 주로 어디에서 활동하셨나요?
- 광주 이후에는 국제호텔 레인보우하고, 조선호텔 투모로우를 왔다갔다했어요. 그 이후에 김 트리오가 시작된 거죠. 광주에서 올라와 국제호텔에서 있을 때, (김)대환이 형이 오셔서, "야! 우리 한번 (최)이철이하고 멋있게 해 보자"고 그랬어요. 그때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Experience)를 비롯해서 3인조가 유행하니까 세 명이 한번 해보자 해서 김 트리오를 결성하게 된 거죠.
Q: 김 트리오 결성 이후 1971년 5월에는 '선데이서울컵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에 나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연주곡은 자서전 [초혼의 노래]에 따르면 유호 작사·최창권 작곡의 "길 잃은 철새"와, 외국곡으로 "My Yiddishe Mama", "Unchained Melody"였다고 나와 있는데요. 그 외에 정확히 다른 어떤 곡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길 잃은 철새"는 스윙 재즈 풍으로 만들어서 연주했었죠. 그리고 빠른 곡들도 몇 개 했어요.
Q: 당시 경연대회에 출전할 때의 멤버가 최이철, 김대환, 조용필 님 셋이었죠? 그때 밴드 편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예, 그렇게 셋이서 했죠. 경연대회에서는 (최)이철이가 건반과 베이스를 같이 쳤고, 나는 기타만 쳤어요.
Q: 이 시기 독집 [조용필 스테레오 힛트 앨범](AALS-0002)과 김 트리오의 [드럼! 드럼! 드럼! 앰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AALS-0004)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조영필이라는 이름으로 4곡 들어 있는 음반 [뮤지칼 사랑의 일기/사랑의 자장가(변혁 작편곡 제1집)](OR-100)도 나오고 뒤에 재발매되었습니다. 특히 변혁 작편곡집에 실린 "사랑의 자장가"는 "사랑의 마리아"로 은희의 곡을 다시 부른 곡인데 최초로 조용필 님의 목소리가 실린 곡이라고 하셨는데, 이 음반이 맞는지요?
- 그때 저희가 프린스 호텔에 있었는데 [드럼! 드럼! 드럼! 김 트리오 앰프 기타 고고! 고고! 고고!]에선 전 기타만 연주했어요. 강태환 씨(색소폰)나 (김)종화 형(건반)도 같이 했고. 정확히 어느 음반이 먼저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배성문 씨가 제작자였어요. 변혁 씨라는 분도 배성문 씨를 통해서 알게 됐고...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녹음할 테니 연주해 보라'고 해서 했을 뿐이죠. 아시다시피 이 시기는 음반 낸다고 해서 로열티 받던 시기도 아니었고, 그래서 판권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죠. 나중에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를 때도 그랬지만, 이 때는 가수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결코 없었으니까...
Q: 이 음반들을 들어보면 관악기도 들어가고, 그룹사운드 연주는 아닌 것 같은데요?
- 예, 이 음반들은 아세아 레코드에서 기획된 건데, 당시 저는 노래만 부르고 연주는 세션맨들이 와서 한 거예요.
Q: 현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이 시기 음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의 대중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솔직히 이 시기의 음반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그때는 내가 이런 음반들을 내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떠밀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죠. 제가 직접 신경 쓰기 시작한 건 1980년에 나온 음반부터죠.
Q: 이 즈음 김 트리오가 해체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음악풍이 고고 풍으로 급선회해서...'라고만 말씀하셨는데 이것만으로는 추상적으로 보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는지요? 조용필 님이 솔로 데뷔하면서 깨진 것이라든지...
- 그러니까... 김 트리오의 (김)대환 형님하고 관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그 분 성격이 워낙 프리한 사람이라 연주할 때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었고... 나중에 (김)대환이 형이 전위음악으로 돌아선 것도 그런 성격 탓인 것 같아요. 그래서 팀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서 키 보이스에서 드럼을 쳤던 이성이란 친구를 데려왔죠. 그리고 (김)대환이 형에겐 매니저 일을 봐 달라고 부탁했었고... 그렇게 해서 시간이 좀 지나 제가 방위훈련 들어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끝났죠.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신청곡으로 자꾸 들어와서 그 곡을 찾아서 다시 연습했어요": 7인조 그룹사운드 그림자 그리고 최초의 대박
조용필과 그림자의 '전격 출연'을 알리는 마이 하우스의 지면 광고
Q: 김 트리오가 해체된 이후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시기 전에 "25시의 리더로 있던 조갑출의 제의로 몇 개월 부산 극동 호텔에서 그들과 함께 일하던 나는 1973년 방위소집령이 떨어져 잠시 음악활동을 쉬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해 가을(1973년 가을) 부산으로 전출을 가게 됐는데 임지 발령이 나지 않아 조갑출과 25시와 함께 잠시 일을 하게 됐다. 이후 방위 근무를 하면서 저녁때는 밤무대에 서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나 내가 서울로 다시 전출해 올 무렵 25시 팀은 멤버간의 불화로 해체됐다"고 하셨는데 이 25시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던 시점이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 25시는 그림자를 하기 전에 잠깐 있었어요. 방위 끝나고 나서 25시에 잠깐 있다가, 1974년 옛날에 같이 음악하던 친구들을 모아서 그림자를 만들었어요. 1974년의 시점이 '그룹으로 음악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컸던 시기였죠. 그래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연주했는데, 동대문의 이스턴 호텔에 나갈 때가 그 무렵이었죠.
Q: 그때는 '브라스 록에 영향받은 8인조(기타, 베이스, 드럼, 트럼펫 2, 트롬본 2, 건반)로 그림자를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시카고(Chicago) 같은 음악을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언제쯤이고 멤버가 누구인지 기억하시나요?
- 이름은 다 잊어버렸어요. 편성만 얘기하면, 트럼펫 둘에 트롬본 하나, 기타가 나 혼자, 베이스, 건반, 드럼, 이렇게 해서 7인조였었어요. 그런데 사실 나는 브라스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언젠가 한번은 해 보고 싶은 음악이라서 브라스 록을 하게 됐죠. 시카고의 음악이 굉장히 유행했던 탓도 있을 거예요. "Make Me Smile" 같은 곡을 연주하곤 했어요.
Q: 이 때는 그룹에서 리더이자 싱어(가수)로 활약한 것으로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이트클럽에서 밤새 연주하려면 혼자 노래부르기는 힘드셨을 텐데요...
- 그 때 베이스 기타를 치던 김주홍이라고 있었는데 그 친구도 가끔 노래를 불렀어요.
Q: 이 때 멤버는 어떻게 구성하셨어요?
- 그때는 멤버 구할 때 "누구누구가 있다. 어떤 노래를 잘 한다"고 일단 추천을 받고, 저희와 맞으면 멤버로 데려오곤 했어요. 나중에 위대한 탄생 때는 그 기준이 "누가 제일 잘 하냐"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Q: 그때 그룹사운드 하시던 분들은 연주는 매일 했어도 음반을 내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 대개 그랬어요. 저도 가수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냥 음악하는 게 좋아서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뿐이죠. 우리는 자존심도 강했었고...
Q: 그럼 이제 문제의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몇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당시 록 그룹이 트로트를 했다는 평을 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고, 1970년대 일본 가요계의 대스타였던 엔카 가수 모리 신이치(森 愼一)를 좋아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비롯해서 당시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면 얘기 해주시겠습니까?
- 물론 그런 평을 한 사람들은 있었죠. 모리 신이치는 개인적으로 좋아했었는데 그때 서울에 있으면서 누가 그 사람의 '도나스 판'을 갖다 주면서 "네가 한번 해보면 괜찮겠다" 해서 몇 곡 불렀죠.
Q: 당시 그렇게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이 허용되던 때였나요?
- 그럼요, 우리는 거의 안한 편이고, 다른 팀들은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때가 나이트 클럽이 한창일 때였고, 유명한 경음악 악단이 전성기를 누릴 때였는데 그 악단에서는 일본 곡을 많이 연주했어요. 그리고 우리도 그런 노래들을 안 할 수 없는 게, 나이 좀 든 사람들은 이런 곡을 연주하라고 야단이에요. 그래서 그런 곡들을 기본적으로 몇 개를 부를 수 있어야 했어요. 안 그러면 쫓겨나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인가요를 몇 개 연습했던 것 같아요.
Q: 그러니까 조용필 씨가 기본은 록인데 가끔 트로트로 외도를 했다는 주장도 있잖아요. 그럼 처음에는 좀 꺼렸지만, 하다 보니까 매력이 생겼다고 볼 수 있나요?
- 예, 그런 셈이죠.
Q: 그런데 킹박이 기획했던 [너무 짧아요/돌아와요 부산항에(안치행 편곡집)](서라벌, 1976, SLK-1009)에 수록된 트로트 곡들은 조용필 님이 적극적으로 넣으셨던 건가요?
- 그건 킹박이 이거 이거 좀 불러달라 해서 넣은 거예요. 그러고 나선 다시 안 불렀죠.
Q: 저 음반이 대박을 치리란 예상은 못하신 건가요?
- 전혀 생각을 못 했어요. 그게 새벽다방에서 인기가 시작됐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타이틀곡은 "너무 짧아요"라는 곡이었었는데,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신청곡으로 자꾸 들어오니까 그 곡을 찾아서 다시 연습했어요.
Q: 지금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인데 그 음반에서 기타 치던 분은 누구셨어요? 안치행 씨였나요, 아니면 세션 기타리스트였나요?
- 기타는 제가 쳤어요.
"위대한 탄생 멤버를 뽑을 때의 기준은 '누가 제일 잘 하냐'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혹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Q: 대마초 파동 이후부터 1980년 데뷔할 때까지는 이젠 지겨우실 테니까 안 물어보겠습니다.(웃음) 조용필님의 본격적인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단발머리](지구, JLS-1201546, 1980-03-20)를 발표하던 당시에 이미 위대한 탄생은 있었던 셈입니다. 그때는 아직 '제일 잘 하는' 멤버를 고를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필 님이 유명한 시기는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그룹을 꾸리게 된 건가요? 결국은 그분들이 최고의 멤버가 된 셈인데...
- 위대한 탄생의 모태가 된 그룹이 원래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그룹이었어요. 대구 출신의 그룹이었죠. 그때 누가 '어느 팀이 있는데, 장래가 촉망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번 봤어요. 그땐 부산에서 연주하고 있었죠. 아직 위대한 탄생이란 이름은 아니었고... 그래서 같이 하게 되었는데, 베이스가 조금 약했어요. 결국 베이스를 빼야 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유재학 씨(주: 뒤에 대영AV대표)예요. 그래서 유재학 씨는 베이스를 내려놓고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었죠. 그때 멤버가 베이스에 (김)택환이, 키보드에 (김)청산이... 베이스만 교체한 바로 그 멤버들이에요.
Q: 그럼 이후 위대한 탄생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출발할 때 최초의 라인업이 김청산(스트링, 그림자 출신), 이건태(드럼, 검은 나비 출신), 이호준(피아노, 동방의 빛 출신), 곽경욱(기타, 미 8군 무대 출신), 김택환(베이스, 밥벌레 출신)이 맞나요?
- 멤버가 들어오고 나간 건 좀 복잡해요. 내 생각에 (이)호준이는 나중에 들어 왔는데... 당시 위대한 탄생의 인기가 엄청났는데, 갑자기 독립하겠다고 (김)청산이, (김)택환이, (곽)경욱이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난 나름대로 키워서 스타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Q: 지금 말씀하신 것은 그분들이 '천하대장군'이란 그룹을 만들었던 4집(1982) 이후의 이야기죠?
- 예, 그래서 부산의 코오롱 호텔에서 5일간 공연하던 마지막날 얘기하더라구요. "독립하고 싶다"고. 그래서 "그렇게 해라"고 했죠. 그렇게 되어서 베이스에 (송)홍섭이, 키보드에 (이)호준이, 기타에 (김)석규, 이런 친구들이 들어왔죠.
Q: 이른바 '위대한 탄생 2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이군요. 실례지만 1980년 데뷔 음반 내시기 전에 무대 수입은 어느 정도였는지 말씀해줄 수 있는지요?
- 당시 그림자는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하는 그룹 중에서는 개런티가 제일 비쌌어요. 월급제로 받았는데, 따로 매니저가 있는 건 아니었고 유재학 씨가 사실상의 매니저였죠. 그땐 뭐 몇 군데씩 뛰었으니까.
Q: 당시에는 디스코가 유행할 때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곡들을 연주하셨죠? 그런 팝송들을 많이 연주했나요?
- 그때 당시에 유행하던 것들을 많이 했죠. 생각나는 건 비지스(The Bee Gees)의 노래(가성으로 부르는 곡)가 굉장히 유행했었는데, "Staying Alive" 같은 곡들을 좀 했죠. 그때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문에 수난을 좀 겪어서 다시는 가요를 안 한다고 했어요. 우리들과 계약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꼭 불러줘야 한다고 하면 '그 노래는 안 한다'고 그랬었죠.
Q: 음악공부를 정식으로 하신 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장점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편곡 같은 것은 혼자 하려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럼 작곡을 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나요?
- 1969년도부터 하숙생활 하면서 방에서 건반을 일일이 다 그렸어요. 도화지에다 그려서 입으로 나오는 걸 기반으로 하다 보니까 라디오나 음반에서 나오는 걸 적게 되었고 악보를 쓸 수 있게 되었죠. 작곡이나 편곡은 거의 혼자 했어요. 나중에 피아노 쪽에는 (이)호준이가 도와줬고, (송)홍섭이도 많이 했어요. 두 친구가 큰 역할을 했죠. 같이 연습하면서 서로가 좋은 아이디어를 뽑아오곤 했어요.
Q: 그런데 이미 멤버들이 최고의 연주자였기 때문에 그런 작업하실 때 자율성을 많이 주는 편이었나요? 아니면 개입하는 편이었나요?
- 거의 다 제가 개입했죠. 녹음하다가도 듣다가 맘에 안 들면 다 가고 혼자 남아서 다 지워서 제가 다시 한 것도 많아요.
Q: 굳이 말해서 위대한 탄생 1기와 2기, 그리고 지금 라인업을 비교하면 어느 시기가 제일 이상적이었죠?
- 장단점들이 다 있죠. 그리고 그때대로 좋았어요. 현재 라인업이 10년째거든요. 지금 (최)희선이나 (이)태윤이는 10년째고, (이)종욱이가 8년째고, (이)건태는 옛날부터 있었고... 음악적으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우리가 워낙 처음부터 연습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그걸 토대로 해서 조금씩 바꿔나갔죠. 2, 3년 전의 신곡이 아니라면 옛날의 추억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이전에 했던 그 음악을 기본적으로 살려야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이니까...
"한 앨범에 신경을 많이 쓰면, 다음 앨범은 음반사에 맡기는 식이었어요": 지구레코드 시기 조용필 신화의 이면
Q: 그러면 이제 1980년대 가수로서의 조용필 님에 대한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시기 지구레코드의 조용필님의 음반들이 일부는 록이었고 나머지는 트로트, 팝 발라드, 이런 식으로 스타일이 혼재되었던 시기였잖아요.
- 그게 우리나라 현실인데, "선배 아무개가 만든 곡을 이번에 좀 불러줘라"고 하면 그쪽의 사람과의 인맥도 있고 하니까 사실 거절하기도 힘들었어요. 지구레코드의 문예부장이었고 작곡도 했던 임석호 씨가 중간에서 그런 말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개별)곡을 연주해서 녹음하는 것에만 신경 썼지, 방송이 너무 많고 하다보니까 앨범의 전체적 편집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했어요. 지금이야 그렇게 하면 안 되겠지만...
Q: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레퍼토리 선정권이 강해졌다고 볼 수 있나요? 한 예로 7집 [눈물로 보이는 그대/들꽃](지구, JLS-1201933, 1985-04-10)은 조용필 님이 기획한 것 같구요. 8집 [허공/킬리만자로의 표범](지구, JLS-1201981, 1985-11-15)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 8집은 음반사에 맡겨버린 거죠. 이렇게 보면 돼요. 한 앨범에 제 곡이 많이 들어갔다면, 그 다음은 제 곡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그건 방송이다, 공연이다 해서 도저히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내가 한 음반에 신경을 쓰면 그 다음 음반은 회사가 신경을 쓰고 그랬어요. 지구 레코드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Q: 1980년대 지구레코드에서 음반 내실 때 여러 작곡가들의 곡을 불렀는데 그 중에서 가장 파트너쉽이 맞다 싶은 작곡가는?
- 가요로서는 역시 김희갑 씨죠. 이범희 씨나 (이)호준이도 나름대로 음악성이 있지만, 김희갑 씨가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킬리만자로 표범"에서의 클래식 기타 전주도 그분이 직접 하신 것이고...
Q: 추측하건대 녹음 하실 때 "허공" 같은 곡 할 때는 다른 악단 반주하고 "미지의 세계" 같은 곡 할 때는 위대한 탄생으로 별도로 녹음하신 것 같은데요
- "허공" 같은 곡을 녹음할 때는 스튜디오에 위대한 탄생은 아예 오지 않았어요. 작곡가인 정풍송 씨가 세션 멤버를 데려와서 했죠.
Q: 위대한 탄생은 키보드가 최소한 둘 이상 있는 그룹이었습니다. 키보드에 대한 나름의 철학은 어떠신 건지요?
- 건반에는 피아노의 역할이 있고, 신서사이저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걸 분리하고 싶었던 거죠. (이)호준이는 피아노 부분을 하고 나머지 신서사이저 부분은 (김)청산이가 하고, (유)상윤이가 있을 때는 세 명이 했어요. 1960년대까지는 그룹에 건반이 별로 없었어요. 기타 둘에 베이스 하나, 이런 식으로 했는데, "In-A-Gadda-Da-Vida"가 유행할 때부터 아마 본격적으로 건반이 나왔을 거예요. "단발머리" 같은 경우도 그렇고 몇 집까지는 건반 편곡도 내가 했어요. 내가 직접 연주한 것도 많고...
Q: 평론가 강헌이 조용필 님의 음반 중 4집 [못 찾겠다 꾀꼬리/비련](지구, JLS-1201706, 19820517), 7집 [눈물로 보이는 그대/들꽃](지구, JLS-1201933, 1985-04-10), 13집 [The Dreams](서울음반, SRCD-3101, 1991)를 최고라고 뽑았다는데 이 음반들이 공통적으로 록 스타일의 음반이라서 뽑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음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죠?
- 그래요. 그때 7집 같은 경우는 내가 1년 정도 쉬겠다고 한 다음 작정하고 작업한 것이죠. 너무 TV 방송에 시간을 많이 뺐기니까 쉬겠다고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때 "조용필, 당분간 TV 안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Q: 지구레코드 시절에 만드신 곡들에 대한 저작권 분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입장을 밝혀주시면? 당시 관행에서 전속은 다 그랬다는 주장도 있잖아요?
- 결국 대법원까지 가서 우리가 졌죠. 그런데 도둑맞은 거예요. 당시 관행에서 전속은 다 그랬다고 하지만, 그때 우린 문외한이었거든요. 저작권법 같은 것들은 전혀 모른 상태였으니까... 그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되질 않았죠. 그러니까 법적으로는 할 말이 없을 수 있지만 도의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어요.
Q: 지구 레코드에서 나온 조용필 님이 작곡한 노래들을 조용필 님이 모아서 음반을 낼 수 없는 건가요?
-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은 새로 녹음을 해야 되기 때문에... 자세한 건 차후에 제가 직접 밝히기로 하고 이 문제는 넘어갑시다.
Q(강성만 기자): 흔히 조용필 님 노래 스타일이나 곡에서 한국의 '한(恨)'이나 아픔과 연관시키는 얘기가 많습니다. 조용필님의 개인적인 삶을 보면 그다지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것들이 음악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글쎄요, 음악은 역시 '아이디어'이거든요. 내 삶과 음악하고의 직접적인 연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영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내가 부모님 속을 썩였으면 썩였지, 부모님이 내 속을 썩인 것은 아니었거든요(웃음). 삶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그런 것 없어요. 그렇다면 '한'이라는 것은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영화나 음악에서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생각해요. 제 목소리에서 한이 서린 듯하다는 것은 아마 성격인 것 같기도 하고 목소리 톤이 뒷받침 해 주는 것 같기도 해요.
Q: 작곡할 때 영감을 받은 부분이 삶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나온 건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 그런 것은 내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인생이 있다 가정하고 만든 거예요. 다른 사람의 이런 저런 삶, 그 삶 속에 들어가서 내가 아마 이랬을 것이다라고 가정하고 만드는 거죠. "미지의 세계" 같은 경우에는 일본, 미국 왔다갔다하면서 본 또 다른 세계들, 그런 것들이 반영된 것이고, "꿈"도 그렇고,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경우는 동심으로 돌아가서 어렸을 때의 천진난만함 그런 것을 만들고자 한 것이죠.
Q: 조용필 님의 곡들 중에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굉장히 강하게 표현한 곡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이 나네" 같은 곡도 그렇고...
- 예. 비록 오래 거기서 못살았지만, 시골(경기도 화성)에서의 어렸을 적의 추억이 굉장히 강하게 남아 있어요.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까지 거기 살았죠. 그런 곡들을 만든 목적이 뭐냐하면 제가 곡을 만들고 노래를 하면서 가요에 이런 것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난 아니야" 같은 동요 가요도 만들고 "고추잠자리"도 마찬가지고요. "한강"이라는 곡도 그랬어요. 우리가 매일 한강을 왔다 같다 하다가 한강에 대한 노래가 없어서 그런 곡을 만들고 싶었고. 우리 주위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않은 것들을 많이 살려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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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트리오 시절 조용필의 기타 치는 모습
Q: 조용필 님 하면 아무래도 1980년대가 떠오릅니다. 1980년대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정치적인 견해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여" 같은 곡은 운동권 학생들도 좋아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생명"도 광주항쟁과 관련되는 것이라 하고, 그런 묘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본인의 생각은 정작 말씀하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 나는 정치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은 (정치를) 참 싫어한다는 거죠. 정치인들이 매스컴에 나오는 이미지, 그런 것들이 너무 싫으니까 내가 보는 (정치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안 좋아요.
Q: 그럼 최근 얘기로 넘어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1992년 이후부터는 인기 최정상에서는 서서히 멀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후의 작업을 들어보면 성인취향이면서도 록 사운드를 결합시키려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18집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컨셉트를 잡고 계신지 궁금하고 앨범 발매가 늦어지고 있는 이유도 궁금합니다.
- 요 몇 년 제가 뮤지컬 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어요. 1992년부터 뮤지컬에 관심이 있었는데, 비록 연출가는 아니지만 무대 쪽을 제가 좋아하고 무대 연출에 관심이 많아서 그 작업을 벌써 10년이 넘게 했어요.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다니고, 비디오도 보고, 최근 DVD도 많이 보고 그랬어요. 더구나 1992년 "꿈"이 끝나고 나서는 TV 출연을 많이 자제하다 보니까 앨범을 내 놓아도 홍보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16집 "바람의 노래"가 나올 땐 TV에 좀 나갔죠. 1996년에 조금 하고 그 다음부터는 거의 방송출연 같은 것들은 끝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새 앨범이 나와도 홍보면에서는 제로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번 앨범도 굉장히 고민이 많아요. 현재로서는.
Q: 이번 앨범은 16집, 17집과 비교해서 음악적 스타일이나 컨셉트가 어떻게 다른가요?
- 일단 오케스트라 사운드예요. 발라드이면서도 클래식에 가까운 그런 곡들이 있고, 작년에 만들어 놨던 "꿈의 아리랑"은 그대로 집어넣었고, 그 다음에 몇 곡 빠른 것들이 있죠. 빠른 것도 완전히 록 스타일이 아니라 중간중간에 오페라식으로 선율이 들어간, 말하자면 '록 오페라' 같은 곡이죠. 이번에도 김희갑 선생의 곡이 들어가 있어요.
Q: 계속 공연하시고 음반 내시겠지만, 나중에 뮤지컬 같은 것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가요?
- 저는 앞으로 한 5년 정도 이렇게 활동한 뒤부터는 내 노래만 가지고 뮤지컬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Q: 이제 데뷔하고 35년이 지났으니까, 데뷔시절하고 지금을 비교해 보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요즘 mp3다 뭐다 이런 말들이 많은데 그런 것들에 대한 본인의 견해, 그리고 음악인이 그것에 대응할 방법, 전략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있으시면 밝혀주시겠습니까?
- 제 입장은 음반 제작하는 사람들 입장과 같다고 보면 되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 음반업계 현실이 갑갑한 상황 아닙니까. 돈 들여서 애써서 나온 음반이 2만장 팔리면 히트했다고 말하는 수준이니... 이 현실이 얼마나 어려운 거냐구요. 그런데 그렇게 노력해서 만들어 놓을 것을 전부 mp3로 다운 받아서 그렇게 쉽게 유통된다면 너무 억울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래요.
Q(강성만 기자): 그런데, 제작진들 내부에서도 입장 차이가 조금 나거든요. 지난번에 양현석 씨 같은 경우에는 어차피 이러 현상은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가사 1절만 들려주게 한다든지...
-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렇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에요.
Q: 요즘 일본 진출하겠다는 젊은 음악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선배로서 어떠한 면이 필요한 것 같다든가, 그런 것을 조언해 주실 게 있다면 몇 말씀 부탁드릴게요.
- 글쎄요. 무작정 진출하는 것 보다 제대로 된 기획이 굉장히 필요할 것 같고, 장기간 안목을 봐야될 것 같아요. 일본은 가수나 장르도 많고 일본이라는 시스템이 간단하지는 않아요. 전문가들하고 상의를 해야 되요. 제가 '이래라, 저래라'하기는 어렵지만 준비를 잘 해야 할 거예요.
Q: 몇 년 전 동숭동에서 소극장 공연을 하면서 김민기 씨와 사석에서 만났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김민기 씨는 1970년대 대중음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한 분인데, 그 분의 음악과 본인의 음악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 (김)민기 씨의 노래는 1970년대라는 상황에서 표현할 수 있었던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1980년대는 영상으로 말하면 흑백에서 칼라로 전환하던 시기고, 음향으로 말하면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변한 시절이고, 야간 통행금지가 없어진 시절이에요. 이런 시대적 변화가 있기 때문에 1970년대 운동권 중심으로 불려진 (김)민기 씨의 음악과 1980년대 조용필의 노래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어요. 시대가 굉장히 많이 달라요.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단속하고, 경찰만 봐도 괜히 무서워 피해가던 1970년대에 비해서 1980년대는 많이 달라졌죠. 1970년대라면 중학생들이 어떻게 30살 먹은 가수보고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그 만큼 많이 달랐어요. 그리고 1980년대는 팝송과 가요가 역전되는 시기였지만, 1970년대는 가요라고 해봐야 관객이 그렇게 많지 않았잖아요. 새벽 세 시에 방송국 앞에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기였고.... 그만큼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문화적인 차이는 엄청났다고 봐요. 1980년대는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대중문화가 많이 성장한 시기였죠.
Q: 이런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룹 사운드 출신 가운데 신중현 선생은 쭉 한길만 걸었는데 조용필 님은 록 이외에도 이런저런 다양한 것을 했다. 그래서 정작 조용필의 음악을 '록 음악'이라고 부르는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고... 이런 견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 신중현 선배 같은 경우는 '작곡가이자 연주자의 길'을 걸었고, 나는 '연주자 겸 가수의 길'이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할 수가 없어요. 사실 가수는 하나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입니다. 가수는 어떤 노래라도 불러야 된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왜냐면 팬이라는 것이 젊은층 뿐만 아니라 노년층도 있기 때문에 내가 가수가 되어 인정을 받으려면 민요도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많은 장르를 했던 거죠. 결국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Q: 1970년대 그룹사운드를 하셨던 분들을 보면 지금은 경제적으로 불우한 분들이 많이 계시더군요. 1980년대라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셈인데 조용필 님에게 이 분들과 다른 전략이 있었다면 어떤 것인가요.
- 그 분들이 설 무대를 잃고 도중하차해서 그렇죠. 1980년대 초만 해도 나이트클럽, 고고클럽, 댄스클럽 등이 많이 있었는데 DJ가 등장하고 스피커나 이런 시스템이 좋아지면서 라이브가 많이 죽었죠.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일본도 옛날에 그룹을 하는 친구들이 도중하차를 많이 했어요. 저 같은 경우는 1980년대에는 TV(방송)이 주된 무대 역할을 한 것이죠. 또 하나는 국내에서만 계속했으면 아마 지겨워서라도 '조용필은 떠나야 된다'는 말이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국내와 일본 활동을 병행했기 때문에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넘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Q: 그럼 그룹 출신의 다른 분들과 달리 조용필님은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말씀이신가요?
-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건 제가 그룹 출신으로 가수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겠죠.
Q: 안타까운 부분에 대해선 어떤 대안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아무대로 라이브 콘서트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은데, 라이브 공연의 경험이 많은 입장에서 라이브 문화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 안타까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로서는 힘들어요. 일본에서 음악하는 친구들과도 이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이유는 그거예요. 테크노 같은 음악이 등장하면서 사운드가 더욱 강렬하졌고... 그래서 연주하는 친구들(연주인들)이 소외되기 시작한 거죠. 대안이라면 일본처럼 과감하게 라이브 하우스를 많이 만드는 것이겠죠. 젊은 그룹이나 옛날 그룹들이 모두 나와서 정말 라이브로 승부할 수 있는 그런 곳들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Q: 지금 한국은 라이브 문화가 빈약하지만 1970년대에는 '콘서트'는 아니었다고 해도 라이브 문화가 활발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시절 (1980년대에 비하면) 무명으로 활동하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 난, 참 좋은 시절이라 생각해요. 비록 환경은 열악했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따지지 않았어요. 어떤 음악도 할 수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Q: 이제 인터뷰를 접으면서 록 음악이나 대중음악 전반의 장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해 마무리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제가 어디선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 관객층이 10대, 20대가 아니라 30대, 40대로 올라가고 있다고 해요. 일본 역시 그렇다고 하구요. 얼마 전에 미국에서 스틱스(Styx)의 공연을 갔다왔는데, 관객 대다수가 40대, 50대였어요. 그 나이의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와"하는 함성을 지르는데 그것이 참 멋있게 보였어요. 여자의 함성 말고 남자의 함성 말이에요. 물론 여자의 함성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의 함성을 듣기 힘들잖아요,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죠.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제 공연도 남자 관객들이 많아져요, 그 분들이 아직 소리는 안 지르지만(웃음)... 그래서 음반 구매층도 언젠가 그렇게 바뀌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Q: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8월 30일에 있을 공연이 잘 되길 바라겠습니다. 200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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