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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마이 그레이스 홈 2022년 12월 소식
“주님이 오신 평강의 계절에 섬기시는 가정과 교회 위에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이 오신 기쁨의 계절에 저는 마음 아픈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 일어난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20여년 동안 우리의 든든한 가족이었고 그레이스 홈의 법인의 대표였던 타왓 목사님 부부가 갑작스레 소천하였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쓰는 지금도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드는 것은 저희들이 그만큼 그를 의지했고 그는 우리나 그레이스 홈 아이들에게 든든한 울타리였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아직도 목사님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이번 달 소식은 목사님의 소식으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치앙마이에 와서 언어를 배우며 처음 찾아간 치앙마이 침례교회에서 처음 뵙다.>
20여년 전 치앙마이에 처음 도착하여 언어를 배우며 현지 교회를 방문할 때 목사님은 50대 초반의 잘 나가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치앙마이 대학생들과 함께 사역을 하셨고 교회는 젊은 학생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습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언어를 배우는 기간 동안 우리는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습니다. 후에 사역을 맡게 되면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옮겨야 했습니다.
(2022년 3월 법인회의 후)
<우리 집으로 찾아오신 타왓 목사님 부부, 아니 집사님이 왜 여기 있어요?>
교회를 옮겼지만 우리는 목사님과 계속 교제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계속 언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태국어 교사가 어느 날은 자기가 갈 곳이 없다고 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태국어를 배우도록 안내하였고 그분을 우리 집에서 그냥 살도록 하여 6개월 이상을 우리와 같이 살게 되었다.
무슨 연유인지 기억은 잘 없지만 타왓 목사님 부부가 어느 날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그러더니 언어를 가르치는 태국어 선생님을 보고는 “아니 집사님이 왜 여기 있어요?” 하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였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말씀해드리자 목사님은 우리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에 법인을 만들게 되었을 때 법인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하자 목사님은 기꺼이 허락해주시고 지금까지 함께 해주셨다. 다른 사람들은 법인대표에게 판공비를 드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음에도 지금까지 기꺼 이 함께 해주셨다. 여러 선배 선교사들이 목사님에게 법인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해도 대표를 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목사님이 특별하게 여기는가 보다 하였다.
<매주 월요일은 가정의 날>
알고보니 목사님은 가정사역이나 성경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하시고 여러 곳의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시고 기독교인이 많지않은 이곳 태국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셨다. 목사님의 설교는 태국인들이 좋아하며 많이 인용하였다. 그런데 목사님이 월요일은 가정의 날이라며 쉬는 날은 항상 사모님과 시간을 같이 보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월요일에는 목사님과 만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우리 부부가 목사님 부부와 같이 식당에서 만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다른 선교사 부부도 같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자주 만났던 장소는 정해진 식당이었다. 초기에는 도시락을 자주 먹었고 사모님은 연어를 좋아하셔서 그것을 잘 드셨다. 돌아가시기 한달전쯤인 11월 15일에도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고 열흘전인 12월 2일에는 이제 그 식당은 실증이 났다며 우리나라의 샤부샤부격인 MK식당을 가자고 하셔서 그곳에서 우리와는 마지막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12일에는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영양식을 하는데 오시기로 하였고 성탄예배에도 설교를 하시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큰 교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작은 교회를 여러 개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치앙마이에 와서 처음 목사님을 뵈었을 때 목사님은 교회의 규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하셨다. 규모가 큰 교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작은 교회를 많이 개척하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아는 태국인이 땅을 판다고 하여 목사님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어느 날은 그 땅을 보러 가자고 하셨다. 땅값은 목사님이 생각했던 것보다생각보다 많이 비쌌다.
목사님은 그날 이후로 규모가 큰 교회를 하기보다는 작은 교회를 여러 개를 개척하기로 결단하였다. 자신의 교회에 나오는 집사들을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3년 동안 훈련하였고 평가하고 난 후 선교사들과 함께 교인들의 일부를 데리고 가서 교회를 개척하도록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작은 교회 개척 운동은 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3년을 가르친 교인이 지도자감이 안되면 더 훈련을 받아야 했고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선교사들도 인내심을 같고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소천했을 때 그렇게 개척된 교회는 16개에 이르렀다.
<당신은 빠져라 태국인인 내가 나설 테니까.>
그레이스 홈의 아이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할 때면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곤 하였다. 대부분은 사소한 일이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마을의 운영 위원회가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문제가 생기면 법인을 운영하는 주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많이 힘들어지게 된다. 그럴때면 목사님은 우리에게 “아짠 권은 가만히 있으세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하며 법인의 대표로서 몸소 일을 해결해주셨다.
태국에는 타이족을 비롯하여 다양한 소수부족들이 더불어 함께 살고 있는데 소수 부족보다는 타이족이 영향력이나 우월한 의식을 갖고 있다. 타이족인 목사님이 일을 해결하려고 나서면 아무래도 소수 부족들을 설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목사님은 친히 맏형 노릇을 자처해서 도맡아 주셨다.
<저기 있는 권 선교사가 잘못하면 내가 감옥에 가야합니다.>
목사님은 한국 선교사들에게는 잘 알려진 분이셨다. 일찍부터 한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나 목회자 훈련원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한국 선교사들 모임에 강사로 자주 초빙을 받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한국 선교사들이 모여서 타왓 목사님에게 선교사들이 태국에 와서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의를 부탁하였다. 당시 한국 선교사 70-80명이 모여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목사님은 뒤쪽에 앉아있는 저를 가리키며 “저기 앉아있는 권 선교사가 잘못하면 제가 감옥에 가야합니다” 라며 강의를 시작하셨다. 자신이 우리 법인의 대표이며 또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현지에서 현지의 법을 준수해야 함을 역설하셨다.
강의가 끝나고 난후 많은 선교사님들은 저에게 타왓 목사님과 도대체 무슨 관계냐라고 질문하셨다. 사실 우리는 특별한 관계는 없었지만 매주 월요일날 만나 식사하고 교제하며 사역이나 태국인에 대해 배우는 그런 관계였을 뿐이었지만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다른 선교사들에게나 태국 현지 목회자들에게는 직언을 잘하는 분으로 알려진 분이라고 하시면서 목사님이 우리를 대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선교사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만큼 목사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나누는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주일에 두번 혹은 세번 만나며 10여년을 한결같이 지내다.>
목사님은 매일 글쓰기를 하셨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매일 글쓰기를 해야한다고 하셨다.목사님이 소천하셨을 때 이미 78권의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셨고 2권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매주 2일 혹은 3일을 만나서 운동하고 교제를 하였는데 목사님은 탁구를 치면서도 이기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셨다. 목사님은 매일 글쓰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데 운동을 하면서 이기려고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번 이기기라도 하면 내가 권선교사를 이겼다고 하시며 좋아하셨다. 우리는 목사님의 50대와 60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결혼한 딸들보다도 우리는 더 가까이에서 지내며 가족이 되었다. 목사님이 교통사고로 소천하시기까지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고 같은 길가는 길동무였다. 지난 2월에 내가 태국 선교에 관한 책을 출간하자 목사님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며 힘든 일을 했다고 자신의 일처럼 축하해주셨다.
<권 선교사는 아직 나한테 이런 것 안사줬다.>
한국에서 GMF 법인 대표가 우리법인 대표인 타왓 목사님을 만나 그동안 치 앙마이 둥지(선교사 자녀 기숙사)를 도와주신 것에 감사하며 대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목사님! 어디서 식사할까요? 했더니 사모님과 의논해보고 알려주신다고 하다가 하던대로 후지에서 식사하자고 하셨다.
후지에서 식사를 하는데 한국 대표님께서 후지에서 가장 비싼 것을 드시라고 하시며 장어구이를 권해서 억지로 그것을 드셨다. 사모님은 참치 살라드를 좋아하셔서 그것을 함께 드셨고 목사님은 조금 느끼하다며 지금까지 한번도 권선교사는 나에게 이렇게 비싼 것을 사주지 않았다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한편으로는 죄송하고 미안했다.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목사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자 독특한 목사님의 사역 여정은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수요일과 토요일에 3년간 평신도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선교사를 수년 동안 지켜본 후 인정이 되면 그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도록 도와주고 계셨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니 나중에 만나 이런 것을 자세히 기록을 하기로 하였다.
<목사님 식사를 어디서 하지요?>
나는 목사님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12월 2일에 목사님 뭘 드시고 싶어요? 묻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일식집 오시네이를 아느냐고 하셨다. 나는 가본적은 없고 우리집에 오는 길에 있는 것을 본적은 있다고 하였더니 그 집에 한번 가보자고 하셨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러더니 목사님은 마음이 바뀌었는지 하시는 말씀이 후지는 이제 싫증이 났다고 하시며 전에도 갔었던 MK를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12월 2일에 MK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를 하시면서 목사님은 마음에 있던 이야기를 쏟아 놓으셨다. 그 동안 마음속 깊이 갖 고 있던 남에게 하기 힘든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그리고 책을 쓰는 이야기며 책을 출간하면서 격는 어려움들을 나눠주셨다. 그리고 앞으로 열흘 후인 12월 12일에 점심을 우리 집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오시네이 일식집을 지나노라면 나는 목사님을 떠올리곤 한다. 생전에 목사님이 가보고 싶어했던 일식집인데 대접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교통 사고로 소천하시고 난 후 나는 가끔은 생각이 났다. 왜 목사님은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같이 갔던 후지 식당이 실증이 났다고 했을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죽음을 예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 점심 식사를 위해 11시 반까지는 오세요!!>
한국에서 오신 팀들이 오전에는 건강과 자연식에 대한 강의를 하고 점심을 자연식으로 차려서 한국 선교사들도 몇몇이 와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오전부터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상하게도 목사님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사모님께도 전화를 했으나 사모님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카톡으로 문자를 드렸다. 우리는 점심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사실 그때 사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목사님은 사경을 헤메고 있던 시기였다. 점심 시간이 되어도 목사님 부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약속을 해놓고 나타나지 않은 일이 한번도 없었다.
밥을 먹고 난후 잠시 쉬고 있는 데 친구 선교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친구는 다짜고짜로 타왓 목사님이 교통 사고가 났다는데 당신은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우리와 점심 약속을 했는데 안오셔서 웬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혹시 나는 타왓 목사님에 대하여 알고 있을 것 같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즉시 전화를 끊고 알아보았다. 실제로 교통 사고는 어제 즉, 12월 11일에 사모님이 운전을 하시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아서 사모님은 바로 돌아가시고 목사님은 하루 동안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12일 오후에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장례식장은 마련되지 않았고 장례 예배를 위한 장소를 물색중이라고 했다.>
타왓 목사님이
<장례 예배를 위한 장소가 공지가 되다.>
미리 가본 장례식장에
<두번의 장례 예배에 참여하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 올해 성탄에도 목사님이 설교를 해주셔야 합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인삼 엑기스가 주인을 잃다>
<그는 나와 함께 천국에 있는데 너의 슬퍼하는 것이 합당하냐?>
타왓 목사님이 갑작스레 소천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거의 나의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감사와 함께 안타까움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장례 예배에 두번 갔는데 작은 딸을 만나자마자 보듬고 울었다. 큰딸을 만나서도 우리는 울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다 말씀해주셨다며 우리를 보고 나이드신 자신의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가꺼이 지내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내마음은 여전히 힘이 들었다.
힘들게 지나기를 4주일이 넘었을까 새벽 미명에 자다가 세시쯤에 깼는데 갑자기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그토록 슬퍼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나와 함께 천국에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슬퍼하냐?고 되물으시는 것 같았다. 목사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과 천국에 함께 있는데 나의 슬퍼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쳐갔다. 여전히 힘이 들지만 이제는 마음을 추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 홈을 위해 새해에는 이렇게 기도해 주십시오.
1) 그레이스 홈의 모든 식구들이 영육간에 강건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2) 갑작스레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타왓 목사님 가족들을 위해, 건축중인 교회를 위해 그레이스 홈에서 성장하여 청년으로 신장병을 앓고 있는 찰랏을 위해(기증자가 나타나도록)
3) 그레이스 혼 아이들 12명이 방콕에서 열리는 국제연날리기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1월 13,14일에 방콕에 다녀와야 하는데 안정하게 잘 다녀오도록
4) 그레이스 홈에서 성장한 청년들과 하영이와 기준이가 믿음안에서 비젼을 갖고 신실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5) 그레이스 홈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2학기에도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학기를 마감하도록
6) 한인에 의한 태국 선교 70주년을 총정리하는 책무를 맡았는데 3년동안 잘 감당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