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물 위를 걷다
2004년 4월 11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4:25-33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완전히 갈라서 있습니다. '구원'이라든지, '주'라든지, '믿음'이라는 용어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사는 동네에서의 용어는 경제 용어들이요 정치 용어들이고 가정에 관한 개념들입니다. 사용하는 용어들이 다르면서 다른 계통을 가지고 의사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물 위를 걸으시고 베드로도 물 위를 걷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물 위를 못 걷는 것입니까? 이로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동네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늘 새롭고, 특수하게 나타나시는 이 예수님의 세계를 우리는 평소에 늘 가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의 세계를 가려서 못 보게 하는 겁니까? 교회나 성당에 대해서는 소위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 하나님의 세계에 닿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죠. 마치 보험하나 들여놓듯이 교회 안에 자신의 적을 둠으로서 장래를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성당과 교회가 예수님의 세계를 가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성당 안에는 인간들의 '행함'이 가득하고 그 행함의 결실로 출현된 단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서 다같이 철야기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행함의 뭉치인 이 교회를 의존한다는 것은 큰 낭패가 됩니다. 예수님에게 통하지 않는 행함 들을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즉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사실 베드로에게 정상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차라리 바다 물 속으로 퐁당 빠지는 것이 베드로에게 정상입니다. 평소에 베드로가 늘 물만 보면 걸어다닌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물 위를 걸어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물에 빠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물에 안 빠지고 얼마를 걸었다는 사실이 이상한 사실입니다.
왜 베드로는 물에서 안 빠지고 걸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베드로에서 나온 행함의 업적으로 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베드로가 처해 있는 환경이 예수님의 주님의 능력이 작용하는 환경인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행함이 절대로 삽입될 수 없는 그런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 자체의 힘만으로는 버티겠다는 자는 예수님의 세계에서 죽어야 될 자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의 행함이 통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그는 예수님의 주되심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과연 물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고 점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물 위에서는 자신을 점검하나 마나 입니다. 당연히 빠지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저 주님을 보자 반갑고 그립고 좋아서 주님과 합류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경제 문제나 가정문제나 사업문제나 건강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에 예수님을 끌어드릴 마음도 없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과 만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허락' 안에서 뿐입니다. 베드로의 자체 능력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계와 인간 세계의 차이점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세계는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기에 계속 가리워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도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바다에 풍랑이 이는 순간, 다시 본연의 자기 믿음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즉 살기 위한 신앙으로 되돌아 선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믿음으로 되돌아와 버리면 그 멀리 보이는 예수님과는 관계 역시 단절되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초청이 바다에 이는 풍랑으로 인하여 끊어질 수 있는 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과연 참된 신앙이 이 세파에 부는 풍랑으로 끊어지는 그런 성질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세계의 기적과 용어들, 즉 '주님'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믿음'이라 하는 것들이 인간 세계에 들어올 때는 '죽어라'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나 행함에도 우리를 물 위를 걷게 하는 힘과 정당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뭘 해도 죽은 시체에 해당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란 그 전에 반드시 깔리게 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5에 보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3:28에서도,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그 전에 깔고 딛고 서야 하는 발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 지킴으로'는 아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소위 '믿음' 안에는 그 '믿음'을 구성하는 구성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믿음의 구성물 속에는 인간의 행함이 가득 들어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식이라면 물에 빠지는 베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진 이유는 나름대로의 선입견으로 되돌아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지금까지는 용케도 잘 버텨왔기에 앞으로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면 계속 산 사람으로 지속될 것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해야 내가 계속 사느냐?'에 관심을 두게 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행함에서 만들어낸 믿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이란 이 세상에서 '인간의 죽음'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지 아니하면 결코 자기 행함을 포기할 자가 아니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철저하게 죽이는 식으로 일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믿음의 구성 문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계속 '물 위를 걷었음'으로 해야할까요?
이 본문 이후에 베드로와 예수님은 물만 보면 신나듯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물을 만났을 때는 도리어 배를 탔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를 타고 내려서 남기신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내 살은 곧 생명의 떡이니 누구든지 내 살과 나 피를 먹지 아니하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하고 했습니다. 자... 물 위를 걷기가 어렵습니까 아니면 이 말씀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렵습니까? 둘 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거기에 신앙의 조상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있는 믿음의 구성물 안에는 뭐가 들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선행입니까? 아브라함의 경건함입니까?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습니다. 그 은혜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태가 죽었기에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입니다. 자, 물 위를 걷는 것이 어려울까요, 태가 죽은 여자가 아기를 가지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둘 다 인간의 범주 밖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그것이 단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뱉은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그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코 아브라함 자신의 행함을 거기에다 삽입시키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 믿음의 구성물을 십자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최종적인 기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기적일까요? 십자가 속에만 영생이 있고 다른 곳은 일체 없습니다. 십자가는 제가 볼 때에 꼭 깔때기 같습니다. 물이 뱅뱅 돌다가 한 복판에 뚫린 좁은 구멍으로 쏙 빠지는 깔때기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위력과 능력은 성도로 하여금 늘 그 십자가 안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 예수님의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속에서는 나오는 흡입력으로 성도는 매일같이 끌려갑니다.
자기 행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믿음조차 버리게 해서 오직 주님에게서 나오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만 끌려 다니게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성도는 주님의 위대한 능력에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경제적인 낭패와 가정적인 혼란, 정치적인 어수선함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꼭 쥐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이라면 그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믿음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십자가 소식이 거추장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물에 빠져 있는 상태인 것을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혀 영생의 나라와 상관없는 자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서 정말 은혜를 받은 자라면 세상 적으로 인해 주님의 은혜가 가리워 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뭘 골몰하게 생각합니까? 왜 무상으로 끌어 당겨주시는 사랑을 왜 우리 스스로가 무시하고자 하는 겁니까? 앞으로 주님의 은혜가 세상 것과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가리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