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당신들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 백제 등에 현혹되어 있는 모습이 결국 <크기에 집착하는> 노예의 정신의 발로라고 봅니다. 주인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위대한 것을 발견해 냅니다. 큰 것의 보잘 것 없음, 작은 것의 위대함을 볼 줄 아는 정신이야말로 위대한 정신입니다. 정신의 깊이를 상실하고 물질의 크기에만 쏠린 당신들의 현대적 마인드(대구 참사도 결국 그거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닌가?)가 고조선이란 엉뚱한 나라를 중국 대륙의 지배자로 둔갑시켜 놓지요. 솔직히 고조선이 소위 우리 민족과 얼마나 관계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를 제멋대로 해석해서 과학적이라고 우기지요. 안타깝습니다.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가 시작되다
26살 차이, 13년 동안의 편지
지금으로 비유하면, 적어도 사회면 톱기사 감이다. “서울대 총장, 고등고시 합격자와 편지로 열띤 토론을 주고받다.” 1558년 조선 명종 13년, 퇴계의 당시 지위는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되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반면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로, 지금으로 친다면 겨우 고등고시 합격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나이로 보아도,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에 불과했다. 무려 26살 차이다. 그러나 청년 고봉은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당시의 대학자이자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퇴계를 찾아가, 평소 자신이 가진 철학적 소신들을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했다. 고봉의 이런 파격적 행동은 오로지 열정과 패기만으로 세속적 편견을 뛰어넘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더 놀라운 건 퇴계의 대응 방식이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한마디로 도저히 맞대응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건만, 퇴계는 청년 고봉에게 기꺼이 마음을 열어 주었다. 청년 고봉의 두려움 없는 열정을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급제를 달성하고 귀향하는 고봉에게 처음으로 먼저 편지를 띄웠다. 마치 첫 만남 이후 퇴계는 고봉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린 듯하다. 나이나 직위나 경륜으로 볼 때, 도저히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은 이렇게 시작하여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13년 동안에 걸쳐 끝없는 애정과 상호 존중의 자세로 편지를 나누었다. 우리 역사상 이들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편지로 우정과 학문을 나눈 사실을 다시 또 발견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지식인들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했고, 사제간의 닫힌 관계를 확장했던 것이다.
일상의 편지로 철학을 논하다
‘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
그들은 당시 가장 일상적인 소통 수단이었던 편지를 통해, 삶의 사소한 문제부터 가장 첨예한 철학적 논쟁까지 모두 나눴다. ‘자기완성’이라는 숙제는 끝없는 것이고, 대학자나 청년 학자에게 모두 절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모든 세속적 통념을 초탈하면서, 편지로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그들은 세속에서 관리된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심리적 모순을 서로 이해했고, 학자와 관리의 길을 함께 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서로 공감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고뇌는 오늘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방기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가 언제 편지로 철학을 나눈 적이 있으며, 시도해 보려고 했는가? 퇴계와 고봉이 주고받은 ‘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47논쟁)은 조선조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유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적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 세대가 수려하게 풀어낸, 우리 고전의 새로운 번역
잊혀진 우리 철학자들의 편지를 온전한 한글로 다시 읽다
퇴계와 고봉, 그들은 우리들 삶의 또 다른 거울이고, 그들의 편지는 우리들이 까맣게 잊어 버린 우리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편지는 지금까지 거의 접근 불가능의 지역에 방치되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한 젊은 학자의 섬세한 언어를 통해, 그들의 편지를 온전한 한글로 배달하고자 한다. 이제 한글 세대가 새롭게 읽고 우리말로 다시 잘 풀어낸, 우리의 고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성리학 두 巨木 영혼의 교류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먼길에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
1558년 지금의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고봉)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는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옮긴이는 두 사람의 오랜 편지를 모아 현대어로 정성스럽게 풀어놓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 접대하는 일이 자못 괴롭고 번거로운데 병까지 들어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지쳐, 전에 배운 것은 아득하고 새로 배운 것은 거칩니다. 그래서 도학(道學)에 정진하고자 하는 평소의 뜻을 아주 저버리게 될까 매우 두렵고, 옛사람에게 미치기 어려움을 깊이 한탄합니다.”(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퇴계)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치밀한 사고력을 가졌던 고봉은 학문과 입신출세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고봉의 강직한 성품과 재능을 알아보았던 퇴계는 그에게 두 길을 함께 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실제로 선조에게 고봉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다.
군왕이 내린 관직을 함부로 사양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사직’하는 일이라면 사실상 퇴계가 ‘선수’였다. ‘학문’의 길을 결심한 퇴계 자신은 1549년에 사임장을 올리고 낙향한 뒤, 끊임없이 내려지는 관직에 대해 사망하던 해까지 총 53회의 사직서를 올리며 학문의 길을 지켰다.
“만일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뜻에 문제가 있어 후학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봉)
“저도 사단칠정에 대한 정지운(鄭之雲)의 분별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논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선, 즉 ‘순선(純善)’이나 ‘기를 겸한 것(兼氣)’ 등의 말로 고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친 것은 서로 도와 가며 밝혀 보려는 의욕에서였지, 결코 그 고친 저의 말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퇴계)
조선시대 지식인사회의 최대 논쟁이 된 사단칠정론은 1559년 30대 초반의 청년학도였던 고봉이 대학자로 존경받던 50대 후반의 퇴계에게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둘 사이에만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 논쟁은 그 후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논쟁을 거쳐 조선 지식인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이는 성리학에서 기본 개념인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심리작용을 논하는 문제였고 이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은 심성론(心性論) 분야에서 중국 성리학을 능가하며 독특한 학풍을 이루게 된다.
“책을 보다가 잘 모르는 것이 있어 별지에 적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 논변에 비할 것은 못되니 답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퇴계)
퇴계는 공부하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26세나 연하인 고봉에게 서슴없이 물었고, 고봉은 또한 열심히 그 문제의 답을 찾았다.
“생각을 다해 자세히 회답할 수 없었으니, 부끄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퇴계)
1570년 11월 퇴계는 고봉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다음달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고봉은 1572년 40대의 젊은 나이에 퇴계의 뒤를 따랐다.
13년의 세월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서, 삶의 무게와 생각의 깊이와 묵은 체취까지 느낄 수 있는 ‘편지’의 맛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e메일과 문자메시지의 경박단소(輕薄短小)한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진 시대,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됐다.
--- 동아일보 책의향기 김형찬 기자 (철학박사)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두 대학자의 지적인 우정
“강 위의 이별은 꿈결처럼 아득했습니다. 선생님이 길 떠나는 모습을 들으니, 슬프고 그리운 마음 갑절이나 더 했습니다.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이 절로 슬퍼집니다”(고봉)
“동호(東湖)의 배 위에서 나누었던 정이 꿈결 속에 되살아나니 봉은사까지 따라와 나누었던 하룻밤의 뜻이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서로 취해 말없이 바라보며 천리의 이별을 다 이루었습니다”(퇴계)
어떤가. 마치 불같은 사랑을 나눈 연인들의 이별장면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 생각한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일 터. 1569년 3월4일 벼슬에서 물러난 퇴계가 낙향하는 길에 동호의 몽뢰정에서 묵은 뒤 다음날 한강을 건넜다. 위의 대화는 당시 퇴계를 배웅했던 고봉과 떠나간 퇴계가, 이별의 순간을 반추하며 주고 받았던 편지이다. 69세의 퇴계와 43살의 고봉이 나눈,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
1558년(명종 13년) 32살이던 고봉(기대승)은 과거길에 ‘감히’ 성균관 대사성이던 퇴계를 찾아간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 합격생이 국립대 총장을 무턱대고 찾아간 셈이니 그 얼마나 만용에 가까운 객기인가. 그런데 퇴계는 이 새파란 젊은이가 제기한 철학적인 논쟁에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열고는 첫번째 편지를 쓴다.
“선비들 사이에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대의 논박을 듣고나서 (제가 전에 말했던 것이) 더더욱 잘못됐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쳐봤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러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1559년 1월5일 퇴계의 편지)
인간미 넘치는 대화와 사단칠정 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담긴 두 대학자의 편지는 무려 13년동안 100편으로 이어졌다. 세대간의 장벽과 영·호남(퇴계는 안동, 고봉은 광주)의 지역적인 한계, 직위와 경륜의 장애를 뛰어넘는 애정이 듬뿍 담긴 대화. 한국지성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이라는 평가는 전적으로 옳다. ‘제대로 된 논쟁과 지적인 우정을 모르는’ 오늘날의 지성인들이여 한번 두 분의 편지를 읽어보라.
“요즘, 사람들이 그대가 세상을 업신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며 말을 삼가는데 모자라고 몸을 단속하는데 소홀하다고 말합니다. 힘써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다시 술을 굳게 다스리지 못해 큰 병이 나겠다고 하니 무슨 까닭으로 이런 평판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제가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고 다투어 말합니다”(퇴계가 자신이 천거한 고봉을 꾸짖는 편지)
“선생님께서 고친 도설(圖說)에서는 오른쪽과 왼쪽을 바꾸었고 나와 남을 구분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멋대로 상상하는 폐단을 키우니 도리어 의리를 더 흐리게 하고 후배학자들에게 허물만 될까 두렵습니다”(퇴계가 고친 ‘심통성정도’를 비판한 고봉의 편지)
두 분은 서로에 대해 이처럼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칼날같은 비판인지 읽는 이마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 하지만 고봉이 “인사고과에서 ‘하고(下考·인사고과에서 낮은 성적)’를 받아 손가락질 받는다”고 하자 “하늘이 그대를 더욱더 완전하게 하려고 시련을 준 것”이라고 위로한 퇴계와 “벼슬을 그만두고 싶다”고 토로하는 퇴계에게 “요즘같은 때에 진실로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충고하는 고봉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우정의 얼굴을 엿볼 수 있다.
두 분의 편지를 아주 쉬운 말로 풀어낸 옮긴 이의 노고는 가상하다. 다만 간간이 편지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황을 함께 풀어주는 수고까지 겸했다면 (이 책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의 출간은) 더욱 대중적인 시도가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를 갖고 이 책을 더듬어 가면 두 분이 그토록 사색하고 토론하고 탐구했던, 동아시아 유고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적인 논쟁인 ‘사단칠정론’을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 그 얼마나 큰 행운인가. 조선조 중기 지식인의 애환이나 그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행운까지 덤으로 잡을 수 있고….
--- 경향신문 책마을 이기환 기자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이황-기대승 '한국지성사 최대논쟁'
이제 막 고시에 합격한 32세의 신출내기 젊은 관료가 조직의 수장인 장관을 향해 '최근 정책현안에 대한 장관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으론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라는 요지로 직격탄을 날린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관은 젊은이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당황하거나 불쾌해하기는 커녕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정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편지로 화답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50여년 전 조선시대 명종13년(1558년) 때 실제 이같은 일이 있었다. 논쟁의 주인공은 당대 지성계의 거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었다.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김영두 옮김,소나무,2만5천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소위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서로에 대한 안부,일상생활에서 느낀 점 등을 두루 담은 책이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나이 58세였다. 반면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로 32세에 불과했다.
고봉의 논쟁 제기로 촉발된 두 사람의 편지 내왕은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13년간에 걸쳐 지속됐다. 서로의 빛나는 정신을 감지한 두 사람에게 나이나 직위 등 세속적인 통념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평생을 학생이라 자부하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자기완성'이라는 숙제는 대학자나 청년학자 모두에게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권위에 눌리지 않고 예리하게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대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잃지 않았다. 때로 자신의 신상 문제를 숨김없이 토로하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 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퇴계와 전라도 광주에 살았던 고봉의 아름다운 관계는 오늘날 영·호남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한국경제신문 김재창 기자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100여통의 편지’… 한국지성사 최고의 논쟁
이 책에는 원문이 없다. 그게 없으면 좀 불안하다. 이웃 교수의 방에 있는 고봉집을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어 포기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내가 원문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드문 경험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익숙한 것부터 손이 가는 법이라, 2부 ‘학문을 논한 편지들’부터 읽었다.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유명한 철학적 논쟁이 담긴 부분이다. 논의는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의지적 표출의 구조와 가치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퇴계는 종교적이고, 고봉은 미학적이다. 노인 퇴계는 보통의 인간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산다는 비관 위에 서 있고, 젊은 고봉은 삶에서 생기는 갈등과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낙관 위에 서 있다. 그래서 퇴계는 칠정 너머에서 사단을 그리워하고, 고봉은 칠정 속에서 사단을 찾아내려 한다.
퇴계는 탁한 정치판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볼 대로 본 사람이었고, 고봉은 이제 갓 출사한 신진 기예였던 것도 그런 차이를 낳았을 것이다. 이 논쟁은 주지하다시피 그 이후 율곡과 우계와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조선 유학사의 일대 공안이 되었다. 이 고민은 지금도 유효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책에는 고봉이 다른 학자들, 가령 항재 이항과 하서 김인후와 나눈 철학적 논쟁도 실려 있다. 고봉은 항재에게 그런 소리는 남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힐난했고, 항재는 고봉이 고집이 너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퇴계는 항재의 공부가 편협하다면서도 고봉 또한 익지 않은 주장을 자의적으로 늘어놓는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다시, 사단칠정에 대한 둘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 고봉은 퇴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퇴계는 고봉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퇴계는 더 이상의 논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놀란 고봉이 고집을 접음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둘의 우정은 바로 그 지점, 논쟁을 포기한 곳에서 출발한다. 둘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조선 유학을 위해서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1부 ‘일상의 편지들’은 그렇게 끈끈하고 간절한 둘의 관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일상의 기거와 벼슬살이의 어려움, 학문의 수련, 경전에 대한 의문, 현실 정치의 비판 등에 대해 그들은 각자의 생각과 우려를 토로하고 서로 위로한다.
독자들은 이 편지들을 통해 조선의 선비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졌으며, 무슨 문제를 고민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곤경을 만났는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그동안 퇴계와 고봉에 관해 쓴 논문들은 많이 있다. 소문이 무성하면 실상을 가리듯, 논문이 많아지면 주제를 도리어 가리기도 한다. 직접 대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적절한 안내를 해주지 못했는데, 이번 책은 그 아쉬움을 일거에 털어주었다. ‘쉽고 아름답게’라는 번역자의 기염 덕에, 우리는 원문에 조회하지 않고도, 허리를 펴고, 조선의 대표적 문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조선일보 책마을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학문ㆍ삶 넘나드는 두 지성인의 교감
"세상 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놀림과 배척 을 면치 못하고, 끝내 몸이 위태로워지거나 뜻을 억눌러야 하는 데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한탄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
16세기 중반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고봉(高峯) 기 대승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퇴계(退溪) 이황에게 편지 를 보낸다. 학문과 벼슬, 인생의 가치 등을 놓고 고민하던 젊은 선비 의 편지를 받고 퇴계는 답장을 쓴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아무에게도 속지 않을 만큼의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 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 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소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된『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 수록된 내용이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처음 만난 건 1558년 명종 13년 10월이었다. 기대승은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처음으로 이황을 찾아갔고 그해 12월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1570년 퇴 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동안 계속됐다.
당시 이황의 관직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지금으로치면 국립 서울대 학교 총장이다.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때였으니 고시를 통과한 연수원생쯤 됐을 것이다. 나이는 이황이 58세, 기대승이 32세로 26살 의 차이가 났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황은 경상도 출신이었고, 기대승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였다.
기대승은 당대 최고 권위의 학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거침없이 제기했고 이황은 기대승이 보내오는 편지에 성심성의껏 답장을 썼다. 둘의 편지는 때로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 때로는 서로 다른 생 각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담겨 있었다. 계층과 나이, 지역을 모두 뛰어넘고 이어진 두 지성인의 학문과 삶에 대한 고민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있게 `그렇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 책은 편지 한 장 써본 지도 까마득한 우리들에게 `자기반성`이라는 숙제를 남겨준다.
--- 매일경제 책 허연 기자 (2003년 2월 17일 월요일)
대가와 후학 우정어린 논쟁
처음 만나 편지를 섞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 차는 스물여섯. 퇴계는 일가를 이룬 쉰여덟 살의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두 살의 신출내기 선비였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조선 중기를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이다. 기왕에 나와 있는 국역본이 국한문 어투인 데 반해, 이 책은 한글 세대들이 술술 읽을 수 있게 꼼꼼히 정갈한 우리말로 옮겨졌다. 편지 왕래는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이 상경해서 퇴계를 처음 만나던 해인 명종 13년(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난 선조 3년(1570년)까지 16세기 후반 13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책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넘나들었던 조선의 두 지성의 교유의 기록이자 “바야흐로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깊은 곳까지 내면화되어가는 조선 중기 사람들”의 내면 풍경과 그들의 풍속,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다. 이들의 편지는 관직에 있을 때는 서울에서 오갔지만, 주로 이황은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기대승은 전남 광주에서 절박한 심정과 논변들을 인편으로 부친 편지들을 통해서 토해냈다. 오늘날의 ‘정서’를 과거로 소급시키는 우를 범하면서 말한다면 이 책은 영호남 지식인(정치가)의 ‘정치적 연대’의 기록이라고도 할 만하다.
편지 왕래 13년 가운데 첫 8년 동안 벌어진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1175년 주희(주자)와 육상산의 역사적 논쟁조차도 여기에는 거의 비교될 수 없을 것”(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소장 뚜웨이밍 교수)이라고도 평가된다.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로 있는 옮긴이 김영두씨는 “한국 유학이 단순히 주자학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단계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우리는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참신한 지적 충격’ 속에서 만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조선의 ‘두 지성’ 간에 벌어졌던 사단칠정 논쟁의 전말을 세세히 접한 바 없는 일반 독자라면, 이들의 편지가 패기방장한 청년 성리학도가 일가를 이룬 스승에게 물음을 구하고 답을 받는 방식이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편지 교류를 시작한 퇴계의 두번째 편지를 들여다보자. “그대의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인 까닭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기대승의 답신은 이렇다.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 이들은 본래 구분이 있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서 나눌 수 없습니다.…모름지기 이는 기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스스로 발현된 것이 이의 본래 모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행간에는 후학으로서 예가 극진하지만, 기대승은 자기 입장을 굳건히 세우고 논변을 이어간다. 반면 이황은 논리적으로 후학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여준다.
성리학에서는 만물(사물)을 ‘이’와 ‘기’로 설명하는데 이는 세상의 원리이고 기는 그 이치가 구현되는 물질적 실체라고 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론은 이와 기를 통해 인간의 마음(심성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설이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대승은 이기이원론에 반대했다. 그는 인간 감정을 연원에 따라 갈라놓기보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퇴계가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고 나누어 도식화시켰다면, 고봉은 사물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통일적으로 바라본 셈이다.
그렇지만 기대승의 관직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신진 사류의 주동자(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파직당하는가 하면 조광조 등 ‘사화’로 희생된 사림의 복권을 역설하는 등 그의 “기개는 너무나 강경하고 주장은 예리했”다. 이황은 이를 염려해 “세상을 일구는 데 너무 용감하지 않을 것”을 타이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기대승은 퇴계가 타계한 지 이태 만에 마흔여섯의 이른 나이에 객사했다.
이 책에서 “삼가 절하고 적습니다”(기대승)라든가 “황이 머리 숙입니다”(이황) 따위의 당시 편지글의 예의를 접하는 것도 흥미롭다. 편지의 내용도 ‘둘째 아이가 죽었음을 알립니다’(고봉)처럼 각기 자신의 일신상의 괴로움 토로에서부터, 사화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당시 분위기 속에서 목숨을 운위할 만큼 정치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의견 교환, 왕실의 의례 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이황은 기대승이 조정에서 이황의 중용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리 두 사람 사이는 뻔질나게 오가며 서로를 좇는 것이 이미 별나게 여겨지고 있는데, 누가 그대의 말을 공정하다고 믿겠습니까” 하고 질책한다.
이들의 편지에는 상례, 제례에 관한 의견교환도 다수 들어 있다. 퇴계와 고봉은 당시 맏며느리(남편을 잃은)가 제사를 주재하는 일반의 세태에 반대하는가 하면 조상 제사를 자손에게 전해 이을 때 부계(父系)로만 해야 된다는 확고한 주장을 서로 확인하고 가다듬는다.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 들어 ‘남존여비’사상이 심화한 것은, 일반의 세태와 풍속마저도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 했던 이들 남성 성리학자들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음이다.
--- 한겨레신문 책과사람 허미경 기자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편지로 꽃핀 '선비문화 진면목'
서양 학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앙숙 관계에 있는 두 학자가 사적으로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학술에 대해 그토록 반론을 펼쳐온 상대 학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추천해 자기 학과로 초빙한 예도 있다. 이런 일은 조선조의 선비 세계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이번에 출간된『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조선조 선비 문화의 아름다운 진면목을 보여준다.
16세기에 활동한 퇴계 이황(1501~70)과 고봉 기대승(1527~72)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제를 놓고 8년간 논쟁을 벌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의 학계나 공직 사회에서 본다면 이 두 학자 간의 관계는 표면상 쉬 이해가 안 가는 면이 많다. 스물여섯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데다, 당시 퇴계는 중앙 학계 대학자였던 반면 고봉은 막 고시에 합격한 새내기였다. 그 두 선비가 논쟁을 벌인 것이나, 13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조선조 선비문화의 성숙한 문화 코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의 대본이 된 원문은 민족문화추진회 등에서 '국역 고봉집'등으로 이미 국역된 바 있다. 하지만 그 국역본들을 지금 시중에서 구하기는 어렵고, 설사 구한다 해도 읽어내기에 적잖이 버거운 형편에서 두 선비의 편지를 새롭게 정리해낸 작업은 평가할만한 대목이다.
본디 번역은 20~30년 간격을 두고 '그 시대의 언어'로 재번역돼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이번 책은 두 대학자가 13년간 주고받은 1백14통의 편지를 주로 날짜 순으로 재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본격적인 학술적 논쟁은 책 뒤편에 따로 빼서 정리하는 입체적 방식을 통해 무엇보다 편안하게 읽히는 가독성(可讀性)을 염두에 뒀다. 따라서 사단칠정 논쟁 자체에 대한 정교한 인식은 이 책을 읽어내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하는 사단(四端)과 희로애락애오욕(七情)가 과연 이(理)가 나타나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중 퇴계가 새까만 후학인 고봉의 날카로운 견해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어느 선에서 절충.정리가 됐다는 점도 결정적인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다만 두 사람의 논쟁이 훗날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사상적 대립으로 번져 조선조 최대의 거대 논쟁으로 발전했고, 그것은 흔한 몰이해대로 공리공담이 아니라 조선조 선비문화의 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둘 일이다.
과연 퇴계와 고봉의 편지는 정중한 일상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양보없는 학문의 멍석이기도 했고, 그것은 요즘 인터넷 시대 혀 짧은 언어로 주고받는 e-메일과는 상당 부분 달랐다는 점도 음미해볼 일이다. 또 하나 독자가 미리 알아둘 참조 사항의 하나로 퇴계와 고봉이 사제 간은 아니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전통의 학계에서 사제 관계는 쌍방의 합의에 의한 일종의 계약 관계여서 한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제 관계는 성립되지 못한다.
훗날 퇴계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일부 후학들에 의해 퇴계와 고봉이 사제 관계인 것처럼 억지를 쓴 적이 있으나 퇴계와 고봉은 도를 같이 하는 차원높은 '도우(道友)의 관계'일 것이다.
--- 중앙일보 행복한 책읽기 김기현(유교사상연구소 책임연구원)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인간적 냄새 전하려 '힘빼고' 옮겼죠”
조선 명종 때인 1558년 10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 이황(1501~1570)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다. 이 첫 만남에서 고봉은 퇴계의 학설을 비롯해 성리학의 요체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했다. 당시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였다. 그로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두 사람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일상의 사소한 반성부터 당대 지성계를 뒤흔든 ‘사단칠정론’의 철학 논쟁까지를 두루 담은 두 사람의 편지는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젊은 사학자 김영두(36ㆍ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옮긴『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발행)는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은 편지를 빠짐없이 묶은 서한집이다.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퇴계와 고봉의 드높은 정신 세계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오늘의 우리말로 수려하게 풀어낸 번역의 빼어남 때문이다.
‘번역이 매우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자 그는 “원문이 워낙 잘 씌어진 글이어서 그렇다”며 물러섰다. “번역하면서 감탄을 많이 했어요. 아,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글 자체가 맛있고, 표현이 아름답고 적절한데다 내용도 아주 논리정연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 깃든 그들의 느낌과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만나는 문장은 한문으로 씌어진 옛글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 본보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전보다 국어사전을 더 많이 찾아가며 단어 하나 하나를 옮겼다”고 했다.
퇴계와 고봉의 서한은 이미 번역돼 있다. 이번 책은 무엇이 다를까. 그는 “원문이 비교적 자유롭게 씌어진 편지글임을 감안해서 되도록 일상의 말투로 자연스럽게 풀었다”고 말했다. “퇴계나 고봉은 훌륭한 성현이고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습니다. 편지로 개인적 하소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요. 그들의 인간적 냄새를 전하기 위해 ‘힘을 빼고’ 옮겼습니다.”
그는 “번역이 즐거웠다”고 했다. 좋은 글을 만난 자체가 기뻤고, 퇴계와 고봉의 향기에 취했으며, 위대한 풍모에 반했다는 것이다. “퇴계는 고봉을 만난 몇 달 뒤 편지에서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사단칠정론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썼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도 퇴계는 자신의 학문적 오류를 인정하는 학자적 양심을 보이고 있지요. 일곱 살 둘째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고봉의 편지를 옮길 때는 가슴이 찡했지요.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으며, 학문적 논쟁으로 팽팽히 맞설 때에도 극진한 예를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봉은 퇴계의 이론에 가장 거세게 반발한 사람이었는데도, 퇴계는 공직에서 은퇴할 때 선조 임금에게 쓸 만한 인재로 유일하게 고봉을 천거할 만큼 고봉을 아꼈습니다. 고봉도 퇴계의 죽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을 했지요.”
600쪽이 넘는 이 책은 일상의 편지와 사단칠정론을 비롯해 학문을 논한 편지를 분류해 1부와 2부로 따로 묶었다. 일상의 편지에서 두 사람은 자칫하면 사화에 걸려 정치적 위험에 빠지게 되는 처세의 고민을 이해하고, 학자와 관리의 길을 병행하는 어려움에 공감했다.
“재미있는 것은 관직 생활에 대한 고봉의 태도 변화입니다. 고봉은 관직에 처음 나간 30대 초반만 해도 퇴계더러 ‘선생같은 큰 인물이 어려운 시기에 세상에 나와 큰 일을 해야지 왜 물러나려 하느냐’고 말하지만, 40대에 들어서서는 물러나 학문에 힘쓰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해서 문제가 될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강한 사람이었던 고봉도 정치적 처신의 어려움을 실감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퇴계와 고봉의 면모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바르게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했다. 욕망을 긍정하지 않는 엄숙함이 오늘의 눈으로 보면 답답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6년의 나이 차와 지위를 뛰어넘어 진실하게 사귀었던 그들의 초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책은 그 모습을 맛깔진 우리말로 섬세하고 그려내고 있다.
--- 한국일보 책과세상 오미환 기자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퇴계-고방의 '四端七情' 빛나는 번역으로 재탄생
책을 번역한다는 것은 새로운 해석을 수반하는 새로운 창조 행위다. 때론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한 구마라집이라는 중국 역경사의 천재없이 당·송대 중국 불교가 그렇게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가를.
신간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한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1572) 사이에 오고간 100여통의 서한을 번역한 것이다. 이 편지가 조선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인만큼, 이미 충실한 번역서가 많이 나와있다. 관련 저서와 논문까지 합치면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책을 머리에 올리는 이유는 옮긴이가 ‘번역’을 통해 퇴계와 고봉의 왕복 서한을 완전히 새로운 책으로 재탄생시키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김영두(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씨는 사칠 논쟁에 가려 유학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던 이 서한집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교양서로 탈바꿈시켰다. 최근 보기 드문 번역의 성과다.
보자. 한국 지성사에 가장 빼어난 학문 논쟁의 기록인 서한집은, 조선조 선비의 우정이 무릇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영혼의 교류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은 조선조 선비의, 나이와 세대, 직위와 경륜, 지역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은 우정이 어땠는지를 감동스럽게 펼쳐 보인다. 이 과정에서 과거길에 올랐던 애송이 청년이 당대의 석학 퇴계를 찾아가 자신의 철학 소신을 펼친 것도 대단하지만, 놀라운 것은 퇴계의 대응 방식이다.
“황은 머리 숙여 두번 절합니다…. 그대의 편지를 기다린 지 오래…. 이제 천리 먼길에서 사람을 보내 제글에 대한 가르침과 아울러 틀린 곳을 바로잡은 책 한권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에 관한 논변이 넉넉하고 자세하여 길 잃은 이를 이끄는 그대의 염려가 남김없이 베풀어 졌습니다.”
이것이 과연 성균관 대사성이던 58세의 석학이 이제 갓 과거에 합격한 32세의 청년에게 보낸 편지인가. 이미 서로의 빛나는 영혼을 감지한 이들에게 나이나 경륜, 직위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처세의 어려움을 나누고, 학자와 관료의 길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한다.
이 책을 통해 조선조 선비의 철학과 정신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일상사를 손으로 만지듯 전하는 것은 책의 또 다른 성과다. 고봉은, 처음 벼슬길에 오른이가 치르는 통과의례인 면신례에서 겪은 모욕과, 총명하던 일곱살 짜리 아들을 잃은 아픔을 편지에 쓰며 위로 받았고, 퇴계는 아버지 묘석의 명문을 고봉에게 부탁할 만큼 고봉에게 의지한다.
그렇다고 책이 본래 가치인 사칠 논쟁을 가볍게 다루는 것도 아니다. 논쟁을 벌이면 으레 인식공격이 가해져야 논쟁인줄 아는 요즘의 지식인들은 책을 보며, 진정한 논쟁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무엇이 책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책의 체제다. 옮긴이는 편지를 모두 날짜 순으로 싣되,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을 논한 편지’는 제2부에 주제별로 따로 편집했다. 이런 시도는 사소한 것 같지만, 고급 논쟁에 가려 읽기 어렵던 편지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멋진 서한집으로 재탄생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주목할만한 것은 책이, 이제 막 학문의 세계를 본격 항해하기 시작한 30대 중반 젊은 학자의 첫 번역 작품이라는 것이다. 옮긴이 김씨는 한글 세대 특유의 감수성과 탁월한 우리말 구사능력으로, 의고체 문장속에 갇혀 있던 두 선현의 내면과 일상사를 섬세한 현대어로 풀어낸다.
글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한 의역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학문적인 엄밀함은 다소 떨어지나, 책이 교양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이 책으로 인해, 우리는 잘된 고전 번역 목록에 또 한권의 책을 추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 문화일보 북리뷰 김종락 기자 (2003년 2월 14일 금요일)
사제지간 이황·기대승 향기로운 영혼의 교류
내밀한 심중을 담은 편지글은 때로 그 어떤 소설보다 극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의 편지,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프란츠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대문호나 예술가들이 연인 혹은 가족에게 흉금을 털어보낸 서간문 모음은 그래서 두고두고 빛을 잃지 않는 법이다.
‘곰팡내나는 조선시대 편지’로 일축할 젊은 독자들에게 먼저 제언 한마디.고문(古文)의 아취를 잃지 않되 한글의 현실감각까지 부여한 번역 덕분에 글맛이 쏠쏠하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와,조선 중기 대표적 지식인인 고봉의 편지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두 사람의 편지교류가 시작된 건 1558년(명종 13년) 겨울.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고봉은 막 과거(문과)에 급제한 서른 두살의 청년이었다.고봉의 ‘그릇’을 퇴계가 일찌감치 알아봤던 걸까.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 격인 퇴계가 먼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라.”는 짤막한 편지를 띄웠다.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답하는 둘의 편지는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13년간 계속됐다.
26세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범상찮게 시작된 사제의 정은 혈육 같은 체온으로 나날이 돈독해져 간다.깊이를 더하는 사제의 관계가 행간행간에서 여실히 읽힌다.조정에서의 어려움,둘째 아이의 죽음 등 고봉은 신변의 고충을 숨김없이 스승에게 털어놓곤 한다.
책은 한글세대를 많이 배려했다.연대별로 나눠 ‘일상의 편지들’로 1부를 엮고,다시 ‘학문을 논한 편지들’로 2부를 채웠다.조선의 지성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은 2부에서다.가장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철학논쟁,이른바 ‘사단칠정 논변(四端七情 論辯)’은 2부에서 펼쳐진다.‘인간이 지닌 네 가지 선한 단서와 일곱 가지 감정에 대한 논쟁’에서 둘은 인간의 심성과 선악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뇌한다.상례·제례의 격식,국가·왕실의 의례를 놓고 이견을 주고받은 편지글은 그대로 조선 지성의 세계를 대변한다.
학문적 견해로 한치 양보없이 빛나던 형형한 눈빛은,다시 존경과 신뢰의 사담(私談)으로 온화해지길 거듭한다.퇴계가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갈 때 배웅길에 나선 고봉은 눈물겨운 이별사를 남긴다.왜 아니었겠는가.훗날 퇴계의 죽음 앞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했다는 고봉이다.
스승과 제자였고 다시 없는 어진 벗이었던 두 학자의 편지는,신기하다.학문과 덕을 그리워한 그들의 교류가 뜬금없이 오늘 지식인들의 초상을 반성하게 만드니.
--- 대한매일 황수정 기자 (2003년 2월 14일 금요일)
후학, 삼가 선생님께 글월 올립니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비할 데가 없습니다…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가 고봉에게 보낸 편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중)
서른두살 혈기방장한 젊은이 고봉 기대승(1527∼1572)은 1558년 조선 명종 13년 10월 과거길에 지천명을 넘긴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을 찾아간다. 정지운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한 퇴계의 견해를 비판하고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퇴계는 그해 12월 20여년 연하의 아들같은 후배에게 편지를 보냈다. 둘 사이의 첫 서신교환이었다. 그 뒤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동안 두 사람은 10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눴다.
김영두씨(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편역한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는 성리학의 거두 퇴계와 젊은 후배 유학자 고봉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500여년 전의 서한집이다. 기대승의 문집 ‘고봉집’에 정리된 두 사람의 편지를 오고간 날짜에 따라 시간순으로 재배열해 편집했다.
20여년의 나이와 지위의 격차,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대한 정신이 교류한 이 기록은 조선 선비의 전인적 삶에 대한 증거이자 16세기 사림의 정치적 부상에 대한 생생한 현장 보고서로 뜻깊다. 무엇보다 한글 세대 편역자의 유려한 우리말 번역은 편지글 속에 투영된 선비의 맑고 투명한 정신을 21세기 독자에게 온전하게 전달한다. 특히 ‘벼슬과 학문 사이에서’ ‘시작하고 물러나는 일의 어려움’ ‘모두들 남을 이기기에만 힘을 쓰고’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 등 원문에 없는 소제목은 편지의 핵심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관직 없는 지방 선달에게 보낸 퇴계의 편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에서 볼 수 있듯 논쟁의 와중에 보여준 대학자의 학문적 겸양은 읽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고봉은 이후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이조정랑,성균과대사성 등 요직을 거치게 되지만 퇴계와 첫 만남을 가졌을 때만 해도 과거에 응시하는 풋내기 시골 선비. 그래도 퇴계는 될성부른 후학의 곧은 정신을 한점 편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들었습니다. 그대의 논박을 듣고 전에 말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보았습니다…이처럼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왕구령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고인(古人)이 잘못 합쳐져 극(克)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그대에게서 듣고 지난날의 의심이 곧 풀렸습니다. 처음 만나면서부터 견문이 좁은 제가 박식한 그대에게서 도움받은 것이 많았습니다”
질세라 후배는 이렇게 답신을 보냈다. “선생님께서 고치신 설을 연구해보면 미심쩍은 것이 확 풀리는 것 같습니다…뵙고서 가르침 받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오간 편지의 상당수는 학자의 정치 참여에 대한 두 사람의 고민으로 채워져있다. 벼슬길을 앞두고 고봉은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입니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어떻습니까. 하나하나 살펴서 비판해 주시기 바랍니다”
퇴계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나라의 선비 중 뜻을 가지고 도의를 좇은 사람들 거의가 세상의 환란에 걸린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땅이 좁고 인심이 박한 까닭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들 스스로를 위한 계획이 미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시대를 헤아리지도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시대와 맞지 않을 때에는 한 오라기도 바깥 일에 관여하지 말고 반드시 한직을 빌거나 물러나길 꾀하면서 학문에 뜻을 모아야 합니다”
학문을 쌓는 일이 양명(揚名)보다 앞서야 함을 강조한 이 말은 벼슬함에 있어서 학문의 깊이가 왜 중요한지를 선비의 진퇴(進退)와 연결해 명쾌하게 해명한다. 붕당과 파벌이 난무하는 정치 격변기의 조선 조정에서 학문적 순결을 고수하고자 했던 두 선비의 내적 투쟁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 학문쯤은 쉽사리 구부릴 줄 아는 우리 시대 ‘해바라기 학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 학문과 정치의 가파른 줄타기는 오늘날에도 첨예한 논쟁거리니까.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 등 오간 글의 내용은 만만치 않지만 편지글 형식이라는 점이 일반 독자를 편안하게 한다. 그 시대 선비들에게 편지는 안부를 묻는 인사장 이상이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편지 논쟁에서 엿볼 수 있듯 서간은 학자들에게 학문적 논쟁의 터전이자 자기 반성을 유도하는 성찰의 장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대화체의 편지를 통해 선비의 삶과 일상,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편역자인 김영두씨는 “퇴계와 고봉은 16세기 사림의 정치적 부상을 의식하고 있었고 이것이 학자의 정치 참여에 대한 고민으로 표출된 것 같다”며 “두 선비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시대적 변화와 유교적 질서의 정립,조선 성리학의 성립 과정 등을 읽을 수 있다”고 서한집의 의미를 평가했다.
퇴계 이황은 독학으로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쌓은 조선 최고의 유학자,고봉 기대승은 약관의 나이에 성리학의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은 천재였다. 이 둘 사이의 편지 중 사단칠정론 관련 부분은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논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 국민일보 책과길 이영미 기자 (2003년 2월 14일 금요일)
나이를 초월한 두 영혼의 아름다운 만남
한 마디로 너무나 좋은 책이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왕복 서한집. 조선조의 걸출한 인물이며, 저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의 주역들이 주고 받은 편지가 이제야 일반인에게 공개되는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이들의 편지는 철학이나 국문학 관계자들의 연구 논문에서나 인용될 뿐,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소개된 적은 거의 없었다.
책을 펼치니 화면이 단정하고 편안하다. 맨 앞으로 가서 목차를 살핀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 중에서 학문적인 것을 제외한 편지들이 1부를 이루고 학문적인 쟁점을 다룬 것은 2부에 실었다. 분량은 1부가 2/3, 2부가 1/3이다. 목차만 살펴도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는지 보인다.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 쯤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에 있던 58세의 이황과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한 32살의 청년 기대승이 이처럼 나이와 공간적 한계를 넘어 13년간이나 깊은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롭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한시의 한 구절 같은 목차의 소제목들을 지나 본문으로 접어든다. 깔끔한 편집에 군데군데 붉은 색 잉크가 포인트를 이루고 있다. 각주를 표시한 숫자와 본문 끝에 찍은 도장이 붉은 색이다. 사진에 조예가 깊은 편집자가 특별히 붉은 색 잉크를 써서 화면에 포인트를 주었다한다. 매력적이다.
드디어 첫 번째 편지, 편지의 제목은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라 하였다. 본문 끝에 퇴계의 도장이 찍혀있으니 퇴계의 편지다. 기대승이 과거에 급제한 그 해 겨울에 보낸 편지다. 자기보다 나이가 26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이토록 겸손하고 삼가하는 문장을 쓴 퇴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장에서 고귀한 품격이 느껴진다. 게다가 번역 또한 참으로 빼어나다. 번역자가 얼마나 깊은 애정과 존경을 담아 번역했는지 독자에게까지 전해지는 그러한 번역이다. 방정하되 부드럽고 유장하되 흐트러짐이 없다.
1부는 5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연대순에 따랐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의 감회에서부터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처세의 어려움, 시에 대한 감상, 관직과 벼슬에 대한 생각, 질병과 운명, 귀향과 죽음 등 온갖 주제에 대해 서로의 심중을 털어놓는다. <깊은 물과 높은 골짜기에 임한듯> 조심하는가 하면 <이별의 정이 꿈결인 듯 되살아나>아쉬워한다. 2부는 학문을 논한 편지들로서 그 유명한 사단칠정에 대한 논변이나, 태극의 개념, 상례와 제례, 기타 왕실의 전례 등을 논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갈명을 실었다. 책 뒤에는 연표와 두 사람에 대한 소개도 들어있다.
이 책은 파묻혀있던 옛 문헌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어 출간 의의가 크고, 내용이 담고 있는 뜻이 높아 배울 바가 많다. 더불어 인간의 만남이란 살과 살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의 만남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어 또한 값지다. 인터넷 서점 편집자는 하루에 수십 권의 책에 치어 살지만 이런 책을 만나는 기쁨에 행복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봉이 퇴계에게 처세와 공부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저는 늘 말하기를 “처세가 어려운 경우 나는 내 배움이 완전하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다. 내 배움이 만약 완전하다면 반드시 처세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했습니다.
--- p. 29
퇴계가 고봉에게 처세와 공부의 어려움에 대한 고봉의 물음에 답하며
이른바 미진했다 함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을 높이고, 시대를 헤아리지 못했으면서 세상을 일구는 데에 용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까닭이니, 큰 이름을 걸고 큰 일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 p.34
퇴계가 고봉에게 술을 굳게 다스리라 이르며
세상 사람들은 제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서 잘못 천거했다고 다투어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잘못 천거했다는 뉘우침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 같이 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대가 평생 뛰어난 재주를 마구 써 버리고 방탕한 습관에 묶이며, 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놀이와 방종에 빠져서, 마침내 성현의 세계와 수만리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이는 곧 세상 사람들의 공격이 진실로 사람을 제대로 안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비록 잘못 천거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해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 p. 306
고봉이 퇴계의 술을 굳게 다스리라는 충고에 답하며
제가 세상을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본다고 하는 말을 들으셨다는데, 저는 그런 마음이 없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때에 기운을 가라앉히지 못해 남들의 험담을 불러 일으켰으니, 참으로 아프게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치우친 성품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을 삼가는 데 모자라고 몸을 단속하는 데 소홀한 병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평소에 스스로 알고 있던 것이라 늘 경계하고 반성했음에도 그런 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뿌리가 깊고 두텁지 못한 까닭에, 일이 있을 때마다 드러나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록 뿌리가 얕지만 그 위에 노력을 더한다면 아마 조금은 나아질 것입니다.
술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근래에 병이 잦았기 때문에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을 기르고 덕德을 기르는 데 모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로 굳게 절제하여 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p. 317
진실한 공부를 방해하는 세 가지
명언에게 답합니다.1-18 퇴계가 고봉에게
구경서具景瑞1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전해 준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지난해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상황이 잘 갖추어져 있어, 먼 곳에 막혀있어 답답했던 마음이 얼음 녹고 안개 걷히는 것보다 더 시원하게 풀렸습니다.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산간 벽지에 살고 있어서 서울 소식을 듣는 경우가 드물어, 그사이 고향에 내려갔다가 병으로 사직한 것과 명을 받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 일 같은 곡절을 모두 알지 못했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따라서 한번 시험하려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분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벼슬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고, 오늘날의 사람이 옛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경력을 쌓으면 더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늙고 미천한 저는 병으로 인해 한가히 지내고 있으니, 임금의 은혜가 하늘과 같습니다. 다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책이 지금까지 해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봄 소명을 받았을 때 사직을 청한 뒤로는 감히 다시 사직을 청하지 못했으니, 스스로의 마음만 불안할 뿐 아니라, 듣자니 여론도 사직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여론이 매우 당연하지만 지난날에 사직으로 인해 낭패를 보았기 때문에 더욱 움츠리고 조심되어 감히 사직의 뜻을 밝히지 못하고,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의리에도 맞지 않고 염치도 모르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지난 겨울 자중子中이 제게 왔을 때, 그대가 제 편지에 답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이미 말했습니다. 말재주만으로 경쟁하다시피 하는 것은 참으로 무익하고, 진실한 공부는 매번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다가 말다가 하는 잘못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기질과 습관의 치우침, 물욕의 가림, 세상사의 구속, 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산중이라서 물욕의 가림과 세상사의 구속은 적지만, 치우친 기질과 습관은 바로잡기 어려워, 뜰 앞을 서성이면서 매번 강직한 친구의 도움 받기를 생각하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대의 편지를 받으니 마치 큰 보물을 얻은 것 같아, 펴서 읽어 보고는 깊이 감복한 나머지, 늙고 혼미하다는 이유로 감히 스스로를 포기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그대도 지난날 스스로 방종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에 와서 사람들이 그대의 풍모를 상상하고 흠모하기를 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부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다 하여, 마음속으로 너무 근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내 주신 별지는 저의 어리석음을 많이 깨우쳐 주니, 천하의 서적을 다 읽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우 다행입니다.
경서가 돌아가는 길에 이 글을 부칩니다. 이만 줄이오니 살펴 주시기를 빕니다. 삼가 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