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면의 지명 유래 | | 여주군 1읍(邑) 10면(面)의 하나, 본래 천령현(川寧縣)의 지역인데, 예종 원년(1469)에 여주목(驪州牧)에 편입되어 직촌(直村)이 되었다가, 그 뒤에 금사면이 되어 전북(箭北), 용담(龍潭),백자(伯子), 상호(上虎),하호(下虎),상품(上品),하품(下品),송현(松峴),소유(巢由),장흥(長興),후동(後洞), 주록(走鹿), 장항(獐項), 도장(道莊), 부곡(釜谷), 궁리(宮里), 이포(梨逋), 외평(外坪), 탄항(灘項), 금사(金沙), 점평(店坪)의 21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흥곡면(興谷面)의 충신동(忠信洞) 일부를 병합하여 전북, 용담, 백자, 하품, 송현, 상호, 소유, 하호, 장흥, 후리, 상품, 주록, 도록, 궁리, 이포, 외평, 금사의 17개리로 개편 관할함. 1989년 4월1일 송현, 상품, 후, 하품, 백자, 용담리를 산북면으로 편입하여 11개리를 관할함. 동쪽은 개군면과 대신면, 남쪽은 흥천면과 이천군 백사면과 신둔면, 서쪽은 산북면, 북쪽은 양평군 강상면에 인접하다. 금사면은 삼국시대 성지매(省知買)로 금사리로 불리우다 통일신라 태종 무열왕7년(서기660)에 술천성으로 개칭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에 기천, 천령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여흥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사면으로 개칭되었다. 금사면은 옛부터 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였으며 특히 남한강 및 관내 하천에서 사금이 많이 채취되어 이에 금사면(金沙面)의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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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절 이포리(梨浦里)
| | ㆍ이포리(梨浦里) (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루터였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배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배나무 이(梨)자와 물가 포(浦)자를 합쳐 이곳을 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는 배개나루, 배나루, 배개 또는 이포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말, 천양, 근정리, 서원, 뒷골이 병합되어 이포리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는 법정리로 분리하여 수구말, 큰말을 1리로, 근정리, 뒷골, 서원을 2리로 나누고 있다. ※이포(梨浦)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1914년 이후이고 원래는 이호(梨湖)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이호(梨湖)로 표기된 것을 자칫 강천면 이호리로 착각하기 쉽다. 강천면 이호(梨湖)의 원래 지명은 배미(梨山)이다. 배는 산(山)을 뜻하는 것인데 한자로 쓰면서 배이(梨)자를 쓰게 되어 유래나 전설에 엉뚱한 배(梨)나 배(舟 나룻배) 등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이곳을 배개(산(山)+나루(津)=배갯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라고 부르고 또는 배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를 배나루(梨津), 배개(山)의 뜻을 이포(梨浦)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옛날 천령(川寧)이 여주로 병합되기 이전 고려 때부터 묵객들의 저서에 으레 시 몇 수식은 올라 있는 곳이다. 다른 지방의 이름 중에 배(梨,舟)자가 붙은 지명이 무수하게 많다. 배말(梨村), 배내(梨川), 배고개(州峴), 배미(梨山), 배안말(村), 배골(舟谷), 배꼬지(梨花), 배다리(舟洞), 배내고개(舟峴)등 이러한 지명은 모두 산(山)과 관계된 지명인데 이(梨)주(舟)자를 붙인 것이다.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시 이호(梨湖)에서 양화(煬花)로 거슬러가면서, 동정 염흥방시 「침류정 사절」, 둔촌 이집의 시, 목은 이색의 시, 백운거사 이규보, 가정이곡, 척약재 김구용외 많은 명인들의 시에 모두 이포(梨逋)가 아니고 이호(梨湖)라고 썼다. 나루터면 으레 모래틉(백사장)변이기 마련인데 배자가 붙은 나루터는 배가 바로산(山)에 닿게 되는 곳이다. ㆍ개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84세)- 이포국민학교앞 갯가에 있는 들 ※개(逋)=강이나 바다에 물이 드나드는 곳 ㆍ곰바위(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이포리 다리 근처에 있는 곰처럼 생긴 바위 ㆍ곰부리(구전자:조계득 84세)-이포리 다리 근처에 있는 모롱이 ※곰(큰)+부리(부랭이, 모퉁이) ㆍ근정리(近汀里)(구전자:이준상외 2명 67세)-천양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금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 ※汀=물가정 ㆍ근정리 고개(近汀里)(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근정리 북쪽에 있는 고개로 현재 지서 앞쪽으로 천양마을과 이어지고 있다. ㆍ기천서원(沂川書院)→모현사 ㆍ김안국 재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모재 김안국을 추향하는 사당 ㆍ대촌(大忖)→큰말 ㆍ뒷골(구전자:조계득 84세, 이준상 79세)- 기천서원 뒤쪽에 있는 마을 ㆍ뒷굴→뒷골 ㆍ뒷-능(구전자:이공희 67세) 수분촌 뒤쪽에 있는 산 ※능(陵)=왕능의 뜻이 아니고 산능선이라는 뜻 ㆍ마상끝- 이포리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말을 놓아 먹였던 곳이라고 함. ※마(큰)+상(산)골(谷) ㆍ말방다리(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리 뒷골에 있는 산으로 병자호란 때 홍명구(洪命구)가 금화(金化)에서 전사하였는데, 말이 그 시체의 머리를 물고 이곳까지 왔다고 함, ※말(큰)+방(귀퉁이)+다리(들)+산(큰모리 고래의 산) ㆍ모현사(慕賢祠)-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 15의 2번지에 있다. 처음에는 마암서원이라 하였는데 조선 선조 13년(1580)에 건축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세워서 인조 3년(1625)에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후 화재로 인하여 터먼 남아 있었던 것을 1877년 4월 김영진씨가 사재를 기울이고 99인의 기금으로 다시 세워 모현사라 하고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외 7인의 명현을 봉안했으며, 봄, 가을로 제향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옛 명현의 덕을 추모하게 하는 곳이다. 모현사의 현판은 서은(西隱) 장홍식(張鴻植)이 새겼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향은 올리는 명현은 다음과 같다.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충공(文忠公) 오리(悟里) 이원익(李元翼) 증영의정(贈領議政) 치제(恥濟) 홍인우(洪仁祐) 문숙공(文潚公) 수몽(守夢) 정엽(鄭燁) 문정공(文靖公) 택당(擇堂) 이식(李植) 충열공(忠列公) 나재(懶齋) 홍명구(洪命?)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ㆍ묘련암(妙蓮庵)- 이포리 수구말 뒤에 있는 암자로 원래의 암자는 폐사되었다. ㆍ박석고개(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천양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로 마을 뒤쪽 새로난 길과 이어진다. ※ 박(받 山)+석(새間) ㆍ배개→이포리(구전자:최병두 78세) ㆍ배개나루→이포리 ㆍ배나루→이포리 ㆍ범사정(泛亭)-금사면 이포리에 세워졌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금사면 이포리에 은거할 때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훼철되었다. ㆍ벼락바위(구전자:이공희외 2명 67세)- 이포 근정리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았던 바위라 하여 벼락바위로 불리우며, 바위가 강 쪽으로 돌출되어 강물이 굽이쳐 흐르며 물살이 빨라 옛 날 이곳을 왕래하던 배들이 종종 부딪쳐서 침몰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벼락은 벼랑의 뜻 ㆍ비석거리→비선거리(구전자:최병두 78세) ㆍ비선거리-이포리 뒷골에 있는 들, 남양 홍씨인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들 ㆍ삼성당(三僊-堂; 여주군지에는 삼선당(三仙堂)으로 표기됨) (구전자:최병두78세)- 금사면 이포리 192번지인 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 세워진 것은 고려말기라고 전해지며 동민을 안녕케하는 수호신으로 모시는 최씨부부와 그의 묘소를 잡아준 나옹선사 및 산신을 제사하는 당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협소한 초옥이었던 것을 주민 오도성이 세웠다가 다시 기와집으로 3칸을 세운 것이 1728년 무신정변 때 소실되었고, 다시 주민이 협력하여 3칸을 새로 세워 1칸은 영정을 봉인하고 2칸은 비워두고 있다. 이 삼선당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말기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영원사로 옮길 때, 수로 뱃길을 이용하려고 배를 구하고자 하자, 최씨가 자기 배에 나옹을 태우고 뱃길을 가는데 배가 바람에 날리듯이 질주하여 최씨가 자세히 보니 청룡과 황룡이 배 밑에서 밀고 끌고 하여 화살처럼 질주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옹선사는 최씨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소원을 물으니 최씨가 일광지를 부탁함에 그 묘자리를 일러주고 먼 훗날 이곳에서 차마 소리가 들리면 후손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약 60년 전에 그 최씨 후손들이 최수만 한사람만 남고 모두 떠났다고 한다. 현재 삼선당 아래 강변의 은행나무는 당시 나옹선사가 지팡이를 심고 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ㆍ새뫼→새매 ※새(가운데 사이)+뫼(山) ※새매앞- 수부촌 뒤쪽의 태봉 밑에 있는 산등성이 ㆍ새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서원 서남쪽에 새로된 마을 ㆍ서원(書院)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천양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기천서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ㆍ성선암(聖禪庵)(구전자:최병두 78세)- 천양 동북쪽에 있는 절로 조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ㆍ소탱이굼치(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큰말(천양)앞에 있는 빨래터로 소가 져 있다고 함. ※ 소탱이= 소댕이, 소덩이(沼가 있는 목) ㆍ수부촌(水夫村)- 뒷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울에 갇혀 있는 외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유래는 아주 먼 옛날 남한강에서 배를 타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수부 말이라고 불리웠으며 또는 수부촌 수구 말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현재 산 아래쪽 마을을 아랫말, 위쪽, 마을을 웃말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며 이포대교가 마을 앞쪽에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ㆍ수구말→수부촌 ※수(물 水)+구지(곶이 튀어나온 곳)=수구지→수곶이 →수구 ㆍ수부말→수부촌 ㆍ술천성지(述川城址) (구전자:최병두 78세)- 금사면 외평리와 이포리 사이에 태봉이라고 부르는 해발 285미터의 산에 있다. 이 성지가 있는 지역은 여주와 병합되기 전에 천령현 구역인데, 이곳은 당초 고구려에서 술천군(성지매)이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여기에 술천성을 쌓고 고구려의 세력을 추방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해 왔다. 한편 백재가 660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된 후 유민들의 반항이 치열했으나 무산되고 663년 고구려 보장왕 때 고구려의 장수 뇌음신이 말갈의 장수 생해와 합세하여 공방전이 생겼으나 신라는 끝내 술천성을 사수하였다. 그 맞은편 대신면 천서리 뒷산에 있는 파사성과는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충분히 교전이 이루어 진 거리라 하겠다. 현재는 산 정상에 토성의 흔적과 일부는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둘레가 커 보인다. 특히 삼국사기에 여주지방의 지명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적 의의가 큰 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ㆍ아랫말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수부말 아래쪽의 마을 ㆍ아랫벌 (구전자:이공희 67세)- 천양 아래쪽에 있는 들 ㆍ여수고개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이포리 수분촌에서 외평리로 넘어가는 산길로 옛날 고개 근처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수(느린머리)→너수→여수 ㆍ옻물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84세)- 이포리 수부말에 있는 약물터로 약수가 옻 오른데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ㆍ우렁바위- 이포 천양마을에서 이포대교로 가는 길 아래 강에 있는 바위로서, 강물이 많을 때면 물에 잠겼다가 강물이 적을 때에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우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우렁= 울림 ㆍ웃말- 수부말 위쪽의 마을 ㆍ육우당(六友堂) (구전자:최병두78세)- 고려 공민왕때의 학자 김구용(1338-1384)이 우거하던 곳이다. 그는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행례사(시신)로 명나라에 들어가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남경으로 압송, 명제의 명령으로 대리로 귀양을 갔다가 여주 영녕현으로 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먼저 친명파로 북원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로 유배된 바 있었다. 석방된 후에 여주 외가에 있으면서 천령에 당을 지었는데 처음에 설(雪), 월(月), 풍(風), 화(花)로 하여 네가지 벗을 삼아 사우당이라 하였다가 강(江)과 산(山)을 더하여 육우당이라 하고 목은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받았다, 이후 어느 시기에 훼철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ㆍ원촌(院村)→서원(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원(院)=옛날 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 ㆍ은행나무 (구전자:최병두78세)- 삼선당 뒤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이포리 나루터 위쪽 강변 암석위에 서 있으며 지상에서 2미터까지 썩은 흠이 있고 수목의 상단은 고사(枯死) 되어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높이 35미터, 나무 둘레가 5.8미터로서 고려시대 나옹선서가 이 나무위의 산으로 오르면서 바위틈에 꽂아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천령 최씨의 시조 묘와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무속에는 귀달린 뱀이 산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ㆍ이문안(里門) (구전자:이준사외 2명79세)- 천양 북쪽 수부촌 방향에 있는 마을로 과거에 큰 대가집이 있어 문이 마을쪽을 향해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그 문밖으로 돌아 다녔다고 한다. ㆍ이포(梨逋)→이포리 (구전자:최병두 78세) ㆍ이포나루터(梨逋)- 이포 천양 앞에 있는 나루터로 대신면 천서리로 건너가는 배가 다니는 곳. ㆍ이포느티나무- 이포리 281번지에 있는 느티나무로 현재 금사 농협 앞쪽 도로변에 있다. 수령(樹令)은 500년, 높이가 20미터, 나무 둘레가 2.8미터로 김창선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지상 1미터 높이에 태와 같은 둘레가 있으며 수간에 길게 흠이 나있다, 약 500년 전 이씨조선 태조가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을 선정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에 이르러 강변의 은행나무와 함께 꽂아 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ㆍ장터거리 (구전자:이공희외 2명 67세)- 큰말 또는 대-촌으로 부르기도 하며 과거 이포장이 열렸던 곳으로 마을의 중심지였다. ㆍ절고개 (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수부말에서 외평리 묘련암으로 가는 고개 ㆍ제비다리(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이포 2리에 속하는 복지회관에서 천양마을로 가는 방향에 있는 다리, 현재는 새 도로가 나있어 없어졌으며 주변에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제비= 좁은 ㆍ차말(次馬)-천양에서 성선암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빨래터 ※차(찬물)+말(마을) ㆍ천령(川寧) →천양 (구전자:최병두 78세) ※처음 지명은 성지 매로서 이후 술천, 기천, 천령의 순으로 변했다. ㆍ천양(川陽, 天陽)- 이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그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무열왕 663년에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곳에 술천성을 쌓고 지방군단인 골내근정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는 천령현을 두었다는 기록을 보아 천양에는 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마을을 천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천령이 변음되어 천양으로 불리운 것 같다. ㆍ침벽루(枕碧樓)(구전자:최병두78세)- 이포리 삼선당 옆에 세워진 누각으로 1994년에 세움. 옛날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남한강을 내다보며 훌륭한 시와 문장을 지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목선을 타고 오는 왜병들과 맞서 이곳의 의병들이 싸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이포리에 거주하고 있는 뜻있는 인사들에 이해 과거의 누각터에 새로 세우게 된 것이다. ㆍ큰말 (구전자:조계득외2명 84세)-대촌, 장터거리라고도 불리우며 천양의 가장 큰 마을로 시장이 있었던 자리 ㆍ탑선대 (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장터 뒤쪽 산에 있는 고목아래 탑이 있었던 자리 ㆍ태봉(산)- 수부촌 묘련암 뒷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옛날 왕자의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ㆍ폄차정-금사면 이포리에 있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점동면 원부리에 은거할 때 세워진 것으로 훗날 페허가 되었다. ㆍ후곡(後谷)→뒷굴 (구전자:조계득외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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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절 궁리(宮里)
| | ㆍ궁리(宮里)(구전자:최병두 78세)- 궁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 궁말, 발림, 뒤밀의 3개 자연부락으로 각기 불리워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궁리로 병합되었다. ※궁말 참조 ㆍ갓모바위(바위)(구전자:신정호 60세)- 궁리에 있는 바위, 갓모(갈모)처럼 생겼음 ㆍ계장천(桂章川) (구전자:오우석 73세)- 궁말 남쪽에 있는 내 ㆍ골우물 (구전자:신선호65세)- 궁말 마을 안쪽에 있는 우물로 몹시 차서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ㆍ관바위→ 갓모- 바위(구전자;신정호 60세) ㆍ구장터(舊場)(구전자:오석우 73세)- 발림 동남쪽에 위치한 들, 옛 장터였음. ㆍ궁리석탑(宮里石塔) (구전자:신정호 60세)- 궁말 마을 앞밭에 있다. 여러 곳에 흩어진 탑 조각들을 모아서 만들었는데 기단부와 초기탑신(初期塔身)만 완전하고 그 이상은 파괴된 것으로 옥개석(屋蓋石) 2개와 보주(寶珠)를 올려 만들었다. 지금은 석탑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과거 수년전에는 기와조각 및 쇠 조각 등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ㆍ궁말 (구전자:최병두78세)-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궁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궁말 이라고 부른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22년(백제 온 조왕 40년)에 말 군이 군사를 일으켜 술천성述川城)을 침범했고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무열왕 7년(서기 660년, 백제 의자왕 20년)에는 백제를 멸하고 지금의 금사면에 술천성을 쌓고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는 전초기지로 삼았으며, 그 후 신라의 지방군단인 10정 중 골내근정(骨乃斤停)을 여주에 진수하게 했고 경덕왕 16년(서기757년)금사면에 천령현을 두었다는 기록을 보아 성이 있고 군단이 주둔했으며 현령이 상주하기 위해 치소와 관가를 두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궁(宮 큰)+말(마을)=큰 동네 ㆍ궁말탑→궁리석탑 ㆍ궁이→궁리 ㆍ당재(堂一) (구전자:오석우 73센)- 궁말 북쪽에 있었던 산 고개로, 옛날 마을의 안녕을 위래 제사를 지냈었던 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당=山 ㆍ당제골- 당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 ㆍ더미고개 (구전자:신선호 65세)- 굴이 뒤밀 마을에서 하호리로 이어지는 고개 ※더미고개=고개너머 또있는 고개 ㆍ더미고개→더미-고개 ㆍ돌터뿌리- 궁말에서 도곡리 방향의 길에 있는 모롱이로 길가로 구부러져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두레우물- 궁말에 우물로 겨울철에도 온수가 나와 동네 주민들이 허드렛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함, ※두레=깊은 또는 여러 사람이 쓰는 ㆍ뒤밀고개- 궁리 뒤밀에서 이포리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 ㆍ맷돌바위(오석우 73세)- 발림 마을 위치한 맷돌같이 생긴 바위 ㆍ물푸레나무(구전자:신선호 65세)- 궁말 뒤쪽에 있는 보호수 ㆍ발림(鉢林)- 궁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발림은 바릿대 발(鉢)자와 수풀림(林)자를 쓰는데 아주 먼 옛날에 이곳에 발이 굉장히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하여 발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발=밝(양지, 남향의 뜻) ㆍ범아굴- 범 이빨처럼 생긴 굴 ㆍ사무바위→ 갓무-바위 ㆍ섬바위- 발림 북서쪽에 있는 바위로 볏섬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아랫말 궁말의 아래쪽 마을 ㆍ아랫보들- 궁말 남쪽에 있는 들로 하천부근 보가 있는 들 ㆍ웃말- 궁말 위쪽에 있는 마을 ㆍ여꾸섬(구전자:오석우73세)- 궁리에 있는 들. 여뀌가 많았음 ㆍ연못들- 궁말탑 옆쪽에 있는 들, 연못이 있었음. ㆍ옥곡(獄谷)(구전자:신정호60세)- 궁리에 있는 골짜기로 옥 터가 있었다고 함. ※옥= 옥은(오그러든) ㆍ옥골→옥-곡 ㆍ옷봇들(구전자:신선호 65세)-궁말 남쪽에 있는 들로 하천 부근 보가 있는 들. ㆍ장군석(구전자:신정호 60세)- 궁말 뒤쪽에 있는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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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절 도곡리(道谷里)
| | ㆍ도곡리(道谷里) (구전자:한준섭외 2명70세)- 본래 여주군 금사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장(道場)리와 부곡(釜谷)리를 병합하여 도곡리라고 함. 현재 도장골과 웃-가마실, 아랫-가마실의 3개 자연부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ㆍ가마실(구전자:박승만 68세)- 도곡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 지형이 가마처럼 생겼다고 함.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고려 대 몽고군과 싸우던 고려군이 이곳에 큰 가마솥을 걸고 밥을 지었다고 하여 가마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가마=큰(大) ㆍ거무레봉(구전자:한준섭 70세)- 가마실 윗쪽에 있는 산. 거미줄처럼 생겼다고 함. ※거무=검(큰: 大) ㆍ김때골- 도곡리 아랫 가마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점대가 있었다고 하며 위쪽 골을 웃- 김때골, 아래쪽 골짜기를 아랫- 김때골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김(검,큰)+대(터:垈)+골(谷) ㆍ능골(구전자:이광수외 2명 65세)- 도곡리에 있는 골짜기로 웃가마실 뒤쪽에 있다. ※능(언덕안)+골(谷) ㆍ도매기- 도곡리에 있는 골짜기 ※도매기=도막이=가로막은 ㆍ도장골(구전자:박승만외 2명 68세)- 가마실 서쪽에 있는 마을, 옛날 마을 고개에 장승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름길로 한양을 갈 때는 이곳을 통과하는데 장승이 길을 안내하였다고 하여 도장골 이라고 불렀다 한다. ※절이 있는 골짜기로 도량(道場)이 있었던 경우도 있다. ㆍ도장골숲- 도장골 뒤에 있는 숲 ㆍ도장-동(道壯洞)→도장-골 ㆍ독부리봉(구전자:한이교86세)- 도곡리 도장골 뒤쪽에 있는 산 ※독(石)+부리(甬) ㆍ돌터뿌리- 도곡리에 있는 모롱이로 바위가 있음. ㆍ마차실(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도곡리에 있는 골짜기로 웃가마실 앞쪽에 위치한다. ㆍ마차실고개- 마차실 위에 있는 고개 ※마(山)+차(山)+실(마을) ㆍ무당바위(구전자:이광수외2명 65세)- 도장골 뒤쪽에 있는 바위, 옛날 밤에 그곳을 지나다닐 때 무당의 징소리가 났었다하여 부르던 이름. ㆍ미륵불(彌勒佛)(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산6번지에 있다. 동리에서는 새낭골 미륵불이라고 부르며 연꽃무늬받침돌에 책상다리를 하고 북쪽을 향하여 앉아 있으며 곱슬머리에 귀가 어깨까지 내려왔으며, 8면으로 된 받침돌의 6면에는 보살상(菩薩像)이 있다. 둘레는 1.4미터, 높이는 1.8미터로 노천에 방치되어 있으며, 조각의 일부는 비바람에 마멸도어 있다. ※경기도 지정 문화재 ㆍ부곡(釜谷)(구전자:박승만68세)- 가마실의 한자표기 또는 일제시대 때의 지명표기로 추정 ※큰 골이란 뜻 ㆍ사당골- 웃가마실 뒤쪽에 있는 골짜기 ㆍ산제장골- 웃가마실 앞산 골짜기로 옛날 도곡리 주민들이 마을 번영을 위해 산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ㆍ새비터골(구전자:이광수외 2명 65세)- 웃가마실에서 도장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 ※새(間)+비(비탈) ㆍ새낭골(구전자:박승만외 2명68세)- 도곡리 아랫가마실에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미륵불이 있어 옛날 절이 있었던 골짜기로 추측된다. ※새(塞)+내(內)+안(內)+골(谷)= (입구가 막힌 듯이 아늑한 안골) ㆍ새낭골미륵불(道谷里彌勒佛)(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도곡리 새낭골에 있는 미륵불 ㆍ시랏고개(구전자:이광수외2명 65세)- 호미기에서 흥천면 내사리로 넘어가는 고개 ※내사리 참조 ㆍ신미-가마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신(神)+미(山)+골(谷) ㆍ아랫가마실(구전자:박승만 68세)- 가마실 아래쪽 마을 ※가마실 참조 ㆍ아랫김때골(구전자:한준서외2명 70세)- 김때골의 아래쪽 골짜기 ㆍ아랫말(구전자:박승만외2명68세)- 도장골의 아래쪽 마을로 청룡월이라고 부르기도 함. ㆍ오양골(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도곡리 웃가마실 북동쪽에 있는 골짜기 ※외양(畏養:마소를 기르는)+골(谷) ㆍ웃가마실(구전자:박승만외 68세)- 가마실 위쪽의 마을 ㆍ웃김때골- 김때골의 위쪽 골짜기 ㆍ웃대골- 도곡리 도장골에 있는 골짜기로 한씨의 조상 산소가 있다. ㆍ웃말- 도장골 위쪽에 있는 마을 ㆍ작은도매기- 도매기의 작은 골짜기 ※도매기골 참조 ㆍ장승거리(구전자:이광수외2명 65세)- 웃가마실 입구 쪽에 있는 길로 느티나무가 길옆에 2그루 서있는데 그 자리에 옛날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ㆍ장화사고개(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도장골 위쪽에 있는 고개로 옛날 석불상이 있었다고 한다. ㆍ장화사지(절터)-옛날 큰 절이 있었던 곳으로 절에서 버린 쌀 뜨물이 이포 강까지 떠내려갔다고 한다. ㆍ장흥고개(구전자:한이교86세)- 도장골에서 장흥리로 넘어가는 고개 ㆍ정가골- 도곡리 도장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정가가 모여 살았던 곳이라 한다. ※정가(亭街= 정자가 있던 거리)+골(谷) ㆍ주룩곡(구전자:한준섭외2명70세)- 도곡리 웃가마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주록(主=산중에 으쯤)+골(谷) ㆍ중간말(구전자:박승만외2명68세)- 도장골의 중간 마을 ㆍ청룡월(구전자:한이교86세)- 도장골 입구에 잇는 마을로 모롱이가 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일명 ?청룡-모룡이?이라고도 부른다. ㆍ큰골(구전자:박승만외2명68세)- 가마실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ㆍ팥대골(구전자:한이교86세)- 도장골의 웃대골 옆에 있는 골짜기 ㆍ호미기(구전자:한이교외1명 86세)- 도장골 남쪽에 있는 마을, 본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골짜기에 인가가 없어 외부에서 보기에는 집이 없는 것으로 보여 후미진 곳이라고 하던 것이 변음 되어 호매기로 불리워지고 있다. ㆍ호매기(마을)→호미기(구전자:한준섭외2명 70세) ㆍ홍보골(구전자:한이교86세)- 도곡리 도장골 뒤쪽에 있는 골짜기 ㆍ회목이(구전자:한준섭외2명70세)- 호미기 마을의 다른 이름으로 지세가 목이 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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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절 장흥리 (長興里)
| | ㆍ장흥리(長興里) (구전자:변동혁외1명70세) 옛날에는 지금의 금사면인 장흥리 일대를 장흥동(長興洞)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마을에는 인가가 없고, 장흥사(長興寺)라는 큰 절만 있었다고 한다. 이 절은 황창부위 변공(邊公)광보의 묘를 쓰게 됨에 따라 어명으로 원찰(願刹)이 되었었다. 고 전해지며 장흥사가 있었던 마을이라 장흥골 또는 장흥동, 장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흥리로 하였다. ※고려시대 목은 이색의 금사팔영시중에 장흥에서 알밤을 줍는다는 시가 있다. 장흥습율(長興拾栗) 추풍초슬슬(秋風初瑟瑟) 율수점루루(栗樹漸壘壘) 독왕오증기(獨往吾曾記) 금환낙지시(金丸落地時) 가을바람 우스스 밤은누룻누룻 나홀로 기억하리 알밧이 떨어질 때를 ㆍ가는글- 장흥리에 있는 골짜기 ㆍ낭성배들- 장흥마을 입구에 있는 들 ※남산보(洑)들→남상봇들→남성배들 ㆍ느티나무 골(구전자:이용철외1명61세)-장흥리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마을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느티나무가 많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현재는 골프장 숙소가 그곳에 들어서서 마을은 없어지고 말았다. ㆍ대람미골=장흥리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 ※다락미= 언덕진 산 ㆍ대월암(구전자:변동혁외1명 70세)- 장흥리 뒤쪽 상두산 정상에 있는 암사 ㆍ대호람→큰-골 ㆍ도매기골- 장흥리에서 주록리 방향의 저수지 북쪽 골짜기 ※도매기= 되막힌= 되막은 ㆍ동해막- 장흥저수지 위쪽에 있는 산 ㆍ뒴방고개골- 장흥마을 남쪽에 있는 산골짜기 ㆍ뒷골(구전자:이용철 61세)- 장흥 마을 뒤쪽에 있는 산 ㆍ뒷골고개-뒷골 북쪽에 있는 고개 ㆍ매골- 장흥리에 있는 골짜기 ※매(뫼산) ㆍ문앞골(구전자:변동혁70세)- 장흥 마을 서쪽에 있는 들 ㆍ배바위-장흥리에 있는 바위로 배처럼 생겼음. ※배(배알→비탈) ㆍ배바위고개- 배바위가 있는 고개 ㆍ사-곡(寺谷)→절골 ㆍ사기막골- 장흥마을 앞 컨트리클럽 옆 골짜기로 과거에 사기를 제작했던 흔적이 있어 붙여진 명칭 ※사(새間)+기(터 垈)+막(막힌) ㆍ산수골(구전자:이용철: 61세)-장흥리에 있는 골짜기 ㆍ살구쟁이(구전자:변동혁외1명70세)- 장흥리에서 도곡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로서 살구나무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 또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살구꽃의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살피언덕(경계 골짜기) ㆍ살구쟁이고개- 살구쟁이 뒤에 있는 고개 ※살피 언덕 고개(경계지점의 능선) ㆍ상두산(구전자:약처암 스님)- 장흥리 뒤쪽에 있는 제일 높은 산으로 산모양이 코끼리 머리형상을 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일 곡대기(상투)→상두 ㆍ소머리산→ 우두산 ※작은 머리산=주위에 더 높은 산이 있거나 제일 높은 산 내룡에서 다시 솟아 다음가게 높은 산 ㆍ쇠머리 음달골- 장흥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소머리산 참조 ㆍ수양버들께 (구전자:변동혁 70세)- 장흥리 입구에 있는 들로서 수양버들이 있어 붙여진 이름 ㆍ승선암골- 장흥리 상두산 정사인 대월암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로 승선암이 있었다. ㆍ앞골- 장흥마을 앞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현재는 이포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다. ㆍ앞들(구전자:변동혁70)- 장흥마을 입구에 있는 들 ㆍ약바위(구전자:약천암 스님)- 절골 약천암 산신각 뒤에 있는 바위로 약수가 나오고 있다. ㆍ약바골(구전자:이용철 61세)- 약바위가 있는 골짜기 ㆍ약천암(藥泉庵)(구전자:약천암스님)- 장흥사터 약 500미터 위에 있는 절로 장흥사를 철거할 때 은신처로 지어진 것으로 보며 현재 비구니 스님 한분이 주석하고 있다. 약천암이라는 이름은 절 주변에 유명한 약수가 있어 유래되었다고 하며 법당에는 약 700년쯤 되는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데 장흥사에 있었던 것을 이 암자로 모신 것으로 보고 있어 규모와 연대로 볼 때 문화재로의 가치가 큰 것으로 본다. 또한 이 불상 재료는 곱돌(화석)로 되어 특징을 더하나 지금은 도금을 하여 원형을 감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ㆍ양달말(구전자:변동혁외1명70세)- 장흥리 위쪽마을로 양자가 드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ㆍ양산 (구전자:약천암스님)-장흥리 뒷산 ㆍ어둠골(구전자:변동혁외1명70세)- 장흥리 음달말에 있는 골짜기로 나무가 우거져 항시 어두컴컴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오리나무밑- 장흥리 현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로 과거에는 오리나무가 많아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ㆍ용강고개(구전자:이용철 61세)- 장흥리에 있는 고개 ※용(산줄기)+강(갈라진 뜻인데 음만을 취해서 한자로 갈경(耕)자를 쓴 것 ㆍ여나무골- 장흥마을 입구에 있는 골짜기 ※여(여기, 이)+나무(넘어) ㆍ우두산(구전자:약천암스님)- 장흥 저수지 앞쪽에 있는 산으로 소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소머리산 참조 . 음달말 (구전자: 변동혁외 1명 70세) - 자흥리 아래쪽 마을로 음달이 지는 지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ㆍ장흥→장흥리 ㆍ장흥골→장흥리 ㆍ장흥동(長興洞)→장흥리 ㆍ장흥사터(長興寺攄)- 금사면 장흥리 상두산내 남쪽 골짜기인 절골에 옛 절터가 있다. 창건과 폐사의 연유는 알수 없고 현재 경작지가 되어있는 절터 안에 주춧돌과 장대석이 일부 산재되어 있다. (현재 뜰돌의 축대는 길게 남아 있음) 구전하는 바에 의하면 절골에는 비구승이 거쳐하는 장흥사가 있었고 승선암쪽에는 비구니(여승)들이 거쳐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장흥사는 승려 300명이 넘는 대사찰로 끼니때 쌀 씻은 뜸물이 절밑 10까지 흘러내렸다고 하며 흥천면 읍드리(현재 효지리)이대가 모두 장흥사의 불양답으로 약 3000석 이상을 수확하였다고 한다. 또한 장흥사는 효종대에 이르러 황창부위 변광보(邊光輔)의 원찰로 사용하면서 번창하였다고 하는데 바로 100미터 가량 떨어진 앞산 능선에 그의 묘가 경순군주(소현세자의 막내딸)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그러나 묘지 주변이 시끄럽다하여 어명으로 정리되면서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흥망성쇠의 덧없음을 알려주고 있다. 절골에는 부도를 안치했던 받침돌이 훼손된 채 남아있으며 부도는 현재 일본 우에노(上野) 공원에 남아 있는데 표면에 장흥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장흥사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ㆍ장흥사지 우물터- 장흥사지 앞에 있는 우물로 직경이 1미터 정도이다. 이 우물은 장흥리에 간이 상수도가 생기기 전에 장흥리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였던 우물로 동내에 부정한 일이 있을 때에는 우물물이 뒤집힌다고 한다. 때문에 상여가 이 우물물 앞을 지날 때에는 가마니나 거적으로 이 우물을 덮는다고 하며 또 겨울에 우물이 마르면 그해 여름에 가물어서 농민들이 물 걱정을 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ㆍ장흥저수지: 금사면 주록리에서 발원하여 이포 컨트리클럽 부근까지 형성된 저수지 ㆍ절골(구전자:이용철 61세)- 상두상 정상인 대월암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 ㆍ주어천- 장흥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 ※주어사지 ㆍ중서랑골(燒僧谷)(구전자:약청암스님)- 장흥마을에서 6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현재는 이포컨트리 클럽이 있는 자리로서 옛날 장흥사 승려들이 죽으면 화장하던 곳이다. 그곳에는 가로 150미터, 새로60미터 정도의 다듬은 돌이 있는데 이 돌 위에서 다비식을 갖었다고 한다. 특히 이 돌은 주변의 돌과 달라 외부에서 가져와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그 명칭과 함께 다비장소로 확신을 갖게 한다. ※중사랑골 참조 ㆍ중선암골→ 승선암-골 ㆍ참나무쟁이(구전자:이용철61세)- 장흥리 마을 아래에 있는 들로 예전에 참나무 정자가 많았다고 함. ㆍ큰골(구전자:변동혁 70세)- 장흥리 서쪽에 있는 큰 골짜기 ㆍ황창부위 변광보의 묘(邊光輔墓)-변광보는 소현세자 막내딸 경순군주(慶順郡主)의 부군이다. 경순군주는 어렸을 때 소현세자가 세상을 뜨게되자 효종이 친히 기르고 가르쳤으며 친 딸 과같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황창부위에게 하가면서 세상을 뜨게 되었고, 황창부위는 국법상 재취가 불가능하여 홀로 여생을 살다가 세상을 뜨게 되어 지금 묘지에 장례를 지낼 때 경순군주도 이장하여 합장 하였다. 효종이 특명으로 경순군주의 불쌍함을 애도하여 장흥사로 하여금 그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으니 이로서 원찰이 되었던 것이다. ㆍ흔시루터- 장흥리 앞 골프장 입구에 위치하던 장소로 옛날 주민들이 고사떡을 놓았덛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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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절 주록리 (走鹿里)
| | ㆍ주록리(走鹿里)(구전자:한상설 81세)- 본래 여주군 금사면 지역으로 아주 옛날에는 인가가 적었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을 주록거리라고 불렀는데 “주록”이란 말은 사슴이 뛰어 논다는 뜻으로 그 지역을 주록거리라고 부르다가 마을이 형성되면서 주록리가 되었다고 한다. ※노루목 참조 ㆍ갓모바위- 주록리에 있는 갓모(갈모)처럼 생겼다. ㆍ골민봉- 주록리 안산 동남쪽에 있는 산 고려 제 31대 공민 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산에서 하룻밤을 지냈다고 한다. ㆍ굴바위- 안산에 있는 바위로 호랑이 굴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긴잔등- 노루목 동북쪽에 있는 긴 등성이 ㆍ낙수재고개- 주록리에 있는 고개 ㆍ낮은 메기고개-주록리 안산에 있는 고개 ※메기= 매기(막는다는 막이의 방언) 보(洑)= 물막이(물매기), 칸막이(칸매기) .내신 → 안산(구전자: 한상직 78세) .너구리바위 (구전자: 한상설 81세)- 안산에 있는 바위로 너구리굴이 많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노루목 -노루목은 주록거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인가가 별로없고 노루들이 사냥꾼들에 의해 쫓기면 항상 이곳에서 만났다고 하여 노루목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①노루(날, 산줄기)+목(목쟁이, 건늘목, 곳, 목에서 지킨다)=산낱목 ②느린목→느루목→노루목 (가파르지 않은 완만한 경사가 길게 느러진 곳) ㆍ농바위(구전자:한상직78세)- 주록리 뒷산에 있는 바위로 농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농바위골- 농바위가 있는 산골짜기 ㆍ농바위산- 농바위가 있는 산 ㆍ느릅저리- 느러진의 뜻 ㆍ느티나무(구전자:한상설81세)-주록거리 마을 길옆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로 나뭇잎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들고 나뭇잎이 적은 해는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다. ㆍ도실- 안산의 웃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승려들이 도를 닦았던 곳이라고 한다. ※도=돌(回廻 돌다) ㆍ독부리산- 주록거리 앞족에 있는 높은 산으로 돌이 많다고 한다. ※독(돌 石)+부리(산부랭이) ㆍ뒷골-고개(구전자:한상직78세)- 노루목에서 후리 뒷골로 넘어가는 고개 ㆍ떨어지기 바위- 주록리 안산에 있는 바위로 두개가 포개어져 떨어질 듯한 모양이라고 함. ㆍ민보타(구전자:한상설81세)- 주록리 안상에 있는 마을 ㆍ백고개(구전자:한산직 78세)- 주록리 안산 입구에 있는 고개로 옛날 도둑이 많이 있어서 백사람이 함께 넘어 다녔다는 고개 ※백=배(山)+고개=산고개 ㆍ뽕나무골-주록거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뽕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ㆍ사실터 고개(구전자:한상설 81세)- 주록리 노루목에서 송현으로 가는 길사이에 있는 고개 ※사실= 가달, 가닥 ㆍ소 잡아먹은 소(구전자:한상직78세)- 주록리에서 장흥저수지 방향에 있는 소로 이곳에서 소를 잡아먹던 자리라고 한다. ㆍ신주바위(구저지:한상설81세)- 안산에 있는 바위로 사당의 신주를 모신 바위하고 한다. ㆍ아랫말- 안산 아래쪽에 있는 마을 ㆍ안가지골- 안산 도실 안쪽에 있는 마을 ㆍ안산- 주록리에서 약1.5키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에는 많은 농가가 살았다고 한다. 주록리 안쪽에 있다고 해서 안산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ㆍ왼골(구전자:한상직78세)-주록리 마을 뒤쪽에 있는 골짜기 ㆍ웃말(구전자:한상설 81세)- 안산 윗쪽의 마을 ㆍ은골→ 왼-골(구전자:한상직 78세) ㆍ입망이골- 주록거리 서북쪽에 있는 산골짜기 ㆍ작은 안자지골(구전자:한상설81세)- 안산 안가지골의 작은 마을 ㆍ장구메기(구전자:한상직 78세)- 주록거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장구(농악기 양끝이 굵고 중간이 가는)+메기(막이) ㆍ장골고개(구전자:한상설 81세)- 안산에 있는 고개 ※장골=잔(작은)+골 ㆍ장항- 노루목의 한자식 표기 ※노루목 참조 ㆍ장항골- 장항 북쪽에 있는 골짜기 ※노루목 참조 ㆍ장화치(長華峙)- 주록리에서 도곡리 도장골로 넘어 가는 고개로 장화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ㆍ정바위(구전자:한상직 78세)- 주골리 안산에 있는 바위로 손 같은 자국이 있는데, 옛날 장수가 손톱으로 누른 것이라고 한다. ※정(頂 정상 정수리) ㆍ주록(走鹿)→주록리 ㆍ주록거리→주록리 ㆍ주예누골(구전자:한상설 81세)- 주록리 안산에 있는 마을 ※주(主)예+녹(鹿) ㆍ큰안가지골(구전자:한상설 81세)- 안상 안가지골의 큰 마을 ㆍ최시형묘소- 최시형(1827-1898)은 조선말 동학의 재2대 교조로서 초명은 경상,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경주이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경전을 완성하였다. 묘는 금사면 주록리 산96-16번지에 소재하고,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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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절 전북리 (箭北里)
| | ㆍ 전북리(箭北里) (구전자:조기행 68세) 전북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 남한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살꼬지, 살뒤, 살띄 또 는 전북으로 불리웠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멀언리를 병합하여 전북리라 하였다. 전북의 유래는 옛날 파사성(대신면 천서리 소재)에서 장수가 화를 쏘면 화살이 이 마을 앞에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화살 전(箭)자를 써서 전북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남쪽에 있는 살띄와 북쪽에 있는 멀언리의 2개 자연부락으로 되어있다. ※①살은(물살)+꼬지(곧이 直) ②살(물살)+띄(허리띠물이 둘려 안은) ③멀(무례:水)+언(안內) 또는 (물:水)+언(堰) 또는 몰(隅)+안(內) ㆍ공마당(구전자;윤세각 66세)-전북리 살띄 아랫말 길건너 강쪽에 있는 들로 겨울에는 공치기를 많이 하여 공마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ㆍ덤바굴- 전북리 살띄 윗쪽에 있는 우측 골짜기 ㆍ덤바위- 전북리 살띄 윗쪽 덤바골에 있는 바위로 더미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덤(더두리의 뜻), 건천에 있는 바위 ㆍ머러니→말언리 (구전자:윤세신 61세) ※몰(隅)+안(內) 또는 물몰(隅)+안(內) ㆍ머러니산(구전자:조기행 68세)- 머러니 서남쪽에 있는 산 ㆍ멀언리(구전자:윤세신 61세)- 이 마을은 남한강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건너 (강 건너) 동네에 앙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오려면 배를 타고 멀리 돌아왔다고 하여 ?멀언?이라고 불렀다 한다. ※멀=몰(隅)+안(內)=몰안마을 멸=물(水)+안(內)=물안동네 ㆍ살꼬지→전북리(구전자:조기행 68세)- 살이 물살인데 살은 화살의 뜻으로 화살전(箭), 화살시(矢), 살았다는 뜻에서 날생(生), 활(活), 쌀로 변음 되어 쌀미(米)자를 쓴 곳도 있다. 전국에 살꼬지, 살띄라는 지명이 많은데 전북리의 살 꼬지는 물살(물)이 직선으로 흐른다는 데서 붙혀진 이름이다. ㆍ살뒤→ 전북리 ㆍ살띄 ①아주 먼 옛날에 망녕든 사람이나 그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보따리를 이곳에 놓고 모여 살았다고 하여 이곳을 ?살데?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이후 ?살데?가 ?살띄?로 바뀌어 부르게 된 것으로 본다. ②옛날 어느 대사가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마을을 보고사람이 살만한 곳이라 하여 이곳을 ?살데? 또는 ?살띄?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이찬도 71세) ※전북리 참조 ㆍ살여울(구전자:윤세각 66세)- 살띄 남동쪽에 있는 한강의 여울로 강물이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강 위쪽의 살여울을 고분여울, 중간에 작은 여울을 소저울, 강아랫쪽의 살여울을 심별여울 이라고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살(물살)+여울 ㆍ살열→ 살-여울 ㆍ삼박굴(구전자:조기행 68세)- 전북리 살띄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삼(산:(山)+박(밖:外) ㆍ아랫말(구전자:윤세신 61세)- 살띄 아래쪽의 마을 ㆍ약수터(구전자:이찬도71세)-살띄 웃말 삼박굴에 있는 약수터로 일명 쌀가마 약수터라 고도 하는데 옛날 다른지방에 있는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이곳 약수터에 와서 물을 마시고 난 치병을 고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ㆍ업바위(구전자:윤세각 66)-포골 윗쪽에는 업바위가 있는데 옛날 동네 청년들이 그곳에 가서 바위구멍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장가가서 첫 아들을 낳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업(엎인)+바위 ㆍ왜재고개(구전자:이찬도 71세)- 살띄마을 아랫말에서 멀언리로 가는 길 언덕으로 사람이 없는 외딴 고개라 하여 왜재고개라고 부름. 또는 일제시대 일본순사(왜경)가 상투를 자르지 않은 동네 청년을 이곳 고개에 잡아 가두었는데 청년이 갑자기 도망을 가자 일본 순사가 왜 째느냐고 소리치고 잡으려 하여 왜째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왜(외, 외딴 : 孤)+재(고개) ㆍ왜째고개→ 왜재고개 (구전자:윤세신 61세) ㆍ웃말- 살띄 위쪽에 있는 마을 ㆍ원동(遠洞)→머러니 (구전자:조기행 68세) ㆍ전북(箭北)→ 전북리 ㆍ전탄(箭灘)→ 살-여울 ㆍ폿대신장등 (구전자:윤세신 61세)- 전북리 살띄 마을 서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일제시대 산의 혈맥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ㆍ함자골 (구전자:조기행 68세)- 전북리 남쪽 금사리와 인접한 골짜기 ※함지→함정 ※함자굴→함자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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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절 소유리 (巢由里)
| | ㆍ소유리(巢由里)(구전자;박치호 79세)-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이 마을은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소리실로 불리워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소유리로 불리워졌다. ※소유(巢由)=둥지(巢)+말(산마루:말미유:由) ㆍ막거리→막골 ㆍ막골- 일제시대 광산촌으로 막을 치고 인부들이 살았다고 하여 부르던 이름. 약 400여 가구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금을 캐던 갱도와 폐 화물차가 남아 있다고 한다. ㆍ보려광산(寶驢鑛山)- 소유리에 있는 광산으로 1937년에 개광되었는데, 6ㆍ25이후 폐광되었다. ㆍ삿갓골- 소유리에서 전북리 방향에 있는 삿갓 모양의 골짜기 ※삿=새(間)+갓(가쟁이, 가생이, 가장자리) ㆍ섬바위- 소유리에서 대석리로 가는 산길에 위치한 바위 ※ 섬=(곡식 두량의 단위 한섬 두섬) ㆍ소리실- 소유리의 옛 명칭으로 마을의 삼면이 울창하고 험한 산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새가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새집 소(巢)자를 써서 소리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다. ※소유리 참조 ㆍ소우실→ 소유리 ㆍ소유곡→ 소유리 ㆍ소유실→ 소유리 ㆍ중사랑골- 옛날 중을 화장하던 골짜기 ※사랑=(사름, 불에 태움, 불사름) ㆍ아랫말-소유리 아래쪽 마을 ㆍ온수골- 소유리에서 세월리 방향에 위치한 골짜기로 온수가 솟아오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ㆍ윗말- 소유리 위쪽에 있는 마을 ㆍ작은절골-옛날 절이 있었던 자리로 작은 골짜기 ㆍ큰절골- 옛날 절이 있었던 자리로 큰 골짜기 ㆍ팔보광산(八寶鑛山)-소유리 윗말 북쪽에 있는 광산으로 1932년에 개광되었는데, 6ㆍ25이후 폐광되었다. |
| | 제8절 상호리 (上虎里)
| | ㆍ상호리(上虎里) (구전자:민봉기 65세)-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범실 위쪽이 되므로 웃범실 또는 상호곡(上虎谷)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상호리라고 하였다. 상호리는 산이 높고 험한 지역으로서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며 수리바위굴에서 호랑이가 나왔다고 하여 호곡(虎谷)또는 범실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이후 1672년경으로 약 324년 전에 신(申),고(高),민(閔)씨의 3성(姓)이 정착하여 금일에 이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호곡 참조 ㆍ갓밭장고개(邊田山長峴)- 웃범실 서쪽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어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ㆍ갱동맥혈(坑東脈穴)- 금광채굴 당시 만들었던 갱도로서 길이가 250미터 가량 되며 이 굴을 통해 상호리에서 소유리로 통행하였다고 한다. ㆍ골말(谷村)- 웃범실 북쪽에 있는 마을 ㆍ노리바위(遊岩)- 웃범실 서쪽 갓밭- 장고개에 있는 바위 ㆍ느티나무-웃범실 동네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3년 계해년 봄에 주민 고시학(高時學),민병두(閔丙斗), 신정균(申正均), 고규전(高奎銓)씨 4인이 30년생 나무를 마을 정자로 식수하였으며 이후 이 나무는 마을의 정자로 이용되고 있고 보호수로 책정되었다. 그리고 좌측에 있는 느티나무는 자연식수된 것으로 주민 민봉기(閔鳳基)씨 보호수로 되어 있으며 모양이 둥글고 정자가 유명하여 1994년 갑술년 봄에 호실정(虎室亭)을 세워 남녀노소는 몰론 외부사람들까지도 쉼터로 성왕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옆에 느티나무 농원이라는 식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ㆍ대바위(臺岩)-웃범실 서쪽 갓밭- 장고개에 있는 바위 ㆍ동문탑(洞門塔)-옛부터 이 마을 입구에는 남탑(男塔)과 여탑(女塔)이 있어 그것을 동문 탑이라고 불렀다. ㆍ등줄머리고개-여수금산에서 소유리로 넘어가는 고개 ※등줄머리 ㆍ말바위(馬岩)- 웃범실 서쪽 갓밭- 장고개에 있는 바위 ※큰 바위 ㆍ맹골-웃범실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산이 험해 사나운 호랑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외골→ 멧골→ 맷골→ 맹골 ㆍ맹호곡(猛虎谷)→맹-골 ㆍ명목바위- 웃범실 서쪽 갓밭- 장고개에 있는 바위로 매년 명목 새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번식시켰다고하여 붙여진 이름. ㆍ미산(黴山)- 웃범실 위쪽에 있는 산으로 고사리가 많이 있어 일명 고사리재라고 부르며 그곳에는 예부터 귀달린 지내가 있어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는바 호곡(虎谷)에 있는 밤나무들이 사방으로 둘러 쌓여 있어 제압함으로서 지내가 크게 이동하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미(뫼:山) ㆍ범실→ 상호리 ㆍ산수골(山水谷)- 웃범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민씨(閔氏) 선조묘가 있으며 용이 엎드려 산골물을 마셨다고 하여 산수골이라 불리우고 있다. ㆍ산신당(山神堂)→상호-신사당(上虎神祠堂) ㆍ상가마골(上虎谷)- 웃범실에서 아랫범실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골짜기 ※상(上)+가마(큰:大)+골(谷) ㆍ상호곡(上虎谷)→ 상호리 ㆍ상호신사당(上虎神祠堂)- 일명 산신당(山神堂)이라고 부르는 이 사당은 이 마을의 오랜 사당으로 동네 주민 92세대가 기부한 찬조금으로 1936년 (丙子年)3월 12일 신축 건립하여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사당안에는 산신화(山神畵)를 모시고 마을의 안정과 재물이 왕성해지라는 뜻에서 매년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리고 소원성취를 빌었다고 한다. ㆍ샛골(大鳥谷)- 웃범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샛(間)+골→대(큰)+새(間)+골 ㆍ소곡(小谷)- 웃범실 남쪽의 작은 골짜기 ㆍ수리바위산(秀岩山)- 웃범실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수리바위가 있다고 하여 수리바위산 또는 수리배산이라고 한다. ※수리(頂:제일 높은 = 정상= 정수리)+바위 ㆍ수리배골→ 흰-수리터 ㆍ수리배산-수리바위-산 ㆍ수돌고개→ 웃범실 남쪽에 있는 산 고개 ※숫돌(수두:首頭) ㆍ습거리- 상호리 마을 입구에는 옛부터 마을 주민들이 오리나무를 심어 마을의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는데 이곳 길을 습거리라고 부르며 지금은 모두 고목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숲+거리 ㆍ안대곡(雁岱谷)-웃범실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안터라고도 하며 고씨(高氏) 선조묘가 그곳에 있다. ※안(內)+대(垈)+골 ㆍ안산(案山)- 웃범실 서쪽 고씨 선조묘(高氏先祖墓)가 있는 산 ※마을 앞산 ㆍ안터→ 안대-곡(雁岱谷) ㆍ약고막산→화약고-산(火藥庫山) ㆍ약수곡(藥水谷)- 약수곡은 약밥골이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암벽사이로부터 만병통치의 효과가 있는 약수가 솟아오른다고 하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ㆍ여수금산(麗水金山)-조선시대인 1865년경에 영남지방에 김씨라는 사금부(沙金夫)가 약수 골을 찾아오게 되었는데 약수가 솟는 암벽사이로 황금이 많이 발견되어 이때부터 금광채굴이 시작되었고, 이름을 여수금산이라 하였는 바, 한때는 전국 3위의 채굴 실적을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 마을은 약300여호의 광산촌으로 성왕을 이루다가 1967년경에 폐광되었다고 한다. ㆍ왕바위(王岩)- 웃범실 서쪽 갓밭- 장고 개에 있는 바위 ㆍ용호현(龍虎峴)- 일명 성황당(城隍堂)이라고 하는데 옛날 장가가던 신랑이 고개를 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ㆍ웃말(上村)- 웃멈실 위쪽에 위치한 마을 ㆍ웃방골(位房谷) →호아산(虎兒山) ※웃(上)+방골(坊曲: 옛날 마을을 칭함) ㆍ웃범실→상호리 ㆍ중간말(中村)- 웃범실 중간에 위치한 마을 ㆍ진밭- 웃범실 동쪽에 있는 화약고 아래쪽 밭 ㆍ진설미 -하촌 마을 앞의 긴밭 ※긴살미= 진설미 ㆍ천양암(天養菴)- 지봉산 줄기 도랭에 위치한 암자로 1984년 봄에 세워졌으며 1995년 봄에는 佛事로 대웅전을 신축하고 탑, 종각을 세웠다. ㆍ대곡(大谷)- 웃범실 남쪽의 큰 골짜기 ㆍ하촌(下村)- 웃범실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 ㆍ화약고산(火藥庫山)-웃범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과거 광산 채굴시 화약을 보관하던 산으로 일명 약고막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ㆍ호곡(上虎谷)→상호리 ㆍ호아산(虎兒山)- 웃범실 남쪽 신씨(申氏) 선조묘가 있는 산으로 그 아래에는 골짜기를 웃방골(位房谷)이라 하며 신씨 후손들이 묘를 지키는 곳이 있다. ㆍ호휴암(虎休岩)- 웃범실 남쪽 산에 있는 바위로 호랑이가 쉬어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ㆍ흥덕재(興德齎)- 웃범실 마을 안쪽 민봉 기씨 주택 옆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고종때 통정대부(通政大夫)였던 민태식(閔公台植)을 제사지내는 사당 ㆍ흰수리바위(白?岱岩)-흰 수리가 바위위에서 집을 짓고 새끼를 치며 아래 굴에서는 호랑이가 번식해 나왔다고 한다. 흰(白)+수리+바위 ㆍ흰수리터(白?岱下谷)- 수리바위가 있는 골짜기로서 흰수리터 또는 수리배골이라고 한다. |
| | 제9절 하호리 (下虎里)
| | ㆍ하호리(下虎里) (구전자:윤기창 73세)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하호곡 또는 아랫범실 이라고 부르며 양지말과 음지말, 그리고 건너말로서 2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상호리와 구분하여 하호리라 하였다. ※본래 지명은 호곡(虎谷)이라고 했다. 고려 말 이색(목은)의 금사팔영(金沙八詠) 시에서 호곡경전(虎谷耕田)이라고 했다. 호곡은 우리말로 범실이다. 범실은 상하로 나누어 윗범실과 아랫범실로 나눈다. ※금사팔영(金沙八詠)의 시(詩) 가운데 호곡경전(虎谷耕田)의 내용일부 평야뇌룡진(平野牢龍盡) 황여편단여(荒余片段餘) 궁경도조석(窮耕度朝夕) 환사공명려(還似孔明廬) 들판은 부자가 다 차지하고 거치른 뙈기밭만 남았고나 밭갈아 조석을 때우니 재갈공명의 집을 찾아온 듯 하구나 ㆍ건너말(구전자:윤흥용 65세)- 아랫범실 시골개울 건너 쪽에 있는 마을 ㆍ남산(南山)(구전자:윤기창 73세)- 아랫범실 남쪽에 있는 산 ㆍ남성바위- 하호리에 있는 바위로 남생이처럼 생겼다. ※남산바위 ㆍ다락재-하호리에 있는 고개 ※언덕이 진 고개 ㆍ다락지고개→ 다락재 ㆍ대천터 (구전자:윤흥용 65세)-하호리 입구에 있는 옛날 집터 ㆍ더메고개 ※더매=더미 더메산에 있는 고개 ※더미산 참조 ㆍ더메산-하호리에 있는 산 ※산 능선이 굴곡이 심하지 않고 긁어 모은 듯한 산 ㆍ면화밭들(구전자;윤기창 73세)- 하호리에 있는 들로 면화 밭이 있었다. ㆍ바랑골-하호교에서 소유리로 들어가는 방향의 골짜기로 바람이 세며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승려가 지고 다니던 바랑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발(山)+안(內)+골→ 발안골→ 바란골→ 바랑골= 위치가 산안으로 들어가 아늑한 골짜기 ㆍ벌땀- 아랫범실 벌판에 있는 마을 ㆍ벌터-벌담 앞에 있는 들 ㆍ범시골개울 (구전자:윤흥용 65세)- 양지말 앞에 있는 내로 범싯골-개울이라고 부름 ㆍ보똥웅덩이- 양지말 길 건너 냇가에 있는 빨래터 ㆍ봉바위- 하호리 입구 다리부근에 있는 바위로 마치 부엉이처럼 생겼다. ※봉(峰)-솟은 바위 ㆍ봉배들- 봉바위가 있는 들 ㆍ산수앞 (구전자:윤흥용 65세)-하호리에 있는 들로 상호리, 장흥리, 하호리의 세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곳 ㆍ숲안- 하호리에 있는 늪으로 숲이 우거진 곳. ㆍ시골개울(구전자:윤기창 73세)- 하호리 양지말 길 건너 쪽에 있는 내 ※시=(셋:三) ㆍ아랫범실- 옛날 어느 상주와 지관이 묘자리를 구하러 이곳 마을을 지나다가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아픈 표정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발견하여 지관이 다가가서 입속을 살펴보니 비녀가 걸려있어 그것을 꺼내주자 호랑이가 사라졌으며 이후 그곳에 묘자리를 쓰게 된 상주의 집안은 번창하였으며 따라서 이 마을을 범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ㆍ안땀 - 아랫범실 서북쪽에 있는 마을 ㆍ윤개묘(尹漑墓)- 조선시대 (1494-1566:성종25-명종21년)의 문신의 묘로 1516년(중종11)에 식민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이조좌랑을 거쳐 좌의정 등을 지냄. ㆍ지붕산 (구전자:윤흥용 65세)- 하호리 양지말 서북쪽에 있는 산 ㆍ칠성당(七星堂) (구전자:윤기창 73세)- 숲안 북쪽에 있는 당으로 마을 사람들이 칠성에게 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ㆍ터골 (구전자:윤흥용 65세)- 하호리에서 장흥리 사이에 있는 길옆 골짜기로 큰 터골과 작은 터골로 구분하여 부른다. ㆍ하마터 (구전자:윤기창 73세)- 하호리와 장흥리 사이에 있는 길옆 작은 들로 옛날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ㆍ하호곡(下虎谷)→하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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