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정권) 유지가 정치의 목표가 되는 한 인간을 위한 이념과 철학이 설 자리는 없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정여립 모반사건”도 철저히 정치에 의한 정치를 위한 사건이었다.
다시 주목 받는 정여립
정여립 모반사건에 대한 학계의 재조명이 활발하다. 또 세간에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영화에서 이몽학과 맹인검객의 끈을 이어주는 인물이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바로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진출한 뒤 이이의 추천을 받아 언관(言官)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서인계열로 분류되었으나, 언관이 되어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해 명성을 얻으면서 동인들과도 어울렸다. 하지만 동인이 집권을 하고 이이가 죽자, 정여립은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했다. 정여립의 이러한 행태는 당연히 서인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선조의 눈밖에도 나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하게 된다. 고향에서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사상은 조선왕조의 지배 이념이었던 주자학적 가치관과는 거리가 있다. 그가 주창한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天下公物說)”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의 통론이 아니었다(何事非君論)”라는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봉건왕조의 기본 골격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영국의 공화주의자 크롬웰(Oliver Cromwell)에 견주어 보아도 약 50년을 앞서는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모반인가? 모함인가?
정여립은 정말 모반을 꾀했을까?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기록인 <기축옥안>을 보면 객관적 정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기록은 3년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따라서 실록의 사건 기록은 지극히 당파의 시각에 따라 윤색된 것일 확률이 높다. 때문에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조작이라는 근거를 보면, 우선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물적 증거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동계는 임진왜란 때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명성을 높였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정여립 모반사건>은 “모반”이 아니라 “모함”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송강 정철이 인간백정?
황해도 관찰사가 왕에게 정여립의 대동계가 역모 조직이라고 보고함으로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이 사건은 서인이었던 송강 정철이 선조의 명을 받고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정여립이 자살을 하니 동인과 정여립은 더욱더 모반죄를 지은 죄인들로 몰렸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동인 1천여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정여립 사망 후 그와 친분이 있던 전라도사 조대중은 다른 임지로 떠나면서 아끼던 기생과 헤어지는 것이 슬퍼 눈물을 흘린 것이 빌미가 되어 끌려가 취조 끝에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심지어 조대중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은 충무공 이순신마저도 혐의를 받아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이렇듯 서인들은 반대파 동인을 제거하려고 무자비한 살육을 일삼았다. 당시 세간에서는 정철의 위시한 서인들을 빗대어 ‘동인 사냥꾼, 인간 백정’이라 불렀다.
‘정여립 사건’, 조선왕조실록을 믿을 수 있나?
교육부가 펴낸 2010년 고교 국사교과서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이 동인의 남인 북인 분당의 원인이 된다’라고 한 문장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그렇게 모호하게 서술한 것은, 이 사건 명칭에 쓰인 <모반(謀反)>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이견(異見)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사건의 거사계획은 애초에 <선조실록>에는 없던 것이 <선조‘수정’실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이것은 서인 정권인 인조 21년 이후에 서인들에 의해서 변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실록에는 이 사건이 역모였으며, 대동계는 불순한 조직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역사는 승자가 쓴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실록에 기록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의 진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 실록을 만들 때 이용된 자료
춘추관에서 작성한 정무 행정 기록인 ‘시정기’와 사관(史官)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 등록, <승정원일기>가 실록편찬의 기본 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