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교동창 480명 중에 성직자가 된 사람이 사제1분 스님1분 이렇게 두 사람 있다.
목사들도 몇 명되는데 그저 고만고만하게 교회 키워서 잘 먹고 사니까 우리네 삶이나 별 다를 게 없다보니 친구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스님 이야기다.
스님들은 보통 사찰에서 정진수행과 함께 불교도들에게 법문(法文)을 내리며 생활하지만, 친구인 스님은 리어카를 끌고 전국을 떠도는 기이한 스님이다. 리어카에 최소한의 생존비품만을 적재(積載)?하고 항상 길 위에 있다. 가는 곳마다 어렵고 아픈 중생을 만나면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합장하여 발원(發願)해주고, 그래도 그들이 흔들리면 영험하다는 부적도 써주어 마음에 평화를 선물한 후 다시 떠나는 행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스님이 리어카 밑에 잠잔 후 새벽에 허전해 깨어보니 지붕 삼고 천정 삼아 보이던 리어카가 없어진 것이다. 어떤 생활고에 시달린 중생(衆生)이 밥벌이라도 하려고 끌고 갔나보다 껄 껄 웃고는 부처님의 자비를 빌고 그냥 터덜 터덜 또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 소식을 듣고 친구들 몇이 급히 도보 수행중인 곳을 수소문해 내려가 만났다. 그 동네에서 리어카를 맞추고, 하룻밤 같이 대포를 나눈 후에 이튿날 리어카 기증식(?)을 마친 후 올라 왔다.
길 위의 스님 말고 또 한분 성직자가 정 지풍 아킬레오 신부다.
친구지만 존경하고 가끔 술자리던 식사 자리던 같이 나누는 사제(司祭)들 중 한 사람이다.
다른 사제도 마찬가지로 신학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인문학의 섭렵(攝獵)으로 인품이 깊고, 명상을 통한 삶의 지혜를 터득했을 뿐 아니라, 사회통찰력(通察力) 또한 대단하여, 사회속의 어둠을 사라지게 기도하며, 기도가 안 되면 털고 일어나 실제로 행동을 다하는 분들 중 하나다.
고교를 같이 마치고, 나는 법대로 그 분은 의대로 진학한 후 서로의 방향과 생활이 다르다보니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 할 때 까지도 정 지풍 동창이 사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었다. 40년 전쯤만 해도 가톨릭 신자들이 아주 적었고, 신부들은 박정희와 맞서다가 구속되는 분들이구나, 뚝심이 대단하구나 정도로만 알려졌다. 다른 친구들 역시, 어렸을 적에 멋모르고 주일학교 나가다가 껍데기 교인된 사람 외에는, 가톨릭에 관심있는 친구들이 없었다보니 종교계 소식이 과문(寡聞)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부터 취미였던 고전음악 감상이 종교음악으로 들어서면서, 종교음악사와 세계 종교사를 접하며 가톨릭을 알게 되었고, 엎어진 김에 아예 가톨릭 세례를 받고, 여차 저차 수소문 끝에 그 친구가 사제가 되었다는 걸 알고도 무심한 채 시간이 흘러갔었다.
그러던 중 매달 열리는 동창회에서 삶의 예지력을 가진 명사 한 분씩 초청강연을 하는데, 한 번은 정 지풍 신부가 초대되어 나의 길 나의 인생을 강연하게 된 것이다. 이날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부터는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방문도 하다가 딸 결혼 때는 주례신부로 모시기도 한 분이다.
우리는 모두 이 태석 신부님에 대해서 잘 안다. 의사를 접고 성직자가 되었으며, 부름을 받고 수단까지 나아간 분이다. 정 지풍 신부도 이 분과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
정 지풍 신부는 당시 중부 명문(大田高)의 수재였다. 나와 동창이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ㅎㅎㅎ.
집은 가난했으며 7남매가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지만, 정 지풍의 좋은 머리와 명문고 진학으로 인한 장래 집안 부흥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위로 누나 두 분은 학업을 포기하고 정지풍의 고교졸업을 위해 희생했다. 그리곤 의대 진학으로 인한 학업을 돕기 위해 동생들도 연이어 대학 교육을 모두 포기했다. 시골의 가난한 농사로 의사 만들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사가 되었을 때 온 집안의 기쁨은 대단했다.
그 시절만 해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던 시절이었고, 용처럼 출세한 한 형제가 출현하면 집안을 일으킨다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던 때기에 당연히 집안의 기대도 집중되었다. 뭐 의사가 대단한 명망가라서가 아니라 경제적 여유를 확보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일. 우리나라 사제들 많은 분들이 사회생활을 겪으며 방향을 바꾸었고, 추기경 두 분 역시 서울대를 나와 입신양명(入身揚名)이 보장되었는데도 신학대학으로 방향을 돌려 사제가 되었듯이, 인턴 2년차를 맞은 정 지풍도 그랬다.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들이 심상치 않았다.
왜 사는가? 생명은 무엇인가? 남는 자의 고통은 누구로부터 인연이 되는 것인가? 죽음 그 뒤에는 무엇이 가다리나? 영원한 어둠이나 무(無)? 그렇다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아 다만 헤어짐이 가슴 아픈거야' 라는 마 종기(의사로서 아주 훌륭한 시인)의 시도 읽으며 끊임없이 인생에 대해 자문하고 고민하던 청년의사는 순간 의사를 내던지고 신학대 입학을 선언한다.
부모님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만류 했고, 겨우 빚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작은 미래를 꿈꾸던 형제들의 실망 또한 컸다.
그러나 부모님의 만류를 물리치고 신학대에 입학을 결행하자, 부모님이 의절을 선언하신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
정 지풍 신학생은 그 이후 신학 공부에 몰두하지만 방학이 되면 의절 선언하신 부모님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수가 없었던 7년 신학대학 생활이었다. 동창 신학생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부모님은 물론 본당의 공동체들 환영 속에 즐겁고 뜻 깊은 방학을 보내지만, 갈 데 없는 그 분만은 오직 긴긴 방학을 도서관에서 밤 새워 읽고 연구하고 명상의 시간을 보낼 뿐이었고, 이때의 집중은 깊은 영적 세계의 심연을 다듬는 기초의 세월이었다.
의대 졸업보다 더 긴 7년이라는 신학교 과정을 전부 마치고 부제서품(副祭敍品)도 마친후, 드디어 사제서품(司祭敍品)식 날. 뜻하지 않게 서품식에 나타나신 부모님. 긴 세월 뒤의 용서가 눈물의 화해 속에서 부모님을 다시 돌려준 것이다.
그 이후 신부로서의 길을 훌륭하게 걸어온 정 신부는, 20년전부터는 입장과 천안 사이에 있는 성거산 성지개발 업무를 부여받고 총력을 기울인 끝에 오늘의 성지를 만들었다. 인근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산골에 버려진 무덤을 일일이 찾고 확인하고 줄무덤으로 이장하고, 성지내의 경관을 고치고 꾸며 다듬고, 많은 독지가들의 성금 모금과 각종 강연료며 여러 본당의 순회 호소 등을 통해 작은 성당과 성지내의 성모동산과 14처 길을 내고, 특히 이 곳 지형의 특성에 맞도록 온갖 야생화 천국으로 성지를 가꾸어 왔다.
사회를 위해 정말 고마운 분이다.
나는 몇 몇 사제들의 삶을 곁에서 직접 듣고 또는 이렇게 눈으로 보고 겪어왔기에 사제들의 삶이 우리의 범상한 생활과는 확연히 다른, 엄청난 기도와 고통과 수련의 열매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기에 이 분들을 존경한다. 하지만 조금 나이가 지긋한 일반인들은 자기 정치적 입맛에 들지 않는 사제 얘기를 하면, 종북 빨갱이라며, 선동한다느니 입에 담지 못할 망언을 내뱉는다. 아마도 그렇게 긴 기간의 영적인 수련과 학문적 연마가 있었다는 걸 간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카잔차키스 같은 대문호(그리스 작가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세계적 작품이 있음) 조차도 죽어서야 조국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카마라 대주교의 촌철살인 한 말씀.
"사제가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면 성자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왜 가난한가에 대해 얘기 하면 빨갱이라고 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이 한마디만 곰 씹어보더라도, 기득권층과, 또한 이들과 강력한 카르텔을 엮고 있는 보수언론들도 제일 싫어하는 종교가 가톨릭이고 어려워하는 이가 사제일 것이 짐작간다.
조선일보 같은 영향력 있는(발행부수가 그렇다는 것일 뿐ㅎㅎ) 신문이 아마도 가장 앞에서 사제들의 부정을 캐내려고 온갖 정보를 동원해보지만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오직 종북기사로 매도하고 이상한 천주교 단체의 이름(검색해보니 그런 인준단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으로 인터뷰 기사나 뉴스도 내보내지만, 부정한 시각을 시민들에게 전파하여 일반인들의 부정시각을 유도하고 가톨릭 내부의 이간을 만들기에 혈안이지만, 가톨릭 내부에 균열이란 신문기사에 나오는 오보(誤報)와는 반대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도 이런 신자의 가면 쓴 사람들이 많다.
신부님이 마음에 안 들면 그분을 위해 기도해보길 권한다.
아마도 기도 드리는 일이 30초, 아니 20초도 안되어 이런 저런 헛 생각이며 분심의 마귀 유혹에 많이 넘어갈지도 모른다.
얘기가 빗나갔다.
급선회해본다 ㅎㅎ.
*
최근 성거산 성지에서는 야생화(野生花)가 한창이다.
나는 두 번이나 야생화 축제기간 다녀왔다. 한 번은 그냥 무심코 동창인 신부가 보고싶어 갔었고, 한 번은 마음먹고 야생화도 감상할 겸, 마침 미국에서 다니러온 처형까지 모시고 갔다.
야생화는 강산의 이곳 저곳에 널려 피는 풀꽃들이다.
말 그대로 가꾸거나 키우지 않는 꽃으로 야생 그대로 철과 함께 수줍은 미소를 준다.
그러나 쉽게 볼 수 없다. 작고 소박하고 드러내지 않고 땅 가까이 숙이고 있는 겸손함 때문이다. 야생화를 보려면 무릎을 꺾어야 된다. 허리를 땅으로 낮게 굽혀야 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놓으면 그 신비한 미소에 황홀해 하고 만다. 야생화의 소박한 이름들은 백성의 삶속에서 지어진 것들로, 촌스러움은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나 역시 한 컷 찍고 이름을 듣고 찾아볼 때마다 작은 행복감도 느꼈다.
간 날은 마침 순례팀들이 인근 최고의 맛집에서 점심으로 주문한 토종 산채 보리밥이 딱 3인분 남았다고, 신부님이 준비해주는 덕분에 입까지 호사했다.
이 날 눈의 야생화 호사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 맑은 눈, 그 고운 볼을 눈 부셔 볼 수가 없구나.
한정 없이 말을 자꾸 걸어오는 그 수다를 당할 수가 없구나.
혹은, 수없는 순교자들이 온갖 꽃의 얼굴로 온갖 색채로 지상에 올려진 모습인지도 몰라.
(2014. 05. 05)
정지풍신부님과 나.
신부님과 처형과 처.
자매의 미소.
[이름은 아름답다].
모든 것은 이름을 불러줄때 내게 온다.
황순원 작가가 제자들의 글쓰기를 지도 할 때, 학생이 제출한 작품 중에
"이름모를 꽃과 새들이~~~~".
이런 부분이 나오자 원고지를 집어 던지면서, 세상에 이름없는 새가 어디 있고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더냐. 이런 걸 글이라고 쓰는가. 무식하면 배워서 써야지, 이렇게 게으르고 무식하며 무책임한 자가 어찌 글을 쓰려는가 라면서 대로한 적이 있다.
나도 그 때부터 꽃 하나라도 반드시 도감을 찾아서 글을 쓴다. 모르면 안 쓴다. ㅎㅎ
이름을 하나씩 불러본다. 너무 아름답다. 구슬봉이, 괴불주머니.
꿩의다리, 녹색꿩다리, 노랑무늬붓꽃.
달개비, 둥굴레.
미나리냉이, 병꽃풀, 새우난.
설난, 포천바위솔, 송엽국.
은방울꽃, 앵초.
은행조팝, 황금국수, 종지나물(보라)과 매미꽃(노랑).
칼잎매화, 태백바람꽃, 헐떡이풀.
홀아비꽃대, 벌레잡이, 민들레꽃씨.
아기나리, 끈끈이귀이개, 동의나물.
으아리, 콩제비꽃, 당개지치.
10초 영화.
첫댓글 좋은내용 올려주셔서 감동임니다. 예쁜꽃들 사진도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정 리사님. 제글의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글에도 관심가져주세요.
좋은글 감사드리며, 사진동호회가 5월 활동을 제게합니다. 도움을 요청드려야 될듯...... help!! 프리즈~~~~!!!!
제가최근기기를몽땅ㅠㅠ.
다시구입하기가어려워서,야생화사진은스마트폰으로찍고,보정과정을한번거친겁니다.
기기를구입하면그때가입할께요.
(하긴,요즘엔스마트폰으로만촬영한영화가화제일정도로,스마트폰카메라기능도장난이아니네요ㅎㅎ)
좋은글 잘읽고,,
야생화공부도,,잘하고 갑니다,,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다른글도 관심가져주네요 ㅎㅎ
야생화 사진중 '은행조팝'은 '산조팝'이라고도 합니다.
@보리수 기대 하겠습니다
조은글 마니 올려 주세요~
행복해 보여서 더욱 아름다운 글입니다. 스님친구, 신부님친구분, 보물을 너무 많이 갖고 계셔서 좀 무겁겠어요.
단 한 명의 친구를 만나도 축복인데 ~. 좋은 글로 많이 나눠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