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대선 정국에 들어선 것 같은 한국 사회는 여전히 리더쉽의 선택에 있어서 많이 나쁜 놈보다 덜 나쁜 놈, 많이 못난 놈보다 조금 못난 놈을 뽑는 이상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전임 검찰총장이 단숨에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 현 정권의 무능력도 국민들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올림픽을 마치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김연경을 대통령으로? 이건 안되나? 이재영,이다영자매가 빠진 한국팀은 사실 8강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지만 김연경이라는 걸출한 리더를 소유했기에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물론 라바리니라는 수평적이고 데이터를 합리적으로 적용할 줄 아는 리더쉽과 함께 이룬 업적이지만 코트에서 땀을 흘리며 함께 뛰는 한 사람의 리더가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녀의 리더쉽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인터넷으로 그녀에 대한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저도 배우고 깨우친 것 가운데 하나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함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솔선수범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서 부정적인 언어들을 듣습니다. 그 언어는 우리를 비판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들지만 아무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엘리트 중심교육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계층이 존재해서 구분이 됩니다. 사다리 위와 아래가 있어서 아래에 있는 아이들은 죽어도 사다리 위로 못가게 만듭니다. 그들만이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좋은 배우자, 그리고 상류층의 삶을 족점하게 됩니다. 결국 실패한 이 시스템을 왜 아직도 갖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 놓은 보수정권을 욕하면서 현 정권도 제가 보기엔 고칠 의사가 별로 없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가능성을 0로 만들어 놓고, 솔선수범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개혁은 부패와 동의어 일뿐입니다. 한국사회의 리더쉽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의 힘을 선용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데 건강한 비판세력이 아닌 맹목적인 지지층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아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틀렸다.”고 단정하고 진지하게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교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단지 정치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신앙 현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소망의 삶, 즉 부활의 소망,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어둡고 타락한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소망으로 살아가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씀 실천에 솔선수범하고 부정적인 언어 대신 긍정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지만, 많은 어른들이 자녀들 앞에서 지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판단을 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나 지체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궁금합니다.“이런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그런 교회를 왜 다니지?”라고 생각할 겁니다.
자녀들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니까 교회에서는 거룩한 부모님들이 가정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에서는 교인 코스프레 하다가 집에 오면 가면을 벗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들이 가장 크게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의 실천없는 신앙생활과 부정적인 언어 사용을 회개합시다. 국가적인 위기의 때에 김연경 리더쉽을 배우는 한국 사회가 되기 원합니다. 한 배구선수보다 못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건강/ 노후생활에 대한 보장/ 자녀문제/ 부부문제/ 재정적인 문제... 인생을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문제를 만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는 음모입니다. 예수를 잡기 위한 음모에 희생양으로 한 여인이 잡혔습니다. 그렇다면 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두려워했을까요? 그가 군사력을 가진 인물도 아니었고,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재벌도 아니었고, 권위를 가진 최고의 율법학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무시한대로 나사렛 출신의 천한 목수의 아들이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해석으로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고귀한 일을 맡은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대로 공부도 못한 예수님을 왜 두려워했을까요?
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기 쉬운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가진 재벌? 그래서 감옥에도 가지 않습니까? 최고 권력에 오른 전임 대통령들 감옥에 계시고, 법원을 드나드는 분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힘이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힘이 선용되는 것입니다. IOC가 도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이순신 장군의 출사표 문구조차 정치적이라고 금지하면서 일본 지도의 독도 표시나 욱일기 문양의 사용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었습니다. 우리 외교의 한계를 보면서 동시에 힘의 오용이 가져오는 권위의 추락을 보았습니다. 힘의 부패는 공정성을 잃을 때 옵니다. LH공사 직원들의 투기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해석을 독점하고 아무도 다르게 해석할수 없도록 막았습니다. 그들의 해석이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정답이 되었습니다. 다른 해석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심판받아야할 죄가 되었습니다.
마23:2-4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모세의 자리는 재판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주지만 그들은 손가락 하나도 꿈쩍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리더쉽의 문제는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누릴 뿐 율법을 실천하기 위해 앞장서지 않습니다.
뜻밖에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중들이 아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위협이 되었을까요? 말씀을 해석하시는 것이 그들과 달랐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의 해석이 무거운 짐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의무감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다면 예수님은 자발적인 헌신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서기관들의 두려움은 그들이 가진 부와 사람들의 존경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그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부와 명예를 잃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기 이익의 수단을 삼고, 그릇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건강, 직장, 자녀, 물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소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답게, 성도답게, 사명으로 주신 각자의 직업의 자리에서 영성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고집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자신을 속이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신 가족 여러분! 주의 은혜로 얻은 생명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이것이 우리의 두려움의 주제가 아닙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는 것, 소명을 망각하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돌을 내려 놓으라!(영성은 돌을 내려놓고 사는 삶입니다.)
한 여인이 간음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여자로서 사회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공개되었으니 율법은 그녀를 돌로 치라고 말합니다. 음모를 꾸민 주동자들은 그녀를 개끌 듯이 끌고 예수님 앞으로 갔고 그들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 9절에 보면 어른들, 젊은이들이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주동자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모세는 돌로 치라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그들은 예수가 그들의 말에 동조해서 돌로 치라고 하거나 모세가 틀렸으니 풀어주라고 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돌을 여인에게 던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선한 양심이 그들 가운데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곳에 현장에서 잡힌 남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7번째“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레20:10절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오용된 힘은 내 편은 보호하지만 내 편이 아니면 돌을 던집니다. 정의는 한쪽에만 작용될 때 더 이상 (하나님의) 정의가 아닙니다. 선한 양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합니다. 음모를 분별하고, 그 음모에 동조하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마음에는 적과 아군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물론 돌도 하나씩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그들은 변하지 말고 그대로 심판받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선한 양심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돌을 빨리 던지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 당신이 돌에 맞아야할 사람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라는 주의 말씀을 당당하게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손에 들린 돌은 주님만이 던질 수 있음을 기억하고 돌을 내려 놓기 바랍니다. 나의 정의가 폭력일 수 있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죄인 취급한 사람은 없느냐?”주님 앞에는 돌을 들고 설 수 없습니다. 그곳에 돌은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신 곳에서 아무도 어떤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없습니다. 돌을 들고 선 그 자리가 주님이 왕 되신 자리가 되도록 돌을 내려 놓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Go now and leave your life of sin." 너의 죄된 삶으로부터 떠나라!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최고봉은 주님을 자신의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판단도 감정도 정의감도 내려 놓고 주님의 뜻앞에 겸손히 서는 것입니다. 고후5:17절“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죄를 떠난 삶은 주님안에서 가능합니다. 육체를 따르던 삶이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바뀌면 됩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손에 돌을 잔뜩 들고 살면서 기회만 오면 던지고 싶어합니다. 여전히 육체대로 알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이 우리를 육체대로 아셨다면 우리는 돌을 맞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분열과 갈등을 치료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