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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언약’에 대하여
1. 성경 - 바이블, 테스타먼트, 카비넌트
성경을 영어로 홀리 바이블(Holy Bible)이라고 한다. 그냥 바이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이블은 비블로스(G. biblos)에서 온 말로서 본래 이집트인들이 나일강변의 갈대(파피루스, papyrus)를 압축하여 만든 종이를 뜻한다. 종이들을 묶어 놓은 것을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이블은 ‘책’이라는 말이다. 논문이나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한 다른 책들의 목록을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라고 한다. 바이블은 책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 성경책을 펼쳐 보면 표지에는 홀리 바이블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둘로 나뉘어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다. 이것을 영어로는 올드 테스타먼트(Old Testament)와 뉴 테스타먼트(New Testament)라고 부른다. 성경이 자신을 테스타먼트(Testament)로 소개할 때, 그 의미는 무슨 뜻일까?
테스타먼트는 본래 어떤 두 사람의 약속에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세번째(L. tres) 사람으로서 곁에 선다(L. stare)는 의미로부터 출발했다. 라틴어로 테스타리(L. testari)는 ‘증인이 되다’는 뜻이며, 테스타멘툼(L. Testamentum)은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언약을 의미하게 되었다. 성경을 테스타먼트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증거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테스타먼트가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고인이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지켜 달라고 유족에게 약속으로 남긴 말이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우리는 성경이 자신을 언약의 책이라고 소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 안으로 더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카비넌트(Covenant)로 표기된다. 영어로 카비넌트는 약속이나 계약, 서약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카비넌트는 본래 라틴어 콘베니레(L. convenire)에서 온 말인데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 동의하여 함께(L. con-, together) 간다(L. venire, to go)는 의미다. 영어의 컨벤션(convention)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여 모이는 집회나 협정 또는 관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편안하다(convenient)고 느낀다.
성경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약속(covenant)을 증거(testament)하는 책(bible)이다. 하나님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그곳에서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하여 약속을 맺으셨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대하여 소개하는 책이다.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것을 관리하고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청지기요 관리자 또는 대리인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것이 인간의 창조목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별도로 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으로 인간을 들이셨다. 에덴은 세상을 비옥하게 하는 강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에덴은 이 세상의 번영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 관리자인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다.
에덴에서 최초의 언약이 맺어졌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언약에 충실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다면 에덴의 생명나무는 번성하여 그 동산에 있는 충만한 생명이 온 세상으로 확산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세상의 번영과 충만으로 결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지향하는 목적이다.
아담과 하와 부부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에덴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온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특권도 잃어버렸다. 언약을 깨트린 결과였다. 그 결과 이 세상은 생명 대신이 죄악이 가득해졌다. 그것은 폭력과 착취, 살인과 보복의 형태로 나타났다. 강자의 횡포 속에 약자들이 희생되는 세상으로 전락했다. 세상은 다시 공허와 혼돈이 확산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에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신 방법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세상을 돌리신 후에 물에서 새로운 육지가 솟아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노아의 홍수는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공동관리할 대리인으로 노아의 가족이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과 새 언약을 맺으셨다.
하지만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탑을 쌓는 등 다시 언약을 깨트렸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 위하여 모의할 수 없게 벌을 내리셨다. 사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해야 할 일은 하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생육, 번성, 충만의 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내는 일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에덴에서 아담 부부가 자신들의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다가 언약을 깨뜨렸다면, 시날 평지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언약을 깨뜨렸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때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이다(창 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새 언약을 맺으셨다. 아브라함이 그 언약에 충실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실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든지 이 세상 전체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임이 여기서 다시 드러난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가문이 어떻게 뜻을 맞추어 가는지를 들려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 가문의 순종을 통해서 어떻게 분명해지는지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출애굽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들려준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시내산 언약이라고 소개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념했다. 그것은 절기와 제사의식으로 지켜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언약을 잊어버리고 결국 그 언약을 깨트리고 말았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다시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기를 70년이 지나 모진 고통과 설움 속에서 그 백성은 언약을 깨트린 자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기에 이른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통회하는 백성을 위로하면서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고향땅으로 인도하시고 그들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격려했다(렘 31:31). 그렇게 포로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은 새 마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들은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돌판에 새기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처절한 노력과 분투를 담은 이야기가 구약성경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에스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뜨거운 회개와 맹세는 점차 희미해졌고,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다시 언약을 상실한 세상을 살게 되었다. 그것은 암흑과 같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종교는 겉치레만 남아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생각나게 해 주셨다. 이사야를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성경을 펼쳐 읽어 주시고 그런 세상이 이제 열린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그 선포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로 압축되어 전파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새 언약을 맺으신다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살아갈 백성을 세우기 위하여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시면서 제자들을 모으셨다.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밤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영원히 잊지 말라고 새 언약을 맺으셨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이 세상 끝까지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아담의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며,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잇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하여 봉사할 제사장을 세우는 시내산 언약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새 언약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과 아브라함, 이스라엘 민족과 예수님과 교회를 향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시며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이해하고 그 위대한 계획에 동참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을 맺은 언약체결자들이며, 그 언약이 성취될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들이다.
밧모섬에서 요한은 환상 가운데 이 세상이 새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날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 환상은 온 세상이 마침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바로 그 모습이었다. 온 세상은 마침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거룩한 땅이 되었다. 더 이상 속된 것과 더러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은 마침내 그 새로운 땅에서 왕노릇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마침내 완성되고 영원히 견고하게 되는 모습이었다.
3.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는 목적
하나님은 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실까? 하나님의 언약을 살펴보면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실 때마다 그 목적을 밝히신다. 아담에게는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임무를 주셨다.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이 세상에 대한 공동통치자로 함께 가자는 초청이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천하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고 그 언약에 충실할 때 이루어질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해지는 복을 경험했다.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고, 이삭은 100배의 소출을 거두었으며, 야곱은 빈손으로 출발했으나 세 떼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고, 요셉은 온 세상을 가뭄과 기근의 위기에서 건져내는 생명의 부양자(사브낫바네아)가 되었다.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백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는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온 세상만민을 축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비추는 시온의 빛이며, 온 세상을 살리고 생명 가득한 세상이 되게 하는 생수가 흘러나오는 성전의 관리자들이었다.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바로 그런 것임을 예언자들은 깊이 깨달았다.
예수님을 만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은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새 언약을 맺은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봉사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고 기대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이 세상의 번영과 회복, 그리고 충만을 위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1:23, 공동번역개정판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란,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며,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천하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물이 바다를 가득 덮은 것처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충만할 때, 그 세상은 더 이상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물이 평화와 사랑 가운데 공생, 공존, 공영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성된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은 바로 그런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인간과 더불어 만드신다. 그것이 인간의 창조목적이다. 인간이 이 세상의 관리자요 청지기라는 점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세상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인간은 낙원을 만드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할 수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관리하는 일꾼이다.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생육, 번성, 충만을 명하셨으니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볼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그 언약을 깨뜨린 사람들은 이 세상과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를 목격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라는 기원은 사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기원과 같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말씀을 충실히 따를 것을 결단한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도리이자 본분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서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루겠다고 일어설 때마다 이 땅에는 유토피아(utopia) 대신에 디스토피아(dystopia)가 나타났다. 유토피아가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이라면, 디스토피아는 그 반대 세상이다. 만민이 평등하게 재산을 나누는 공동사회를 꿈꾸던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의 삶이 더욱 피폐하게 되는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한 자본주의는 빈부의 격차가 더욱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세상을 만들고 말았다.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면서 만인의 의견이 존중되는 세상을 꿈꾸는 민주주의는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중우정치(衆愚政治)를 낳기도 한다.
이 세상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롬 8:19).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사람들이며,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기대하며 희망하기에 그 일에 자원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한 낙원으로 만드는데 필수불가결하다.
4.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인간은 누구인가?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자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요 동반자다.
시편 기자가 노래하기를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라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을 성경은 신이라고 했다고 예수께서는 대담하게 선포하셨다(요 10:35).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인간은 이처럼 중요한 존재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어느 시대나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을 감사함으로 물려받아 생명 가득한 곳으로 가꾸라는 명령이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시며 언제나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꿈과 계획에 동참하도록 초대하신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영원하며, 이 세상을 생명 충만한 땅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늘 새로운 언약이다. 아담은 최초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에로 초대를 받았으며, 노아와 아브라함, 이스라엘 민족과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언약에 초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하나님의 새 언약으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어 새롭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에 초대받은 것이 은혜요, 인간의 적은 순종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은혜다. 인간이 수고하여 심고 가꾸는 포도나무가 결실하는 것은 하늘의 은혜요 하나님의 기적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그 자체로 은혜 언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에게 결단과 수고를 요청하는 행위언약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어느 언약도 ‘은혜언약’이 아닌 것이 없고, ‘행위언약’이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은혜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인간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사람들에게 오해되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데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도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죄인이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데, 거기에서 건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볼 때, 아담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아담은 행위언약을 깨트린 원조다. 그리고 아담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아담과 같은 죄인이다. 그들은 자력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행위언약이 아닌 은혜언약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 은혜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언약이라고 그들은 소개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런 생각으로 보면,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는 결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는 세상의 번영과 충만이 아니라 인간이 언약을 지키는가를 감시하는 분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도덕률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나 지키지 않나 감시하시는 분이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경영하는 대리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라는 규약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험을 보는 존재가 된다. 그 결과 기독교의 인간은 도덕률 앞에 서 있는 시험받는 존재이며, 철저하게 실패하고 타락한 존재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에 대한 심각한 오해라고 신학자 톰 라이트는 우려한다.
참고:
기독교의 세 가지 오해: 종말론, 인간론, 구원론에서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91
인간을 이처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바라보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결코 지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부어질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 이후로 이런 주장이 교회에서 힘을 얻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어보면 그가 어떻게 처절한 절망과 죄악 가운데 고통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가 어떻게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의 고백은 독자의 마음 깊이 파고든다.
하지만 터널과 같은 어두운 곳에 오래 있던 사람이 빛 가운데로 나오면 그 빛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때가 있다. 그 감동과 감격은 이해되나 차분한 마음을 되찾으면 사물을 바르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에 어떤 빛을 비추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시대와 문화의 한계로 인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성이 임신과 분만 과정을 통해서 자손에게로 전달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성적인 본능은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의 가르침 이후로 오랫동안 교회는 성에 대하여, 여성의 지위에 대하여 성경이 아닌 세속의 생각을 교리로 가르쳐왔다.
인간이 죄를 범하는 이유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인간이 본래 죄인이라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을 때 탐심이 그 마음에 들어와 하나님 아닌 것을 예배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담이 범죄한 까닭은 그가 죄인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자기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여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성경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소개하는가?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자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은총을 힘입어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언제나 인간은 우상숭배에 빠지며 그 결과는 범죄요 사망이 뒤따른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자신과 피조물을 예배하는가에서 결정된다. 인간 자체가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면 그런 존재와 언약을 맺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에게 말도 걸어보고 산책도 하지만 강아지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없는 존재라면,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언약, 곧 은혜언약을 제공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언약은 그 이전의 옛 언약과는 달리 전적인 은혜로 맺어지는 언약이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행위로 완성되는 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런 언약이라면 예수님은 왜 인간에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가?
요새 사람들이 말하는 ‘은혜언약’은 값싼 복음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값싼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책무와 본분을 소홀히 여기게 하는 주장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언약에로의 초대라고 할 때 그 언약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위대한 대리인으로 여기게 하기도 하고, 사람을 구제불능의 죄인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보기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은 은혜 언약이며, 행위언약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으로 초대받는다. 그리고 그 언약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 받을 상속자요, 하나님과 함께 그 포도원을 경작하는 동역자다. 그리고 그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장차 완성하실 나라에 동참할 위대한 대리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들려주는 인간의 위상이며 실존이다.
5. 결론 – 새 시대는 새로운 질문으로 열린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530년 전에 인도로 가는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라고 질문한 것으로부터 대항해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시절에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같은 사람들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콜럼버스는 새로운 모험을 감행했다. 그가 던진 새로운 질문은 그에게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게 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신앙의 길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리의 빛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때 수많은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질문은 매우 평범하고 단순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마 16:15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눅 10:3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 마 12:3
*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 마 15:3
*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 마 21:25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문제를 인식할 때 질문을 던진다. 나는 함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누고 싶다:
* 하나님은 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걸까?
*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기를 바랄까?
* 정말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일까? 시내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을까?
*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세상일까, 아니면 이 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우리가 하늘로 들림 받아 올라가서 만나게 될 세상일까?
*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킨 것일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가? 십자가에 대한 다른 설명은 없는가?
내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까닭은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들의 주장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은 내가 배운 신앙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할 수 있게 나의 눈을 열어주었다. 앞으로 계속 구도의 길을 걸으면서 나는 새로운 질문을 발견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를 바라고 고대한다. 그 때마다 성경의 빛은 새롭게 나와 세상을 비춰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로 가는 새로운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끝>.
참고:
나의 독서 여정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