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녹비(鹿皮)에 가로왈(曰)
이희근
교육에 몸담고 있지 않은 사람도 공부를 소홀히 하는 자기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하면, 공부를 잘해야만 성공하는 것도 아닌데 왜 공부를 강요하느냐고 불평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성인 중에서도,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무 쓸모가 없고, 살아가는 데는 가감승제만 할 줄 알면 되는데 골치 아픈 함수나 집합을 공부하느라고 죽을 고생만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 쓸모나 필요가 없다고 과소평가됐던 것들의 필요성이 절실할 때가 많다. 우선 국내는 물론 해외여행을 가면 역사와 지리까지 동원해야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행지의 아름다운 경관의 배경이 되는 주변의 식물이나 지리적 특성, 그리고 특산물은 물론 그곳의 풍습이나 문화에 대한 상식이 없다면 불편을 느낀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은, 설령 잊었다 하더라도,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희미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그때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더 열심히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할 때가 많다.
글쓰기를 하면서부터 어렸을 때 또는 학창시절에 배운 것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주 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홀히 여겼던 것들을 잘 알고 있으면 글을 쓰는 데 정말 도움이 된다. 실제로 내가 풀이나 나무에 대해 쓴 졸문을 읽고 나를 생물을 전공한 사람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배운 천자문 덕으로 초등학생 때에는 한자를 잘 아는 학생으로 통했다. 그리고 국어책에 나오는 많은 한자가 어렵지 않았다. 또 고등학교 1학년 한문 시간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요즘은 수필을 쓰거나 읽을 때 그 한자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는 한자 중에서도 주로 두 가지 이상으로 소리가 나서 틀리기 쉽고, 대학입시에서 출제빈도가 높은 것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독’과 ‘두’'로도 읽는 ‘讀’, ‘성’과 ‘생’으로도 읽는 ‘省’, ‘동’과 ‘통’으로 읽는 ‘洞’, ‘구’, ‘귀’ 그리고 ‘균’으로도 읽는 ‘龜’ 등.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글자가 있다. ‘가죽 피(皮)’자다. ‘皮’는 피부(皮膚) 피골(皮骨) 호피(虎皮) 철면피(鐵面皮) 면장우피(面張牛皮)의 경우처럼 대부분 ‘피’로 읽지만, 사슴의 가죽인 鹿皮의 경우는 ‘비’로 읽는다.
선생님께서는 ‘녹비에 가로왈’이라는 속담도 가르쳐주셨다. [녹비(鹿皮)에 써 놓은 가로왈(曰)자는 녹비를 아래위로 당기면 날일(日)자로도 보이는 데서] ‘일이 이리도 되고 저리도 되는 형편’을 이르는 말이지만, 녹비에 가로왈처럼 우유부단하지도 말고 매사에 일관성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또 曰을 日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열심히 하라고도 하셨다.
녹비에 가로왈의 속담을 가장 잘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사슴 가죽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녹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항구불변의 발달된 인쇄매체로 ‘曰’을 써 놓는다. 녹음기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나 상황이 바뀌면 눈을 번히 뜨고도 자기가 써놓은 ‘曰’을 ‘日’이라고 우긴다. 그것을 曰자라고 우기는 사람은 무식하고 이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日’은 자기의 환경과 조건이 다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曰’로 변하지 않는다.
파충류 중에는 주변의 빛깔에 따라 몸의 빛깔을 바꾸고, 양 눈을 따로 움직이며, 긴 혀를 재빨리 움직여 곤충을 잡아먹는 것이 있다. 카멜레온이다. 카멜레온은 평소 동작이 빠르지 않지만 먹잇감을 사냥할 때는 재빠르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동작이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위장의 대가(大家)’라느니 ‘변신의 달인(達人)’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위장술을 원한다.
하지만 변신과 위장은 다르다. 변신은 부단한 노력으로 자기의 몸이나 모습을 다르게 바꾸거나 바뀐 모습이지만, 위장은 남을 속이기 위한 거짓 꾸밈이다. 변신은 지속적이지만 위장은 한시적이다. 위장은 실패하든 성공하든 시간이 지나면 해제된다. 그런 위장술로 살아가는 동물이 카멜레온이다. 따라서 카멜레온을 좋아한다는 말은 남을 속이기를 좋아하거나 우유부단하다는 뜻이다. 카멜레온을 보고 녹비에 가로왈이란 속담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쟁이이거나 사기꾼 또는 위선자들이다.
학장시절에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녹비에 가로왈이란 속담을 잘 알기 때문에 曰자 사용을 삼간다. 그러나 ‘녹피’인지 ‘녹비’인지도 모르고 曰자를 밥 먹듯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학창시절에 국어공부를 소홀히 한 사람들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말을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曰은 녹비에 쓰인 것이 아니라 카멜레온의 표피에 새겨진 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