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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시1:1-6)-2017.10.1
행복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관심사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돈 벌고 땀 흘리며 일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면 행복한 줄 압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사는 세상은 행복과 불행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입니다. 실제적으로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노래하면 행복한 인생이요, 스스로 불행을 노래하면 그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거울을 쳐다보며 웃기도 하고, 불행이라는 거울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이지만 진짜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더구나 행복을 그토록 그리워하며 찾아보고 소원을 하지만 행복이 우리의 기대처럼 내 곁에 머물러 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행복이라는 친구가 아예 찾아오지 않는 자도 있고, 찾아 왔던 행복이 몇 날을 못 버티고 금방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행복이란 친구가 영원히 함께 머무르며 살기도 합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행복은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이 모든 사람에게 규격화된 제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소유도 아닙니다. 행복은 각자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느낌입니다.
보통 우리 주변에는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유형이 다른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행복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행복을 연구하고 학문화시켜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행복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름대로 정의한 행복을 가르칩니다. 실제 자신들의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특히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치료에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합니다. 어느 날 매우 초췌하게 생긴 환자 한 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그런데 상담을 받아보니 그의 상태가 아주 심각한 수준의 중증환자였습니다.
의사는 꾸준히 치료할 것을 권유하며 한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 한권 있습니다”. “무슨 책인데요?”. “유명한 철학자가 쓴 책인데 당신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책을 소개해 주십시오”. “혹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한참 후에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그 책의 저자입니다”. 이는 본인은 정작 행복하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노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그렇지 않을까요? 충분히 복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복음을 믿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말할 수 있고, 복음을 믿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행복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행복전도사라는 애칭으로 아침마당에 나와 행복을 강의하며 명성을 떨치던 분이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을 했습니다. 행복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를 노래하던 가수는 노래처럼 진짜 행복할까요?
그리고 행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언젠가 나도 헹복하겠지라는 꿈을 갖고 삽니다.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는 처녀들이 많고, 양귀비 같은 아가씨만 만나면 행복할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총각들도 많습니다. 어떤 이는 로또복권만 한번만 맞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점심은 굶어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로또를 구입한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행복하겠지라는 꿈을 갖고 사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록 지금 현실은 행복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머지 않는 장래에 행복이 나에게 다가올 것을 믿는 믿음마저 꺾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발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주변에 있고, 내안에 있습니다. 마냥 행복을 기다리고 살다가 이 세상에서 당신이 기다리는 행복은 구경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행복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행복이 있는 곳을 아십니까? 제게도 한번 알려주십시오. 행복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행복을 어떤 지정된 장소에 숨겨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좇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닙니다.
옛날에 행복을 모르던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고민하다가 스님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왕의 고민을 듣고 있던 스님이 처방을 내렸습니다. ‘왕이시여,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왕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아 그의 속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경들은 다른 일은 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구해보라’. 신하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유명한 장군, 부자, 학자, 미인들을 찾아다니며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행복한 자를 찾아다니던 한 신하가 어두운 날밤 피곤에 지쳐 강가에서 쉬고 있는데 어디서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하는 그에게 찾아가서 물어봅니다.
‘당신의 피리 소리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렇게 행복하십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그럼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신하는 크게 웃으면서 ‘당신의 속옷을 내게 팔수 있겠소? 내가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사내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지금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오, 어제 내가 길을 가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났소,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속옷까지 모두 벗어주고 말았다오’라고 말하더랍니다. 이처럼 상당수의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잡아다가 새장에 가두려고 합니다. 새장에 갇힌 새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당신의 행복을 당신이 만들어놓은 울타리에 가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행복한 조건을 가지고도 불행하게 사는 자가 있고, 불행한 조건을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살고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권세와 명예가 있으면 행복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소유나 조건이나 배경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지금까지 그런 것들로 사람들을 속여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철저히 속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지혜를 남용하여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신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회의를 했답니다. ‘인간들의 행복의 비결을 빼앗아 찾아가지 못하도록 숨겨버립시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요, 여러분은 어떻소?’. ‘그것은 말이 안되오, 인간들이 어디에 감춰도 찾아낼 것이요, 땅속에다가 감춘들 못 찾겠소, 그들은 행복에 미친 사람들이라오’. 그래서 신들은 여러 장소를 논의했습니다. 하지만 장소가 영 마땅치 않다고 모든 신들이 고민할 때 한 신이 외쳤습니다. ‘있습니다, 좋은 곳이 있어요, 인간들의 마음속에 감추어두면 가장 안전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지혜로운 인간들이라도 절대 거기까지는 생각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자 모든 신들이 기분 좋게 고개를 끄떡이며 회의를 마쳤다합니다.
웃고자하는 이야기 같지만 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행복은 전적으로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복 있는 자일까요?
(1)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1절)
세상이 제공하는 육신으로 것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단은 마치 자기들이 행복을 주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이 땅에 행복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토리를 찾으려고 주둥이로 땅을 파는 멧돼지처럼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일시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말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육신의 행복은 극히 불안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이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금방 행복한 것처럼 피었다가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합니다. ‘한 시간의 즐거움을 맛보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두 세 시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며, 일주일 정도의 행복을 위해서는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을 떠날 것이요, 한 달 정도의 행복을 맛보려면 새 차를 구입할 것이요, 일 년 정도의 즐거운 행복을 원하신다면 집을 새로 지을 것이며, 일생을 행복하게 살기 원하신다면 양심의 소리인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세상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도 울고 징징거리며, 양귀비처럼 절세의 미인을 데리고 사는 자도 속 모르는 소리 마라고 타박을 합니다. 백마 탄 기사같이 멋진 남자와 사는 여인도 당신이 한번 데리고 살아보라고 주문합니다.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연예인이나 스타들은 행복할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인기가 언제 떨어질지 몰라 잠을 제대로 못자는 경우가 허다하답니다. 많이 배운 자들은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는 것 때문에 더 많이 고통을 받고 불행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왜 안경을 써야하고 머리가 빠져가는 지 조심스럽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혹은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진짜 행복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돈 많이 버는 의사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는 때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은데 오직 나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는 아직도 행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들은 비록 행복이 주어져도 행복하다는 고백을 쉽게 못합니다. 어느 교회 돈 많은 장로님이 교회 게시판에 이런 광고를 냈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는 주일 새벽 세 시까지 교육관으로 오세요, 제가 천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장로님이 워낙 존경받고 돈도 많으신 분이라서 교인들은 의심없이 새벽에 모여 들었습니다. 이윽고 장로님의 면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제 삶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지금 이 상태로도 절대적으로 행복합니다. 모두들 자랑스럽게 말을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장로님을 만나고 나온 사람들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입을 다물고 나오더랍니다. 이유인즉, 장로님이 그들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무엇 하러 이 새벽부터 돈 천만 원에 욕심을 부리며 나왔단 말이요?’. 그들은 더 이상 장로님의 말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나온 것입니다. 절대 나만이 불행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본문 1절에 보면,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인의 ‘꾀’는 죄로 유인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은 죄악된 삶으로 나아가는 접근방식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죄악된 삶으로 길들여진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악인의 꾀를 통해 죄악을 구상하고, 죄인의 길로 접어들어 죄를 접촉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죄악중에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처럼 죄악도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스타일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스타일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두 갈래 길밖에 없습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뿐입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나오는 ‘자리’는 심령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만하고 거만하며 교만한 자는 절대 행복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항상 불행한 상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약4:6). 그리고 사람들도 오만한 자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만한 자의 자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겠다는 말입니다.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2)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2절)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또 하나의 조건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2절). 물론 1절에서 말씀드린 세상 사람들이 즐겨하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런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오(요1:1),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도 대표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만 ‘오직’이라는 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은 오로지 말씀만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즐거워하고 묵상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우리 인생의 행복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어떤 복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 받기를 원하신다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십시오. 그것만이 행복의 비결이요, 지름길입니다. 말씀 안에 인생의 모든 행복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 송이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씀과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충만하면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말씀과 친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거나 병든 사람은 말씀이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졸리고 불편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근히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거부합니다. 말씀이 즐겁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친해지지 않으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복 있는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삶을 행복하게 이끌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행복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모든 삶을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2절과 1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고 인생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인생의 행복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복 받기를 원하신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씀은 말씀의 생활화를 말합니다. 즉, 모든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잣대가 되고 표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행복의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고, 모든 복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음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시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6절)
사람들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최고로 행복해합니다. 사람에게는 강한 인정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인정받으면 학교생활이 행복합니다.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것은 교회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존재가치를 느끼면 살만한 가치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에서도 그러할진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행복이 우리 하나님께 있는데요.
우리 인생의 모든 복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른 곳에 기웃거리면서 복을 달라고 주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오, 모든 복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만족하십시오. 오직 그 사람이 진짜 복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복된 자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인정하십니다. 의로운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길만 인정하십니다. 의인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어떤 자일까요? 본문 1절에서 말씀드린 악인이 아니요, 죄인이 아니며, 오만한 자도 아닙니다.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이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도 당신을 인정하실 터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당신이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당신을 인정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당신도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모든 것이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의인임을 믿는 믿음은 주님이 당신의 성전 됨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당신을 성전 삼고 오심을 믿고 오직 주님이 당신의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시며, 머리가 되셔서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을 만져서 주님이 당신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고 확증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의인임을 당당히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은 당신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당신은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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