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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눅 18:9-14)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비가 내림으로, 우리를 괴롭게 했던 나쁜 공기들이 사라졌듯이, 하나님의 은총의 단비가 내림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악함이 깨끗하게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가 말한 것처럼,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6)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였습니다.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난 후,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 3:7-8)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그 어떤 지식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이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하고,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학자, 장로, 대제사장, 제사장이라는 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율법학자인 바리새인들은 유대 사회에서 아주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으며, 유대 종교를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들을 보면, 말은 잘 하지만 행함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칭찬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배움 탓에, 교만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자기들만의 특권의식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거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17-18)
바리새인들은 안과 겉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은 그럴싸 했는데, 행함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들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들이 지켜야 할 것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시편 119편을 보면, 율법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1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9-11절)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3-34절)
그들은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나라가 멸망당하였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였습니다. 그후 그들은 70년 만에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왔습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 말씀을 평생 동안, 지키고자 하는 율법학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좋았으나, 갈수록,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많아졌는데, 그 아는 것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꾸 이것저것 따지고, 또 쓸데없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것들이 자신들을 의롭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어지는 기계가 엘리베이터일 것입니다. 초고층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습니다. 아파트 하면, 20-30층은 기본입니다. 예를 들어, 30층에 사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걸어서 올라가거나 내려와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엘리베이터를 어떻게 사용합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고자 하는 층수 번호를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번호 누르는 것이 어렵습니까? 힘이 듭니까?
안식일, 토요일에, 유대인들은 엘리베이터를 어떻게 이용할까요? 평상시처럼, 가고자 하는 층수 번호를 마음껏 누를 수 있을까요? 안식일에는 일할 수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한때, 주일에 버스를 타지 않았고, 음식을 사 먹지도 않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할 수 없기 때문에, 버튼을 누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용합니까? 엘리베이터가 혼자 알아서 움직입니다. 30층이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층마다 멈추도록 해 놓았기에, 문이 30번이나 스스로 열리고 닫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안식일, 토요일에 과연 그런가 하고 확인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엘리베이터를 그렇게 해 놓은 것은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두 대 이상일 경우, 한 대를 그렇게 해 놓는다고 합니다. 그런 엘리베이터를 직접 보았을 때, 신기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할 수 없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에만 치우치는 그런 삶을 살았고, 또한 그런 삶을 강요했던 사람들이 바로 율법학자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안다고, 자기만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0-12절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세상 사람들과 세리와 자기를 비교했습니다. 토색하는 자, 불의하는 자, 간음하는 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쁜 아주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떻습니까? 세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 공무원입니다. 지금 세무서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을 보고, 무조건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하는데, 세리가 세금 걷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이기에, 세리이기에,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리새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울을 가리켜, 그가 바리새인이었기에 아주 나쁜 사람이었다고 욕하는 사람 있습니까?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세리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자기 이름 앞에, 세리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9:9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자신이 세관에 앉아, 세리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에,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도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는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대접했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라는 삭개오의 말에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기에 무조건, 형식적인 사람이요,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리이기에,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돈을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빼앗아가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멸시하며,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우월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토색하는 자, 불의하는 자, 간음하는 자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단지, 세리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다릅니다. 구별할 수는 있지만,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자기를 비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자기는 옳은 사람이고,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상대방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랑에 빠졌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 높였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데, 마땅히 기도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자리를 기도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멸시하고, 자기 자랑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어떠한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지만, 제단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시몬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고기의 많고 적음보다도, 고기를 어떻게 해서 많이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갔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라는 물음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로 변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리는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세금을 거두는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세금을 열심히 걷다 보면, 자기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떤 세리들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사람이었기에, 민족적인 감정이 더해져, 세리 하면 매국노와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세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같은 백성들로부터도, 나쁜 사람이라는 욕을 먹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삶이었기, 성전에 올라온 세리는 얼굴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여러분! 다른 말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고, 자기 자신이 더 깨끗해질 수가 있습니까? 더 의로워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리와 같지 않다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두가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슨 말도, 무슨 자랑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습니다. 어릴 적, 들판에서 양들을 돌볼 때, 범죄했습니까? 아닙니다.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백성을 돌볼 때, 범죄했습니다. 다윗이 범죄했을 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얼마나 높은 자리입니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런 높은 자리에 앉고 난 후에, 범죄했습니다. 왕이라는 자리가 그를 의롭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왕이라는 자리가 그를 죄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와, 그가 범한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03)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다른 어떤 변명이 필요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얼마나 황홀한 자리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옹위하고 있던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엎드린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맨 처음 고백은 과연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불결하며, 추하고, 더러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 외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 모든 재물을 다 낭비해 버린 둘째 아들이 먹을 것조차 없어, 다 죽게 되었을 때, 생각난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둘째 아들이 생각한 것은 “나는 죄인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토색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바리새인의 고백처럼, 그런 자기 자랑의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세리의 고백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는 둘째 아들의 고백처럼, 그런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로움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랑할 것이 있다고 자랑한다면, 다른 사라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고백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시는 주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교만함이 아니라 오직 겸손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우리의 의로움과 공로를 앞세우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