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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8;1-10. 만나를 먹이신 이유!!! 2023. 11. 5.
이제부터 감사의 계절이고, 열매의 계절이고 수확의 계절입니다. 기도하기는 여러분의 11월이 이런 감사와 수확과 소출이 있는 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삶은 항상 열매의 계절이었습니다. 수고와 땀 흘림이 없어도 그냥 저절로 얻는 수확이었고 소출이었습니다.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말씀으로 보지 않았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성과 감정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던지는 전략에 빠졌습니다. 허물과 죄악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이런 허물과 죄악 때문에 우리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복종하고 사랑해야만 했습니다. 주종관계로 변했습니다. 또 이전에 저절로 얻었던 수확과 소출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그냥 만들어지고 그냥 얻는 것이 없습니다. 수고하고 노력을 하고 땀을 흘리고 싸워야만 했습니다. 어두움과 흑암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심는 것마다 쓴 뿌리와 엉겅퀴로 인하여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생육강식이 도입 되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고 인간의 마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눔이 없었고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웃이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기준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족장시대로 이어졌고 애굽의 생활까지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430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모세의 지도하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홍해를 건너게 되었고 지중해 연안의 길이 아니라, 광야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광야에서 베푸셨던 하나님의 준비하시고 주셨던 만나를 통하여 베고픔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주셨던, 그리고 저절로 얻게 하셨던 그 만나에 대한 말씀인데, 그 만나를 40년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왜 주셨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입니다. 왜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왜 이렇게 복을 주셨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1-3.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은 왜 이런 은혜와 복을 주셨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만나를 주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만나를 먹어야 하루하루를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세상을 이기고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것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증거가 되도록 하셨는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4-6.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 지니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날마다 경외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어떤 땅입니까? 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들어가게 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데, 그 땅은 골짜기이든지, 산이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풍성한 소출이 있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풍성한 수확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며 산에서는 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옥토를 주셨다는 고백을 하며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노력과 애씀과 눈물이 없이 얻은 구확이고 소출이기 때문입니다. 엉겅퀴와 쓴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내가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엉겅퀴와 쓴 뿌리를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는 상황을 뛰어넘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명하여 보낸 일에는 형통함이 있습니다. 이 것이 본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1. 매일에 대한 양식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광야가 무엇입니까? 애굽을 탈출해서 걷게 되는 광야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를 하는데 광야 또한 인생이 걸어야 하는 삶으로 표현을 합니다. 왜요? 광야에 있을 때에는 해야 할 임무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으며 광야에 있을 때에는 그 무엇에 메여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깨어 있고 살아 있으면 됩니다. 앞으러 진행을 하고 전진하면 됩니다. 이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배웁니다. 광야에 있을 때 단순해지고 광야에 있을 때 깊어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광야에 있을 때 좀 더 자신다워지고 좀 더 정리되고 좀 더 자연스러워 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광야생활에 익숙해 질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매우 자주 하나님을 찾게 되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적이고 시적인 의미를 떠나서 실제 지질학적 의미로 보면 광야는 전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보통 광야란 텅 비어있고 아득하게 너른 들판입니다. 이 것을 중동지역으로 옮겨보면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동남아시아의 광야에는 동식물이 살고 조금 노력을 하면 사람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의 광야는 바위와 자갈로 덮여있어서 약간의 식물과 파충류와 사나운 짐승만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 곳이든지 다닐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고 왕만이 지나다니는 왕의 대로만이 있습니다. 농사나 목축을 생각할 수없는 불모지가 광야입니다. 그래서 이런 광야의 기적은 다른 곳에서의 기적보다 더욱 놀랍고 더욱 경이롭습니다. 또한 광야는 겁이 나는 곳입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입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곳이고, 얌전하게 보이던 동물도 순식간에 맹수로 변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방법과 수단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에는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성이나 자연과학적으로 믿기 어려운 일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과 돌기만 했는데도 성이 무너진 것과 소수의 병력으로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기고 승리한 것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 약 200만 명이, 장정만 60만이라니까 딸린 가족들까지 합치면 그 정도는 되겠지요-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않은 기적입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200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도 하루 이틀, 한두 달도 아닌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이곳저곳에 옮겨 다녔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자연의 법칙대로 하면 그들은 모두 며칠 못 버티고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았습니다. 40년 동안 살아남게 된 이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이40년의 광야 생활을 민수기, 신명기, 출애굽기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라고 합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경험하고 거기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고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남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광야 생활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은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습니다. 장정 60만과 그 가족들, 그리고 기르던 가축까지 다 몰고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는 지중해에 맞닿은 서쪽 해안 길을 따라가면 10흘 정도이지만 길으면 20일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길은 홍해를 건너 시나이 반도를 거치는 광야의 길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지 삼일 만에 마라라는 곳에서 첫 번째 위기가 오는데, 그곳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구했더니 한 나무를 주시는데 그것을 샘에 던졌더니 물이 달게 되고 백성들이 그 물을 마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첫 번째 기적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집트에서 나온 후 한 달 정도 되었던 때였습니다. 갑작스럽게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안은 이집트에서 갖고 나온 양식으로 버티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졌습니다. 온 백성의 먹을 양식이 완전히 바닥났습니다. 당장의 끼니도 문제지만 가나안 도착 때까지 어떻게 양식을 구해야 할지는 정말 엄청난 큰 문제이었습니다. 이동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것도 이 때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먹는 문제에 대한 항구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시겠다. 다만 그 양식은 꼭 일용할 분량만, 그러니까 매일 하루치씩만 주셨습니다. 물론 안식일 전날은 일용할 양식의 2배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그것을 주워 먹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주신 것이 바로 만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후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접경에 도착할 때까지 하늘에서 계속 떨어졌습니다. 단 하루도 빠짐이 없었고, 장소가 어디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무엇입니까?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매일의 만나로 주시고 어디에서든지 주셨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장소에 불문하고 어느 곳이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매일의 말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만나의 공급은 골짜기이든지, 산이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풍성한 소출이 있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풍성한 수확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며 산에서는 동이 나오는 그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매일의 만나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시간만 있으면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를 매일 공급하시는 것은 불평이 아니고, 도리어 꿈을 갖고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무슨 꿈과 비전입니까? 처음의 약속입니다. 출16;2-9까지 많은 원망을 합니다. 너댓 차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출16;7절,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말과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찬송과 영광도 들으시지만 반면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 역시 듣고 계십니다. 민14;28에는 더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그 원망에 대해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의 말이 하나님에게 들린 대로 행하신데요. 승리하고 꿈을 이루고 비전을 말하면 그대로 됩니다.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날마다 죽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죽겠다는 표현과 그 소원대로 그대로 행하십니다. 여러분,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미래를 좌우하고, 우리의 태도가 미래를 좌우합니다. 그래서 약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를 나무에 비유했지요? 나무 한 그루가 작아 보이지만 산불을 일으켜서 모든 나무를 다 태워 버립니다. 또 혀를 배의 키로 비유를 합니다. 약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커다란 배가 있는데 그 배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지극히 작은 키인 것처럼 작은 세 치 혀의 하는 말이 배의 진로를 바꾸듯이 인생의 진로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10년 후의 모습을 보시려면 지금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말대로 됩니다. 말이 미래를 바꾸는 배의 키와 같습니다. 특별히 광야생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적어도 내 인생에 사랑이 있고 영광스런 인생이 되고 싶으시면 원망하지 마시고 항상 감사하고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끄신다는 믿음의 말로 우리 입술을 채워야 합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말을 해야 하고 믿음으로 하는 표현들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시인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말에서 실수를 했고 하나님이 그들 말대로 –절대로 우리는 가나안에 못 들어갈 거다 – 하는 얘기를 들으셔서 그들의 소원대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41;3. 여호와여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이 표현이 얼마나 웃기는 표현입니까? 입술 앞에 보초를 세워달라고 합니다. 왜요? 함부로 말을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나를 지키기 위해서 저기 보초들이 서 있는 것처럼 내 입술을 지키기 위해서도 보초를 세워 주세요. 얼마나 리얼한 표현입니까? 다윗은 입술에 대한 복과 은혜를 구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광야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비전과 꿈을 향하여 전진을 했습니다. 기나긴 세월의 흐름도 있었지만 얼마 안 되는 시간, 또한 지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는 길을 지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은 뜨거운 가슴이 말하고 뜨거운 눈물이 말하는 그런 신앙과 그런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원망과 불평이 나올 때마다 비전을 품고 꿈을 갖고 처음 약속을 생각하면서 성곽이 없는 광야로 가야 하는데 출16;31절에서 꿀 석은 과자 맛이라고 합니다. 꿀맛입니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프고 필요에 따라 공급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의 문제 앞에서는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어떤 것을 주어도 모든 것이 꿀맛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매일이 꿀맛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육체의 반응이 다르다고 합니다. 민11;7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표현합니다. 유과 맛이었습니다. 꿀맛에서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맛나가 변한 것입니까?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고 나중에는 유과 맛의 만나를 주셨습니까? 같은 은혜를 가지고 불평을 합니다. 같은 축복을 가지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같은 것으로 안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계속적인 은혜가 지속이 되면 육체의 반응이 다르고 마음의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릅니다. 처음 것으로 만족을 못합니다. 그래서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좋은 것으로 채우셔도 같은 모양과 같은 색깔과 같은 강도와 같은 시간으로 주어지면 육체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면 그래도 들어줄 만 합니다. 어디까지 원망하고 불평하는지 아세요? 민21;5절.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원망하는데 애굽에서 인도한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물도 없고 먹을 식량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도 만나를 주시는데 왜 없다고 말을 합니까? 그들의 입맛에 박한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박한 음식의 niv 성경은 miserable food, 지겨운 음식입니다. 여러분, 결국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 때까지 만나를 주시는데 그 만나가 싫고, 박한 식물이 되었습니다. 박한 식물이 무엇입니까? 마실 그 무엇이 없으면, 물이 없으면 넘어가지 않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도 없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보초를 세우고 파숫꾼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는데, 만나를 먹이시고 만나를 주신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처구니.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궁궐의 전각이나 히메지 성 같은 문루의 기와지붕 위에나 추녀 위에 사람이나 갖가지 기묘한 동물들의 모양을 한 토우(土偶: 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있는데 이를 어처구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궁궐이나 성문을 짓는 와장(瓦匠)들이 지붕의 마무리 일로 어처구니를 올려야 하는데, 실수로 잊어버리는 경우를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의 어처구니는 맷돌의 손잡이입니다. 그 무거운 돌 두 짝을 포개어 놓고 한쪽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데, 손잡이가 없으면 어떻게 돌리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손잡이가 없이 돌려야하는 상황을 가리켜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삼손이 돌렸던 맷돌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나실 인의 복이 떠난 이후에, 그러니까? 나실 인으로서의 모든 능력과 권능과 초월적 은혜가 모두 떠난 뒤에 그는 맷돌을 돌혀야만 했습니다. 그 돌려야만 했던 맷돌의 손잡이가 어처구니이고, 두 눈이 뽑히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거대한 맷돌을 돌려야만 했던 삼손의 삶을 가리켜서 어처구니가 없다고 했습니다. 리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나에게 일어나고 발생되어진 문제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항상 따라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물어야 합니다. 이 것이 신앙이고 이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광야 생활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책임지시고 축복하실 줄로 믿고 믿음가운데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40년 광야 가운데 주신 만나를 보면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출16: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만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daily bread, 매일의 빵입니다. 어제 주신 빵이나 내일 공급될 빵이 아니라 오늘 공급되는 빵입니다. 일용(日用)이라는 뜻은 하루에 쓸 분량입니다. 그러면 왜 한 달 치나 일 년치를 한꺼번에 주시지 않았을까요? 만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만나를 통해서 매일 매일 하나님만 철저하게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어제나 한 달 전에 얻은 은혜가 너무 커서 그 힘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오늘 아침에 새로 얻은 은혜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만나는 해가 뜨면 곧 사라져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에 먹는 것 배우고, 새벽에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새벽에 나가지 않으면 그 날의 먹거리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새벽에 공급하시는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새벽 그렇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나가서 부르짖고 외침으로 인해서 날마다 말씀의 양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런 훈련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더 주시고, 반드시 잉여분을 주십니다. 잉여분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이유는 나누어 주고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누어 주고 심지 않으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고, 쓸 때 쓰지 않으면 결국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이 어떻게 풀려지느냐? 가진 강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셨는가? 무엇을 준비시키셨나? 장점을 드러내고, 그것을 가지고 일하되 겸손하고 이유를 알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전히 인생의 광야를 지나고, 먹고 있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귀에 들린 대로 이뤄 주시는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에 고아같이 홀로 두시지 않겠구나! 굶기시지 않겠구나! 염려 근심을 다 맡아 주시겠구나! 험한 길을 고르고 순하게 닦아 주시겠구나! 결국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구나! 이런 일상으로 주시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광야생활과 이동생활을 하면서 잠 잘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깰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것, 숨을 쉬면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과 매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이런 일상의 복들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여러분, 내 자신의 눈과 귀와 생각에 속지 않아야합니다. 왜냐하면 드러난 것과 의미는 항상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것과 듣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롬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여러분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입니다. 만나를 주신 이유인데 결론입니다. 매일의 양식이지만 결국에는 결론입니다. 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들어가게 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데, 그 땅은 골짜기이든지, 산이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풍성한 소출이 있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풍성한 수확이 있기 때문에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며 산에서는 동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옥토를 주셨다는 고백을 하며 찬양을 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수고와 노력과 애씀과 눈물이 없이 얻은 구확이고 소출이기 때문입니다. 엉겅퀴와 쓴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우시고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감사하며 광야를 지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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