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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4.-15일간 임진왜란 노량해전 전적지 관광 이야기 2부.
(3.15일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남해충렬사 관광)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는 이순신 장군이 관음포 해전에서 전사했을 때 시신을 운구해 와 임시 안장했던 가묘와 현충시설이(사당.비각.내삼문.외삼문.청해루 등) 있는 곳이다. 이 현충시설를 “남해충렬사”라고 했다. 통영시에도 통영충렬사가 별도로 있다. 이곳의 남해충렬사는 도로변의 남해충렬사안내소 건물 우측으로 돌아서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남해충렬사 입구문이 나온다. 가파른 산언덕 속에 위치하고 주변은 숲이 우거져서 도로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숲속에 남해충렬사가 꼭꼭 숨겨져 있다. 그런데 금일은 너무 이른 아침 시간대( 07시30분경) 라서 남해충렬사 안내소건물과 남해충렬사 입구문도 모두 닫혀 있어서 내부 구경은 못했다.
( 남해충렬사 안내소 건물 앞에 세워진 남해충렬사 안내도 모습)(사진속에서 우측은 안내글이고 좌측은 남해충렬사 안내도면임. 도면 아래는 안내도면의 범례표시임.)
(남해충렬사 안내도 설명문 기록내용)
“ 남해충렬사는 충신과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남해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의 유구를 처음으로 안치한 것
을 기려서 순국한 지 30년째 되던 인조6년(1628
년)에 지역의 선비들이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9년(1658년)에 다시 지었으며 현종
4년(1663년)에 통영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액을 받았다.”
“ 사당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
무이공묘비가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내
삼문,외삼문,청해루 등이 있다. 사당 후원에는 충
무공의 시신을 초빈했던 곳에 가묘가 있다. 사당을
세운 이후에는 충렬사 옆의 호충암에서 화방사의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 ”
* 초빈=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체를 방안에 둘 수
없는 경우에 관을 바깥에 놓고 이엉같은
것으로 덮어서 눈비를 가리는 것.
* 가묘=정식으로 묘를 만들기 전에 임시로 쓰는묘.
* 승장=승려들로 조직된 군대인 승병의 장수.
* 사진속에서 숫자로 표시된 곳의 건물 이름.
①=가묘
⓶=사당
⓷=비각
⓸=내삼문
⓹=외삼문
⓺=청해루 ”
(남해충렬사의 입구문)(이른 아침시간대라서 안으로들어가는 출입문이 잠겨있음.)
(남해충렬사 입구문 우측에 세워진 충렬사임을 알리는 비석모습) (이 비석에 쓰인 글은 “로량바다는 리충무공 전사하신데라 여긔에 충렬사를 세우니라”고 기록됨.한글맞춤법이 왜당시의 문법에 따른것으로 보임.)
(도로변에 있는 남해충렬사 안내소 건물모습.이 사진우측으로 충렬사 안내도면이 그려져 있으나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음.)(이 안내소 건물 뒤쪽 상단 숲속에 남해충렬사 사당이 위치하고 이 안내소 건물 좌측 도로변에는 노량해협의 바다가 있음.)
(3.15일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남해충렬사 주변 관광)
남해충렬사 안내소건물 좌측 도로를 건너면 노량해협 바다다. 바다 건너에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마을이 훤히 보인다. 바다위로는 남해대교와 노량대교가 쌍둥이 다리처럼 노량바다를 공중으로 횡단하고 있다. 그 다리 모습이 무척 예쁘게 보인다. 그리고 이곳 도로변 바다가에는 모형 거북선 선착장이다.
(노량해협위로 쌍둥이다리처럼 세워진 앞쪽의 남해대교와 뒤쪽의 노량대교모습.)(바다건너 마을은 하동군 노량리 마을임.)(이 바다 왼쪽은 남해군 노량리 마을이지만 보이지않음.)
(남해군설천면 노량리 쪽에서 바라본 노량대교 진입로 모습)
(남해군설천면노량리 선착장에 정박한 모형거북선과 남해대교 및 노량대교 모습)
(남해군설천면노량리 모형거북선 안내문 기록내용)
“ 이곳 노량리에 있는 거북선은 1591년 건조한 돌
격용 전선이다. 이충무공전서와 옛 선박관련 기록
을 참고해 노산 이은상 등 학계전문가 16명의 고
증을 받아 1980.1.31.에 해군공창에서 복원해 해
군사관학교에서 전시 관리하던 것을 류삼남 전해
군참모총장이 주선하여 1999.12.31.에 이곳으로 옮
겨 국민과 청소년들에게 이충무공의 호국정신과 창
의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해 호국의 성지인 남해충렬
사 아래에 정박하였다. ”
“(관람료500원/관람시간09시-17시/휴관일 매주
화요일.설날.추석.1월1일/전체길이 25.5미터 /
승조원130명/노16개/함포14문/속력최대6노트)”
이렇게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남해충렬사 일대를 둘러본뒤 우리는 08시22분경에 다시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소재 이순신바다공원 관음포 광장으로 향했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남쪽으로 5km쯤을 더 달리니 이순신장군바다공원 관음포 광장이었다.
(3.15일 이순신장군의 전사지인 관음포 앞바다 볼거리내용)
이순신장군의 전사지는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 앞바다이다.여기에 있는 첨담정이란 누각 즉 전망대에서 장군의 전사지인 관음포 앞바다가 서쪽으로 멀리 보인다.
이곳 차면리에는 (1)이순신장군 바다공원이라는 공원. (2)이락사 사당과 유허비 (3)첨담정이라는 누각(관음포앞바다 전망대) (4)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기록한 유언비 (5)이순신장군홍보영상관 등이 잘 설치되어 있다.
(3.15일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소재 이순신바다공원 관음포 광장 관광)
이순신바다공원 관음포광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08시35분이었다. 남해충열사에서 약 13분이 소요된 거리였다.
(이순신바다공원 종합안내도 도면모습)
(이순신바다공원 종합안내도에 기록된 설명문 내용)
“ 이순신바다공원은 공원의 한 면 전체가 바다를 향
하고 있습니다. 공원에서 보이는 바다는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이 벌어진 격전지이자
이순신장군이 순국한 바다이다. ”
“ 축구장 9개가 들어가는 넓은 면적의 공원에는 이순
신장군을 기리는 유적,광장과 야외전시장,놀이터 등
이순신장군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특히 사적으로 지정된 남해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에서는 1832년에 세운 유허비와 비각
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소나무와 동백숲
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첨망대로 이어지는 숲길을 거
닐며 이순신바다공원을 오롯이 느껴보시기 바랍니
다.”
*안내도면 범례표
①이순신캠퍼스(전통놀이 체험실은 거북선 만들기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⓶이순신체험공원(테마별로 즐길거리가 있어 어린이
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⓷첨망대(이순신장군의 전사지 바다를 관조할 수 있
는 누각)
⓸이락사(이순신장군을 모시는 사당으로 유허비가 세
워져 있다.)
⓹이순신영상관(상영물과 전시물을 통해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의 역사를 배움)
⓺순국의 바다(석양이 아름다운 포토존지역이다.이순신
장군의 바다를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⑦바다광장(동상과 바다전시장 위령탑을 돌아보며 임
진왜란에 참전한 선조들의 희생과 공을 되
새겨 볼 수 있음)
이곳 이순신바다공원 관음포 광장 내의 이순신체험공원 구역에는 고려 우왕9년인 1393년에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를 대파한 관음포대첩의 명장을 기리는 정지장군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이후 정지장군은 해도도원수를 (해군총장의 직위) 역임한 고려 때의 장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 관음포는 고려때부터(1393년) 왜군과의 격전지였고 이어서 임진왜란 때도(1592년이후) 이순신장군 수군과 왜군과의 격전지였다.
(고려때 정지장군의 관음포대첩비 모습)
(남해관음포 이충무공유적 안내판)(이 도면에서 사진중앙 좌측의 녹색나뭇잎 모양은 소
나무숲으로 이뤄진 땅임(반도임). 이 땅의 위쪽과 아래쪽은 바로 관음포 바닷물임. 소나
무숲의 땅에 있는 ⓵은 충무공유언비 ⓶는 이락사 유허비 ⓷은 관음포바다를 바라보는
첨망대 누각이 있는 장소를 나타내고 있음.)(①부터 ⓷까지는 약2km의 소나무숲속으로
난 산책로이며 왕복30분정도 걸림)
( 남해 관음포의 이충무공 유적에 대한 안내글 내용)
“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은 선조31년(1598년) 노량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이곳에서 이충무공은 관음포로 도
주하는 왜군을 쫒던 중 적탄에 맞고 순국하였다. 그
이후 관음포 앞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 라는
뜻에서 이락파라고도 한다. ”
“ 조선 순조 32년에 (1832년) 이순신장군의 8세손 통제
사 이항권이 왕명에 따라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
적을 기록한 유허비를 세웠다. 충무이공순신 유허비는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가 짓고 예문관 제학 이석희가
썼다. ”
“ 해방후 1950년 남해군민 7000여 명이 헌금하여 정원
과 참배로를 조성하고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
와 대성운해라는 현액을 내렸다. 1998년12월16일 충무
공 이순신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여 유언비를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이 유적은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
의 공로와 충의가 담긴 역사의 공간이다.”
(이락사 입구에서 바라본 이락사 모습과 입구 우측에는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
을 알리지 말라 ”는 충무공의 유언비 비석모습)(계단위의 숲속에 보이는 집이이락사 모습
임.)(이락사는 관음포바다에서 순국한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는 뜻임.)
(이락사 입구 우측에 세워진 충무공유언비인 “戰方急 愼勿言 我死”(전방급 신물언아사)라
고 돌비석에 새겨져 있음.) (이 유언비 우측하단 안내판에는 노량해전의 상황일지가 기록
되어 있음.)
(노량해전의 해전 상황일지 기록내용)
(3.15일 이충무공의 유언비와 노량해전 상황일지 기록내용)
이충무공의 유언비 내용은 “戰方急 愼勿言 我死”(=전방급 신물언 아사)(=전쟁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알리리 말라) ”라는 말이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돌비석 우측하단의 안내표지판에는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의 해전 상황일지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 1598년음력11.18일22시경-조명연합함대는 묘도를 출
발해서 명수군은 노량수로쪽으로 이동, 조선수군
은 관음포쪽으로 향했다.
1598년음력11.18일24시경-관음포에서 이충무공은 축천
기도를 드림.기도문은 만약 이 원수를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아무런 근심이 없겠나이다 였음.
1598년음력11.19일02시경-조명연합대 400여척과 일본
군300여 척이 접전을 시작함.
1598년음력11.19일 아침-혼전중 일본군 총탄이 이충무
공 왼쪽가슴을 관통함.임종전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의 유언을 남기고 순국.
1598년음력11.19일12시경-일본전선 200척을 분멸시키
고 50여척은 도주함. ”
(이락사라는 사당 모습)(1965년 박정희대통 령이 하사한 이락사라는 현액 모습임.)(이 락
사 우측에는 같은시기에 박정희대통령이 하사한 대성해운이라는 현액이 있음)
(대성해운이라는 현액 모습)(이락사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시기에 하사한 현액
이 바로 이락사 우측변에 세워져있음)
(이락사 입구에서 소나무숲속으로 첨망대 누각까지 이어진 2km의 산책로 모습)
(관음포앞 바다가 조망되는 첨망대 누각 모습)
(첨망대누각에서 바라본 관음포앞 바다의 충무공 순국지 모습임.)
이곳 관음포 첨망대 누각에서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 전사지인 관음포바다를 바라보니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500여년전인 1498년 임진왜란 노량해전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을 끌어모아 최선을 다했던 장군님의 죽음이 사무치게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노량해전에서 살아남아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순국하신 장군님의 영혼에게 삼가 명복을 빌 뿐이다. 그래서 한국역사는 이렇게 훌륭한 분이라서 성인의 반열로 인식하자고 성웅 이순신 장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해서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이순신바다공원관음포 광장내의 이순신체험공원에서 관음포대첩비,남해관음포이충무공유적과 대성운해,충무공유언비와 노량해전상황일지기록문, 이락사와 유허비, 첨망대누각과 충무공전사지 관음포 바다까지 둘러보고 이락사 입구로 다시 돌아왔다.
이락사 입구 북쪽으로 이순신영상관 건물이 보이지만 오늘 상경일정을 고려해서 영상관건물의 내부구경은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09시41분이다.
(3.15일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광양매화축제장으로 출발)
이순신바다공원 주차장을 출발해서 남해고속도로 하동ic-진월ic를 빠져나와 광양시 매화축제장을 찾아갔다. 매화축제기간은 3.8부터 3.18일까지 라서 아직은 축제기간이다.
그런데 금년 광양매화축제장 진입차량은 섬진강 둔치의 대형 주차장으로 차량을 안내했다. 둔치주차장은 그 크기가 엄청 컸는데 벌써 많은 차량이 가득찬 모습이다. 주차된 차량들은 수많은 꼬막껍데기를 땅바닥에 빼꼼히 엎어놓은 것 같다. 빈 자리가 있다고 안내요원이 들어가라고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 빈자리에 주차를 했다. 주차된 차량들 틈새를 빠져나와 우측길를 따라 셔틀버스가 출발하는 장소로 찾아갔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 길이가 100미터는 넘는 것 같았다. 대형 셔틀버스는 약5분 간격으로 사람들을 매화축제장까지 실어 나른다고 한다. 도보로 걸어가면 약 2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매화축제장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려고 줄을 서고 있는 관광객들 모습)
셔틀버스를 타고 매화축제장 승하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01분경이다. 매화꽃밭 속으로 난 산책로에 들어서니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꼬리를 문다. 매화꽃들은 벌써 파장에 접어든 모습이다. 매화꽃들은 흰색 매화꽃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7-8년전에 한번 와서 구경했던 곳이라 큰 호기심은 없었다. 대충 한번 훑어본다는 생각으로 산책로를 걸었다. 매화축제장 중심부까지 올라가지 않고 중간쯤의 음악축제장에서 빽코스로 돌아 나왔다.
(매화축제장내의 음악축제장 모습)
(음악축제장 무대에서 연주하는 여인 모습)
(음악축제장 무대 한쪽에 세워진 시비모습)
(시비에 새겨진 “사랑하는 사람아” 라는 시의 내용)
“ 아픈 마음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도록 허전할 때
내가 채워줄 수 있는
가슴이 되어 줄게 ”
“ 사랑하는 그 사람 가슴에
구멍나도록 아플 때
내가 때워 줄게
사랑하는 그 사람 가슴속에
내 마음 숨어있다가
힘들 때 꺼내 볼 수 있는
눈물 닦아줄 보고싶은 사람이 되어줄게 ”
“ 가끔 아련히 떠오르는 그 얼굴
눈가가 젖도록 그리운 그사람
표현 못할 뿐이지
사랑이 별 것인가.
보고 싶은 사람이면
사랑이제 ”
2020년 봄.
아름다운 농사꾼 홍쌍리.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무척 아껴주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이다. 보고싶은 마음이 있으면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이 시인은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 사랑이란 실체를 가장 쉬운 말로 잘 표현하고 있다.
(광양매화축제장내의 음악축제장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섬진강변 모습)
(3.15일 광양매화축제장에서 상경길)
이렇게 광양매화축제장을 대충 둘러본 우리는 3.15일 12시47분경에 매화축제장 주차장을 출발해서 상경길에 올랐다.
구례ic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진입-완주분기점-익산분기점-유성분기점-회덕분기점-중부고속도로진입-호법분기점-여주분기점-양평ic-화도분기점-퇴계원ic-의정부ic를 빠져나와 도봉동 아파트단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19시27분이다.
광양매화축제장에서 서울까지는 6시간 40분이 걸렸다. 중부고속도로는 공사중이라고 밀렸고 양평포천고속도 화도분기점에서 100번고속도 의정부ic까지는 퇴근시간대라고 밀렸다.
금번 1박2일간 여행은 광양시 이순신대교,섬진강포구 배알도섬,정병욱교수와 윤동주시인의 인간관계 기록물이 전시된 가옥,하동재첩국식당,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 전적지(하동군금남면노량리와 남해군설천면노량리,고현면차면리),광양시 매화꽃축제장까지 잘 둘러본 멋진 여행이었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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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간 비용 지출액 : 155,429원)
1.1박2일 왕복주행거리 : 900km
2.평균연비:24.4km/리터당.(계기판에 표시된 내용이지만
정확성은 검증하지 못함/하이브리드 차임)
3.휘발유값=900km/24.4km*1580원=58,279원
4.고속도로통행료=36,300원(9건)-할인50%환급=18,150원
5.조식용 김밥 1인분= 2,000원
6.하동읍내재첩국(점심값2인분)=27,000원
7.남해군설천면노량리민박집1박숙박료=40,000원
8.집사람 구매내역 : 10,000원
가.휴게소 옥수수차 1병=5,000원
나.휴게소 빵 1개=5,000원
9.여행비용지출액 총액 : 155,429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