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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자료 스크랩 퇴계선생 발자취를 찾아서 2
이장희 추천 0 조회 47 14.10.08 21: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퇴계선생 발자취를 찾아서 2

 

 도산서원 앞에서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가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이 금송이다. 금송은 정원수 중에서 가장 값이 비싼 나무이다. 2년 전에 우리 학교가 녹색학교로 선정되어 품위 있고 멋이 있는 나무를 심어 볼 욕심으로 금송과 주목을 구하러 전라북도 정읍까지 간 적이 있다. 금송을 심고 싶었으나 20년 된 금송을 한 그루에 운반비 포함해서 삼백만원이나 달라고 해서 포기했다. 금송의 높이는 160cm에 불과했다. 정말 비싼 나무가 금송이었다. 산지에서 그 정도였으니 조경업자는 두 배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산서원의 금송은 지금껏 내가 본 금송 중에서는 가장 크고 굵다. 이 나무를 보기 전에는 이 나무의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나무가 내가 아는 최고의 나무였다. 그것은 부산중학교 현관 입구에 동창회에서 기념 식수한 금송으로 수천 만 원을 들여 구입했다는 설이 있다.

                         도산서원 금송

 

 지금 이 나무의 값을 매긴다면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대단한 나무다. 나무 밑에 표지석이 있는데 박대통령이 평소 아끼는 금송을 청와대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손수 심었다는 내용이다. 전체적인 정원의 균형미를 조금 어긴 점은 있겠지만 퇴계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지극했다는 일면을 볼 수 있다.


금송을 감상하고 왼편으로 들어서니 도산서당이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5년에 걸쳐 직접 지어 1561년 회갑인 해에 완공한 건물이다. 도산서당 현판글씨는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지만 山자가 멋이 있다.

 도산서당 현판

 

이 도산서당이야말로 선생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다. 선생이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은 가르친 곳이다. 선생께서 주무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고 하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한다.

완락재는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서 따온 말이다. 낙이완지고족이종오신이불염(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즉 道와 理를 즐기고 완상하면 죽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산서당 마루에서

 

암서헌은 암서란 뜻은 속세를 떠나 산다는 말로 주자의 운곡시에서 나온다. 자신구미능암서미효(自信久未能巖栖微效) 즉 학문에 자신이 오래도록 없었는데 바위에 기대서라도 작은 효험을 바란다, 라는 뜻이다.

마당에는 몽천(夢泉)이라는 우물이 있다. 몽천이란 산 밑에서 나오는 샘물이다. 주역의 네 번째 괘인 산수몽(山水蒙)에 나오는 것으로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 바르게 가르친다는 의미다. 주역의 <象曰 山下出泉 이 蒙이니 君子以하야 過行하며 育德하나니라>에서 나온 말이다. 즉 산 밑에 샘이 나는 것은 몽이니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서 행동을 과단성 있게 행하며 덕을 기르는 것이다.

즉 몽은 어리다, 어리석다의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리고 어리석지만 시일이 경과 할수록 발전의 여지가 있음을 말해 준다.

  몽천

 

농운정사는 제자들의 기숙사다. 선생이 처음 지은 건물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뿐이다.

도산서당을 나와 천천히 올라가면 곳곳에서 매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선생의 매화사랑이 느껴진다. 전교당에 오르기 전에 동.서 두 채의 광명실 건물이 있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도서실이다. 광명실이라는 현판 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실

 

광명실을 지나면 진도문에 이르게 된다. 진도문에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인 강학 공간이 나온다. 정면에 도산서원의 주 건물인 전교당(보물210호), 동재인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가 나온다. 전교당은 퇴계선생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착공하여 1575년에 완공되었다. 전교당에 있는 도산서원 현판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글씨인데 여기에는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도산서원 현판(한석봉 글씨)


도산서원 현판의 글씨를 자세히 보면 도자가 약간 삐뚤게 쓰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유인즉 선조가 한석봉에게 명을 해서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했는데, 이 때 선조가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한석봉에게 알려 주면, 놀라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가르쳐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꾸로 한 자 한 자 불렀다. 한석봉은 영문도 모르고 받아 쓰는데 맨 처음에 원(院)자를 쓰고, 다음에 서(書)자, 다음에 산(山)자, 그리고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했다. 한석봉은 원, 서, 산자를 쓰고 나서 도자를 임금이 부르니, ‘아!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구나!’ 하고 그만 놀란 나머지 붓이 떨려서 마지막 도(陶)자를 삐뚤게 썼다고 한다.

 전교당 마루에서


전교당 마루에 앉아서 보면 낙동강의 풍광과 도산서원의 모습이 거의 다 들어와 경치가 일품이다. 내가 전생에 이곳에서 배운 듯한 착각이 들어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전교당 뒤에는 퇴계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상덕사가 있다. 상덕사와 그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퇴계선생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 같다.

도산서원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유물전시관이다. 유물전시관에 있는 겸제 정선과 표암 강세황이 그린 도산서원도를 보면서 그 당시의 도산서원을 한번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다. 몇 백 년 전의 세월로 타임머신 타고 가는 기분이다. 택리지에도 나오는 혼천의(渾天儀)는 천체의 운행과 성좌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데 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제자 이덕홍이 만든 것이다. 선생이 우주의 운행 이치를 얼마나 열심히 연구를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유물이다.

다음으로 눈여겨 볼 것은 태극도다. 퇴계선생이 직접 작성한 태극도가 전시되어 있다. 태극도는 진단이라는 분이 중국 화산의 석벽에 각인하여 후세에 전했는데 진단은 북송 초기의 저명한 도사이다. 이 태극도를 유학에 접목시킨 것이 성리학이다. 태극도를 설명한 대표적인 예는 주렴계(1017-1073)의 태극도설, 주자(1130-1200)의 태극도설주해, 퇴계의 성학십도, 우암 송시열의 태극문, 한강 정구의 태극문변 등이다.

이 태극도를 인간의 성품에 적용시키면 성리학이 되고, 사람의 운명에 적용시키면 명리학이 된다. 결국 성리학과 명리학은 같은 우주관을 갖고 있고 똑 같은 이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명리학을 미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유물전시관을 보고 나면 도산서원의 주요 부분은 다 관람을 한 셈이다. 도산서원에서 걸어서 나오는 풍광도 운치가 있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북쪽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이육사 생가와 함께 퇴계선생 종택 표지판이 나온다. 한적하고 평온한 길이다. 길 옆에는 개천이 흐르는데 이 개천이 토계(兎溪)다. 토계의 토(兎)자를 퇴(退)자로 바꾸어  퇴계선생이 호를 삼은 것이라 한다.

길 오른쪽에 반듯한 사대부 집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경상 감사 자리보다 퇴계 종손자리가 낫다”는 퇴계선생의 종손들이 대대로 이어오면서 살아왔던 퇴계종택이다.

집안에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으나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간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산서원을 본 뒤라 예의와 염치가 살아난 때문일 거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정식으로 답사도 하고, 선생의 묘소 풍수도 보고 싶다. 다음을 위해서 남겨두는 것도 미덕이다.

 퇴계 종택


퇴계선생이 우리나라의 최고의 철학자이고 인격자라는 데에 이견은 크게 없을 것이다. 그럼 왜 선생이 위대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근거는 아마 기대승선생과 토론한 사단칠정논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논쟁은 중국에서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사단과 칠정은 무엇이며 어떻게 논쟁을 했는가를 수박 겉핥기라도 알아보자.

사단칠정논쟁의 시작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선생이 53세 무렵 옆집에 사는 정지운이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하늘과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을 천명도라고 한다. 이 그림을 선생에게 보여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달라고 했다. 선생은 한 부분을 고쳐준다.

정지운의 그림에는 “사단은 理에서 생기고 칠정은 氣에서 생겨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선생은 이 부분을 “사단은 理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氣가 드러난 것”이라고 고쳤다.

理에서 생겨난다는 표현은 理가 원인이라는 소극적인 의미이지만 理가 드러난 것이란 理가 주인처럼 주체적으로 움직인다는 적극적인 뜻이다.

이 그림을 6년 뒤에 기대승 선생이 보고 퇴계선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1559년부터 1566년까지 계속되었다. 무려 8년 동안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주희와 육상산 사이의 토론조차도 비교가 안 되는 수준 높은 논쟁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단과 칠정을 설명하면

사단(四端)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는 도덕적 감정이고, 칠정(七情)은 욕망을 포함한 일반감정이다.

사단은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본 맹자의 성선설에 근거를 한 다음의 네 가지다.

1. 남의 어려움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

2.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3.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

4.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


맹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측은지심이 발전하면 인(仁)이 되고, 수오지심이 발전하면 의(義)가 되고, 사양지심이 발전하면 예(禮)가 되며, 시비지심이 발전하면 지(智)가 된다고 했다. 결국 사단(四端)은 인의예지(仁義禮智)다.


칠정(七情)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1. 희(喜, 기쁨), 2. 노(怒, 노함) 3. 애(哀, 슬픔), 4. 락(樂, 즐거움), 5. 애(愛, 사랑), 6. 오(惡, 미움), 7. 욕(慾, 욕심)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요약하면,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고,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다.

퇴계선생의 주장은 사단은 언제나 결과가 선이기 때문에 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결과가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기 때문에 氣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대승선생은 사단은 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氣에서 나온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한 비판을 다음의 세 가지로 반대 입장을 편다.


1. 인간의 마음에는 理와 氣가 같이 들어 있으므로 하나는 理에서 나오고, 하나는 氣에서 나온 것으로 나눌 수 없다.

2. 사단도 감정이고 칠정도 감정이기 때문에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만 뽑아내면 사단이 된다 . 그러므로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3. 氣는 변하는 것이므로 감정의 움직임은 氣의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理는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움직일 수 없는 理가 드러난 것이 사단이라고 할 수 없다.


퇴계선생은 기대승의 반박을 받고 한 발 물러서서 사단은 理가 먼저 움직이면 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氣가 움직이면 그 위에 理가 함께 드러나는 것이라고 고쳤다.

논쟁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끝난다. 기대승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기대승은 이와 기를 나누지 말자는 의견을 끝내 굽히지 않았고 이황도 나누자는 의견을 버리지 않았다.

- 한국철학 스케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참조 -


논쟁을 통해서 퇴계선생과 기대승선생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퇴계선생이 四端과 七情을 理와 氣로 나누고자 하는 근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소인(小人)과 군자(君子)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군자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옳다고 생각되면 목숨을 잃더라도 꿋꿋이 실천하는 사람이다. 소인은 자기의 이익만 탐하고, 이익을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해치는 자다. 이러한 소인과 군자를 구별하고자 하는 이론적 배경이 사단과 칠정을 바탕으로 한 이기이원론이다.

사단도 기에서 나왔다면 사단도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단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이론과 배치가 된다. 그러면 결국 소인과 군자는 구별할 수 없고 같다고 하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사단(四端)은 理가 발하여 氣가 거기에 따르는 것(理發氣隨之, 이발기수지)이고, 칠정(七情)은 氣가 發하고 理가 올라타는 것(氣發理乘之 기발이승지)이라고 결론은 내린 것이다 이런 견해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이다.

이 이론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한발 앞선 이론이다. 퇴계가 세계적인 철학자로 존경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동이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처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퇴계선생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보는 성선설에서 그 선한 마음이 사단이라고 보고,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감정 중 나쁜 것도 포함된 것이 칠정이라고 본다. 따라서 본래의 선한 마음이 칠정의 나쁜 마음에 예속되지 않도록 늘 경건하게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퇴계선생의 경(敬) 사상의 바탕이다.

퇴계선생이 직접 가르친 제자가 310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분들이 대를 이어서 계속 이러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켰다. 안동 일대의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거의 모두 다 퇴계선생과 직, 간접으로 관련이 있다. 결국 위대한 스승 한 분이 나라의 생존과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퇴계선생의 이기호발설에 바탕을 둔 선비정신이 이 나라를 살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술에 대한 편지글과 주요저서를 소개하면서 끝내고자 한다.

이제 조지훈시인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과 입암의 서석지와 봉감모전석탑만 보면 이번 여정은 끝이 난다. 선생의 선비정신을 되새기며 종택을 뒤로 하고 주실마을로 향했다. 

 

★ 술이 사람을 망친다


아! 술이여

사람을 망침이 심하여

창자를 헐뜯고 병을 일으키며

본성을 잊은 채 헤매게 하고

덕을 잃게 하는구나.

한 사람에게 들어가서는

그 몸을 망치고

한 나라에 들어가서는

그 나라를 엎어버리는구나.

나도 일찍이 그 독을 맛보았고

그대도 그 구렁텅이에 빠졌었으니

옛 임금이 시까지 지어서

타이른 훈계를

어찌 함께 힘써 지키지 않겠소

뜻을 굳건히 세워

이 놈을 다스리면

저절로 많은 복이

찾아지리라.(제자 김응순에게 준 술 조심하라는 훈계)

퇴계선생에게 배우는 인생의 지혜 -이윤희-에서 인용


◆ 퇴계선생의 중요한 저술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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