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성 김대건 신부(1820∼1846년) ▲성 정하상(바오로,1795∼1839년) ▲1839년 성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신부가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 탁희성(비오) 화백 작품 ▲현 명동성당 부근(김범우 토마 의 사저)명례방의 신앙집회 모습. ▲순교자의 옥중서한 ▲198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을 주재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신자들 환호에 답하고 있다. ▲문학진(토마스, 82) 화백이 그린 103위 한국순교 성인화. 서울 혜화동성당에 걸려 있다. ▲최양업(도마)신부님, 충남 청양(1821 ~1861)=김대건(안드레아)신부님을 피의 순교자, 최양업(도마)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고 하지요!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에 대한 간단한 자료를 올립니다.
수 많은 순교자들 중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 순교자도 많고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 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도 해 드려야겠지요! (가까운 배론성지에도 무명순교자의 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작년, 순교자현양대회 때, 배론성지에서 최해성(요한:아직 성인품에는 오르지 못 함)님의 원주감영에서의 순교 장면을 성극으로 보여드렸습니다. 그 때 말씀 드렸듯이 우리는 지금 순교신앙 선조들이 흘린 피로 가꾼 잘 익은 과실을 따서 먹고 있는 태평시대의 천주교신자들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무엇인가를 해야겠지요?
잡수신 과일의 씨를 땅에 잘 묻어주십시오. 그리고 거름과 물도 때 맞추어 잘 주시구요. 그러면 그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자라서 또 열매를 맺습니다=사랑의 씨 뿌림과 전교의 씨 뿌림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박해가 없으니 순교꺼리가 없다고 무료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이 시대에도 우리가 감당할 순교는 많이 있으니까요.
마음속에 감추어 놓은 깔꼬장한 낙시바늘, 창처럼 예리한 송곳, 빼어내 버리면 그거 순교 맞을겁니다. 그런거 다 가지고 살면서 오른 뺨 때리는데 왼 뺨 내밀게 되나요? 낙시바늘로 걸고, 송곳으로 찔러야 직성이 풀리지요.
버리기가 죽기보다 어렵나요? ^^
행동하지 못 하고 변화하지 못 하는 신앙은 죽어있는 신앙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고,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수 있겠지만, 썩은 고기가 탁류에 떠 내려 가듯이 죽은 신앙생활을 하는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뜨겁게 사십시다. 미지근하면 뱉아 버린다고...그럽디다.
^^!이런 글을 쓸때면 내 눈안에서 들보가 건들거려서 눈알이 아프고 골이 휘잉~합니다. 눈 안에 약간의 티만 가지고 사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합니다(진심)
돌 덩어리 잡수신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제 허물 다 가리지 못하고 글 쓸때도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 -시몬- ................................................................................
(103위 순교 성인) ▨ 남녀
남성 56명, 여성 47명으로 거의 반반이다. 박해시대가 남성 중심의 유교 사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회적 지위가 극히 낮았던 여성이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이 천대받던 여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하겠다. ▨ 연령대
△10대 3명 △20대 18명 △30대 22명 △40대 26명 △50대 25명 △60대 6명 △70대 3명으로, 40~50대가 가장 많다. 최연소자는 13살에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이며, 최연장자는 정하상(바오로)의 어머니 유소사(체칠리아)로 79살에 옥사했다. ▨ 성직자와 평신도
성직자는 11명. 따라서 평신도는 92명이다. 성직자 가운데 주교는 앵베르(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ㆍ베르뇌(제4대 교구장)ㆍ다블뤼(제5대 교구장) 주교 등 3명. 사제는 모방ㆍ샤스탕ㆍ브르트니에르ㆍ도리ㆍ볼리외ㆍ위앵ㆍ오매트르ㆍ김대건 신부 등이며, 김대건 신부를 제외한 성직자 10명은 모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다. ▨ 직업
양반과 중인, 평민을 아우르는 한국 순교성인들 직업은 매우 다양하다. 관리는 남종삼(요한) 등 4명이며, 유진길(아우구스티노)ㆍ조신철(가롤로)은 역관이다. 농부 전장운(요한)과 목수 최형(베드로)은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했으며, 민극기(스테파노)는 교회서적을 판매하는 일에 종사했다. 권득인(베드로)은 성물공이며, 박후재(요한)와 유정률(베드로)은 짚신장사꾼이다. 조신철(가롤로)은 중국을 오가는 동지사 마부였으며, 남경문(베드로)ㆍ허협(바오로)은 군인 출신. 나머지는 대부분 상인과 농부이다.
신학생으로는 정하상(바오로)과 이문우(요한)가 있었으며,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회장'은 남명혁(다미아노)ㆍ이호영(베드로) 등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던 중인 계급의 여성 회장 현경련(베네딕타)도 있었다. 여성 중에는 동정녀 15명, 궁녀 3명, 과부 17명, 젖먹이가 딸린 어머니가 4명 있다.
순교자들 신분과 직업이 이처럼 다양한 이유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그리스도교 복음에 따라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떠나 수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당시에 이같은 교리는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친족 관계
친족관계에 있는 순교자들이 많다는 것이 103위 순교성인의 대표적 특징이다. 103위 가운데 45명(18가구)이 한 핏줄로 얽힌 관계.
▲ 아버지와 아들(父子)=김제준(이냐시오)과 김대건 신부, 유진길(아우구스티노)ㆍ유대철(베드로), 조화서(베드로)ㆍ조윤호(요셉) 등이 있으며, 김 데레사는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자매)가 된다.
▲ 어머니와 딸(母女)=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권진이(아가타)ㆍ한영이(막달레나)가 있다. 이광헌(아우구스티노)은 권희(바르바라,아내)와 이광렬(요한,동생) 그리고 이 아가타(딸)와 일가를, 정하상(바오로)은 유소사(체칠리아,어머니)ㆍ정정혜(엘리사벳,동생)와 일가를 이루고 있다.
▲ 부부(夫婦)=남명혁(다미아노)ㆍ이연희(마리아), 박종원(아우구스티노)ㆍ고순이(바르바라), 최창흡(베드로)ㆍ손소벽(막달레나), 조신철(가롤로)ㆍ최영이(바르바라) 등이 있으며, 조신철은 최창흡의 사위다.
▲ 형제ㆍ자매=홍병주(베드로)ㆍ홍영주(바오로)가 형제 성인이며, 박희순(루치아)ㆍ박큰아기(마리아), 김효주(아녜스)ㆍ김효임(골룸바), 이영덕(막달레나)ㆍ이인덕(마리아)이 자매이다.
이밖에도 이호영(베드로)과 이 아가타, 현경련(베네딕타)ㆍ현석문(가롤로)이 남매 사이며, 이정희(바르바라)는 어머니 허계임(막달레나)과 고모 이매임(데레사), 동생 이영희(막달레나), 조카 이 바르바라와 함께 1893년 기해박해 때 순교해 모두 성인품에 올랐다.
▨ 순교 시기
순교성인들은 모두 기해(1839년)ㆍ병오(1846년)ㆍ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했다. 박해가 탄생시킨 성인 수는 순서대로 70명, 9명, 24명.
헌종 5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신유박해(1801년) 이후 대규모 박해였다. 풍양 조씨가 안동 김 씨에게서 권력을 탈취하려고 일으킨 기해박해로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 등 평신도 지도자들과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했다.
병오박해는 1846년 6월5일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일어났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현석문ㆍ남경문ㆍ한이형ㆍ우술임 등 평신도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1년까지 5년간 이어졌다. 이 박해 때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평신도 8000여명이 순교했다. ▨ 순교 형태
군문효수(16명), 참수(60명), 교수(15명), 장사(3명), 옥사(9명) 등 다양하다. 목을 베어 군문에 높이 매다는 군문효수는 대역 죄인에게 행하는 것으로, 성직자 11명은 모두 군문효수로 순교했다. 주로 서울 새남터와 충남 갈매 못에서 행해졌다. 목을 치는 참수형은 서울 서소문 밖과 당 고개, 전주 숲정이에서, 그리고 목 졸라 죽이는 교수형은 포도청 감옥에서 행해졌다. 장사(杖死)는 곤장으로 볼기를 쳐서 죽이는 형벌이다.
▨ 순교성지
성인 44명 배출한 서소문, '순교 1번지' -------------------------------------------------------------------- 103위 성인이 순교한 장소는 전국적으로 10곳이다. 현재 교구 관할로 따지면 대다수인 88명이 서울대교구에 있는 성지에서 순교했다.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은 중림동본당 관할 서소문 순교성지로, 44명이 이곳에서 순교의 칼을 받았다. 서소문 성지 다음으로 24명의 성인을 낳은 포도청 옥터는 종로구 권선동과 서린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찾아갈 수가 없다. 순교성인들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성지들을 성인을 많이 배출한 순서대로 소개한다. --------------------------------------------------------------------
◆ 서소문
우리나라 최대 순교지 서소문 순교성지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나 4호선 서울역에서 내려 서울역 출구로 나와 염천교를 지나면 바로 나온다. 사방이 고층건물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서소문 성지에 들어서면 도심 한가운데 이런 아늑한 공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평온하다.
공원으로 꾸며진 성지 안으로 들어서면 순교 현양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탑은 신유ㆍ기해ㆍ병인박해 때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44위 성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 조광호 신부가 설계한 이 탑은 분수대가 15m 높이 중앙탑과 12m 높이 탑 2개를 감싸안고 있는 형태로, 순교자들이 목에 찼던 칼을 형상화했다.
서소문 밖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눠진다. 초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로 1801년 2월 첫 순교자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국교회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어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을 비롯해 황사영ㆍ현계흠ㆍ황심 등이 죽음을 당했다.
두번째 단계인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성 남명혁(다미아노)과 성녀 김아기(아가타)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8월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성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다시 참수됐다. 세번째인 병인박해 때 순교한 사람은 남종삼 성인 등 3명이다.
서소문 성지를 찾은 이라면 반드시 들러볼 곳이 성지 바로 옆 중림동성당 구내에 있는 서소문순교자기념관이다.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건립된 기념관에는 성인들 유해를 비롯해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하는 다양한 교회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 새남터
서울 지하철 1호선 강북에서 한강철교를 지나기 직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전통 한옥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기와집이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터에 세워진 새남터 기념성당이다.
서소문을 '평신도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11명의 성직자 순교성인 가운데 8명이 목숨을 잃은 대표적 '사제 순교지'. 새남터가 배출한 순교성인은 이들을 포함해 모두 11명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기념성당 입구에는 1984년 이곳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명이 새겨진 머릿돌이 놓여 있다. 건축양식이 기존 교회건축양식과 달리 전통 한옥식이어서 더욱 친근감이 든다. 1층 소성당 입구에는 새남터에서 순교한 11명의 성직자 이력을 자세히 적은 안내문이 걸려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순교의 피를 뿌렸으며, 그로부터 7년 후인 병오년에는 김대건 신부가 박해의 칼날을 받았다.
현재 새남터에는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성 앵베르ㆍ성 베르뇌 주교, 성 모방ㆍ성 샤스탕 신부ㆍ브르트니에르 신부ㆍ볼리외 신부ㆍ도리 신부, 성 우세영(알렉시오) 등 9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당고개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5분여 걸어올라가면 나타나는 당고개 성지는 절두산이나 새남터, 서소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아담하다. 하지만 옛사람들이 청계산의 아침 구름과 관악산의 저녁 안개, 동작나루의 돛단배 등 이른바 '용산 8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당고개를 꼽았을 만큼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기해년(1839년) 12월 이곳에서 신자 10명이 순교했으며, 그 가운데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100여평이 될까말까한 언덕배기 성지에는 순교자 현양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가운데는 특히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 사연이 눈물겹다.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한 이들 가운데 최경환 성인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그 이유가 너무 인간적이어서 순례자들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본래 부모와 자식을 함께 옥에 가두는 법은 없었지만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키우고자 유학 보낸 최경환 일가는 예외였다. 어린 자식들과 함께 투옥된 이성례는 세살짜리 막내가 엄마의 마른 젖을 빨다 죽자 자칫 네 자식을 모두 굶겨죽일까봐 배교하겠노라며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얼마 후 이성례는 자식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 남편 최경환이 있는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어머니로서 인간적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성례의 애절한 삶이 당고개 언저리에 배 있는 듯하다.
◆ 숲정이
호남지방은 '호남의 사도'라 불리운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전교로 일찍부터 천주교회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있는 숲정이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라고도 불리운 곳.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의 처 신희, 유관검의 처 이육희,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 등 유항검 일가가 순교하면서부터 순교자들의 처형이 그치치 않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5명이 참수된 데 이어 1866년에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ㆍ손선지(베드로)ㆍ한재권(요셉)ㆍ조화서(베드로)ㆍ이명서(베드로)ㆍ정원지(베드로) 등이 치명했는데, 이들 6명은 모두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훗날 교회는 숲정이 순교성지에 해성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1992년 학교가 전주시 삼천동으로 이전한 뒤 1400여평 부지를 성지로 꾸몄다. 전주에는 또 조윤호(요셉) 성인이 1866년 12월 치명한 서천교 성지가 있다. ◆ 갈매못
갈매못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고종비(명성황후) 간택을 앞두고 "한양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국가 장래에 이롭지 못하다"는 무당 말에 따라 형장으로 선택된 바닷가 모래밭이다. 서울에서 250여리 떨어진 충남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은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로ㆍ위앵 신부, 교회서적 번역과 교회사 정리에 큰 업적을 남긴 황석두, 그리고 배론신학당 집주인이었던 장주기 등 5명의 성인이 군문효수를 당했던 순교지. 이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은 서해안 지역에서 유일하게 개발돼 있는 성지라는 점에서 꼭 한번 순례할 만하다. 갈매못이 순교성지로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정응택 신부가 순교 당시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다. 대전교구는 1985년 9월 다섯 분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을 세웠으며, 나중에 기념성당도 신축했다. 대전교구 지역 순교지로는 이밖에도 손자선(토마스) 성인이 1866년 옥사한 공주 감영이 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1867년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당했으며, 유정률(베드로) 성인은 1866년 평양 감영에서 옥사했다.
........................................................................................ '103위 한국 성인 호칭 기도'는 가톨릭 기도서 49쪽에 있습니다. |
첫댓글 순교자 성월을 맞아 다시 한번 새겨 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좋은 자료네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