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5. 마흔여덟 번째 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3장)
신앙고백
찬송 14 구세주를 아는 이들
기도 조용림 권사(549)
성경말씀 마가복음 9:43~50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사랑의 묘약
찬송 901 내 평생 살아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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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자 권사 소천, 새 가족-임성례 권사, 정길래 선생, 임~
찬송 1137 사랑은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엊그제 우리 임정자 권사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우리 임정자 권사님은 아침에 눈을 뜨면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잠 들기 전까지 종일 노래를 쉬지 않고 부릅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 6시 30분부터 숨을 헐 떡 헐 떡 몰아쉬기에
제가 찬송가를 불러 드리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뒀습니다.
목사인 저도 이 찬송가를 부르는데 목이 메였습니다.
43절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절, 없음
45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절, 없음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절,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인생이 이렇듯 힘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라는 이름으로 산다는 것도 목이 멥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서울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목사님들을 만나기라도 하면은 거룩 거룩 숨이 막힙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동무였던 친구를 만나서
아무런 격식도 없이 이놈 저놈 하면서 욕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광명역 콩나물 국밥집에서 만났습니다.
이 친구가 골프를 잘 칩니다.
그래서 골프도 배우고, 장기도 두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늦은 밤이 되어 기차역까지 배웅을 받았습니다.
속으론 쓸쓸했습니다.
엊그제가 불끈불끈 청년이었는데
벌써 60이 넘어버린 중늙은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름 성공을 해서 서로 껴안고
하루를 이놈 저놈 하면서 살아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실천했습니다.
43절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절, 없음
45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절, 없음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을 대하기도 답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엄격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노름을 좋아해서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손을 자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발까지 자르고
눈까지 빼 버린다는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모세 십계명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오랜만에 십계명을 생각해 보니 숨이 턱턱 막힙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사셨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이나 목사인 저 역시
이렇게 십계명을 준수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새 계명을 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제야 답답했던 숨이 조금 풀리는듯합니다.
어제저녁에도 우리 임성례 권사님 때문에 소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임성례 권사님은 이제 70입니다.
그런데 벌써 요양원 신세입니다.
90을 훨씬 넘으신 우리 남기열 권사님, 조분례 권사님 뵙기에 민망스럽습니다.
그런데도 목이 컬컬하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시는지
목사인 제가 스트레스가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어제 아침부터 90 된 남자 친구인지 뭔지 전화가 와서
왜? 우리 임 권사가 아파 죽겠다는데 뭤들을 하느냐? 마느냐?
밤늦게까지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 농담 삼아서 하는 말이
휴~정말 밥 먹고 살기 힘들다.
엊그제 우리 임성례 권사님을 모시고 병원에서 종일 살았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약 보따리가 가득한지 알아야 되겠기에.
오후에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료, 염증 외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방 죽는 것처럼 산 것입니다.
빌어먹을 그놈의 성격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사님을 달달 볶아 먹더니
어젯밤에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쁠싸~ 사랑 때문이구나~
사랑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임성례 권사님, 사랑합니다.
우리 권사님들, 사랑합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권사님, 집사님들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목사님도 엄청 고단합니다.
그래서 전화벨 소리를 무음으로 해 뒀습니다.
그래서 전화기를 손에 들고서도 전화가 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요즘 우리 석 권사님 치매가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러워서 한약을 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석 권사님을 뵐 때마다
손을 붙들고 박수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장 16절.
그러면 우리 석 권사님도 함께 따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묘약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어제가 토요일입니다.
목사인 저는 토요일 날이면 책상에 앉아 꿈쩍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제 자신을 치료하는 날입니다.
목사인 저도 위로가 필요하고 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를 씁니다.
위로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토요일은 종일 서성거렸습니다.
오전에는 장례예식장 조문을 했습니다.
이제 67세신데 죽었습니다.
저하고는 매월 식사를 함께 하던 친구입니다.
배짱도 두둑한 친구입니다.
평소 당료 때문에 약을 복용했는데
결국 당료 때문에 발복을 잘라내더니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논을 저당 잡혀 비트코인에 전부를 투자하고
금방 벼락부자가 되는 것처럼 저에게 자랑을 하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놈의 욕심 때문에 67세에 죽어버렸습니다.
우리 요양원에 계신 엄마는 매일 제 손을 붙들고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하는데
목사인 제가 뵐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는 죄스러운 생각 때문에
걱정이 끊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죄스러운 생각보다도 더 아픈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배어 있는 몸의 관성적인 나쁜 짓입니다.
아마 벌써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때론 목사인 저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합니다.
제 몸에 베어 있는 관성적 나쁜 짓들 때문입니다.
피눈물이 납니다.
그러고도 목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고도 장로 권사 집사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더 썩어 고랑 냄새가 나기 전에 손금으로 절여야겠습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