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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금일은 영광스러운 천년 신라(千年新羅)의 두 번째 신전인 숭혜전(崇惠殿)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재건회에서 연재(連載)로 특별히 전국 팔전(全國八殿)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위대한 대한제국 재건 사업(大韓帝國 再建事業)에 있어서 원래 태묘(太廟)였던 현재의 이름인 종묘(宗廟)의 정상적 복원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안이 바로 전국 팔전의 재건이고 복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태묘의 복원과 팔전의 재건이란, 바로 성스러운 조선왕조(朝鮮王朝)에서 태묘 제례 때 원래 행해졌던 종묘제례(宗廟祭禮)의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과 12월 납일(臘日)에 하던 종묘제례와 함께 일본제국 시대에 변형이 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원형 복원 및 종묘에 현재 불완전하게 복원되어 있는 악공청(樂工廳)의 원형 복원으로 실제로 종묘제례의 악공들이 왕조시대 당시처럼 전속(專屬)되고 제대로 된 연주 연습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복원시키는 것이 우선이며, 전국 팔전의 경우도 각 성씨 대종회(大宗會)에서 각각 하는 제례에 대해 제국의 조정(朝廷)에서 새롭게 예법(例法)에 맞는 팔전 제례의 엄격하고 통일된 절차 및 형식에 대해 가장 유교적 원형에 맞는 절차에 대한 고증(考證)으로 역사의 오류가 없도록 정비 및 발전시키는 것이 대한제국 조정에서 행해야 할 가장 우선 순위의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팔전 중 북한 지역에 위치해 있는 숭령전(崇靈殿)과 숭인전(崇仁殿)을 제외한 나머지 육전(六殿)에 대해서는 남한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비교적 외형적인 원형은 잘 보전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형식적 외형이 아닌 바로 조상 제례에 대한 숭고한 유교적 정신 아니겠습니까.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중심이 되는 원래 주인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각 왕조의 시조들에 대한 매우 형식적이고 의미없는 제례(祭禮)를 지내고 있는 전국 팔전은 사실상 영혼없는 형식적 껍데기 제례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급하게 대한제국 재건의 의미는 매우 남다르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난 3월 9일에 저희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에서 올린 '帝國 二百六十五: 팔전 중 세 번째 신전 숭덕전'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만, 현재 각 성씨 대종회에서 제작하고 보존하고 있는 족보(族譜)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족보제작의 자체적 어려움과 현실적인 많은 문제점에 대해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과거에는 각 성씨에서 가지처럼 갈라지는 파조(派祖)들에 대해 과거 왕조시대에는 전통적인 관직명(官職名)을 따르는 파조들을 통해서 유교에서 강조하는 질서정연(秩序整然)함을 가질 수 있었고, 함께 각 성씨가 가지는 정통성과 연속성을 가질 수 있었으며, 또 그것을 통해 분명하게 각 성씨의 위대성과 신성한 가치에 대해 언급하며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하면, 지금은 단순히 사람의 성명을 따르는 식의 마치, 조직폭력배(組織暴力輩)의 단체 이름과 같은 형식으로 바뀌어가는 안타까움을 언급하며 대한제국 재건의 시급성과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전국 팔전의 신전이 모두 각 왕조의 시조신에 대한 위패만 모시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금일 언급하는 숭혜전의 경우는 특별히 세 분의 제왕(諸王)을 모신 신전으로 숭혜전이 가지는 특별함을 더하고 있습니다만,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숭령전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고구려(高句麗)의 동명성왕(東明聖王), 그리고 숭인전은 기자(箕子)만 모시고 있으며 숭덕전(崇德殿) 역시 박혁거세(朴赫居世)만 모시고 있는 실정입니다.
훗날, 대한제국이 영광스럽게 재건이 되고, 안정이 되어 발전이 되는 단계에 이른다면, 분명히 전국 팔전의 규모도 지금보다 훨씬 크고 단계적으로 확장되어 명실공히 각 왕조의 종묘로서 기능으로 늘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재건되는 대한제국에게도 영광이고 또 각 왕조를 대표했던 성씨 종친회(姓氏 宗親會)의 입장에서도 매우 명예스러운 사업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지금 유림(儒林)을 대표하는 성균관(成均館)에서도 간판(看板)같은 이름만 가지고 거들먹거리지 말고 진정으로 유교 발전과 유림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부디 역사에 대한 반성(反省)으로 잘못된 정신을 깨닫고, 보다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복벽 운동(復辟運動)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간곡히 바랍니다.
그것이 지금처럼 이름뿐이고 상처뿐인 성균관의 이름을 일본제국 시대와 멸절(滅絶)할 공화국 시대에서 남아있는 오욕(汚辱)의 영예를 명예로운 과거 왕조시대의 영화로운 모습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원래 성균관이 가야 할 역사적 임무(任務)이고 소임(所任)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서대문구에 위치해 있는 대종교(大倧敎) 역시 대종교를 단순히 한배검이라는 신을 믿고 경배만 하는 지금의 후락한 모습이 아닌 진정 대종교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기 바랍니다. 한 줌도 안되는 처량한 인물들이 알량한 권력의 맛에 취해서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채 가짜 대표로 내세워 무려 2018년부터 대종교를 장악한 지금의 대종교 상황은 종교도 아니고 일반 단체도 아닌 깡패 수준밖에 안되는 모임밖에 안됩니다.
역사의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망나니같은 행동을 자행하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또 하늘의 벌을 피할려도 피할 수 없는 죄업(罪業)을 스스로 짊어지고 사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대로 된 정신이 있다면 스스로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는 것이 순리이며, 또한 새로운 지도부가 형성이 된다면 대종교도 성균관과 동일하게 교리(敎理)에 따라 복벽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대종교가 대종교다운 종교로 남는 유일한 길임을 스스로 잘 깨닫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慶尙北道 慶州市)에 위치해 있는 숭혜전은 숭덕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신라의 제13대 임금이신 미추대왕(味鄒大王)과 제30대 임금이신 문무대왕(文武大王),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이신 제56대 임금 경순대왕(敬順大王)까지 모두 세 분을 모시고 있는 신전입니다.
숭혜전이 위치해 있는 곳은 바로 경주 김씨(慶州 金氏)로는 처음으로 임금이 되신 미추대왕의 릉 앞에 위치해 있고, 특별히 경순대왕의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주 김씨의 시조이신 김알지(金閼智)를 모신 계림세묘(鷄林世廟)도 위치해 있어서 숭혜전은 말 그대로 경주 김씨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입니다. 원래 숭혜전은 지금의 월성(月城) 안에 경순대왕의 진전을 모신 사당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다만,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들에 의해 불타면서 1627년인 인조대왕(仁祖大王) 5년에 지금의 동천동(東泉洞)에 동천묘(東泉廟)를 세워 모셨고, 경순왕전(敬順王殿)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794년에는 지금의 미추대왕릉 앞에 위치하면서 황남전(皇南殿)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887년에는 다시 고종황제께서 특별히 미추대왕의 위패를 모시게 하였으며 이듬해인 1888년에는 문무대왕의 위패까지 모시게 하여 총 세 분의 임금을 모시는 신전이 되었으며, 편액(扁額)도 숭혜전으로 사액(賜額)하신 역사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미추대왕은 신라 역사에서 경주 김씨가 최초로 임금이 되시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으신 분입니다.
물론, 신라 역사에서 임금을 하셨던 대부분의 왕은 모두 경주 김씨가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만, 초기 시대에는 박씨(朴氏)와 석씨(昔氏), 그리고 김씨가 서로 번갈아가며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오름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또한, 우리나라의 다른 왕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사례입니다.
또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아닌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추며 평화롭게 왕위 계승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신라 초기에는 성씨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없었고, 특히 평장사 김부식(平章事 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때 신라 후기시대에 남긴 형식적인 성씨 표기를 그대로 역사서에 기록하면서 마치 역성혁명의 모습으로 신라 왕조(新羅王朝)의 역사를 비추게 했다는 반론도 있습니다만, 신라 후기에 박씨 임금으로 평화적으로 승계했던 사례, 그리고 김씨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신라의 시조신인 박혁거세에 대한 제사는 계속 이어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과거 신라 시대 임금들의 인식은 성씨에 대해 지나친 편견은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현재 대한제국 재건과 관련하여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것이 바로 대한제국이 재건되었을 때, 전주 이씨(全州 李氏)라는 특정 성씨가 왕위를 독차지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대 의견이 다수인 점을 감안해 볼 때, 신라 왕조의 사례는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전국 팔전에서 모시고 있는 각 시조 성씨가 일종의 화백회의(和白會議)를 통한 왕위 승계 방식을 선정하는 방식은 대한제국 재건 후 발생될 수 있는 부정적 시선을 불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사례는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것이 조선왕조 시대에 전 시대를 거쳐 선조들이 남기신 전국 팔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숭혜전을 언급하면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분이라면 바로 문무대왕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재 문무대왕은 숭혜전에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만, 과거 박정희(朴正熙) 정부 시절인 1977년에는 특별히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통일전(統一殿)을 세워서 태종 무열대왕(太宗 武烈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 그리고 흥무대왕(興武大王)을 모셨습니다. 또한 영정(影幀)도 비록 추정입니다만 표준 영정으로 삼아서 통일전에 모신 것은 매우 깊은 의의가 있다고 보여지며,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국신사(靖國神社)에 비견(比肩)되는 사당을 경주에 세웠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매우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립 현충원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공화국의 특성상 그냥 건물만 지어놓고 유교식 제례의 풍습을 남기지 못한 채 그냥 형식적인 빈집으로 남기는 이상한 행태는 대한민국 공화국만이 남길 수 있는 매우 나쁜 특수하고 쓰라린 유산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문무대왕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릉(王陵)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해중왕릉(海中王陵)을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으로 호칭되고 있는 현재의 대왕암(大王巖)이라는 곳에 대하여 문화재청(文化財廳) 외 대부분의 국내 학자들은 그냥 대왕의 시신을 불교(佛敎)식으로 화장(火葬)하여 산골(散骨)한 장소, 즉 재만 뿌린 곳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교식 장례가 화장이라고 해도 정작 불교를 신봉하는 소위 국내 고금(古今)의 중들 조차 현재까지도 최소 사망 후에는 화장을 하였을 때, 수습되는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에 대해서는 특별히 부도탑(浮圖塔)을 조성하거나 또는 일반적인 유골함(遺骨函)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식 장례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일찍이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한 미증유(未曾有)의 제왕이시면서 또한 생전(生前)에 매우 성심(誠心)이 깊으셨던 불자(佛子)였던 점을 십분 생각해도, 문무대왕의 붕어(崩御) 후 대왕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현재의 문무대왕릉인 대왕암에 그대로 산골처로 유골을 뿌렸다는 점은 아무리 발견되는 유물이 없다고 하여 내린 결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각하게 빈약(貧弱)하고 단순한 결정이며, 성급한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을 안가질 수 없습니다.
신라 후기나 또는 이후의 이어지고 있는 고려왕조(高麗王朝)와 조선왕조에 조성된 왕릉의 경우도 기본적인 왕의 릉(陵)은 시신과 부장품(副葬品)을 같이 왕릉에 장례하는 것이 기본 상례(常例)인 것은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따라서 문무대왕릉만 부장품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무리 불교식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에서 벗어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경주시에 위치해 있는 문무대왕의 부친이신 태종 무열대왕의 왕릉과 또 문무대왕의 아드님이신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왕릉을 보면 지금 현대인의 시각에서 봐도 매우 크기가 크고 부장품 또한 신라의 전통 장례 풍습대로 절차에 걸쳐 조성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록과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에서도 가장 큰 왕릉을 조성하던 시기의 문무대왕의 왕릉을 해중왕릉으로 했던 것도 매우 파격적(破格的)인데, 유골조차 산골을 하는 방식으로 장례를 했다고 한다면 과연 이후에 왕릉으로 조성된 신문대왕의 왕릉은 왜 전통적인 장례 방식으로 왕릉을 조성하였는지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해답(解答)은 문무대왕이 그만큼 불교를 매우 신봉하셨던 불자였다는 것에 대한 확인(確認)이었으며 또, 확증(確證)이라는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재 문무대왕릉이라는 대왕암을 보면 일부러 석공(石工)들을 동원하여 십자형(十字形)의 인공 수로(人工水路)를 내고 가운데 복개석(覆蓋石)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공 수로를 조성한 이유는 바로 가운데 복개석에서 동서남북(東西南北)이라는 사방으로 용(龍)이 되신 문무대왕이 자유롭게 지나다니실 수 있도록 하는 배려 차원으로 조성을 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용이 위치하는 자리, 즉 용좌(龍座)가 바로 복개석 자리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용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임금의 자리 즉, 용상(龍牀)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용상이 문무대왕이라는 것을 상징하려면 십자형 인공수로의 가운데 부분인 복개석 자리에 문무대왕의 어떤 흔적, 또는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립할 수 없는 장례 방법인 것입니다.
또, 특별히 육지쪽의 감은사(感恩寺)는 편안하게 오실 수 있는 만든 인공 수로가 일종의 신도(神道)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설명하고 있는 감은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라고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위의 삼국유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상고(詳考)했을 때, 유골을 보관한 장소가 현재 대왕암, 즉 유골함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산골처(散骨處)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화재청은 과거 기록조차 무시하는 심각한 실수를 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만약 문화재청이나 기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국내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왕암이 단순히 산골처로서의 역할만 했다면 분명히 전제(前提)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산골을 했다면 산골을 한 사람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산골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무대왕의 붕어 후, 시신을 화장해서 산골을 했다면 분명히 직계 가족(直系家族), 그중에서도 아드님이시면서 후임 임금이신 신문대왕께서 직접 산골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의 기록에는 전혀 내용이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왕암에서 산골을 하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현재까지 대왕암을 조사하였을 때 물론, 발견되는 문무대왕과 관련한 부장품이나 유골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추정할 수 있는 이유라면, 유골함이나 부장함의 경우 대왕암에 안치하게 된다면 분명히 물속에 잠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유물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사 물에 잠겨서 유품(遺品), 유물(遺物)로서의 가치가 훼손(毁損)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능(陵) 조성의 처음부터 계획이 대왕이 용으로 환생하는 것을 전제로 해중왕릉으로 조성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대왕암에 대왕의 어떤 상징물로서 유품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 보다 유품의 존재 자체에 신라 조정(新羅朝廷)이 더 큰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추가적인 정밀 조사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마지막으로 경순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숭혜전에 영위(靈位)로 모셔져 있는 미추대왕, 문무대왕 그리고 경순대왕까지 세 분의 위대했던 공적(功績)과 위훈(偉勳)을 본 재건회 카페(cafe) 글에 모두 기재(記載)하기는 솔직히 칸이 너무 부족하고 또 송구(悚懼)스러우며 카페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남루(襤褸)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재건회와 또 대한제국의 재건을 바라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에게 본 글의 취지(趣旨)인 대한제국의 태묘와 전국 팔전의 큰 뜻과 이상을 알리는 것이 대한제국이 가지는 높은 뜻과 기상을 알리는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염치 불고(廉恥不顧)하고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가납(嘉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순대왕릉은 신라 역대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난 지역에 조성된 유일한 왕릉입니다. 이렇게 신라왕조의 왕릉이 경주지역을 벗어나 연천 지역에 위치한 이유는 바로 경순대왕이 신라를 고려에게 양국(讓國)하게 되면서 경순대왕이 개경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고려 태조께서 특별히 자신의 큰딸이신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와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 소생(所生)의 공주를 모두 경순대왕에게 시집 보내셨으며 이어서, 작위(爵位)는 낙랑왕(樂浪王), 공신호(功臣號)는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정승 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政承 食邑 八千戶)를 내리셨고, 훈위(勳位)는 상주국(上柱國), 직위(職位)는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任命)하셨습니다. 비록, 경순대왕께서는 나라를 고려왕조에 양위(讓位)하셨습니다만, 천년 신라의 위상(位相)과 위계(位階)는 그대로 고려왕조에서도 영속적(永續的)으로 존속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심지어, 경순대왕의 신라왕실 혈통이 고려왕조 존속 기간동안 고려왕실의 혈통과 면면(綿綿)히 함께 이어졌다는 점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시작된 단군(檀君)의 뿌리와 혈통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바로, 경순대왕의 백부(伯父)이신 잡간(匝干) 김억렴(金億廉)의 따님이신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金氏)께서 고려태조와 혼인하게 되셨다는 점과, 신성왕후님이 낳으신 아드님이 바로 안종(安宗)이시며 안종의 아드님이 바로 고려 제8대 임금이신 현종(顯宗)이시라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려는 이후 현종의 후손들께서 고려왕조를 계승하시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본다면 고려왕조(高麗王朝)는 신라왕조(新羅王朝)와 함께 통치된 국가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단군교(檀君敎)의 경전(經典) 중 하나이신 단군교오대종지포명서(檀君敎五大宗旨佈明書)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려말 몽고(蒙古)의 침입으로 고려의 임금이 몽고 원나라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는 때부터 단군교의 대(代), 가르침(敎)이 끊겼다고 하는 성언(聖言)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언급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경순대왕께서는 978년 무인년(戊寅年) 4월 4일에 붕어하셨고, 고려왕조에서 특별히 경순(敬順)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셨습니다. 지금의 경순대왕이라는 시호는 이렇게 받게 되신 시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대한제국의 재건에 대해 주장하고 또 추진하는 이유는, 지금의 공화국 체제가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통감(痛感)과 함께 공화주의(republicanism)의 많은 의견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그렇게 밝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대한민국 공화국이 1948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건국되지만, 당시의 공화국 건국은 오로지 당시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이 이미 소련(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에 의해 공산화(communization)된 상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즉, 방어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건국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제국의 1945년 항복 이후 공산주의(communism)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공화주의 체제의 공화국 건국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만,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26년이라는 오랜 시간 오직 중국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던 단체가 과연, 해방 이후 국내에 들어와서 공화주의 체제로 만약 건국하려고 하였을 때, 국내 모든 국민의 반대없이 그대로 수용되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단언하기에는 충분하게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1945년까지 일본에 머물고 계셨던 영친왕께서 귀국하셨을 때 과연 대한민국 임시정부측 인사들이 일본제국(日本帝國) 시절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다음으로 조선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계셨던 이왕(李王)이신 영친왕 전하(英親王 殿下)의 복위를 반대할 명분은 없기 때문입니다.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 공화국의 경우는 소련에 상대되는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당시 군사정부(military government)의 비호(庇護)로 건국되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미국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한국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공화국으로 건국된 이후조차 이승만 대통령은 끊임없이 미국 정부측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대한민국 공화국이 주권국가로써 처음부터 독립성(獨立性)을 가지고 통치행위를 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부인하면 안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라는 것이 모든 국민의 평등을 약속한 이데올로기(ideology)이다보니까, 누구는 우대(優待)하고 누구는 천대(賤待)하는 차별성(差別性)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배경이다보니까, 공산주의도 탄생했을 정도로 매년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분단국가 대한민국 공화국의 자유주의(liberalism)를 추구하는 우파(Right)와 평등주의(equalitarianism)를 추구하는 좌파(Left)간 정권을 둘러싼 졸렬하고 지극히 유치한 싸움박질은 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계 파업을 비롯하여, 올해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발생된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한 정부의 계획에 대한 의료계의 황당한 파업까지, 시끄러운 국내 사정이 전혀 통제 불가(不可)한 상태까지 이르고 있는 점은 분명히, 명분만 그럴듯한 공화주의 체제로는 사회적 통합(社會的 統合)의 해결이 요원(遙遠)하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의 공화주의 체제로 과연 북한 지역의 극렬한 공산주의와 만신창이(滿身瘡痍) 사회주의(socialism) 체제의 통일과 전체 한반도의 온전하고 안전한 통치가 가능하겠느냐에 대한 물음에는 전혀 답할 수 없는 상황인 점 또한 더욱 대한민국의 공화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을 낳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점점 심각하게 줄고 있는 공화국 인구에 대한 대한민국 공화국의 상황은 남녀의 기괴(奇怪)한 평등 이상만 주장하다 종국(終局)에는, 출산까지 여성에 대한 차별 운운하며 거부하는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과연 멸절(滅絶)될 공화주의의 결말과 끝을 보는 것 같습니다. 가히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코미디 공화국(comedy republic)이라는 말로 호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화국의 출현으로 족보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이제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한 대한민국 공화국의 인구 감소까지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간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완전한 공화주의 체제를 선택한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개국(開國)의 정신으로 제국(帝國)을 다시 복원하고 재건하여 원래 단군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성을 회복하고 가장 깨끗하고 숭고했던 단군교의 정신인 화랑(花郞)의 민족 정신(民族精神)을 회복할 때가 왔다고 감히 진언(盡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디, 재건회를 방문하시는 모든 국민에게 행운(幸運)과 만복(萬福)이 깃들기를 바라며 대한제국의 복원을 위해 많은 분들의 동참과 협력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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