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란스는 어떤 사람인가?>
은행에 다니던 미국의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1859년 세계 최초로 석유광이 발견되자 친구인 록펠러와 함께 석유회사를 세웠다.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성공하여 그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고향인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도시 곳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나 공짜로 갈 수 있는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지었다. 그리고는 완성된 건물을 시 정부에 기증했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Lewis Henry Severance)였다. 지금의 연세대학교는 연희전문학교의 “연”자와 미국의 석유재벌 세브란스가 지은 세브란스병원의 “세”자를 따서 지은 교명이라고 한다.
세브란스는 어려서부터 빈민과 고아를 돌보았던 부모님의 나눔정신을 이어받아 평생 자선활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한데는 계기가 있었다. 1900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설을 들었다. 연사는 조선이라는 동방의 이름 없는 나라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던 의사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이었다. “조선에 있는 병원들은 병원이라고 부를 수가 없을 정도로 빈약합니다. 간호사도 없이 한 명의 의사가 모든 것을 운영합니다.”
그 연설을 들은 세브란스는 그 자리서 흔쾌히 많은 돈을 기부했고, 4년 후에는 그의 기부로 경성(지금의 서울)에 조선 최초의 종합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졌다. 왕에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자선병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주치의인 어빙 러들러(Irving Ludlow)를 조선으로 보냈다. 러들러는 26년 동안 외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러들러가 입국한 이듬 해 세브란스는 갑작스런 복통을 일으켜 입원했으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세브란스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낡은 수첩에는 기부를 약속한 곳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필리핀 세부 여학교. 중국 체푸병원, 항주 유니언 여학교, 태국 치앙마이 학교 등이었다. 세브란스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신이 한 약속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기금까지 마련해 두었으나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은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세브란스는 생전에 기부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내가 더 행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기부왕들이 종종 소개되고 있다. 카카오의 사회공헌 플랫폼 “카카오같이가치”가 “올해(2020년)의 모금함” 공개와 함께 기부왕, 성실왕 등 5인을 선정해 발표했다. “카카오같이가치”가 발표한 올해의 기부왕은 익명의 “몰래천사”, 성실왕은 “김*영”씨, 홍보왕은 “한*규”씨, 기부신인왕에는 “오*희”씨가 각각 선정됐다.
“카카오같이가치”는 전문 기관이나 단체가 아니더라도 사회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공익적 주제라면 이용자 누구나 모금을 제안하고 기부 프로젝트를 개설할 수 있는 오픈 플랫폼이다. 투명한 운영을 위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한국사회복지관협회, 아름다운재단, 함께 일하는 재단 등, 전문 파트너 4개 기관과 함께 모금의 적합성부터 결과 보고까지 심사과정을 거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빈손으로 태어난다. 따라서 그가 태어나서 가지게 된 물질적, 정신적 재산은 모두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내가 잠시 사용하는 것이지 영원한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큰 농장을 가지고 있어도 그 땅은 내가 사는 동안 사용하는 땅일 뿐 내 것이 아닌 자연의 것이다. 또 아무리 큰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사는 동안 쓸 수 있는 것일 뿐 내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이다.
이렇게 어차피 영원한 내 것이 아닌 만큼 나눌 수 있는 한 나누어 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사랑을 하는 이는 사랑을 받는 이보다 행복하다”고 노래했던 청마(靑馬)유치환 시인처럼, 또 “주는 자는 받는 자 보다 더 행복하다”고 했던 세브란스의 말처럼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나누는 삶은 실천해볼 만한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