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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부 23
네흘류도프가 아는 학생 시절의 셀레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들이었고 충실한 벗이었고, 그 또래로선 퍽 교양 있고 세련된 사교가였고, 언제보아도 우아한 미남인 동시에 또 드물게 정의감에 불타는 결백한 인간이었다. 그다지 노력도 않는데 성적은 출중했고 진급 논문을 쓸 때마다 금메달을 받기도 했으나 조금도 잘난 체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젊은 인생의 목적을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 두었다. 그는 공무에 들어간다는 형식밖에는 그러한 봉사를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대학을 졸업하자 곧 자기 실력을 바치기에 적합한 일을 이것저것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결국 법률 제정을 맡는 궁내청 제2과라면 자신도 가장 소용되리라고 생각을 정해 그리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키는 일을 모두 양심적으로 정확히 정리해갔는데도 그는 이 근무를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며,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심중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허영심 강하고 무척 옹졸한 인간인 직속상관과 충돌하면서 이 불만이 한층 더해지자 그는 제2과를 뛰쳐나와 원로원으로 옮겼다. 원로원쪽이 나았지만 같은 불만이 여전히 따라다녔다.
그는 노상 자신이 기대하던 일이나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과 현실이 사뭇 엉뚱하게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다. 원로원 봉직 중에 친척 누군가가 힘을 써 시종보로 임명된 그는 흰 리넨으로 앞을 대고 금몰이 달린 예복을 입고 이런 요직을 얻어준 사람들에게 인사를 차리기 위해 마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보아도 그는 이 직무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관청 근무 당시보다도 한층 강하게 그는 '잘못된 것'임을 느꼈지만, 동시에 한편으로 이번 일로 그에게 커다란 만족을 주었으리라고 믿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낙심시키지 않으려고 이 임명을 거절하지 못했고, 또 한편으로 이 임명은 그의 본성에 있는 저속한 분자를 기분 좋게 간질이기도 했다. 금몰을 수놓은 예복 차림의 자신을 거울에 비쳐 본다든지, 이번 임명으로 일부 사람들 사이에 생긴 존경심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이 퍽 만족감을 주었다.
결혼에서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세속적 관심으로 보자면 호화로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그가 결혼하게 된 주요한 이유 역시, 만일 거절이라도 한다면 이 결혼을 바라는 처녀와 중매한 사람을 모욕하는 셈이 되어 불쾌감을 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동시에 젊고 사랑스러운 명문과 딸과의 결혼이 그의 자존심을 도발하여 큰 만족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결혼은 관청 근무나 궁정 봉직보다 한층 더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첫아이를 낳자 아내는 더는 아이 낳기를 싫어하고 화려한 사교 생활을 시작했으므로 그도 하는 수 없이 끌려 들어갔다. 그녀는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남편에게 정숙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러한 생활 태도로 남편의 생활을 해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녀 자신도 엄청난 노력으로 피로 이외에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도 여전히 이런 생활을 계속했다. 생활을 바꾸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친척이며 친지들에게 지지를 받은, 이런 생활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그녀의 신념과 충돌하여 벽돌에라도 부딪힌 것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렸다.
길게 금발을 늘어뜨리고 언제나 발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딸은 그에게 전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것은 특히 아이의 훈육 방식이 자신의 희망과는 전연 달랐기 때문이다. 세상에 흔한 이해 부족이 문제라기보다 아예 서로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예의에 억눌린 무엇의 냉전이 부부 사이에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점이 그에게는 가정생활을 다시없이 괴롭게 만들어주었다. 이리하여 가정생활은 관청 근무나 궁정 봉직보다 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은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다른 모든 동료나 동년배와 마찬가지로 지적 성장과 더불어 자신이 교육받아온 종교적 미신의 질곡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타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 그런 미신에서 해방되었는지 스스로도 모른 정도였다. 진지하고 결백한 사내였던 그는 한창 젊었던 시절, 대학 시절, 네흘류도프와 친하게 지내던 시절에는 국교의 미신에서 해방된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여 근문처에서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특히 당시 사회에 밀려온 보수적 반동사상의 대두와 더불어 이 종교적 자유가 짐이 되기 시작했다. 가정에서의 여러 관계, 특히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 추도식 때, 그리고 어머니가 그에게 재계(齋戒)하기를 원하고 또 공론도 어느 정도 이를 요구했다는 일 땨위는 그만두더라도, 근무처에서는 끊일 새 없이 기도식이라든가, 성찬식이라든가, 감사 기도라든가, 그 밖의 갖가지 의식에 출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종교의 표면적 형식에 아무 관련을 맺지 않고 보내는 날이란 거의 없었다. 이런 의식에 참석하는 한 그는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듯한 시늉을 한다든가(몸에 밴 정직한 성질로 보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또는 이런 모든 표면적 형식을 허위로 인정하고 거기에 참가할 필요가 없도록 자기 생활을 뜯어고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일도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 하니 여러 가지로 애로가 많았다. 가까운 사람들 모두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을뿐더러, 자기 환경을 바꿔 직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자기가 이 직채을 감당해 지금도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믿고 앞으로는 한층 더 공헌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인류에 대한 모든 이익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데는 끝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소나마 역사를 배우고 종교의 발생이며 기독교의 기원과 분열을 아는 현대의 교양이라면 누구든 자기 상식의 정당성을 믿지 않고는 못 배기듯이, 그도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 교리의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생활의 갖가지 외압으로 그처럼 성실한 인간도 조그만 허위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고 확인 하려면 먼저 불합리한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그것은 조금만 허위였지만, 지금 그가 빠져 허덕이고 있는 커다란 허위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양육된 신아오가 주위 모든 사람이 그에게 요구하고 또 이를 인정치 않고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자신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는 그리스 정교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의문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가 손에 든 책은 볼테르도 쇼펜하우어도 스펜서도 콩트도 아니라, 헤겔의 철학서며 비네와 호먀코프의 종교 논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종교적 교리의 안정과 변명 등을 찾아냈다. 그의 이성은 그 속에서 자신이 자라난 종교 교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생활 전체가 여러 가지 불쾌한 일로 꽉 차는데, 일단 인정해버리면 그런 불쾌한 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인간 개개의 지식으로는 진실을 인식할 수 없으며, 진리란 사람들의 결합체에만 계시되고, 유일한 인식 수단은 계시뿐이며, 또 계시는 교회에 의해 보존된다는 따위의 판에 박힌 궤변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허위를 행한다는 의식 없이 아주 태연하게 기도식이나 추도식, 미사에 참석하게 되었고, 재계도 하고 성상 앞에서 성호를 긋게 되었으며, 인류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낙이 없는 가정생활에 위로를 부여해주는 근무 활동을 그대로 유지해갈 수 있었다. 그 자신은 신앙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면에 그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잘못된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수심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허위가 아직 마음속에 굳어지지 않았을 무렵의 벗인 네흘류도프를 만났을 때 그는 그 당시의 자신이 생각났다. 더구나 자기 종교관을 네흘류도프에게 암시한 뒤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으로 느껴져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둘은 재회를 서로 약속은 했지만 어느 쪽도 만날 기회를 만들려 하지 않았고 결국 네흘류도프가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끝내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부활 2부 24
원로원을 나와 네흘류도프와 변호사는 보도를 나란히 걸었다. 변호사는 자기 마차를 따라오게 하고, 아까 심의 위원들이 평하던 모 국장 사건에 대해 그것이 탄로 난 경위부터 얘기하기 시작했다. 법률상으로는 당연히 징역을 받아야 했지만 그 대신 시베리아 시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 사건의 전모와 추악성을 모두 말해버리고 나서, 이번엔 기념비 설림을 위해 모은 기부금을 여러 고관들이 착복한 이야기를 유달리 즐거운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그 옆을 지나왔는데 기념비는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개라는 사내의 첩이 증권으로 몇 백 만을 벌었다는 이야기와, 뭐라든가 하는 사람이 여편네를 팔아버리고 누구라든가 하는 사람이 샀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서, 변호사는 또 국가 요직에 있는 인간이 온갖 사기와 범죄를 저지르면서 감옥은커녕 이곳저곳 관청 의자에 도사리고 앉은 이야기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마 변호사에게는 이런 얘기가 무궁무진한 것 같았고, 그 자신에게도 무척 만족을 주는 듯했다. 돈을 벌기 위해 변호사가 쓰는 수단이 같은 목적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의 고관들이 사용하는 수단에 비해 아주 정당하고 죄가 없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므로 변호사는 네흘류도프가 고관들의 범죄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작별을 고하면서 마차를 집어타고 강변에 면한 집 쪽으로 돌아가버리자 무척 놀랐다.
네흘류도프는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슬퍼한 가장 큰 이유는 원로원의 기각이 죄 없는 마슬로바에게 뻘어지는 무의미한 고통을 더욱 확실하게 했으며, 이 기각이 그녀와 운명을 연결하려는 자신의 변함없는 결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그토록 신이 나서 떠벌려댄 지배적 악의 가공할 만한 이야기와 한때는 상냥하고 솔직하고 고귀했던 셀렌닌의 떼밀어내는 듯한 차갑고 불쾌한 시선이 자꾸 떠올라서 그의 슬픔은 한층 더 심해져갔다.
네흘류도프가 집으로 돌아오니, 문지기가 어느 정도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으로 어떤 여자가 하닌 방에서 썼다는 편지를 주었다. 슈스토바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그녀는 딸을 구해준 은인이며 구원자인 네흘류도프에게 감사를 표하러 왔으며, 바실리예프시키 5번가의 자기 집에 와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베라 예프레모브나를 위해서라도 꼭 오시기를 바란다고 그녀는 쓰고 있었다. 번거로운 사례의 말씀은 드리지 않을테니 안심하시고, 오직 한 번 뵙기만 해도 기쁘겠으며, 만일 틈이 나신다면 내일 아침에 와주실 수 없겠느냐는 사연이었다.
또 한 통은 네흘류도프의 옛 번인 시종 무관 보가트이레프의 편지였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준비한 분리파 교도를 위한 청원서를 직접 황제에게 내달라고 이 사내에게 부탁해두었다. 보가트이레프는 그 큼직하고 무게 있는 필체로 청원서는 약속대로 자기가 직접 황제에게 내겠지만, 그래도 네흘류도프가 이 사건의 담당자에게 미리가서 부탁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쓰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며 요 며칠 사이에 받은 인상으로는 네흘류도프는 무슨 일을 성취하려 해도 아주 절망적이라는 심경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세웠던 모든 계획은 실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환멸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저 청년기의 공상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상 계획했던 모든 일을 실행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일은 보가트이레프를 방문한 뒤에 그의 충고에 따라 분리파 교도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을 찾아가보리라 결심했다.
그가 분리파 교도들의 청원서를 가방에서 꺼내 다시금 읽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의 하인이 들어와 2층으로 차를 마시러 와달라는 말을 전했다. 네흘류도프는 지금 곧 가겠노라 대답하고, 서류를 도로 가방에 넣고는 이모한테로 갔다. 2층으로 가는 길에 창밖으로 한길을 내다보고 마리에트의 밤색 말 쌍두마차를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갑자기 마음이 즐거워지고 웃음까지 나왔다.
마리에트는 모자를 쓴 채로 이번엔 검은 정장이 아니라 별의별 색깔이 혼합된 밝은 느낌의 옷을 입고, 찻잔을 손에 들고 백작 부인 곁에 앉아 웃음을 머금은 어여쁜 눈을 반짝이면서 열심히 지껄이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방 안으로 들어 갔을 때는 마침 마리에트가 퍽 우스꽝스러운 무슨 점잖지 못한 말을 했는지(웃음의 성질로 네흘류도프는 그것을 알았다) 수염이 엷게 돋은 사람 좋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은 그 뚱뚱한 몸을 온통 뒤흔들면서 웃어대고 있었고, 마리에트 자신은 일종의 독특한 mischievous(장난꾸러기) 표정으로 살며시 웃음 띤 입을 일그러뜨리고 정열적이고 명량한 얼굴은 모로 기울이고는 잠자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네흘류도프는 두세 마디 들었을 뿐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지금 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 뉴스가 되고 있는, 시베리아 시장으로 전임된 그 사내의 일화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마리에트가 바로 그 일에 대한 어떤 우스운 이야기를 해서 백작 부인이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이레다 날 죽이겠어요." 기침을 하면서 그녀는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인사를 하고 그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가 마리에트의 경박함을 꾸짖으려고 하자, 그녀는 그의 얼굴에 감도는 적이 불만스러운 진지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곧 그의 마음에 들도록(그를 보았을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얼굴 표정뿐만 아니라 기분까지도 싹 바꾸었다. 그녀는 별안간 자기 삶에 불만을 느끼며 무엇을 갈구하고 무엇을 지향하는 듯한 진지한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를 별로 꾸며대는 것은 아니고,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었지만 여하튼 이 순간 네흘류도프가 젖어 있는 거소가 똑같은 정신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패소한 일과 셀레닌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아, 정말 결백하신 분이에요! 그분이야말로 Chevalier sans peur et sans reproche(공포와 비난을 모르는 기사예요). 결백한 분이에요." 두 부인은 사교계에 알려진 셀레닌에 대한 인상을 되풀이했다.
"부인은 어떤 분이죠?" 네흘류도프는 물었다.
"부인요? 글쎄요, 전 남을 비평하지는 않기로 했어요. 근데 그분은 남편을 이해하지 않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그분까지 기각에 찬성했나요?" 그녀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동정하며 물었다. "무서운 일이군요. 정말 그 여자가 가엾어요!"하고 그녀는 한숨을 섞어가며 덧붙였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고 화제를 바꿔, 요새 감옥에 수용되었던 슈스토바가 그녀의 알선으로 석방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남편을 움직여준 그녀에게 감사를 전한 다음, 이어서 힘을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여자와 가족들이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진다고 말하려하자, 그녀는 다 듣기도 전에 자기대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 말 말아주세요." 그녀는 말했다. "석방해도 좋다고 남편이 말했을 때 저도 곧 그와 똑같은 생각에 흠칫했어요. 죄가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가둬둔 걸까요?" 그녀는 네흘류도프가 하려던 말을 고스란히 입 밖에 냈다. "정말 분개할 만한 일이에요!"
백작 부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마리에트가 조카에게 아양을 떠는 것을 눈치채고 마음이 즐거웠다.
"저기 말이야." 두 사람이 한동안 말이 없자 백작 부인이 말했다. "내일 밤 알린한테 가봐요, 키제베테르 선생이 나오신다니까. 당신도요"하고 마리에트에게 말했다.
"Il vous a remaque(그분은 네게 관심을 두고 계셨어)." 그녀는 조카에게 말했다. "네가 한 말을 전부 얘기해드렸더니, 모두 좋은 징조니까 너는 반드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더라. 그러니 꼭 가봐라. 마리에트, 당신도 좀 권해줘요. 당신도 오는 거예요."
"백작 부인, 첫째로 제겐 공작에게 권고할 자격이 없어요."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눈초리는 그와 자기 사이에 백작 부인의 말이나 일반적인 복음서에 대해서 어떤 완전한 합의를 보고 있다는 듯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잘 아시겠지만....."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남들과는 반대로 자기 마음먹은 대로 하는군요."
"마음먹은 대로라니, 그런 일 없어요. 저는 보통 여자들과 똑같은 신앙을 가졌을 뿐인걸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셋째로"하고 그녀는 계속했다. "내일은 프랑스 극장에 갈 예정이에요."
"아, 그래! 너 보았니....그 여배우 이름이 뭐더라?"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백작 부인이 말했다.
마리에트는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꼭 가보는 게 좋아, 정말 훌륭하니까."
"어느 쪽에 먼저 가는 게 좋겠습니까, 이모님. 여배우입니까, 선교사입니까?" 네흘류도프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제발 내 말꼬리만 잡지 마라."
"선교사를 먼저 보고, 그 뒤에 프랑스 여배우를 보고 싶ㄱ룬요. 그렇지 않으면 설교에 대한 흥미를 온통 잃어버릴 우려가 있으니까요."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아니에요, 프랑스 극장부터 갔다가 그 뒤에 참회하시는 쪽이 더 좋아요." 마리에트가 말했다.
"들이서 그렇게 날 놀리는 게 아니에요. 선교사는 선교사고, 연극은 연극 아니겠어요. 뭐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얼굴을 기다랗게 늘어뜨려 노상 울어 보일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요. 필요한 것은 믿는 일이죠. 그러면 마음이 밝아져요."
"이모님은 어느 선교사보다도 설교에 능하시군요."
"그러시면요"하고 조금 생각한 뒤에 마리에트가 말했다. "내일 우리 좌석에 오세요."
"가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손님이 왔다고 알리러 온 하인 때문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손님은 백작 부인이 회장직을 맡고 있는 자선단체의 비서였다.
"퍽 따분한 분이니 저쪽에서 만나는 게 좋겠군. 나중에 또 오겠어요. 마리에트, 이 사람한테 차라도 주지 않겠어요"하고 백작 부인은 총총걸음으로 홀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마리에트는 장갑을 벗었다. 약손가락에다 보석 반지를 낀 정력적이고 넓적한 손이 번쩍번쩍 빛났다.
"드시겠어요?" 그녀는 이상한 모양으로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알코올 램프에 얹혀 있는 은 포트에 손을 뻗치면서 말했다.
그 얼굴은 진지하고 슬픈 표정을 띠었다.
"제가 항상 존경하는 의견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지금의 제 처지와 저를 혼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안타까워져요."
마지막 말을 입에 올리면서 그녀는 금세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분석해본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또 있다면 매우 애매한 의미뿐인데도 네흘류도프에게는 적잖이 심원하고 진지하게 선량한 말로 여겨졌다. 젊고 아름답고 훌륭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이런 말과 함께 보내는 빛나는 눈초리가 그토록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 기분과 당신 마음속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시죠. 그렇지만 당신이 하신 일은 누구나 다 알아요. C'est le secret de polichinelle(세상이 다 아는 비밀인걸요). 저도 감탄하며 당신에게 찬성하고 있어요."
"뭐 그렇게 감탄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별로 한 일이라곤 없으니까."
"마찬가지 아녜요, 전 당신 기분을 이해하고 또 그 여자의 기분도 잘 아니까요. 그렇지만 좋아요. 좋아요,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둬요."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불만의 빛을 살피고 자기 이야기를 그쳤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전 알고 있어요. 당신은 감옥에서 일어나는 모든 공포와 고통을 보셨기에"하고 마리에트는 그의 마음을 끌고 싶은 일념에서 그가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여자의 직감으로 알아차리면서 말했다. "괴로워하는 사람을 구해주려고 생각하시죠. 세상 사람들 때문에, 냉혹한 몰인정 때문에 저런 무서운 괴로움을 맛보는 사람들을 구해주려고 생각하시죠. .......이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괜찮다는 것도 알아요, 저 자신도 바치고 싶을 정도인걸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있으니까......."
"그럼 당신은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제가요?"하고 그녀는 이런 질문에 깜짝 놀란듯이 되물었다. "저는 만족하지 ㅇ낳으면 안 될 처지인걸요. 그래서 만족하고 있죠. 그렇지만 가끔 벌레가 눈을 뜰 때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벌레를 잠자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녀의 수단에 온통 말려들어가며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그 후에도 네흘류도프는 몇 번이고 그녀와의 이 대화를 수치스럽게 상기했다. 허위라기보다는 그를 흉내 낸 그녀의 말투며, 그가 감옥의 무서움이나 시골에서 받은 인상에 대해 얘기했을 때 사뭇 감동하여 주의 깊게 듣던 그녀의 얼굴을 생각해냈다.
백작 부인이 돌아왔을 때 둘은 이미 단순한 옛 벗이 아니라, 자기네들을 이해해주지 않는 군중속에서 서로만은 이해하는 둘도 없는 친구인 양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관헌은 불공정함과 불행한 사람들의 괴로움과 농민의 가난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열띤 대화를 나누며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두 사람의 눈은 쉴 새 없이 '저를 사랑해주시겠어요?'하고 묻고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성적인 감정이 뜻밖에 무지개처럼 화려한 형태를 이루며 서로 상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돌아갈 무렵 그녀는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그에게 말하고, 중대한 이야기가 있으니 내일 밤에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극장에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그리고 언제 또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하고 그녀는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이고, 반지투성이 손에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일은 꼭 오시겠다고 약속해주세요."
네흘류도프는 약속했다.
그날 밤 네흘류도프는 자기 방에서 홀로 자리에 들어 불을 끄고 나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슬로바의 일이며 원로원의 판결,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자신의 결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 포기 따위를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그러한 문제에 대한 답인 양 '언제 또 만날지?'하고 말했을 때의 마리에트의 얼굴과 한숨과 눈초리, 그리고 웃음 따위가 마치 금방 눈으로 본 듯 선연히 그려져 그 자신도 빙긋이 웃었을 정도였다. '시베리아로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커튼 틈새로 보이는 페테르부르크의 밤은 밝았으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막연하기만 했다. 그는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는 예전의 기분을 마음속에 불러일으켜보기도 하고 사상의 경위를 상기해보기도 했으나, 그러한 사상도 이미 예전과 같은 설득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모두를 대뜸 생각해보기만 했을 뿐 그것을 생활에 실행해나갈 만한 힘이 없다, 좋은 일을 했는데 후회하는 처지고 보니.'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오랫동안 맛본 적 없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을 느꼈다. 이들 문제를 해명할 수 없었던 그는 카드놀이로 대패햇을 때 겪곤 하던 답답하고 괴로운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