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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2023.09.14~2024.01.12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이다.
‘지속성’과 ‘일관성’은 장욱진 그림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재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움과 하나의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 태도를 보여주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현재 알려진 작품들만 헤아려도 유화 730여 점, 먹그림 300여 점으로 그 수가 상당하다. 나무와 까치, 해와 달, 집, 가족 등 일상적이고 친근한 몇 가지 제한된 모티프만을 평생에 걸쳐 그렸지만,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또한 서양화를 기반으로 동양적 정신과 형태를 가미하면서도 서로 간 무리 없이 일체(一體)를 이루는 경우는 장욱진 외에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전시는 1920년대 학창 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약 60여 년간 꾸준하게 펼쳐 온 장욱진의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장욱진은 그의 화문집(畵文集)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화가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자기자신을 소모시켰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노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다.
그가 떠난지 30여년이 흘렀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分身)은 없다.
난 나의 그림에 나를 고백(告白)하고 나를 녹여서 넣는다. 나를 다 드러내고, 발산하는 그림처럼 정확한 놈도 없다.”
‐ 장욱진, 「마을」, 『조선일보』, 1973. 12. 8.
1. 첫 번째 고백
내 자신의 저항속에 살며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저항 속에 사는 것 같다. …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인은 모두가 자기 직책을 빌려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순수성을 지키려 하고 안간힘을 쓰며, 이 순수성에 대한 타인의 침해를 막으려 드는 것이 상례이다. …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행위[제작 과정]에 있어서 유쾌할 수만도 없고, 소재를 다룰 때 기교에 있어 재미있게 나왔다 해도 결과[표현]가 비참할 때가 많다. 이렇다 보니 나의 일에 있어서는 저항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 일상(日常)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 장욱진, 「저항」, 『동아일보』, 1969. 6. 7.
장욱진의 첫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의 청년기(10~20대) 작품들은 고전색과 향토색이 짙게 느껴지는 모티프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흑백과 갈색의 모노톤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욱진은 장년기(30~40대)를 거치며 명도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주목도를 높인다. 형태는 더욱 평면화, 도안화시키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아동화적 도상을 분할 구성하여 표현해낸 시도나, 서양 동화 같은 정경에 동심이 천진하게 깃든 정감 어린 풍경 등이 그러하다. 이후 중년기(40~50대)에 이르면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서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만든 까칠한 질감의 마티에르가 점점 원근법적 공간을 지우고, 그림 표층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의 질감을 더욱 다양하게 조성한다. 잠시 구상과 추상을 혼성한 반추상과 더 나아가 순수 추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형상성(形像性)이 회복되며 장욱진 그림만의 졸박(拙朴)한 양식이 이어진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는 완숙한 장욱진 작품의 전형(典型)이 완성되기까지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장욱진만의 독창적인 ‘한국적 모더니즘’이 창출되는 여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작품과 함께 유기적으로 배치한 장욱진 관련 아카이브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그의 저항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번째 고백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사람마다 내 그림을 보고는 그림의 설명을 요구해 온다. 그림을 그리는 누구도 그렇겠지만, 나는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이란 게 그림의 발상(發想)으로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생각이 좋고 나쁜 것으로 그림의 됨됨이 또한 결정되기도 한다. 나의 생각이란 것은 무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포름(forme)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즉 산만한 외부 형태들을 나의 힘으로 통일시키는 일이다. …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단지 파괴로서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개성적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임을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점이 오늘날 작가들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 장욱진, 「발상과 방법」, 『문학예술』, 1955. 6.
장욱진의 두 번째 고백, 여기서는 장욱진이 화가로서 어떠한 ‘발상’을 했고,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 구성했는지 살펴본다. ‘보고 싶은 대로 그냥 보고 있는 것’과 ‘지식을 가지고 관찰해서 보는 것’은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그가 그림 한 점을 그릴 때마다 점 하나, 선 하나에도 지나칠 만큼 엄격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장욱진의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조금은 더 진지해져도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그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을 자세히 분석한다. 장욱진 회화의 대표적 모티프 가운데 ‘까치’, ‘나무’, ‘해와 달’을 선정해 각각의 소재들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가 무엇인지, 도상적 특징은 어떻게 변모되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전시장에 가득한 ‘까치’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고, ‘나무’는 그의 온 세상을 품는 우주였으며, ‘해와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의 매개체로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임을 보여주려 한 장욱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의 구성도 작품의 의미와 관계가 깊다. 소재를 통해 그림의 의미를 분석했다면, 이러한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각각의 소재들이 작은 그림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얼마나 조형적 완결성을 가지는지 구성 방식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몇 가지 소재들이 반복됨에도 구성을 달리하면서 똑같은 그림이 단 한 점도 없는 것처럼, 별도로 마련한 ‘콤포지션’ 코너에서 그가 고민했던 작품의 발상과 방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에 마련한 ‘장욱진 그림 읽기법’ 혹은 ‘장욱진 그림 감상법’을 통해서 장욱진 작품 속 구성 요소와 각각의 역할을 확인하고, 장욱진의 그림을 깊이 있게 이해하며 그의 고백을 진지하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3. 세 번째 고백
진眞.진眞.묘妙
“자기의 생활은 자기만이 하며 자기의 생활을 그 누구의 생활과도 비교하지도 않았으며 때문에 창작 생활 이외에는 쓸데없는 부담밖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승려가 속세를 버렸다고 해서 생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과 함께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하려는 또 하나의 생활이 책임 지워진 것과 같이 예술도 그렇듯 사는 방식임에 지나지 않으리라”
‐ 장욱진, 「예술과 생활」, 『신동아』, 1967. 6.
장욱진의 세 번째 고백,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 진진묘[眞眞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첫 불교 관련 작품인 〈진진묘〉로 시작하는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장욱진의 내면에 스며있는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 정신세계를 살펴본다.
장욱진과 불교의 인연은 유명한 여러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청년기부터 있었지만 실제로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먹그림 역시 이 시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불교 인식과 태도가 딱히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전시된 그의 먹그림들을 통해서 적어도 예술이라는 개념에서 ‘깨달음의 과정’이자 ‘깨달음의 표현’이었음을 말해준다. 나아가 그의 간결하고도 응축된 작품 경향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 오히려 불교적 사상과 개념으로 추구된 ‘절제’와 ‘득도’의 결과로 바라보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진진묘’는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法名)이다. 아내를 보살상으로 표현할 정도로 존중하고 가족을 귀하게 여겼던 장욱진은 하다못해 동물을 그려도 동물 ‘가족’을 그렸다. 가족도, 동물도 모두 소중한 인연(因緣)으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던 그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다. 특히 이 전시실에서는 일본에서 60년 만에 돌아온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가 응급 보존처리를 마치고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4. 네 번째 고백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툭툭 튀어나온다. 마음속으로부터 …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맑은 바다처럼 순수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잡다한 얼룩과 찌꺼기들이 많다. 기쁨, 슬픔, 욕심, 집념들이 엉겨서 열병(熱病)처럼 끓고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지워 간다.
다 지워 내고 나면 조그만 마음만 남는다. 어린이의 그것처럼 조그만 … 이런 텅 비워진 마음에는 모든 사물이 순수하게 비친다. 그런 마음이 돼야 붓을 든다.”
‐ 장욱진, 「경향화랑」, 『주간경향』, 1979. 10. 7.
장욱진의 네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1970년대 이후, 곧 노년기를 살펴본다.
흔히 이야기하는 수안보 시기부터 용인(신갈) 시기까지의 작품들이다. 장욱진이 평생 남긴 730여 점의 유화 가운데 80퍼센트에 달하는 580여 점이 이 마지막 15년 동안 그려진 것이다.
실제 1973년 전후로 그의 작품에서는 1960년대까지 주를 이루던 강한 마티에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의 색층은 더욱 얇아지고, 수묵화나 수채화처럼 묽은 물감이 스며드는 듯한 담담한 효과를 유지한다.
마치 먹으로 그린 동양화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 민담이나 고사 같은 한국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삼거나, 조선시대 문인화에서 보았던 소재들도 새로이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민화를 연상시키는 화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킨 그의 유화는 결국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무상(無相)’으로 집약된다. 하늘로 둥둥 떠다니며 공중 부양하는 사람들, 시공간을 초월한 화면 구성을 통해 모든 사물은 공(空)이라 일정한 형태나 양상이 없음을 보여준다. 즉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應無所住]” 모든 집착을 떠난 초연함,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인 ‘무상(無相)’을 여실히 드러낸다. 압축적이며 평면적인 그의 초기작들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속성을 추출하여 본뜬 ‘추상(抽象)’의 작업이었다면, 말년작들은 ‘무상(無相)’의 작업으로 생략과 압축, 시공간의 초월을 통해 그의 성찰과 내면세계를 표현하면서 진정한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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