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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은 '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는 '디오코'의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란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덕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는 '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
(3) 이 비유법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즉,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 예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롬 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성도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덕을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함으로써 그의 논점을 강화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카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
하나님의 사업'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다 정하되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즉,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롬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다.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하는 것이 아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은 '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스'의 목적격이다.
그러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들의 지극히 훌륭한 일 즉, '칼론 토'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이것은 본장 2, 3, 6, 17절에서 말한 '먹는 것'과 15, 20절에서 말한 '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아니함이 영구하고 강력한 금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먹다'를 가리키는 '에스디오'의 동사가 20절에서 현재형인 '에스디온티'('먹는')로 사용된 후 바로 이어 본절에서 부정과거 '파게인'('먹었다')으로 사용된데서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규례에 매여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잠시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음은 구약성경에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를 못 먹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적절한 방법으로 피를 빼지 않은 고기. 다시 말해 고기를 그 피와 함께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아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도 금지되었다.
(나) 부정한 동물의 고기. (다) 우상 제물의 고기. 물론 고기를 먹는 그 자체를 율법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위의 금기 사항과 관련된 고기를 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규례를 아직도 준수하는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신앙의 자유의 행사를 절제하는 것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동임을 밝히고 있다.
즉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2)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메데 피에인 오이논). 이는 '칼론 토' 구문의 두번째 용어로서 17절의 관용구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먹는 것과 마시는 것') 중에 '포시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밝혀준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는 하나의 가상적인 실례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모든 고기를 피하는 조심스러운 행위는 포도주까지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은 약한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약한 자들 편에서의 금주가 아닌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의 금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야말로 참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3)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콰테이). 이는 '칼론 토'는 구문의 세번째 용어로서 연약한 자를 위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거리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하는 것이 좋음을 시사한다.
'거리끼게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콰테이'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다' 혹은 9:32, 33에서처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롬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피스틴'('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헨'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쉬'('너',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카타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절)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절)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마카리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책(責)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역시 '정죄하다', '심판하다'(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
[롬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는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죄니라'는 말에서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는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마르티아'가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