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선 쉼터 풍경(2020년 늦여름 촬영) ⓒ 윤태옥
폐허가 흉하게만 보이는 건 아니다. 폐허의 미학이 작동하여 사진기를 꺼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 고향도 아니지만 뭔지 모를 회고감을 끌어내기도 한다. 소양호 조망이 참 좋은 곳에 있는, 지금은 폐업한 38선쉼터(춘천시 북산면 소양호로 650)도 그렇다. 소양호로는 소양강댐의 북안을 따라 꼬불꼬불 흘러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외길이었으니 이 휴게소는 장사가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6년 수인터널이 개통되면서 통행량이 거의 없어졌고 38선쉼터는 폐업을 지나 폐허가 되어 있다. 나의 휴전선 답사여행에 동반했던 화가 윤지원은 이곳 풍광에 자신을 얹은 <38선쉼터>(130cm×89cm)라는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한국전쟁이란 현대사를 밟아보는 자신을 그린 것 같다.
▲ 38선 쉼터에서 본 소양호 전망. ⓒ 윤태옥
38선쉼터는 소양호 전망은 아주 좋지만 교통은 좋지 않다. 멀리 둘러싸고 있는 첩첩의 능선과 발 아래의 급경사를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한국전쟁 이전 시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깊은 산과 강에도 38선은 어김없이 그어졌다. 누군가는 숨 가쁘게 산길을 오르고 숨 고르며 강물을 건넜다. 그걸 월남이나 월북이라 했다.
월남이란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잊힌 말이 아닐까 싶다. 경로는 달라졌지만 북에서 남으로 당국의 허가없이 자의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는 탈북이란 말이 있을 뿐이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월북은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사람을 둘러싼 뉴스와 논란 때문에 기억이 되는 말이다.
남쪽으로 가는 아홉개의 길
▲ 아홉 개의 월남 루트 ⓒ 봉주영
한국전쟁 이전의 월남 루트는 동서에 걸쳐 아홉 개가 있었다. 해상루트는 동해와 서해에 하나씩 있었고, 철도(해주선,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를 따라가는 네 개의 루트, 그리고 철도노선 사이로 세 개의 루트가 있었다.
서해에서는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에서 배를 타고 연안(황해도)이나 인천 또는 한강하구에 하선했다. 동해에서는 원산 등지에서 주문진, 묵호, 포항, 방어진(울산), 부산으로 연결되었다.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루트 가운데 경의선은 북쪽의 금교역과 남쪽의 토성 구간을 걸어서 통과했다. 해주선을 이용할 때에는 학현역까지 와서는 청단까지의 산길 20km를 건너기도 했다. 경원선은 북에서는 복계역(철원역의 북쪽 세 번째 역)까지만 운행했기 때문에 복계역부터 걸어서 포천, 동두천 또는 고랑포구(연천)로 남하했다. 동해북부선의 종착역이었던 양양과 남쪽의 주문진 사이 28km 구간을 걸어서 월남하기도 했다.
철도노선이 아닌 루트는, 해주선과 경의선 중간의 산길을 거쳐 연안에 이르는 루트와, 경원선의 서부 산간 지역을 통과하여 이천(강원도), 고랑포, 장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루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원선 동부 지역으로 북쪽의 준양(강원도)을 경유해 춘천으로 연결하는 경로가 있었다. 이 루트가 바로 폐허가 된 38선쉼터가 있는 지역으로 북한강 건넌 다음에 다시 소양강을 건너야 했다.
▲ 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번화했던 1930년대 고랑포. ⓒ 윤태옥
▲ 고랑포 모습(2022년 봄 촬영). ⓒ 윤태옥
월남 루트라고는 하지만 이미 누구나 이동하고 어떤 물자든 운송이 되는 기존의 교통망이었다. 다만 38선에서는 소련군과 북한 내무기관(남한의 경찰에 해당)의 초소를 피하기 위해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안내가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직업적인 월남 안내인과 짐꾼이 생겨났으니 이들이 월남루트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안내비는 300~500원 정도, 당시 북한의 노동자 월급이 1천원 수준이었으니 상당히 짭짤한 돈벌이였다. 짐꾼의 보수는 더 컸다. 북한에서는 38경비대 38보안대 자위대와 소련군이 월경을 통제했지만 월남 시도는 대부분 성공했다. 강원도 인제군의 경우 한국전쟁 이전에 노동당원 288명이 월남을 시도했는데 체포된 당원은 4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례가 당시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38선이란 남북의 인위적인 구분선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합의하여 우리도 모르게 그어졌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해 8월 하순 38선에서 열차 운행을 차단하면서 행동의 제약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과 소련군이 만나 곳곳에 38선 초소를 세우면서 지리적인 구분선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제 월남과 월북이란 특별한 용어가 사람들의 이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주기 시작했다.
미군이든 소련군이든 처음부터 엄격하게 통제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내지나 만주 또는 소련의 연해주 등에서 귀국하거나, 북한 지역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재산을 포기하고 맨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 "모든 월남자는 즉각 ○○ 경찰에게 신고하여야 한다."고 38선의 남쪽 도로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일본어, 영어, 한글 순으로 쓰여 있었다. 많은 일본인이 귀국하기 위해 월남했음을 보여준다. 1946년 여름의 한 통계에는 47일간 38선을 통과한 사람 가운데 조선인 177명에 일본인 214명이었다.
1946년 초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수송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의 왕래를 허용한다는 원칙에 합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행 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점차 봉쇄국면으로 기울어갔다. 1946년 3월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되자 북한을 탈출하는 망명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월남이 급증했다. 3월 34,670명, 4월 50,450명이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전의 월별 월남인 숫자로는 1, 3위에 해당한다.
▲ 월남 루트 중 하나인 고랑포구에서 본 북녘. ⓒ 윤태옥
월남하려다가 체포되면 군인이나 군속은 소련군에게 인계되고, 그 외에는 구호소에 수용되었다. 북한은 내무기관의 지침으로 월경 행위를 처벌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1946년 5월 미군정은 무허가 월경을 금지했다. 그해 6~8월 콜레라가 전국에 퍼지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38선의 육상해상 교통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 질병마저도 38선을 점점 더 얼어붙게 했던 것이다. 1947년에도 월남은 갈수록 어려워졌으나 월남 시도는 계속됐다. 그해 여름에는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해, 12월에는 북한 화폐개혁으로 월남인이 일시적으로 급증하기도 했다.
1948년 9월 북한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후에는 아예 형법에 불법월경죄가 명시됐다. 직업적으로 월경을 돕거나, 공무원이 월경을 도운 것도 처벌대상이었다. 남북이 제각각 정부를 수립하자 점령 지역 구분선을 넘어 적대국 국경이 되었다. 월남은 본인은 물론이요 가족의 안위가 걸린 결단이 되고 말았다.
남한과 미군은 북한과 소련군의 월경 통제에 비해 관대한 편이었다. 당시의 '삐라'에는 "국군 정방 50m까지 와서 무기를 내려놓고 '이승만 박사' 만세를 외치면 귀순으로 인정해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술했으나 무작정 금지하기보다는 월남인들을 수용하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듯 월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쪽에는 38선을 따라 황해도의 청단, 경기도의 토성, 개성, 동두천, 의정부, 강원도의 주문진과 춘천에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에도 수용소가 하나 있었다. 수용소의 위치는 위에 나열한 월남 루트와 조응한다. 월남자들은 일단 수용소에서 개인별 심문을 거쳐야 했다.
정치적 월남보다 많았던 경제적 월남
▲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 ⓒ 윤태옥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을까. 학계의 추정치는 월남 150만, 월북 30만~35만이다. 1947년 6~7월에 개성 수용소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31,859명 가운데 생활난(20,731명 65.1%)과 귀향(9,400명 29.5%)이 많았다. 구직과 진학이 각각 82명(0.3%), 892명(2.8%)이었고 상행위가 252명(0.8%), 가장 많을 것 같은 사상적 이유는 502명(1.6%)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도 굳이 발설하지 않은 월남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월남은 조사에서는 소수지만 영향력은 강력했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민주개혁과 토지개혁으로 친일 그룹과 지주층을 궁지로 내몰았다. 남한으로 와서는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강렬한 반북한 조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에게는 이미 원한과 복수라는 데칼코마니가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북한의 우익은 남으로, 남한의 좌익은 북으로 이동했다. 서울과 평양의 두 권력은 강력한 구심력과 원심력을 휘둘렀다. 자기편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반대편도 강력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이 계속됐다. 월남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의 우익은 극우로, 북한의 좌익은 극좌로 치달았다.
통계로 잡힌 정치적 월남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생활난으로 월남한 빈농층이 가장 큰 비중을 점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38선을 가장 많이 넘나든 것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전문 38꾼들, 곧 밀무역 상인과 월경 안내인이었을 것이다.
상인들은 월경 안내와 짐꾼을 겸하기도 했다. 하나의 경제공동체였던 조선을 남북으로 분리하자 물자의 수요공급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작게는 38선으로 집과 논밭이 갈리기도 하고 시장이 38선 건너편에서 열리기도 했다. 크게는 남한에서는 중공업 화학제품이나 전기가 부족했고 북한에서는 경공업 생필품이 부족했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곧 이윤이었고, 이윤이 커질수록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늘어갔다.
전쟁 전이라지만 처벌 가능성이 상존하는 38선 지역에서도 생업이 활발했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가. 일제가 패망하고 38선으로 느닷없이 갈라진 후에도 백성들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반면 38선을 긋거나 그것에 기댄 상하좌우의 권력은 (미국이든 소련이든, 남한이든 북한이든) 시국을 폭발의 임계점으로 밀어가고 있었다.
월남이라는 격렬한 인구이동은 국가로서나 개인으로서나 핏물이 배어나오는 살벌한 현실이었다. 그 서사는 오랫동안 반공 웅변대회의 주된 소재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젊은 역사학자들이 한국전쟁을 포함한 현대사를 역사학의 연구주제로 삼아 세밀하게 사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당한 연구 결과가 쌓여왔으나 대중적으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쌓여온 반공을 위한 반공교육 덕분인지 넓고 두꺼운 공포심이 무의식까지 적시고 있다.
그런데 남한과 미군은 월남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지만 북한은 월북을 반겼을까. 다음 편에서는 대개 이념을 찾아 간 것으로 생각하는 월북자들의 발자국이 남은 곳을 찾아가려고 한다.
▲ 무심히 강물이 흐르는 고랑포구. ⓒ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