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화가 중 칸딘스키는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출생해 오데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배웠고, 전문가로서 인정받아
대학(University of Dorpat) 교수가 되었어요. 거기에서 30세 때에 그림 공부를 시작하여,
모델 데생, 스케치, 해부학을 배웠어요, 1896년에 뮌헨에 정착하여 사립학교(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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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Anton Ažbe)와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에서 수학했어요.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모스크바의 예술 이론에 동의하지 않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1921년에 독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1922년에서 1933년
까지 예술과 건축을 위한 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가 담당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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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
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나치로 인해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에는 프랑스로 옮겨 여생을 살았으며, 1939년에 프랑스국적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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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고 1944년 Paris 근교 Neuilly-sur-Seine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바우하우스에서 강의
록을 기초로 하여 1926년에 그의 제2 이론적 저작인 ‘점·선·면’이 출판되었습니다. 회화의
기초적인 평면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한 것인데, 제1의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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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기술한 독특한 저작입니다.
당시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려던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는 매우 귀중
했어요.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조각가 막스 빌은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 주어,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비판을 환기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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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작에 있어서 1910년 ~ 1920년의 기간에는
색채와 형태의 격렬한 다이너미즘이 1920년 ~ 1924년의 시기에는 자취가 없어지고, 대신
명확한 형식에 의한 구축적인 콤퍼지션(구성)이 현저해집니다. 이는 모국에서 구성주의와
절대주의(쉬프레마티슴)를 체험한 성과입니다. 1925년 ~ 1928년까지는 이 경향이 더욱 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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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이른바 원(圓)의 시대에 들어갑니다. 1931년 그는 이집트·그리스·터키로 여행하여
동양의 풍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인상이 익어서 다채로운 형태
가운데에 동양의 여정과 향수를 표현한 것은 1933년 파리에 이주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 만년의 제작으로 그는 원의 시대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탈피하고 형식과 색채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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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내지는 환상이 넘치는 음악적 해조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내면의 표출을
주안점으로 하는 추상의 이념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인 제작에서도 그에 의하여 기초가
닦여진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칸틴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합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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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됩니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
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2.
간밤에 비가 얌전히 내려줘서 다행이도 천막아래 내 놓은 옷가지들이 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