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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진짜 징글하게 덥네요... 오늘 낮에 밖에 나왔던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진짜 더워도 너무 더운날이였습니다. 비같지 않은 비 몇일 오고 금방 이렇게 덥다니 반칙 이네요..
계속해서 2차대전 최고의 폭격기인 B-29 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심층적으로 탄생부터 쓸라고 했는데 곧 815 라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부터 먼저 다루고 넘어갑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에 투입된 B-29 폭격기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1941년 12월7일 이른아침 일본의 진주만의 기습으로 시작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6일과 8월9일 두발의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긴 5년간의 전쟁을 끝을 보게된다]
[ 초기에는 완벽한 기습전으로 우세를 떨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해전에서 대부분의 함대를 잃고 정신을 차린 미국이 거대한 공업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하게 되자 1944~45년이 들자 이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미군은 한때 자신들의 식민지였다 일본에게 빼앗긴 필리핀을 비롯한 남태평양일대의 과거 식민지들을 수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65개 일본내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는 작전으로 이미 일본의 항복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미육군항공대를 이끌던 커티스 르메이 (Curtis Emerson LeMay) 장군은 폭격을 통한 독일의 항복을 이꿀어낸 작전에 이어 유럽전선이 정리되자 이어 일본을 상대로 67개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의 경우 대부분 목조가옥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통상폭탄대신 불이 잘붙는 소이탄을 이용하는 작전을 펼치게 되느데 대부분 목조건물인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사진은 B-29를 이용해 일본도시를 폭격중인 모습 이때 B-29의 공습은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생존자들에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이오지마 전투(영어: Battle of Iwo Jima, 일본어:
[이오지마 전투이후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위해 일본에 상륙작전을 펼칠시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핵 두 발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 올림픽 작전이 핵탄두 20여 발과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까지 사용되는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는 하지만 거듭된 항복 권유를 묵살하고 반자이 어택을 일삼는 일본군의 모습을 치가 떨리게 봐온 미군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결정에는 카미카제도 크게 작용했는데 이를 본 미군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놈들인가?" 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 연구가 있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었다. ]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상륙전 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중하나가 바로 핵폭탄을 이용한 폭격이였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1942년부터 맨해튼 계획 또는 맨해튼 프로젝트(영어: Manhattan Project)라는 프로젝트를 계획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원자분열을 이용한 새로운 폭탄을 개발하는 연구였다 사진은 194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회동 중인 어니스트 로렌스, 아서 콤프턴, 배너버 부시, 제임스 코넌트, 칼 캄프턴, 알프레드 리 루미스 의 모습 이들은 당대 내놓라 하는 석학들로 훗날 맨하튼프로젝트팀의 주요 연구원들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1945년 트리니티 실험 현장을 다시 찾은 로버트 오펜하이머 (맨하튼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 와 레슬리 그로브스. 낙진 때문에 흰색 방제화를 신고 있다.]
[ 일본내 핵폭탄을 투하할 폭격기로는 당시 최고의 4발 중폭격기자 무려 9톤의 폭탄을 싣고 5천킬로 이상을 비행할수 있었던 B-29 가 선정되었다. 최초의 핵폭탄 투하기체는 에놀라 게이(Enola Gay) 라는 기체였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관중인 에놀라게이의 모습 긴전쟁을 끝을낸 기체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체로 무려4톤이 넘는 핵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만을 한채 회전포탑 마저 제거한채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글렌 L. 마틴 사 (현 오퍼트 공군 기지) 벨뷰 공장에서 제조되었다. 그 후, 폴 티베트 대령이 개인적으로 골라 1945년 5월 18일에 미육군항공대 509 혼성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7월 6일에는 미국 본토로부터 티니안 섬에 도착해, 그 날 안에 원자폭탄을 탑재하기 위해 폭탄창의 개조가 행해졌다]
[에놀라게이는 배속 당초, 번호「12」로 지정지만,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수직꼬리날개의 마킹을 특수 작전기라는 것을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일반 폭격 전대인「제6 폭격대」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R로 변경했기 때문에, 오인 방지를 위해 「82」로 변경되었다. 초기는 특수 임무기 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좌향의 화살표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4톤이 넘는 핵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모든 회전포탑을 제거하고 폭탄창도 개조하여 비행하였다.
에놀라 게이에는 1945년 8월 6일 총 12명이 탑승하였다.
[현재 에놀라게이는 스미소니언 항공기 박물관에 전시중에 있는데 전시초기에는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 측이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도 포함해 복원 중의 에놀라 게이의 전시를 계획했다. 이 정보가 전해지면 미 퇴역군인 단체등 에서 항의와 강한 압력을 받을 수 있어, 전시는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을 생략하게 되어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 일련의 소동의 책임을 지고 박물관장은 사임했다.
그 후, 복원이 완료되어,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의 별관이 되는 스티븐 F. 우드바-헤이지 센터(워싱턴 덜레스 국제 공항 근교에 위치)가 완성된 것에 의해 현재는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중요한 상용 전시 기체이며, 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파괴 행위 등이 행해지지 않게, 복수의 감시 모니터로 감시되어 조심성 없게 기체에 가까이 가는 수상한 사람에 대해서는 감시 카메라가 자동 추적 해 동시에 경보가 발생하는 시스템을 채용했다. 2005년에는 영상 해석 장치도 도입하는 등, 엄중한 관리 하에서 공개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은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은 일절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전시 방법에는 비판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에놀라 게이에 이어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의 핵폭탄을 투하한 기체는 복스카로 불리는 기체였다]
[비행기의 이름인 '복스카(Bockscar)'는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기체 역시 모든 무장을 철거하고 핵폭탄 탑재를 위한 폭탄창을 개조했으며 폭격후 피해를 기록할 다수의 카메라들이 설치되는 개조를 가했다고 한다]
[일본에 척 핵폭탄을 투하한 애놀라게이 라는 명칭은 본기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성함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 로 명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임무를 수행하는 기체의 기장인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꼬장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참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 라는 페인팅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억울하면 군대 일찍 오든가!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 에노라 게이는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글렌 L. 마틴 사 (현 오퍼트 공군 기지) 벨뷰 공장에서 제조되었다. 그 후, 폴 티베트 대령이 개인적으로 골라 1945년 5월 18일에 미육군항공대 509 혼성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7월 6일에는 미국 본토로부터 티니안 섬에 도착해, 그 날 안에 원자폭탄을 탑재하기 위해 폭탄창의 개조가 행해졌고 이후 에놀라 게이는 8회의 훈련 임무와 2회의 산업 목표를 파괴하는 고베·나고야에의 펌킨 폭탄(모의 원자 폭탄)을 사용한 폭격 임무를 실시했고, 1945년 7월 31일에는 원폭 투하 임무 리허설을 모의 원자폭탄을 탑재해 티니안 인근 바다에서 훈련, 투하했다.한편 기체 명칭인 에놀라 게이는, 기장인 폴 티베트 대령의 모친인 에놀라 게이 티베트(Enola Gay Tibbets)로부터 따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44-86292호기 사령관인 로버트 A. 루이스 대위(원폭 투하 임무시는 부기장을 맡았다)는 운명적인 이 작전에 모친의 이름을 붙이는 일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맨하튼 프로젝트에 의해 제작된 두발의 원자폭탄의 모습 각각 펫맨과 리틀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물론 생김새에서 딴 이름이였다. 이들은 당시 핵분열을 불러 일으킬수 있는 두가지방법을 각각 적용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였다. 이때는 아직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압축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무게 4톤이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이를 운반할수 있는 기체는 그리 많치 안났다 (당시로는 랭카스터나 B-29 나 가능했다)]
[두 원자폭탄은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텅 빈 공간 바깥에 플루토늄을 배치한 후 기폭과 동시에 이 조각들이 안쪽으로 날아가서 공 모양으로 합쳐지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있었다. 이렇게 두가지로 만든 이유는 당시 시간이 촉박하여 뭐가 나은지 테스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B-29 에 장착되기 위해 운반중인 펫맨. 무게 4톤의 거대함이 느껴지는듯 하다]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투하한 에놀라 게이와 승무원들.]
[히로시마에 투하된 세계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의 모습 위에 설명한 대로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는 구조였다]
[히로시마는 원자 폭탄이 투하될 제 1순위 목표 도시였으며 임무 수행 중 변수가 생길 시 이를 대체할 목표 도시는 고쿠라와 나가사키였다. 8월 9일에 투하된 이유는 그 전에는 기상 문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93사단 폭격 비행중대에 속했던 B-29 에놀라 게이는 일본 본토 영토에서 비행시간으로 6시간 떨어진 서태평양 티니언 섬 북쪽에 있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히로시마로 향하였으며, 제 509 혼성부대 폴 티베츠 대령이 폭격기를 조종하고 지휘했다. 에놀라 게이는 두 기의 다른 B-29 폭격기와 함께 일본 본토로 향했는데, 그 두 기 중 한 기는 찰스 W.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원폭투하 후 결과 측정을 담당했으며, 나머지 한 기는 조지 마쿼트 대위가 지휘하는 폭격기로 처음에는 기체명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후에 네세서리 이블이란 이름으로 정해졌다.티니언 섬에서 이륙한 후 각 폭격기는 산개비행을 하다가 이오 섬 고도 2,440 미터에서 재 집합한 후 일본 본토로 향했다. B-29 에놀라 게이는 목표도시 히로시마에서 고도 9,855 미터 상공에서 시야를 확보했다. 본토로 향하는 동안 해군 대령 윌리엄 파슨스가 이륙 시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리해뒀던 원폭 리틀 보이를 장착했고, 보조를 담당하던 모리스 젭슨 소위가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안전 장치를 분리했다.]
[원폭 투하가 있기 한 시간 전, 일본 제국 조기 경보 레이더는 본토 남쪽 부근에서 일부 미국 비행편대가 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히로시마를 포함에 많은 도시에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공습경보가 울렸다. 오전 8시 무렵, 히로시마 레이더 관측소 측에선 본토로 향해오는 비행기 기체의 숫자가 몇 안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공습경보를 해제했다. 연료와 기체를 아끼기 위해 비행편대가 지나가게끔 방치했다는 것이다. 기존 라디오 방송에서는 실제로 B-29 폭격기들이 포착될 시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내용을 방송했다. 하지만 이미 아침 7시 31분에 기상 관측 비행기 스트레이트 플러시가 고도 9,800 미터 상공에서 히로시마의 기상 상태가 양호하다는 내용을 담은 전언을 모스 부호로 보낸 상태였다. 아침 8시 9분 폴 티베츠 대령은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했다.]
[60 킬로그램의 우라늄 235가 담긴 포신형 핵분열 무기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 현지 시각 08시 15분에 투하됐다. 리틀 보이는 고도 9,470 미터 상공에서 43초 동안 떨어져 도시 위 580미터 상공에서 폭파됐다.[27]B-29 에놀라 게이는 후폭풍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도시에서 벗어나 11.5 마일(약 18.5 킬로미터)을 비행했다.]
[리틀 보이는 옆바람 때문에 본래 조준했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240 미터 벗어난 시마 외과 병원에 투하됐다.[29]리틀보이는 TNT 13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반경 1.6 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것을 파괴했으며 11 제곱킬로미터에 해당하는 화재를 일으켰다.[31]미국은 도시의 12 제곱 킬로미터가 파괴된 것으로 측정했으며, 일본은 히로시마의 69%의 건물들이 파괴됐으며 그것을 제외한 31%의 건물들 중 6~7%가 손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히로시마의 인구 중 70,000명에서 80,000 명, 약 30%가 원폭 투하 당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으며 70,000여명이 부상당했다.또한 도시의 90%의 의사들과 93%의 간호사가 사망하거나 다쳤다. 이들은 도시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시내에 있었다.]
[단 1발의 폭탄은 히로시마를 완벽에 가깝게 파괴하였다. 하필이면 투하 시간이 사람들의 출근 시간이었기에 피해가 더 컸다. 도쿄 NHK는 히로시마 NHK의 방송이 갑작스럽게 중지하게 되자, 다른 전화선을 이용해 방송 연결을 다시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36]약 20분 후 도쿄 철도 전신 센터는 히로시마 북쪽으로 향해있는 전신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히로시마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일부 철도역들에서 비공식적으로 엄청난 폭탄 투하가 있었다는 보고했으며, 이 보고는 일본 제국 군 참모 본부에 전해졌다.]
[일본 제국 참모 본부는 반복적으로 히로시마 군지휘부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으며 이것은 곧 지휘부에 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제국은 3기의 비행기가 그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참모본부는 히로시마에 즉시 비행기를 보내 피해를 조사하고 도쿄에 보고할 것을 명령했다. 지휘부는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러한 폭탄투하는 없다며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비행기는 히로시마 남서쪽으로 향했다. 3시간 여 동안 비행을 한 끝에 비행기 조종사와 함께 파견된 참모 장교는 히로시마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원폭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연기구름을 목격했다. 비행기는 곧 도시에 다다랐으며 히로시마에 있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뒤덮여있는 광경을 목격하며 히로시마 상공을 비행했다. 참모 장교는 이 사실을 도쿄에 보고한 후 즉시 피해를 측정했다.
1945년 8월 8일 미국은 도쿄 라디오에서 히로시마 폭격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보고를 받았다. 당시 라디오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 동물, 모든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말 그대로 죽음 속에 그슬렸습니다]
[미국 에너지부의 기록에 따르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즉사한 사망자가 대략 70,000명이라고 돼있다. 의료 물자 부족 때문에 화상과 피폭 및 관련 질병을 입은 환자들은 더욱 더 부상이 심해져 1945년 말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인해 생긴 총 사망자는 90,000명에서 166,000명이었다. 일부는 1950년까지 피폭으로 인한 암과 같은 장기질환 등 때문에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약 20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1][7][40]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에서 암과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들 중 9%가 히로시마 원폭 당시 피폭을 맞은 사람들이라고 발표했다.]
[히로시마의 원폭상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있긴했다.. 하지만 그들역시 이후 방사능낙진으로 인한 병마로 서서히 죽어갔다]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다. 큰 재래식 폭탄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첫번째 핵폭탄인 리틀보이에 일본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대한 피해를 끼친 핵폭탄임을 인정하지 않고 규모가 재래식 폭탄으로 전과를 평가절하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미국은 두번째 핵폭탄인 펫보이를 준비하게 된다]
[8월6일 첫번째 핵폭탄인 리틀보이의 투하이후에도 일본의 반응이 없자 3일후 미군은 두번째 핵폭탄 투하를 준비하게 된다. 사진은 두번째 핵폭탄인 펫맨을 투하한 복스카 의 승무원들 모습]
[ 히로시마에 이어 두번째 원폭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 시는 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산업 지대를 포함하고 있었고 군수품, 선박, 무기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도시였기에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
히로시마의 모습과는 달리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무로 지어진 전통 일본식 집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많았다. 수많은 공장과 사무실들 또한 폭발과 화재에 약한 재료나 나무로 지어졌었다. 또한 나가사키는 계획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들 중 대부분이 산업 지대 공장에 굉장히 근접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가 있기 전에 한 번도 대규모의 공습을 겪지 않은 도시였지만 1945년 8월 1일 수많은 재래식 고성능 폭탄들이 도시 투하됐다. 이로 인해 도시 남서쪽에 있는 조선소와 부두가 피해를 일부 입었으며, 미츠비시 중공업 공장과 군수공장이 타격을 받았으며 6발의 폭탄이 나가사키 의과 대학과 병원에 떨어졌으며 그 중 세 발이 직접타격을 받았다. 피해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나가사키 시와 아이들을 둔 주민들에게는 큰 염려를 불러일으켰으며 곧 나가사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지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원폭투하가 이루어졌을 당시 도시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아침 미국 찰스 393사단 비행 중대 찰스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B-29 벅스카가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싣고 주요 목표 도시 고쿠라로 향했다. 임무 계획은 히로시마 임무와 거의 동일했다. 두 기의 B-29가 팻 맨을 실은 비행기를 뒤따라가면서 기상 관측 및 사진 촬영과 원폭 투하 결과 측정을 맡았다. 찰스 스위니 소령은 비행기에 이미 팻 맨을 장착한 상태였지만 전기 안전 플러그는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비행기가 고쿠라, 나가사키 모두 시야확보를 찰스 스위니 소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벅스카가 일본 해안에 있는 재 집합 장소에 도착할 무렵 그 뒤를 따르던 세 번째 B-29 빅 스팅크를 조종하던 제임스 I. 홉킨슨 중령이 재 집합에 실패했다. 벅스카와 다른 B-29는 빅 스팅크 없이 40여분 동안 상공을 활주했지만 원폭 투하 계획에서 30분이나 지연됐기 때문에 찰스 스위니 소령은 홉킨슨 중령 없이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30분 후 B-29는 고쿠라에 다다랐으나 이미 구름이 도시 70%를 가려버려 육안으로 폭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도시 상공을 3회 배회한 찰스 스위니 소령은 이륙 전 예비 탱크의 연료 공급 펌프를 수리 받지 못해 연료가 부족하게 된 상태가 되어 대체 목표 도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49] 나가사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시 벅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원폭을 옮겨 필요한 경우 바다에 버려야할 상황이었다. 당시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드릭 에쉬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 할 시,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 투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현지 시각 07시 50분 경, 나가사키에 공습경보가 울렸으며 08시 30분에 경보가 완전 해제됐다. 10시 53분, 두 대의 B-29가 포착되자 일본군은 정찰 비행기로 확정하고 아무런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몇분 후 11시 00분, B-29 그레이트 아티스트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C. 벅 대위는 세 개의 기기들을 낙하했는데, 이 기기들 안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세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 폭탄을 연구한 도쿄 대학 사가네 료키치 교수에게 담긴 편지가 담겨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사가네 료키치 교수가 대중들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일본군 장교들이 앞서 찾아내었고, 한 달이 지나서야 사가네 교수에게 전해졌다.[51] 1949년 이 편지에 관련된 인물인 루이스 알바레즈는 사가네 교수를 만나 사인했다.
11시 01분, 나가사키에서의 마지막 1분에 벅스카의 폭격수였던 커미트 비핸 대위가 타격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약 6.4 킬로글램의 플루토늄 239가 담긴 팻 맨이 나가사키 산업 지대에 투하됐다. 팻 맨은 43초 후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 군수공장과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제작공장 사이에 정확히 투하돼 도시 위 상공 439 미터에서 폭발했다. 본래 타격지점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된 것이다. 폭발은 우라카미 계곡에서 한정된 채 일어나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언덕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팻 맨은 TNT 21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진주만에 91타입 어뢰를 공급하던 미츠부시-우라카미 어뢰 제작공장이 파괴됐다.폭발반경은 약 1-2 킬로미터로 측정됐고 후에 화재가 북쪽에서 남쪽까지 3킬로미터 퍼졌다.폭발지점에는 순식간에 섭씨 3,900도의 열이 달아올랐으며 후폭풍의 바람 속도는 1005km/h로 측정됐다.]
[나가사키의 두번째 원폭 투하로 인해 40,000명에서 7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즉사했으며, 1945년 말까지 총 80,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측정됐다.또한 최소 8명에서 최대 13명의 전쟁 포로가 원폭 투하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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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부 강화 콘크리트 건물들은 굉장히 견고한데, 히로시마에도 이런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원폭에도 붕괴되지 않았다. 생존자 노무라 에이조(野村 英三)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170미터 떨어진 강화 콘크리트 건물(전후엔 레스트 하우스로 바뀜) 지하에 대피해있어 살아남은 것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300미터 떨어진 히로시마 은행에 있던 타카쿠라 아키코(高蔵 信子)도 대표적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원폭 투하가 이루어진 후 폭발은 샛길보다는 큰 길을 향해 퍼져나갔으며 이것은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이 폭발에서 붕괴되지 않게 해주었다.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후에 이 건물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으로 명명됐으며 1996년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일부 사진과 내용은 추가하였습니다.
PT3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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