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평화를 위해 교회의 과거를 읽기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
인간은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과거를 기억한다. 지나간 일의 이미지나 그때의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의식적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순간도 있다. 고대사회 공무원 중 상당수가 역사를 기록하던 사관이었다는 점을 봐도,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 삶과 문명을 떠받치는 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과거는 역사로 서술되며 개인과 집단의 삶에 더 구체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역사를 대하는 순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여러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왜 인간은 ‘나’만이 아니라 ‘너’의 과거까지 알아야 할까. ‘너’가 걸어간 흔적을 나의 기억에 접붙임으로써 ‘나’의 존재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나’는 수많은 ‘너’와 상호작용하지만, 어떤 ‘너’가 ‘나’를 형성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까. 이러한 질문은 과거를 돌아보고 기록하는 역사 서술이 상당히 복잡한 이론적·실천적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이 낯선 과거를 마주하면서 이를 역사로 서술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1) 우선, 과거를 정확하게 보존하고 교육하고자 역사를 기록한다. 비극적 사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과거를 들춰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오해와 갈등과 폭력으로 깨져있는 현실을 넘어 치유와 평화와 화해를 위해 기억하는 일이다. 이 네 가지 방식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지만, 역사가들은 이들 중 하나에 더 집중하며 역사를 서술하곤 한다.
스위스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1928-2021)의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Das Christentum: Wesen und Geschichte) 속에는 역사 서술의 다양한 목적과 방법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학적 방법을 엄밀히 적용하며 과거를 충실하게 재구성하려는 노력, 교회사 속 부패와 타락에 대한 고발,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찾으려는 시도, 이 모두를 꽤 두툼한 한 권의 책에서 다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는 주제로 큉이 20세기 말에 시작하여 21세기 초에 마무리한 큰 기획의 일부이다. 일명 아브라함 유일신론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획은 독일에서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순서로 각각 1991년, 1994년, 2004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큉의 3부작은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13년에 걸쳐 출간되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출간 순서도 뒤바뀌었고, 책마다 다른 번역자가 작업했으며, 두 번째 책부터 출판사도 바뀌었다.2) 그 결과 한국 독자들은 《그리스도교》가 큉의 거대한 기획의 일부임을 즉각 알아차리기가 힘들어졌고, 많은 사람이 천 페이지가 넘는 책을 그리스도교를 알기 위한 단권 백과사전처럼 여기기도 했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만 《그리스도교》에 접근한다면 이 책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통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편향성이라든지 과거를 해석하는 다소 단순화된 방식에 불만을 표할 고급 독자 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과거에 대해 완전히 객관적이고 균형 있는 재현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큉이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역사를 탐구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려면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 혹은 “본질적인 것이 다시금 뚜렷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23)이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제2의 루터로 불린 가톨릭 사제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던 가톨릭 신학자가 많음에도 왜 하필 큉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게 들릴까. 교회 개혁을 위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가한 젊은 가톨릭 신학자가 여럿 있었지만, ‘개혁자’ 이미지가 큉에게 강하게 부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가톨릭 신학을 주도한 독일어권 학자 중 왜 유독 큉의 작품이 우리말로 많이 옮겨졌을까. 가톨릭 사제인 큉의 주요 작품들을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기꺼이 번역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는 데 큉의 생애를 살펴보는 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큉은 1928년에 스위스에서 가톨릭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던 루체른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교황청 소속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특별히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에 집중했다. 1954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그는 유럽의 여러 대학교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 칼 바르트와 가톨릭의 칭의론(가톨릭 용어로는 의화론)을 비교하는 논문으로 1957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몇 년간 사목 활동을 하고 뮌스터 대학교에서 잠깐 교편을 잡았지만, 1960년에 그는 이후 36년 동안 몸담으며 신학자로서 활동할 기반이 되어준 튀빙겐 대학교에 임용이 되었다. 이때 큉이 작성한 교수자격 논문(habilitation)은 독일 철학자 헤겔의 사상에서 성육신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학문의 배경을 볼 때 그는 젊은 시절부터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대화에 큰 관심을 두었고, 신학의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근현대철학이라는 더 큰 사상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현대적 의미를 질문하고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다.
영민한 젊은 신학자 큉은 왕성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쳤고, 그중 상당수는 교회의 본질과 개혁에 관한 내용이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하며 당시 34세였던 큉을 (최연소) 신학자문위원으로 임명했다. 공의회가 진행되는 중에도 그리고 끝난 후에도 큉은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의미를 탐구했고, 그러한 결과물은 1967년에 선보인 《교회》(Die Kirche)에서 집대성되었다.3) 이 작품은 20세기 가톨릭 교회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이후 계속될 큉과 바티칸 사이의 충돌이 가시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큉은 가톨릭의 경직되고 왜곡된 교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고, 특히 1970년에는 교황무류설에 도전하는 《무류한?: 하나의 질문》(Unfehlbar?: Eine Anfrage)을 출간하였다. 결국, 바티칸은 1979년 12월 18일에 큉에게 전 세계의 가톨릭 기관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금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교황청의 결정은 정반대의 효과를 불러냈다. 즉각적으로 세계 곳곳의 가톨릭 학자들이 반발하였고, 수많은 튀빙겐의 학생들은 독일식 ‘촛불시위’를 하였다. 큉은 가톨릭 신학부에서 가르칠 자격은 박탈당했지만, 튀빙겐은 그가 교회일치신학연구소에서 교수직을 수행하도록 곧바로 조치했다.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가톨릭의 ‘종교재판’은 젊고 유명한 개혁적 성향의 신학자 큉에게 ‘제2의 루터’와 같은 아우라를 부여하며 그의 명성과 인기를 더욱 드높였다. 신학자로서 큉의 활동 반경은 세계적으로 더욱 넓어졌고, 그는 마치 성역은 없다는 듯 여러 예민한 신학적 문제에 관해 자기 입장을 소신 있게 밝혔다.
이처럼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큉은 《그리스도인 실존》(Christ sein, 1974), 《신은 존재하는가?》(Existiert Gott?, 1978), 《영원한 생명》(Ewiges Leben?, 1982) 등의 굵직굵직한 주저를 펴냈고, 다양한 출판물과 강연을 통해 세속화된 사회에서 교회의 의미에 관한 논쟁적 해석을 이어갔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며 큉의 관심사는 국제화된 21세기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와 사명이 무엇일까로 확대되었고, 타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특히 1990년 《세계윤리구상》(Projekt Weltethos)은 인류가 서로의 차이와 지금까지 반목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려면 종교 간의 평화가 필요함을 강조하는 역작이다.4) 이듬해부터 차례차례 선보인 유일신론 3부작은 이러한 구상의 대표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