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호 충청도 양반길 다녀오는 길에 봐둔 추성산성을 찾아간다.
2020년 6월 16일 제법 더운 염천에 개망초 풀꽃 향기 맡으며 헤매면서 찾아간 추성산성,
이 전에는 이성산성이라고도 한 토성이다.
09:30분에 약속 장소에서 만나 증평을 향해 고속도로로 달려간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고속도로, 신나게 달리는 차속에서 바깥 경치를 보면서 즐긴다.
계절따라 변하는 아름다운 산하의 모습, 그 아니 금수강산인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네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 본다. 한때는 헐벗은 산하, 가난의 냄새가 찌들었던 내 조국, 우리 나라, 반만년 역사에 천번도 넘었다는 전쟁의 나라, 침략보다는 당하기만 한 나라, 바깥 나들이가 나를 얄팍한 애국심의 감상에 젖게 만든다.
굶주림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 고생만 하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자랑스럽게 세계 10대 경제 대국 소리까지 듣게 될줄이야!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길가의 나무며, 사람 사는 모습에 감회가 새로워진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옛시절을 떠올리다 보니 차는 벌써 작은 산지기가 봐둔 증평 추성산성 표지판있는 곳에 도착한다. 그런데 입구가 천주교 공원 묘원으로 되어있고, 묘역으로 통하는 길 한가운데에 가로막대가 걸려 있다. 분명 추성산성 표지판이 있는데 공원묘지에 줄줄이 묘들만 보인다. .
순간 어리둥절 해진다. 그냥 올라갈까?
망설이다 차를 돌려서 도안면 쪽으로 향한다. 흔히 가는 길이라고,
증평읍과 도안면 경계를 이루는 고개를 넘어 우측으로 표지판을 따라간다.
표지판을 잘못 봐서 길을 헤매다 논두렁 끝나는 막다른 데까지 갔다가는 다시 되돌아와서 찾아가는 길,
초행길인데 내비도 없이 눈먼 답사길에 흔히 했던 짓을 오랜만에 또 한다.
물어볼 사람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정표만 보고 쫓아 왔다가 기성전 앞에서 멈춘다. 웬 기성전인가. 기성전앞 좀 넓은 빈터에 차를 두고 걸어갈 요량으로. 그런데, 물어볼 사람이 없어 지나가는 운전자에게 물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 노인이 울어바위 쪽보다는 천주교 묘원있는 곳에서 올라가는 것이 편하다고 추천한다. 걱정스러워서였던지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까지 한다.
처음에 멈췄던 천주교 공원묘원으로 다시 와서 주차하고, 길을 찾아 더듬거리면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개망초 흐드러지게 핀 한 여름 뙤약볕을 받으면서 표지판도 없는 데 등산로 입구를 못 찾은 채, 어데로 올라 가야할 지, 무턱대고 동편 산정상을 향하는 능선을 어림짐작으로 찾아 풀섶을 헤치며 올라간다.
천주교 공원 묘역이 끝나는 곳 근처 숲속에서 마침내 추성산성이 적힌 이정표 표지를 발견한다.
북성으로 가는 길도 찾았겠다, 긴장했던 마음이 놓여서인지, 목도 마르고 시간도 꽤 지났으니 휴식 겸 간식 타임. 조금 올라가서 편한 곳을 찾아 퍼질러 앉는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호젓한 산속. 각자 가져온 간식을 서로 나누면서 시장기와 갈증을 달랜다. 열두시가 가까웠다. 주변의 산업단지가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인다.
간식을 마치고 다시 인적이 없어 온통 제차지가 된양 풀섶 으로 가로막은 길을 헤치면서 올라간다 . 등산 스틱보다는 장대높이뛰기 봉으로 만든 수제 지팡이가 제법 위력을 발휘한다. 양쪽으로 길을 막고있는 아카시 나뭇가지며 한길 가까이 자란 외래종 자리공 풀을 사정없이 쳐가며 밀림 속을 헤치듯 나아간다. 얼굴에 달라붙는 거미줄과도 씨름하면서. 등산 보조용 로프줄이 있는 경사면 계단을 오른다. 토성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벽쪽으로 보이는 곳으로 올라선다.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려워 진다.
정상을 둘러싼 토성의 윤곽이 큰 나무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인다. 내성과 외성으로 된 북성이라는데...
어디가 내성이고 외성인가? 지금 여기가 북성이 맞긴 맞나? 순간의 의심이 어느 정도 풀린다.
원래 토성이란 답사하기가 밋밋하고 덤덤하다. 석성만큼 흔하지도 않은데다가 겉으로 드러나는 바가 없어 눈요깃거리가 없어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아는 토성으로는 서울에 있는 한성 백제시대의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처럼 크고 오래된 성 정도이고, 웅진백제 공주와, 사비백제의 수도 부여 도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충북에서는 청주의 정북동 토성이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증평의 이성산성/ 추성산성은 산을 거점으로 한 점에서 큰 내를 끼고 있는 정북동토성과 비교가 된다. 정북동 토성이 미호전을 마주한데 반해서 추성산성은 300m도 채 안되는 낮은 산을 거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남성과 북성의 2개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다..
토성은 발굴하지 않으면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수박 겉핥기라는 말이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성 흔적도 찾기 어려운데 경작하거나 해서 훼손되거나 아니면 나무나 풀섶으로 가려져 있으면 토성인 지를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다.
여기 증평 추성산성의 북성처럼 개발이 안된 채 자연 숲속에 묻혀,있으면 더욱 그렇다. 이게 토성이 맞는 지 아닌지 보통사람이라면 망설여진다. 역으로 오히려 그점이, 고즈녁하게 숨어있는 모습이라 더 애착이 가기도 한다.
토성을 확인해 보려하나 숲과 나무에 가려 전체 윤곽을 알 수가 없다. 모퉁이를 돌아서동벽쪽으로 걸어가니 빛바랜 합섬 그물망이 언덕둑을 덮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발굴했다 다시 원상 복원하 면서 사용한 것이었다.
북성이 틀림없다는 증거를 발견한 셈이라 안도가 되었다. 나중에 보니 그 부뷴이 동문지 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벽에서 남벽으로 돌아드니 남성도 보이고,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했다는 표지석도 발견한다.
근처에는 성돌 채취흔적처럼 보이는 곳도 있고,
토성인데도 성돌 채취가 필요했겠지. 하면서 남성쪽으로 이정표를 따라 남으로 걸어간다. 0.8km 정도라는 데
길은 그런대로 평탄한 편이지만 날은 엄청 더워서 힘이든다.
중간에서 뱀딸기도 보면서 간다.
드디어 발굴 후 정비가 된 남성의 북벽 모습이 훤하게 나타난다.
북성과는 대조적으로 성벽 주위가 벌목되어서 성곽 윤곽이 뚜렷하다.
안내 표지판도 잘 되어있고.
-처음 만난 추성산성 안내 표지판 -
천주교 공원 묘원(증평 성 요셉 공원)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차마 못들어가고 나와서 고개를 넘어 도안면 쪽 다른 표지판 안내를 받으면서 찾아 나선다 -
-기성전 앞에 주차하고서 걸어서 갈려고 하다가 -
한 노인의 권유로 되돌아 다시 원래의 곳으로....
-은나라의 성인 기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기자조선의 기자가 중국 은나라 출신이라고 ?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요,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 또한 동이족이 만든 글자라고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기자 사당과 그 연유가 적힌 안내판을 보고 .... 뜻밖의 발견이다.-
( 고대사가 궁금해진다.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연경, 비파형 동검, 고인돌 유적지 분포 등...
어쩌다 한반도 조그만한 반도에 갇혔나 ? 그것도 허리가 잘린 채로 .....)
-추성산성이 0.6km이라는 데 - 길이 안좋으니 천주교 공원묘원 쪽으로 가는 것이 더 편하다고 권고를 받다.-
<북성>
- 다시 되돌아온 천주교 공원 묘원 입구.
그냥 가로막대 옆으로 난 길로 올라간다.-
-공원 묘역이 끝나는 맨 윗부분 근처에서 찾아낸 이정표 푯말.-
-토성벽(서벽)임을 추측케하는 경사진 곳-
- 북성의 토성벽: 북벽위로 난 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 동벽으로 향한다. 밤꽃이 한창이다.-
-발굴한 후에 다시 되덮은 흔적:
아마도 동문지 터 발굴지였을 것 같다. 동벽과 남벽이 마주해서 꺾인 부분 근처에서_
- 발굴 흔적 : 토성벽 속살 보기 -
- 남벽쪽을 돌다가 만나는 곳, 아마도 성돌을 채취한 흔적인지 의심해본다...-
-중원문화재 연구원에서 세운 표지석 -
(증평 이성산성 북성이라고 명기되어있다. 제대로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이성산성 북성이라고 ? 추성산성은 언제부터 ?)
-북성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남성의 모습 -
-추성산성 북성쪽에서 남성쪽으로 가다가 중간 낮은 곳에서 만나는 이정표 -
- 매혹적인 색깔로 길손을 유혹하고 있는 빨간 뱀딸기도 보면서 -
<남성 돌아보기>
(2편에서 소개 계속 )
- 북성에서 남쪽r으로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0.8km 정도 ) 나타난다.
발굴과 정비가 되어 있어서 북성과는 대조적이다.
- 서쪽(화면 오른쪽 끝에 보이는 전망대) 망대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돌아보기 시작한다 -
- 북성과 같은 시기에 발굴 조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증평 이성산성 남성'이라고 표기.
-남성 망대지의 전망대 -
(남성의 내성 중에 가장 높은 곳으로 망대가 있었던 곳)
-안내판에 있는 발굴 당시의 모습 -
- 망대지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돌아본 주변 높은 산 들 좌구산,.... -
중요 교통로에 세워진 중요 산성임을 짐작케 한다.
(내성과 외성으로 된데다가 그것도 두 개의 토성으로 이뤄진 특이한 산성이다. )
- 남성 수혈 주거지 보기 -
( 유물에서 연대측정 결과 4세기로 나왔다고 ? 한성백제시대 이야기네.... 참으로 오래 된 토성이다)
15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토성,
그 당시에는 현재 일본어와 백제어가 거의 같았을 거라는 고대언어학자들의 설이 있고 보면,
청주의 정북동 토성 모습이 떠오른다.)
-남성의 내성 안쪽 모습 -
-(남성의) 내성의 남쪽 전망대 :동치성이라고 하는데 외성에서 보면 내성 쪽으로 된 동치성이 되는 셈이다.-
- 처음에는 내외성으로 된 것을 모르고 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전체 윤곽을 알고서야 이해가 된다.. 거꾸로 북성서부터 내려온 탓, 사전 조사도 전혀 없이 - 날라리 구경이지 무슨 답사.-
- 내성 남벽쪽 토성위에 나뒹굴고 있는 기와 조각편 -
- 도안면사무소 쪽에서 올라오면 이곳에 다다른다. -
-남성 북동문지 -
내외성 구조로 된 성인지를 잘 몰라서, 북동문지라는 글씨에 선뜻 이해가 안가 어리둥절해 하기도...
방향감각 상실했나 하고,...
-남성 내성 우물터 -
( 성과 우물의 관계를 생각해보기 ) 우물이 없으면 빗물이라도 받아 먹어야 하니, 백령성의 저수조 (목곽)같은 것, 아니면 공산성의 연지 같은 것도 있지. 계족산성의 연못도...
-산성 축조에서 배수시설의 중요성 보기- 배불뚝이 되지 않고 1500여년을 잘도 견뎌온 축성술의 대단함.
( 배수처리 시설 돌아보기)
- 남성 답사 후 다시 북성을 거쳐 공원묘원에 주차해둔 곳으로 와서 늦은 점심(오후 3시가 다 되었네)을 먹는다. 고갯마루에 있는 공단 전용(?:치부책이 한 20권은 되지 ) 한식부페 식당에 가서 해결한다. 땀흘린 터에 특식으로 나온 콩국수가 유난히도 맛나다.
식후 대전으로 오는 도중에 미암 사거리에서 다시 남성 입구를 찾아 들어간다.
미암 4거리에서 동쪽으로 조금(약 300m 정도) 가면오른쪽에 있는 표지판 지시를 따라 신호를 받아 왼쪽으로 돌아들어가면 남성으로 가는 이내 진입로와 만난다.-
-제일 먼저 봤어야 할 증평 추성산성의 전체 개요 안내판 -
-산성 답사가 아닌 날라리 산성 구경이라 대충 돌아 다녔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제대로 된 산성 안내판 덕분에 심봉사 눈뜨듯, 추성산성 개념도가 만들어진다.
승용차로 더 이상 들어가기에는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는 산성 관리 직원의 권유로 되돌아서서 대전으로 향한다.
진입로 개선및 확포장이 올 해중에 계획되어 있다니, 다음에는 오늘같은 헛고생을 안해도 되겠구나. -
(* 토성 축성에서 판축기법 등과 추성산성 발굴 사진 등을 다음 편에서 게재할 예정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