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블루바다 목사님의 이멜..., '심수봉 공연 소식을 읽고 거기에 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하셨더군요.
딩동댕!!
맞았습니다.
어제 심수봉 님의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어제...아침부터 흥분되더군요. 아이들 학교에서 일을 좀 봐주고 집으로 와서 컨서트 갈 준비를 했습니다.
컨서트, 그냥 가면 되는 거지, 뭔 준비? 네.. 꽃을 사야하고...(애들이랑 같이 꽃다발을 만들기로 했음)--- 움하하하 나도 그런 거 해보자~~
일찍 퇴근해 오는 남편과 아이들이랑 차를 타고 엘에이 올라가면서 먹을 저녁과 간식, 음료 준비..
아이들 옷 준비---복숭아 나무 결혼식 때 입었던 옷들!
컨서트 끝나고 돌아올 때 아이들 이 닦고 잠옷 입고 잘 수 있게 여러가지 준비하기
학교에 편지 쓰기--애들 시험 공부 못한다는 편지-.-
아이들이 어리니까 자질구레하게 준비할 게 많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이거 저거 생각했습니다. 이제 심수봉 님을 드디어 만나는구나.
심수봉 님.
고등학교 때, 수많은 대학생들 틈에 끼어앉아 통기타, 록 그룹들의 공연 일색의 대학가요제를 기대하다가 심수봉 님을 보고 놀랐었지요. (아마 그 공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심민경 님을 '놀람'으로 기억하는 거 같더군요. 아니, 난데없이 왠 트로트야? )
거침없이 걸어나와 피아노에 앉자마자 거침없이 노래를 부르던 그 여성..
그런데..고등학생이었던 저의 어린 눈에도 심민경 양의그 거침없음이 '자신만만함'이라기보다는 수줍음으로 보였었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으니까, 불러야하니까 부르는 거 같은...그래서 나오는 거침없음으로..
우린 웃고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과 환호는 심민경 양에 대한 매료라기 보다는 '너 참 대단하다~ 여기가 어딘데 그런 음악을 들고 나와' 식과 '와, 정말 노래 잘한다!' 가 혼합되었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그 어린 심민경 님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제가 지금 40 넘은 여성으로서 그 당시의 20대 초반의 심민경을 떠올리면서 생각해보면, 아마 이미 그 때 심민경 님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어떤 세상을 경험하고 살고 있었던 거 같아요. 당시의 대학생들이 자연스레 연출하던 그런 젊음의 표현과는 아주 다른 의상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대학생들은 기성세대의 음악이라고 우습게 여기던 트롯트를 프로처럼 (이미 프로이셨지만...) 소화해내면서, 어린 심민경은 아마 이미 다른 길을 택해서 걷기 시작했던 거 같습니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을 희구하지만 그런 삶에서 이미 멀어져있던 어린 여성...외로움, 소외감, 침묵...
그리고 그런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너무도 어렸고, 너무도 이기적이었던 우리들....
저는 대학가요제에서 심민경의 노래에 매료 되었지요.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심민경 양의 노래를 녹음해서, 수십 번 들으면서 청음해서 그때 그사람을 피아노로 따라쳤습니다.
그 후.. 80년. 침묵, 억압, 루머 속에 사라져버린 심수봉. 가끔 들리는 소식들은 이런 일들이 있었다더라, 그래서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더라.., 졸지에 입에 자갈을 물린 가수, 날개가 꺾인 새 처럼 가엾은 여성...
그러다가 저는 유학을 갔습니다. 86년..그리고 가끔 그녀님의 테입만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프랑스, 일본, 미국, 제가 살았던 곳들 마다 그녀의 노래는 저와 항상 함께 했습니다. 고 김현식 님의 노래와 수봉 님의 노래....제 유학 생활의 가장 귀중한 벗들이었지요.
결혼을 한 뒤, 수봉 님의 노래를 들은 남편 에릭이 깜짝 놀라더군요. '이런 목소리가 있을 수가?!!'
저와 결혼을 하여 한국의 문화의 여러가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했던 저의 남편이 '와~~~~" 하면서 얼싸 안은 것이라면 '한국음식'과 수봉님 노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의 긴 고속도로를 달릴 때, 장시간 달리는 긴 주말 여행,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들었지요. 아이들은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냥 따라 들었고요.
한겨레에 쓴 제 에세이를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 식구들은 다 심수봉을 좋아합니다.
자, 우리 튀기 가족은 그 심수봉 님의 실제 공연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엘에이로 가는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꼬박 2 시간이 걸리더군요. 아아..늦겠다..어쩌나.. 그러나..늦어도 좋다. 그냥 잠깐이라도 뵈면 되는 거지. 내가 한달 전만해도 이렇게 공연을 볼 수 있으리라 상상이라도 했었든가.
도착해보니 주차장이 다 차서 멀리 주차하고, 저는 아들 손을 잡고 뛰고, 남편은 딸을 번쩍 안고 뛰었습니다. 늦지 않으려고...뭐가 좋은지 온 가족이 "꺄글까글"웃으면서 (하하하, 웃는 소리가 정말 꺄글꺄글 같았어요), 엘에이의 윌셔 길을 가로질러 뛰었지요.
도착해서 앉자 마자 심수봉 님이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휴...다행이다.
날씬한 몸매에 검정 드레스, 그리고 화려한 깃털 쇼올을 두른 수봉 님의 등장, 어머, 참 고우시구나...제 첫 인상이었습니다. 소극장을 꽉 채운 관객들은 환호했습니다.
무대의 왼쪽에는 바로 전날 조직되어 밤 늦게까지 연습을 했다고 하는 밴드도 있고요. 외국인 키보드 주자와 한국 여성 키보드,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등 구색을 갖춘 밴드였지요. 그리고..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오른쪽에 놓여있었습니다.
컨서트에서 처음, 제가 가장 큰 인상을 받은 것은 심수봉님의 말할 때의 목소리와 말투 였습니다. 무지 무지 고운 말투이시더군요. (저는 좀 왁왁거리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투 고우신 분들 보면 무지 부러워요) 말의 내용도 참 깔끔하시고, 솔직하시면서도 솔직한 사람들이 범하눈 우, 함부로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시고, 뭔가 아주 절제된 가운데에서 다정하고 위트있는 그런 담화였습니다.
곱다..
매사에 고운 여성.. 노래도, 말도, 손과 몸을 움직이는 모습도..
그리고 압권은 물론 노래! 노래! 노래 이지요. 관객들은 환호하면서 박수치고,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저의 자손들은 심수봉 님이 새 노래를 할 때마다, '엄마, 나 이 노래 알아' 하고 좋아하더군요. 한 순간에 제 아들이 너무도 열정적으로, 고개를 재껴가면서 박수를 치는 바람에 그 주위의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에피소드 몇 개.
수봉 님이 '나는 여자 이니까~~' 노래를 같이 부를 자원자를 찾으셨습니다. 듀엣으로 부를 남성! 여기 저기에서 '있어요!" "여기요!" 하는 소리만 난무하고 정작 아무도 자신있게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 때, 무대의 맨 앞에 앉아 있던 한 '은색 곱슬머리의 싸나이'가 씩씩하게 일어섰습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이거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부츠'를 신으셨습니다. .아주 멋있는 의상 이지요. 연세로 보면 40 후반, 50대 초반으로 뵈는 분인데, 그 연배의 남성들은 폴로 셔츠에 면바지 정도로 젊음을 표현하는데, 흰 라운드 티셔츠에 청바지에 부츠라하면 가히 파격적 의상이 아니겠습니까? 은발...파마 머리처럼 무성한 곱슬머리... 아주 독특한 헤어 스타일입니다.
그분이 올라오시자 수봉 님이 조금 당황하신 듯 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도 다 당황했지요.
어...미국...쌀람...인거 같은데...
수봉 님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면서 성함이? 하고 물었습니다. "조OO" 입니다.
"어머, 조 선생님, 한국 분이셨어요?"
그 순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졌습니다. 정말 '조 선생님'이 다들 외국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나봅니다. 심수봉 님과 '조 선생님'의 듀엣이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이 울리고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조 선생님'의 부드럽고 진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려났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또 환호했습니다. 정말 '쥑여주는' 목소리였거든요. 굳건히 믿음직한 자세로 서서 노래를 불러주시는 은발의 곱슬머리, 청바지와 부츠의 조선생님~!! (저는 하마터면 '오빠~~!!' 하고 오빠부대로 돌변할 뻔 했다지요.)
또 한 에피소드..
한번은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관객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여기에서 공연 자주 보세요?"
웅얼웅얼 (관객석에는 마이크가 없으니까 대답은 안 들렸음)
"네, 자주 보시는군요. 어떤 공연을 주로 보세요?"
웅얼웅얼..
수봉 님이 미소를 띄고 그 웅얼웅얼을 전해줬습니다.
"네, 한국에서 오는 '것'들이요?"
우하하하!!! 관객들의 폭소
그 박자를 놓지지 않고 수봉님의 코멘트가 날아갑니다.
"그래, 오늘 것은 어땠어요?"
다시금 우하하하!
미소와 자잘한 웃음, 가끔가다의 폭소를 연출해내는 심수봉 님.. 크리스챤으로서의 간증도 있었고요. 죽음과 삶, 변화, 사랑..
공연 중...제 마음에 확 꽂혔던 부분들도 좀 있습니다.
"그 때...제가...어떻게 살았는지...모르겠습니다."
"그 때...제가...그것을 어떻게 살아냈는지, 무슨 힘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어 번, 다른 문맥에서 그 말을 들었는데..... 저도 한 여성으로서 그 말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심민경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여성.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 삶이라는 괴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고 사는 평범한 삶과는 너무도 먼 삶을 살아야했던 저 여성. 어린 나이에 도도히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찍혀서, 아니 그 사이에 끼어서, 벙어리가 되어야했던 여성...그 시간, 그 장소에 있어야했던 (그것도 거의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유로 개인적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이 거꾸로 선 비행기를 탄 듯이 앗찔하게 되어버렸던 그 여성..결혼.이혼.양육권포기. 재혼.전남편의 죽음의 목격. 삶의 괴로움과 허망함을 보여주는 경험의 연속...
그 경험 속에서 그녀가 포기하지 않은 음악. 아니, 그녀의 영혼이 숨 막힐 때 호흡을 하게 해준 음악.
이제 지난 20년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자신의 개인의 역사를 진솔하게 털어놓으면서 강조하는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 '그것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말자'라는 이야기...수많은 고통 속에서 만난 절대자에 대한 언급..그리고 덧없는 삶 속에서 우리가 낭비하는 수많은 감정들, 미움들을 벗어나, 그저 사랑하고 살아야겠다는 말...
무궁화 꽃에 대한 언급..
지고 또 지지만, 끊임없이 계속 꽃을 피우는 무궁화 꽃나무..
저는 혼자 생각 했습니다. 심수봉 님도...무궁화 같은 가수.. 짓밟히고, 무너지고, 스러지는 듯하면서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무궁화 같은 여성.
국민가수라는 말,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구나. 맞다.
수봉 님 노래 여러곡 들으면서 한 생각 또 하나. 힛트곡이 많지 않다고 하는데...애창곡은 무척 많구나. 팬들이 그저 한 테입 닿을 때까지 듣고, 또 듣고, 또 들으면서 한 앨범의 노래를 다 꿰어버리는 거구나..
수봉 님이 다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엘에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시는 팬인데...."
하시기에 저는 입을 헤벌레벌리고, '옴마, 엘에이에 극성 팬이 또 있나부다"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강/신/주/ 님 여기 계십니까?" 하고 물으시는 거에요.
깜짝 놀랐지요. 엉겁결에 일어나 네! 하고 고함 지르고...-.- 잠시 나오라고 하시더군요.
옴마? 워쩌? 에밀아, 꼴렛아, 늬들 준비한 꽃다발 들고 같이 나가자~
두 아이와 함께 무대로 갔습니다. 무대 밑에서 꽃을 올려드리는데,
"어머? 어머! 애들도 이렇게~~왠 배우 같은?!!" 하시더군요. 그러더니 무대로 올라오라고. 그래서 애들이랑 같이 올라갔습니다.
덜덜~~^^
(좀 전에 관객들 중에 춤추는 사람 있냐고 했었던지라, 머리만 '무희무늬'인 저를 본 관객들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 춤 좀 춰봐요~" -.- 심수봉 님도 춤 안 추던데 지가 왜 무대에 올라가서 춤을 추겠습니까?!!! 엉엉..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옷 입고 갔는데, 그게 좀 너무 무희 옷 같았나봐요잉.)
글로만 뵙다가 처음으로 눈맞춤을 하는 순간..좀 놀랐습니다.
수봉 님, 참 곱구나!
(오늘의 주제 되시겠슴이여..^^)
예쁘다라는 형용사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곱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눈매..입매..피부..선한 시선..
투박한 모습으러 거침없이 피아노를 치고 거침없이 나가던 그 수줍은 여학생이 이제 이렇게 고운 잔주름에 편안한 시선을 가진 여성이 되었네.
몇 초, 손을 잡고 이야기했습니다. 원래 수봉 님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저한테 특별히 사진을 찍게 해주려고 일부러 저를 부른 것이었더군요.
아이들을 귀여워하면서 나중에 한국 오면 아이스크림 사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말을 알아들은 에밀이가 나중에 차에 오르더니, '엄마, 아이스크림 먹으러 언제 한국 갈거야?' 해서 웃었습니다.
남편은 어딨냐고, 나와서 사진 찍으라고 하라고... 그래서 제가 에릭을 마이크로 불렀습니다. 가엾은 에릭. 왜 자기 부인이 벌떡 일어나 무대로 뛰어올라간지 모르고, 아이들이랑 부인이랑 왜 심수봉 님 옆에서 폼잡고 서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라는 대로 사진기 들고 뛰어 나왔습니다.
(에릭, 결혼 삐딱하게 하면 두고 두고 고생이지? 뻬롱~)
그래서 수봉 님이랑 애들이랑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흑...남편이 사진 찍는데 (그게 제 사진기라서 제가 잘 알거든요) 플래시가 안 터지더군요. 안 찍혔구나...알았습니다. 역시나 사진이 안 찍혔더군요.-.-
그리고 그래...괜찮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기억하기 위해서 찍습니다. 제게는 컨서트 안내지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컨서트 기억하면 되겠지요.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컨서트의 '분위기', 컨서트에 앉아 있던 관객이 느끼는 감흥들...
그리고...제가 의자에 찌그러진 듯이 앉아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의 갈래갈래.. 그것을 사진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글로 씁니다. 사진보다 더 정확히 제 사고와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글로.. 그리고 저는 또 압니다. 글로도 그 순간을 잡아낼 수는 없다는 거..
그냥 혼자 꾸그러져 앉아서 (지금...방 한구석에 앉아 랩톱 두드리는 제 모습...) 잡아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만 있겠지요.
어제 컨서트에서 잠깐 나왔던 이야기 중에 '외로움'이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10,26 사태 이후에 너무도 외롭고 괴로운 상태에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아이가 6 살 때 이혼...양육권이 없어서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던 이야기..그러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났는데, 그를 사랑해서 곡을 만들어 바쳤다고 하더군요. 그 노래를 듣고 남편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하고요. 그 노래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해요. 그런데...결혼하고 나서 행복한데, 그래도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외로움을 느낀다고...
그 말..참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사랑하는 남편 꼬셔서 (?) 결혼했고, 지금 현재 행복을 주무르며 사는 듯한 그런 삶을 살고 있지만...가끔 느끼는 외로움이 있어요.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손을 잡고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냄새, 진주같은 살을 부비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있지만...
남편과 아이들과 제가 껴안고 있어도, 우리가 발을 둔 곳은 단 몇 센티라도 차이가 있지요. 내가, 그가, 아이들이 선 위치가 단 5 센티 뿐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각자 서 있는 그 자리가 결국은 각자의 운명일 따름...
결국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삶을 보고 사는 거... 나는 나를 보는 그와 아이들을 볼 수 있을 따름...결국, 나는 아이들과 그와 엉켜다가 언젠가는 다 놓고, 홀로 서야하는 운명..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원하고, 아무리 위해도...
우리는 각자 인간으로서 혼자 인생이라는 여정을 걸어내고, 생명의 끝을 맞이해야하는 우리들...같이 가는 순간에 서로 도와주고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결국은 혼자 죽음을 맞이 하고, '저 세상'으로의 '공간이동' (심수봉 님이 잠깐 한 적이 있는 이야기) 을 해야하는 우리들..자기가 정하지 못하는 시간에, 자기가 정하지 않은 방법으로...(대부분의 경우에.)
그러므로...외로움이란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아닌 척 하는 순간들이 좀 있을 따름...외로움은 나쁜 거 없다..내가 외로움이 있어야, 갈증이 있어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을 품을 수 있고, 갈증이 있는 사람의 목을 축여줄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때 그사람, 젊은 그대, 비나이다비나이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봉님의 연가를 들으면서 제 머리 속에서도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딴 생각이 많아서 문제.. 모든 생각의 귀결점은 항상 삶..죽음..사랑...으로 귀결되니..
나는 죽을 때...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이만큼 사랑하다 죽습니다. 당신 나라로 공간이동 합니다~~' '하나님, 이만큼 당신을 찬송했습니다. 저에게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 벙개 무지 재밌게 많이 했습니다." 라고 하지나 않을지^^움하하하)
이게...어젯 밤, 컨서트 끝나고 나서 뒷자리에서 곤하게 자는 애들을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끝이 안 날 듯이 죽죽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남편과 제가 두런 두런 나누던 이야기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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