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3·1운동만세길 걷기(1)
(2019년 4월 6일∼7일)
瓦也 정유순
기미삼일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들은 종로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왜경에 전화로 자수하여 스스로 잡혀갔고, 민중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들을 기다렸으나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아 우왕좌왕 할 무렵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이란 학생이 전날까지 시내 곳곳에 돌리다 남은 독립선언서를 안주머니에서 꺼내어 팔각정 단상에서 낭독하자 비폭력 독립운동은 전국을 향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서울탑골공원 팔각정>
화성지역은 1919년 3월 26일 송산면 사강리시장에서 홍면옥의 지휘 아래 약100명의 군중이 모여 평화적인 모습으로 만세를 부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틀 뒤 장날인 3월 28일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왜경의 권총에 홍면옥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이 광경을 본 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일본경찰에게 달려들었다. 위급함을 느낀 일본경찰은 사강리주재소로 달아났으나 흥분한 군중은 돌과 몽둥이를 가지고 쫓아가 순사부장 노구치(野口)를 죽이는 사태로 발생한다.
<화성시 송산면 지도>
송산면의 남부와 접한 장안·우정지역의 시위는 3·1운동 기간 중 가장 강력한 공세적인 만세 시위 중 하나였다. 3·1운동에서 인명 살상의 사례가 극히 드문 가운데 이 지역 만세 시위에서 일본 순사를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혹독한 보복을 당하였다. 장안면 시위는 이웃 우정면 주민들과 함께한 연합 시위로서, 독립 만세 시위가 확산되면서 점차 지역의 공동체적 응집력과 결합하여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으로 강력한 시위운동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다.
<화성시 우정읍-장안면 지도>
화성시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장안·우정지역 만세운동의 족적을 찾아 15곳의 유적을 복원하였는데 묘하게도 연장거리가 31㎞다. 이 거리는 100년 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약2천 5백 명이 같은 마음으로 하루 만에 이 길을 걸으며,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잔악한 왜군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걸었을 그 길을 따라 걸어본다.
<화성3.1운동만세길 걷기체험 노선도>
<화성3.1운동 100주년 뱃지>
화성시 우정읍 화수초등학교에서 ‘화성3·1운동만세길’ 식전행사와 개통행사를 간략하게 치른 후 방문자센터를 출발하여 당도한 곳은 ‘차희식 집터’다. 1919년 4월 3일 장안면과 우정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차희식이 당시에 살던 집터다. 차희식(車喜植, 1870∼1939)은 주곡리의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 화수리주재소를 파괴하고 전부 불태웠으며, 일본순사 가와바타도요타로(川端豊太郎)를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차희식에게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식전행사장의 태극기>
<차희식 집터>
차희식 집터에서 바로 장안면 석포리로 들어서면 ‘장안논들’을 건너고 ‘버들저수지’ 안동네에는 ‘차병혁 생가’가 있다. 만세운동 당시 차병혁이 살았던 곳으로 화성지역 독립운동가 생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다. 차병혁은 장안면 석포리 출신으로 만세꾼들을 인솔하여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로 가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정부는 차병혁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차병혁 생가 앞에서 독립의 횃불 점화>
차병혁생가에서 화성장안첨단산업단지를 지나 한 시간여를 걸으면 장안면 수촌리 1107에 있는 ‘개죽산횃불시위터’다. 이 산은 화성지역민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4월 1일 개죽산을 시작으로 쌍봉산, 남산, 천덕산, 무봉산 등 화성지역의 각 산봉우리에서는 일제히 횃불이 치솟았다. 산상횃불시위는 화성지역민들의 독립의지를 드높이고 장안면과 우정면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개죽산 횃불 시위터>
개죽산횃불터에서 약10여분 거리에는 ‘백낙열(白樂烈)의 집터’다. 수촌리 출신의 백낙열은 천도교 순회전도사로 서울의 3·1운동에 참여한 후 장안면과 우정면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수촌리 구장이었던 백낙열은 1919년 4월 3일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여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주재소를 파괴할 때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부는 백낙열에게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백낙열의 집터>
수촌리 674-1에는 수촌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3·1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왜경이 마을 전체를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교회도 전소되었는데 교인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보다도 불타는 교회 안 괘짝에 있던 교적부를 가슴에 안고 뛰쳐나와 안전하게 보관되었다고 이 교회 목사님이 설명하신다. 교적부에는 당시 교인들의 개인 신상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수촌리마을과 교회>
<교적부를 보관하던 괘짝>
<수촌교회 초기 교적부>
수촌교회는 1905년 교인 김응태의 주도하에 정청하의 집에서 교인 7명이 모여 예배를 본 것을 계기로 창건되었다. 1907년에 초가 15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만들었으며 교인이 약100여명이 되었다. 1922년 4월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초가 8칸의 예배당이 건립되었고, 1932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74년에는 양식기와로 지붕을 개량하였으나 퇴락이 심하여 1987년 초가형태로 재 복원 하였다. 초가교회 옆으로는 첨탑으로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 교회가 함께 자리한다.
<수촌교회 초기초가교회(좌)와 지금의 교회(우)>
수촌교회에서 점심을 하고 마을 앞으로 나오면 ‘3·1독립운동기념비’가 수호신처럼 서있다. 이 비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리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1889∼1970)는 1916년 선교사로 부임했으나 1920년 일제에 의해 해외로 추방당했으며,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써서 일제의 만행과 한민족의 의거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1958년 정부의 초청으로 다시 한국에 와서 문화훈장(1960)과 건국공로훈장(1968)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외국인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1독립운동기념비>
평택∼시흥 간 153호 고속도로를 건너 도착한 곳은 장안면 어은리 133-5 ‘옛 장안면사무소 터’다. 1919년 4월 3일 우정면 주곡리를 출발하여 장안면 석포리와 수촌리를 거쳐 이곳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여 면장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는 면 청사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다. 만세꾼들이 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운 것은 일제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이후 만세에 참여한 사람들은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평택-시흥 간 153호 고속도로>
<옛 장안면사무소 터>
<옛 장안면사무소 건물>
https://blog.naver.com/waya555/221513411325
첫댓글 강진으로유배당한[정약용]은 [나라의주인은 임금이아니라,백성입니다.] 때문에 유배생활로 나섰지만
허나의 백성으로서 나라를지키기에는 역부족이였죠. 이나라에군대는없고 일본군대만설치니
족탈불급이지요. 지금도 화성시 남양주에가면 천주교도인들의살상당한현장을 목격할수있다.
독자는 화성에있는 살상지하고 미국 LA에있는살상지가 거의같음을보고 다시한번놀랬다.
생각컨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군대가있다는게얼마나다행인가
다시는왜놈들에게 농락당하는 그런일은없기를바랄뿐이다....15박장춘....
다시는 불행한 과거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를 바르게 알려야 할 것 같아요.
선배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