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生生이다
앞서 나는 「지금은 不生이다」라고 썼다.
불생(不生)이란 무엇인가.
무언가가 생겨나기 이전의 어떤 신비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겨난다’고 말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본래 없다는 뜻이다.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붙잡으려는 순간, 이미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 된다. 그러므로 불생은 말 이전이며, 분별 이전이며, 어떤 주장도 성립할 수 없는 자리다.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둘이라고 할 수도 없다.
끊어졌다고 할 수도 없고 영원하다고 할 수도 없다.
不生不滅, 不去不來, 不一不異, 不斷不常.
이것이 팔불중도(八不中道)가 가리키는 바이며, 결국 언어가 더 이상 자신을 밀고 나갈 수 없는 자리다. 말이 말의 허망함을 드러내고, 개념이 스스로 적멸하는 자리. 그래서 나는 그것을 ‘지금은 불생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전혀 다른 말이 가능해진다.
지금은 生生이다.
불생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겨남을 붙잡을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눈앞의 꽃은 피어난다.
바람은 불고, 빛은 변하고, 새는 날아간다.
생각 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며,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며, 한 찰나가 다음 찰나를 낳는다.
이것을 부정하여 ‘모두 불생이다’라고 말한다면, 불생을 또 하나의 관념으로 만들어버리는 셈이다.
불생은 생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생이기에 생은 생생하다.
여기에서 화엄의 성기(性起)가 떠오른다. 성기란 어떤 본체가 숨어 있다가 현상계로 ‘나타난다’는 단순한 발생론이 아니다. 법계의 진여한 성품과 현상의 일어남이 둘로 나뉘지 않는다. 진공이 그대로 묘유이며, 공성의 세계가 그대로 무한한 현현이다.
그러므로 생생(生生)은 불생(不生)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不生이 生生이고,
生生이 不生이다.
혜능이 말한 「何期自性 能生萬法」,
“어찌 자성이 능히 만법을 낳는 줄 알았으랴”라는 놀라움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읽을 수 있다.
자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성이 공하기 때문에 만법이 일어난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나타난다. 공하기 때문에 꽃이 피고, 공하기 때문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며, 공하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고 세계가 펼쳐진다.
만약 불생을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단멸에 가깝다. 반대로 생생을 ‘무언가가 실제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유의 실체론에 빠진다.
불생과 생생은 서로를 부정하는 두 개의 명제가 아니다.
하나의 현실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두 표현이다.
불생의 눈으로 보면
생겨나는 것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다.
생생의 눈으로 보면
오지 않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온 우주로 펼쳐진다.
불생의 눈으로 보면
생겨난 모든 것은 붙잡을 수 없다.
생생의 눈으로 보면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매 순간 새롭다.
그러므로 불생은 정지된 적멸이 아니며, 생생은 실체적인 생성도 아니다.
적멸이 곧 생생이고,
생생이 곧 적멸이다.
이것이 어쩌면 중도다.
불생을 깨달았다고 해서 생을 떠날 필요가 없다.
생생을 긍정한다고 해서 불생을 잊을 필요도 없다.
꽃은 피지만 꽃이라는 고정된 ‘생겨난 것’은 없다.
생각은 일어나지만 생각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나’는 살아가지만 그 나를 붙잡아 둘 실체는 없다.
그렇다고 꽃이 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내가 살아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다.
생겨나지만 생겨난 것이 없고,
사라지지만 사라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은 불생이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은 생생이다.
생생하게 피어나는 이 세계가 그대로 불생이며,
불생의 적멸이 그대로 생생한 세계다.
공(空)은 허무가 아니다.
공하기 때문에 무한히 나타날 수 있다.
적멸은 죽음이 아니다.
적멸하기 때문에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은 不生이다.
그리고 지금은 生生이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불생과 생생은 둘이 아니며,
정지와 운동도 둘이 아니며,
적멸과 현현도 둘이 아니다.
無生而生,
生而無生.
생겨남 없이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생겨남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은
죽어 있는 적멸이 아니라
끝없이 살아 있는 生生이다.
생생하되 집착하지 않고,
나타나되 붙잡지 않고,
살아가되 ‘살아가는 나’를 세우지 않는 것.
이것이 不生과 生生이 동시에 구족한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