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마음(출 23:16-19)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된 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신자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 멋대로 기준을 정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살려고 힘쓰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가지고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을 해도 이미 자기 기준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은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내가 아는 신앙의 기준을 실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찾아가려고 모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의 기준을 배우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거나 동조를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서 설교되는 말씀들이 자기의 기준과 맞지 않을 때 반발을 하게 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람이 세운 신앙의 기준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 가능해 보인 것들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어떤 기준을 제시할 때 그것을 보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시작하는 말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기준을 모두 인간들이 조금만 열심을 보이면 가능한 것들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주관자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믿음의 주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하는 것만큼 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신자들은 자기들의 열의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뭔가 신앙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그러면 신앙생활에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기도할 것은 하나도 없네요’ ‘우리가 해야할 것은 뭡니까?’라는 것입니다. 자기 쪽에서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신앙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그 모습이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기가 어려우니까 보이는 것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교회서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부지런히 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가르치는 이유도 목사 자신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교회가 교회답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만족해하는 그 자체가 불신앙임을 목사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은, 교회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보여질 때입니다. 즉 교회로 모이는 신자들이 서로서로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주님을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면 이 모습이 교회의 일에 대한 열심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전에 말한 대로 형제를 대하는 사랑의 마음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교회는 바자회를 했습니다. 해마다 하는 바자회이지만 그 목적을 바자회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바자회를 할 때마다 걱정을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몇명이나 오겠나?’ ‘뭘해야 하나?’ ‘바자회가 너무 초라하다’ ‘물건이 많아야 할텐데’ ‘수입이 너무 적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바자회를 해서 누군가를 도와주기 때문에 교회답다는 생각은 인간의 기준입니다. 신자들은 교회가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뭔가 교회가 활기가 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앞다투어 여러 가지 행사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기준도 교회의 기준도 아닙니다. 교회 행사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 행사를 통해서 얻어야 할 유익을 바로 찾아가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행사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으로 스스로 일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작은 일에 봉사하는 마음을 배우시라는 것입니다. 바자회를 해서 수입을 가지고 누군가를 도와주자는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일 안했다고 나무랄 것도 없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핀잔줄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 우리 기준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자회를 통해서 작은 자리에서 일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모습을 얼마나 발견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발견했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한 결과에 관심을 두게 되면 결국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은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일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배웠느냐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습니다.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주님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의 계획과 노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 때 실패의 자리는 오히려 성공의 자리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약자 보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는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입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자 보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내려다보면서 도와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 또한 약한 자들과 똑같은 약자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나에게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손해를 유발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런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나에게 손해가 있게 하시는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의 사업을 도와주고, 소원을 이루어주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나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마음먹는다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만 따라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말을 하면 아주 당황해하고 부담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과는 너무나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네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으로 바뀌었느냐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인간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6년 동안은 땅에 파종하여 소산을 거두되 7년째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7년째의 것은 땅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종하지 않았는데 곡식이 나는 것은 땅에 남아 있는 씨앗이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즉 7년째에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도와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7년째에 파종을 포기함으로 가난한 자들이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규례 속에 은혜와 자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모습을 바라보는 땅주인은 가난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규례 때문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것을 먹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천국 가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 땅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은혜와 바리를 아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육일 동안은 일하고 칠일은 쉬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세상을 사는 것은 우리가 일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은혜로 산다는 것은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13절에서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신을 부르게 됩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이든 무엇이든 그것은 다른 신을 부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14-17절까지의 절기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의 세 절기를 말씀합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없이도 지금 나에게 있는 지위와 돈만 있으면 세상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떡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 즉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떡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떡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과 힘을 쏟지만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붙들고 얻고자 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은 나를 살리는 떡이 더 필요한데 목사의 입에서는 은혜만을 말하고 은혜로만 만족하라는 말만이 나오기 때문에 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그것으로 최고의 복을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복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떡으로 까 살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을 배웠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삶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자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