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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6
복 있는 사람은
저는 목회를 비교적 쉽게 하고 있습니다.
그 한 방식으로 들었던 말씀을 계속해서 듣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가장 쉽게 접하고 가장 잘 아는 말씀으로 여기는 이 말씀을 함께 생각하십시다. 여러 시편을 한 권으로 엮은 사람은 그가 에스라이건, 또 다른 사람이건, 본 시편을 서언 형식으로 맨 처음에 둡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편에서 예언자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곰곰이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전체 핵심은 하나님, 곧 하늘 지혜 추구에 마음을 쏟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된 방식으로 멸시하는 자들은 비록 당분간 자신들이 행복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더없이 비참한 결말을 갖게 되고 만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일생동안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사는 생의 복된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본문 1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입니다.
1) 시편 예언자는 하나님 면전에 나아가서 율법 연구에 한결같은 진전을 보이는 독실한 신자들은 언젠가 만사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복이 있다' 라고 할 때에 통합적인 의미가 그런 것입니다.
인류 대다수가 성도들이 취하는 모든 행동을 한낱 고지식한 것으로 비웃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이 하는 수고를 전혀 쓸모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오늘날도 가장 경건하고 고급한 신앙을 그렇게 취급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의인들은 하나님의 복이 없는 모든 인간들의 비참한 상태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계시하신 그 진리 연구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자들 외에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호의를 베풀지 않습니다.
이 점을 우리 모두는 확신해야만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한 길에 굳건히 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2) 인간 생활 전반적인 성격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이탈할 태세입니다.
이렇게 될 정도로 이 세상은 무지와 부패와 무능의 타락상이 언제나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니 만큼 시편 예언자는 하나님 면전에 나아가서 법을 연구하는 학도들이 복되다고 주장하기에 앞서서 주위에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불경건에 넋을 잃은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시편 1 편
그런 점에서 본 시편은 사악한 사람들을 혐오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혐오 선인이 버림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먼저 악인들의 무리에서 물러서거나 떨어지지 않고서는 마음을 기울여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그릇된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취하는 것이 갱신의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권고를 정말 필요로 하는 인간들이 경솔하게 사단의 올무에 자신들을 내던집니다.
최소한 죄의 여러 유혹에 대해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상은 치명적인 타락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복되고 잘 사는 첫 단계는 불경건한 자들과 교제를 끊는데 있다는 것을 필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좀 덜 경건한 생활을 위하여 떨쳐버리고 털리는 게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 오염이 반드시 우리 마음과 몸과 생활 모두를 감염시키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3) 그러므로 예언자는 먼저 경건한 자들에게 악에 대한 여러 유혹을 경계하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똑같은 순서를 따르도록 하십시다. 불경건한 자들과 전혀 교제를 갖지 않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이 예언자의 확실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인류 공통적인 감정과 견해가 결코 용납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천성적으로 행복을 바라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무척 안이하게 그들의 죄악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나간 자들이 자신들 욕정을 만족시킬 때 그들이 욕망을 채웠다고 했을 때 행복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갖는 방식입니다.
예언자는 반대로 먼저 모든 불경건한 자들은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서 물러서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받는 멸망에 말려들고 말 것이라 합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뒤섞여 사는 악인들과 완전히 결별할 정도로 그들을 기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권고를 더욱더 강조하는 뜻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그 악인들의 조언에 따라서 함께 걷는 것' 을 금합니다.
다음으로 '그 악인들의 길 가운데 함께 서는 것' 을 금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악인들의 좌석 사이에 함께 앉는 것' 을 금합니다.
4)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을 철두철미하게 혐오하도록 함께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 편
이 거룩한 연합의 방식이 교회생활인데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활한 방법으로 여러 거짓 수단을 주입하는 방식이 사단이 갖는 술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아무도 부지중에 속아 넘어 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흔히 인간들이 올바른 길에서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첫발부터 교만하게 하나님을 멸시할 정도로 큰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그들이 악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사단은 그들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곁길로 이끌어내는 가운데 그들이 마침내 공공연한 범법 행위를 향해 줄달음질 치도록 합니다.
① 그러므로 예언자는 '꾀'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아직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은 사악한 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상이 말로 결집되면 선언이 되고 글로 결집되면 선언서가 됩니다.
② 그리고 나서 예언자는 '길'을 말합니다.
이것은 공언된 사상 체계를 따르는 습관적인 생활 방식을 뜻합니다.
③ 그리고 나서 예언자는 그들이 회집된 정상에다가 '자리'를 하나 놓습니다.
이와 같은 비유 표현은 죄악스러운 생활 습관이 가져오는 진지 구축과 같은 완고성을 가리킵니다.
'걷다', '서다' 그리고 '앉다' 라는 세 마디의 표현도 같은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기 타락한 욕정 만족을 따라 '걸을' 경우, 그는 죄짓는 습관에 이끌려 자신을 망각하고 그들 중에 서고 앉음으로써 더욱 사악으로 굳어져 갑니다.
바로 이 점을 예언자는 '죄인들의 길 가운데 서는 것' 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앉다' 라는 표현은 저질스럽고 절망적인 고집하는 단계입니다.
이 시편 저자 시대에도 하나님의 독실한 예배자들이 자기 생활 틀을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 무리에서 스스로 물러설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용의주도하게 모든 위험한 모임을 피하는 가운데 그것이 주는 불결로 얼룩지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신실한 신자들에게 단지 악한 자들에게서 오염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멀리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권면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불신앙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두드러지게 악한 본보기에서는 더러움을 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악인들이 타락한 태도를 자동적으로 모방하다 보면 악인들을 닮아가기 마련입니다.
시편 1 편
2. 본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입니다.
이제 시편 예언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자가 '율법을 묵상' 하는 생활을 최상 경건으로 말씀합니다. 이로써 하나님 법을 순종하는 것만이 그분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판단에 따라서 신앙 체계를 세우는 일이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 표준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서 취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성경 다른 부분을 제외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율법에 대한 해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머리격인 이 율법 밑에 전체 몸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습니다.
예언자는 율법을 칭송하면서 영감으로 된 나머지 글 모두를 거기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역시 신실한 자들에게 시편을 읽고 그 내용으로 찬송하도록 권합니다. 예언자는 경건한 자들이 갖는 특징은 여호와 율법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을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 순종은 결코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직 즐거운 마음으로 율법을 대하고 그것에 대한 진전을 보는 것을 무엇보다 바람직하고 기쁜 일로 여길 만큼 그분 교훈을 기뻐하는 자라야 올바른 율법 학습자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그 분과 그 분의 교훈이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한 이와 같은 사랑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한결같은 '묵상'이 주야로 나옵니다.
참으로 율법에 대한 애착을 갖는 자는 모두 그것을 꾸준히 탐구하며 기쁨을 느낍니다.
3. 본문 3절은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입니다.
예언자는 여기서 건실하고 아름다운 비유방식을 통하여 앞에서 말씀된 내용을 실례를 들어 확실하게 증명합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행복한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덧없고 허황된 기쁨을 맛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람직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쓰는 표현에는 물길이 좋은 곳에 심겨진 나무의 성장과 잠시 동안은 아름답게 자랄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토질의 불모성 때문에 곧 시들어 버리고 마는 나무의 초라한 모습 사이에 대조가 있습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시37:35에서 볼 수 있듯이, 때때로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습니다.
그들은 현재 행복에 아무 결핍이 없어 보일 정도로 재물과 영예가 넘쳐 흐릅니다.
시편 1 편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높이 올려지고, 제아무리 넓고, 자신들의 가지를 멀리 뻗는다 할지라도 땅 속에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에, 또 영양을 공급할 충분한 수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모든 아름다움은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 시들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단으로 주시는 빛과 바람이 징벌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물의 공급까지도 그런 형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철에 맞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든 번창한 상태에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복 뿐 입니다.
'제철에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에서 예언자의 명백한 의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꾸준히 번창하고 하나님 은혜의 은밀한 영향력을 항상 공급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그들의 구원에 유익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반면에 악인들은 갑작스런 폭풍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거나 작열하는 열기에 타 없어지고 만다거나 홍수에 매몰되거나 뿌리 채 뽑히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제철에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그 열매가 완전히 여물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악인들은 겉으로는 일찍 열매가 잘 맺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것이 여물지 않는다는 점을 나타냅니다.
4. 본문 4절은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입니다.
시편 예언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악인들을 광야에서 자라는 떨기나무에 비교했듯이(렘17:6),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마는 어떤 나무에 비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께서는 이 같은 비유를 충분하게 강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층 더 모욕적인 비유를 사용하여서 그들을 격하시켜 버립니다.
그 이유는 예언자가 그들이 잠시 떠들어대는 번창한 상태에 눈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파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마침내 덜미를 잡고 만다는 것을 진지한 마음으로 곰곰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현재는 번창하게 살지만 날이 갈수록 쭉정이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낮추시기 시작하면 진노의 거센 바람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와 같은 형식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악인이 장엄한 나무처럼 높이 올라가고 크게 유리한 것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입김으로 그 사람을 그 높은 위치에서 내던지기로 작정하는 날이면 한낱 쭉정이나 찌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 1 편
5. 5절은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입니다.
본문 5절 전체에서 행복한 생활이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중생자의 선한 양심에 달려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결국 불경건한 자들이 그들 스스로 소유했다고 생각하던 행복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지고 만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닙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겠습니까?
악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표현에는 일종의 양보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는 마치 사법권이 미치지 않을 때 강도들이 숲과 동굴 속에서 판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무질서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동안에는 불경건한 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항상 현재 혼란 그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제 질서를 바로 잡게 되는 날이면 이 불경건한 위인들은 통째로 쾌락을 박탈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행복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그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행복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 내면에 담겨진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예언자는 악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 선언합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으러 끌려가기 전까지는 만사 형통하게 보입니다.
그들을 지탱하는 본질이 악이요, 정직성이 없으니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갖는 진정한 정직성은 그것이 마침내 단련을 받을때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론 여호와께서 날마다 의인과 악인들을 구별하시며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오직 부분적으로 시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의 회중"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더 높은 곳을 향해야 합니다.
6. 본문 6절은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입니다.
장로교회에서 예정론을 가르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예정론에는 택자들 뿐 아니라, 유기자들에 관해서도 말씀되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의인의 길과 그 결국, 그리고 악인들의 길과 그 결국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한 표를 드러내 보여주실 때마다 불경건한 자들이 누리는 번영이 시들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 1 편
그때마다 그들이 선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처럼 싫건 좋건 결코 자신들이 의인의 회중에 끼지 못한다는 점을 시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항상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모든 사람을 상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할 최종 계시의 날을 참고 기다립니다 동시에 우리는 불경건한 자들이 비참에 처해진다는 것을 일반 원칙으로 삼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양심이 자기 사악성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 삶을 계산하도록 소환을 받을 때마다 그들의 헛된 잠은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 마음의 진정한 상태를 바라보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을 행복하게 상상했던 때가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이 우연의 지배에 따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또 팽배한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예언자가 말씀한 진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세상 유일한 재판관이라는 큰 원리를 명심시킵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에게는 일이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더없이 처참한 파멸이 따르게 됩니다.
외관상으로는 하나님 종들이 자기 정직으로부터 아무 혜택도 맛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호와 그들의 안전이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분의 보호 아래서 행복하리라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수 있는 결론은 그분께서 악에 대한 확실한 보복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만큼, 설령 그분께서 당분간 악인들을 눈여겨 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그들에게 파멸을 가지고 찾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갖는 환상적인 행복 때문에 기만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할 때마다 우리 눈앞에 세상 만사를 안정시키고 혼란에서 질서를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떠올리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습니다.
그들이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은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실 때마다 이 큰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삼위 일체이신 주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감이 우리의 복입니다.
왜 시편 1편이 시편의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을까?
1. 들어가면서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첫 장, 즉 서문이 중요하다. 그 책의 성격과 방향, 그리고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서문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의 총 150편 가운데 1편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한다. 보통 “시편”이라고 하면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기도 책”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예배 시에 불려졌던 “찬송 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 시편의 일반적인 주제를 “기도와 찬송”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 서문의 역할을 하는 시편 1편은 왜 “기도와 찬송”의 주제가 아닌 “교훈과 율법”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을까? 아니, 왜 시편의 최종편집자는 이 시편 1편을 시편의 맨 처음에 위치하게 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시편 1편에 대해 살펴보면서 1편과 2편과의 관계, 1편의 내용과 제작 연대 등을 알아볼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시편의 역사인 제작과 수집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1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고, 시편의 삶의 자리와 1편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면서 왜 1편이 시편의 서문으로 발탁되었는지를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2. 시편 1편
1) 시편 1편과 2편
머리글이 없는 시편 1, 2편은 행복 찬양으로 시작하고(시1:1) 행복 찬양으로 끝을 맺기에(시2:12) 가끔 하나의 시편으로 간주된다(행13:33에 대한 몇몇 헬라어 수사본들과 유다교 전통 등). 그리고 1편과 2편 사이에 있는 히브리어 본문 전승은 휴지 표시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1편과 2편을 하나의 시편 본문으로 합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두 본문의 모형과 양식, 그리고 메시지가 너무 다르며, 1편은 포로 후 말기에 기원을 두고 있는 교훈 지혜시이며, 2편은 포로 이전의 절정기 고대의 궁정시의 본문이기 때문이다.
또 B. W. Anderson은 시편 1편과 2편이 둘 다 시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1편에서는 토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가 주제이고, 2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할 메시아의 오심이 주제인데, 이 두 주제는 시편서가 마지막으로 그 형태가 결정될 시기의 유대 신앙에서의 양대 주요 신앙이었으며,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이 되는 말이기에 1편과 2편이 모두 시편의 서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 1편과 2편, 두 시편이 모두 서문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 두 시편이 시편 전체의 서문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 같이 두 시편의 내용과 성격이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편이 전체 시편의 서문이고, 제왕시인 2편은 다윗의 시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3-72편에 있는 시들의 서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본 보고서에서는 시편의 서문으로서의 시편 1편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시편 1편의 내용
먼저 시편 1편이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두 가지의 길을 대조시키는 부분(1-2절)이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과 악한 자의 본질과 가치가 두 폭의 그림처럼 묘사된다(3-4절). 마지막 세 번째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의 최후 판결이 선포된다(5-6절).
이 시는 지혜시, 특히 율법시, 토라시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유를 사용하여 인생의 두 가지 길을 강조하고, 축복을 선포하며 인생의 풍요함을 위해서는 율법이 구심점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3) 시편 1편의 제작
시편 1편에는 이 시의 저자와 그 지은 연대를 암시하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시편 1편이 순수한 시편 기자의 작품이 아니며, 고대 근동의 지혜 문학의 영향과 예언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지혜서인 「아메넴오페의 교훈」(Instruction of Amenemope)에서 의인을 번성하는 나무에 비교하고 있는 비유가 등장하는데 시편 1편과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있으며, 또한 거기서 사악한 사람도 한 그루의 나무에 비교되고 있다.
또 시편 1편은 예레미야 17:5-8과 어휘나 사상에 있어서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Gunkel, Briggs, B. Duhm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 1편의 작자가 예레미야의 노래를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편과 예레미야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강조는 서로 다르다. 즉 시편 1편 저자는 율법을 중심한 경건 사상을 가졌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어떤 환경에서든지 신뢰하는 의지사상을 중심한 경건을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에서는 그 경건한 자가 “야훼를 의지하는 자”임을 말하고, 시편 1편에서는 그 경건한 자가 율법을 읽고 있음을 보여 준다. 1편은 분명히 기록된 율법이 경건을 규정하는 시대의 산물이며, 나라와 큰 예언자들의 자취가 감추어진 시대에 나타난 시이다.
율법을 경건 생활과 관계를 짓게 된 시대는 포로 이전 시대라기보다 에스라의 활동 이후 율법의 권위가 이스라엘 백성의 경건 생활과 구체적인 관련을 가지기 시작한 시대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은 지혜문학의 영향과 예레미야의 영향 아래 있으며, 그 제작 시기는 아무래도 포로기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 시편 1편의 제작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시편이 제작 될 때 처음부터 시편 전체의 서문의 역할이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저술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며, 최종 편집자의 의도와 이 시가 일치되어서 1편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3. 시편의 역사와 시편 1편
1) 시편의 형성과정
시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제작되고 편집되었는지를 한 마디로 말하기란 쉽지 않다. 시편 가운데에는 왕정제도를 배경으로 읽히는 시가 있는가 하면(시 89 ; 93 ; 99), 예루살렘의 패망을 무대로 해석되는 시들도 있고(시 74 ; 77 ; 79 ; 89), 바벨론 포로기에 기록된 시들도 있으며(시 137), 제2성전시대(주전 515-주후70)라는 역사적 변혁기에 작성된 시들도 있다(시 12 ; 37 ; 49). 시편의 형성과정은 이처럼 장구하다.
하지만 현재의 시편처럼 150편이 한 책으로 묶여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몇몇 시들이 이중으로 전승된다는 사실(시편 14 = 53 ; 40:14-18 = 70 ; 57:8-12 + 60:7-14 = 108)은 현재의 시편이 원래 독립적인 책으로 존재하다가 수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원래 시편의 핵심 덩어리는 시편 3-41편의 다윗 시 모음집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원래의 핵심 시편집은 시편 51-72편과 같은 다른 다윗시편 모음집으로 보충되었고, 또 제2성전시대 때 성전에서 작시되거나 사용된 여러 시편 모음집들이 따라서 덧붙여지게 되었다(시 42-49, 73-83, 84-89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편 90-150편에 있는 시편 모음집들이 더 첨가되었다. 이 마지막 부분에 있는 시편 모음집으로는 야훼의 왕권을 경축하는 시편들(시 93-99편), “할렐루야”, 즉 “야훼를 찬양하라”라는 시편들(시 111-113, 115-117, 135, 146-150)이 있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시 120-134편)이 있다.
그럼, 시편은 언제 한 권으로 묶여지게 되었을까? 대체적으로 시편이 최종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정착되게 된 때를 제2성전시대로 본다. 150개의 시들이 토라의 다섯 부분을 본 따 다섯 권으로 편집되게 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말이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기도와 찬양이던 시편이 토라나 하나님이 주신 교훈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2) 포로기 이후, 제2성전시대의 시편 1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시편 1편의 제작이나 시편의 최종 형태로 모양을 갖춘 시기가 대략 포로기 이후, 제2성전시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대 사회는 율법, 즉 토라를 중심한 하나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그들은 토라를 구속력 있는 “규범” 또는 “생존을 위한 지침서”로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삶의 태도” 또는 “삶의 정신”을 구축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율법의 백성”임을 자처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상적인 생활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시기에 완성된 시편의 형태가 토라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편이 토라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은 시편 전체의 모습을 해석하는 일에서 소중한 해석학적 길잡이가 된다. 개인의 영성을 함양하는 기도나 공동체 예배에서 낭송된 차원으로 시편 하나하나를 대하기보다는 시편을 일종의 토라로,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계시로 대해야 할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편집한 사람은 포로후기 공동체 시절 학자나 서기관으로 뿌리를 내렸던 토라, 지혜 교사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토라시인 시편 1편이 시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시편 서문을 위해 1편이 제작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토라의 정신이 충분히 배어있는 1편을 의도적으로 삽입함으로써 시편의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제시하였다.
3) 시편의 삶의 자리인 예배와 시편 1편
또 다른 차원에서 시편의 서문으로서의 1편의 위치를 시편의 삶의 자리인 예배와 관련시켜 알아보고자 한다. 모빙켈은 시편이 여러 가지 예배 상황을 암시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편의 삶의 자리가 예배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시편 속에서 뿐만 아니라 미슈나에서나 다른 랍비 문서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여러 가지 예배 상황에서 시편이 사용되어야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시편들이 탄생하고 성장했던 예배는 그 바탕에 있어서 우리들 시대의 예배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자연적이었으며 논란의 여지가 없이 전 공동체의 삶의 구심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예배라는 것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말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이 그 속에 담겨 있고 또 예배가 삶을 움직이는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전체로서의 공동체의 삶이든, 혹은 어떤 특수한 개인들의 삶 속에 발생하게 된 어떤 것이든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예배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예배와 접촉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들의 삶의 전부였다.
이런 이스라엘의 예배 생활은 경건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이 시들을 노래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죄를 고백하고, 그들의 고난과 비애를 호소하며, 간구와 탄식을 아뢰며, 위기의 모면과 죽음의 극복과 원수의 패망을 기원했다.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과 투쟁의 기록들이 담긴 이 모든 시들에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경건한 사람이 되고자 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들의 예배는 그들의 경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편을 최종적으로 편집한 기자는 위와 같이 시편의 삶의 자리인 예배와 예배 생활이 바로 경건 생활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시편 1편을 시편의 서문으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시편 1편을 통해 ‘토라’를 존중하는 자의 삶과 그것을 무시하는 자의 삶의 내용과 운명을 대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삶과 경건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밝히려 했다. 즉 예배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가질 것인가 하는 질문의 답으로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그와 반대로 예배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경계하고 버려야 하느냐는 질문의 답으로 악인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의인의 경건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기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공동체의 경건’ 보다는 ‘개인의 경건’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시편이 공동 예배에 사용되기에 ‘공동체의 경건’을 위한 책이라 하겠으나, 하나님의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기도와 명상을 의미한다. 신앙 공동체의 유지와 그 생명력은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의 개인 경건이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시편은 그 성격과 목적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를 위한 것이나, 이것이 그 공동체의 공유물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개인 영혼들의 피나는 신앙 투쟁이 있었다고 함을 부정할 수 없다. 시편은 이런 개인의 영적 투쟁 기록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신앙공동체의 경건한 책이 되기 이전에 이미 개인 영혼들의 경건 생활록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시편 1편은 역시 서문의 위치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냇가에 심은 한 나무가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한 영혼의 푸르고 싱싱한 자세를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나오면서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시편 1편은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편 전체의 서시 역할을 한다. 시편 1편의 제작 연대나 시편의 최종적인 편집 시기가 토라를 중요하게 여겼던 포로기 이후, 제2성전시대였으며, 그 시대의 흐름이 시편 1편을 그 자리에 위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시편의 삶의 자리인 예배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삶의 전부였으며, 이런 예배와 예배 생활이 바로 경건 생활이기에 시편 1편을 지금의 자리에 앉히게 하였다. 시편 1편은 독창적으로 창작된 시가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시편의 서문의 역할을 위해 제작되지도 않았지만, 시편을 최종적으로 편집한 기자는 의도적으로 시편이라는 책의 성격을 규정짓는 서문으로 이 시를 사용하였다. 이 시는 오늘날 시편을 읽고,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어떻게 사는 것이 토라의 삶이며, 경건의 삶이며, 예배의 삶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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