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회에서 주말부흥회가 있었다.
말씀의 감동으로 은혜 충만한 시간이었다.
목회 경험 중에서 있었던 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한 집사님이 이스라엘 나라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셨다.
지금도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데,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었다. 이걸 보고 이런 생각이 드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인데 그 직계 후손이 지금도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키고 있으면 그날이 진짜 안식일이겠다. 내가 지키는 이 일요일은 아니겠다.
그래서 그분이 114에 전화하여 제칠일 안식일인 토요일날 예배드리는 교회를 찾아서 교회에 나오셨다.
이 집사님은 성경말씀을 곶이 곶대로 믿는 말씀중심 신앙이셨다.
사람들의 의견보다 성경이 우선이셨다. 그래서 진리를 찾으신 것이다.
그 집사님께서 대뜸 목사님께 이렇게 여쭈어보았다.
“목사님, 하나님도 거짓말하십니까?”
“아뇨,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면 큰일 나지요.
나를 믿으면 구원해 주겠다 하셔놓고, ‘거짓말’인데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큰 일 날 말씀이지요.”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시다고 분명히 되어있어요.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그런데 목사님 이것 보세요.
이것 거짓말이 아니고 뭐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쟎아요?
그런데 성경 창세기를 보세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창 5:4-5)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았잖아요. 적어도 930세를 살고 죽었잖아요.
그러니 선악과를 먹으면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는데 거짓말이지요.
그래요. 그것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가 끊어져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그의 육신의 생명은 930살까지 지탱된 것이에요. 선풍기를 보세요. 코드를 뽑았죠. 그렇지만, 얼마간은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그런데 이 집사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으리라 했는데 930년 살았다고 거짓말이란 거예요.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이분을 이해를 못 시키고 결국 이렇게 제가 나왔습니다. 나왔더니, 저랑 같이 방문 갔던 집사님들이 뭐라 그러냐면 ‘목사님이 이렇게 잘 설명해 주는데 이걸 이해를 저렇게 못하다니 답답해요.’ 그리고 나왔어요.
그리고는 세월이 지나서 이 말씀을 보는데 말이에요. 근데 어르신의 말씀이 맞았어요. 제가 잘못 설명한 거죠. 왜 맞았는가 하게 되면 성경을 보니까 먹는 그날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거예요. 창세기 2장 17절에 대한 호크마 주석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베욤 아칼레카 밈멘누) - 여기서 '날'이란 말에는 전치사(* , 베)가 붙어 '바로 그날 안에'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명령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엄정한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제가 잘못 설명한 거죠. 그럼 어떻게 된 걸까요? 그날의 아담과가 죽어야 되는데 안 죽었어요. 그러면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거짓말하신 게 맞나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시면 안 되는 거죠.
제가 성경 말씀을 창세기 1장과 2장 3장을 딱 읽어 나가는데 불현듯이 저의 생각을 스치고 지나간 어떤 생각이 있었구요. 그 생각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어요. 사실은 여러분이 목회자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목회자들이 느끼는 어떤 그 심적인 부담들은 표현이 안 되어져서 그렇지 굉장히 클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제 인턴으로 진보 교회에서 목회했었는데 그때 제가 인턴 때 27~28살에 장례식을 4건을 치렀어요.
그때 제가 지구장이었어요. 아무도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장례식을 다 치렀어요. 연세 많으신 80 되신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는 부담이 좀 들되었어요. 살 만큼 사신 분이니까.
그런데 40대 초반의 분이 2분이나 돌아가신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부인들이 30대 중반 요런 애들이 막 3명 딸려 있어요. 너무 불쌍한 거야. 이제 아버지를 잃고 이 어린 것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13살 된 아이가 죽었어요. 심장판막증으로 서울대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는데 제가 방문을 갔더니, 얘가 완전히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심장 판막 때문에 얘가 제대로 크지 못해곤 온 몸이 수술 자국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결국 그 아이가 죽었어요. 할머니께서 우리 교회 집사님이셨는데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 키웠어요.
이 아이가 학교 갈 때 조그만 언덕도 숨이 차서 가방을 들고 못가는 거예요. 그러면 할머니가 그 아이를 업고 가방 들어다주고 이렇게 키웠는데 이 아이가 죽은 거예요. 안식일 날 그 가정을 방문을 해야 돼요. 1주일 내내 그 가정 가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씀으로 이 집사님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목회자가 아니면 그걸 못 느낄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워 밥도 안 넘어가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니까 그래서 저는 이 장례식 갈 때마다 많이 힘들었었거든요. 근데 제가 이 말씀을 깨닫고 난 이후부터는 장례식을 웃으면서 갑니다. 사실은 제가 어제도 당진에 밤에 갔다 오늘 아침에 거기서 하룻밤 자고 문상 갔다 왔거든요.
가서 제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냥 상주 만나서 이야기하고 뭐 웃으면 웃고 그렇게 왔어요. 제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된 그 말씀인데 여러분 이 말씀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거짓말하신 걸까 아닐까 정답은 하나님은 거짓말 안 하셨어요.
근데 아담은 언제 죽어야 돼요? 그날 죽었어야 됐어요. 근데 아담은 930년을 살았어요. 그럼 여기서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릴까요? 아시는 분은 아실 거예요. 제가 창세기 3장 21절을 읽는데 전에는 전혀 이해를 못 했었는데 이 말씀이 이렇게 풀어지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그날 아담과 하와가 죽어야 하는데, 안 죽었어요. 대신 죽은 게 있어요. 뭐가 죽었어요. “가죽옷”이 뭐예요? 가죽옷을 만들려고 그러면 동물이 죽어야 되죠. 성경을 한번 읽어보세요. 이게 얼마나 과학적인지 가죽옷을 지어 입혔었는데 이 가죽을 내어준 그 짐승이 뭐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세상이 창조된 이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계 13:8, 현대인)이라는 거예요. 그 어린 양인 누구를 표상하고 있어요.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더니, 이야기 하잖아요.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제가 이 말씀을 깨닫게 된 거예요. 아 그날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지만 누가 죽었어요. 아담과 하와의 그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가죽옷을 내어주기 위해서 양이 죽은 거잖아요. 하나님은 뭘 담보로 하신 거예요.
언젠가 오게 될 여자의 후손인 그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담보로 해서 누구를 살려준 거예요. 지금 아담과 하와를 살려 준 거예요.
이건 깨달음이에요. 깨달음 이걸 알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그날 이후로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어요. 어떻게 바뀌어졌을까요? 눈을 딱 뜨는 순간에 어떡할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왜 사실은 아담과 그날 죽었으면 어떻게 됐어요. 이 땅에 한 사람도 존재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아담이 죽는 대신 누가 죽었어요? 양이 죽음으로 아담을 살려주셨기 때문에 아담이 살아있음으로 오늘 우리가 있는 거잖아요.
제가 이 내용을 보고 난 다음에 본교 성경주석을 봤더니, 정말 놀라웠어요. 본교 성경주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무서운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자비로 은혜의 날을 허락받지 못했다면, 죽음은 즉시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생명을 요구하나, 그분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성경주석, 창 3:19)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뭐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이 뭘까요?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이걸 알고 나니까 13살 된 그 아이를 생각했어요. 지금 같으면 그 아이 집에 가서 그 할머니, 그 집사님을 아무런 부담이 없으면 만났을 거예요. 그때 뭐라고 했을까요?
이 아이가 13년을 집사님과 더불어 산 이 삶이 하나님께서 집사님께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50이 되어 죽든지 60이 되었죠. 100살이 됐든 어떤 언제 우리가 죽든지 간에 우리가 살아온 모든 삶이 다 뭘까요?
하나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지 못했을 뻔한 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란 걸 제가 알게 된 거예요. 이걸 알고 나니까 눈이 딱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뭘까요?
하나님!
오늘 하나님께서 제게 이 한 날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일어나게 되네요.
마땅히 죽었어야 할 죄인에게
주님이 대신 죽으시고
허락하신 이 날 하루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살겠습니다.
마땅히 심판받아야할 죄인에게
주님의 생명을 담보로 하시고
덤으로 주신 이 생명
은혜에 보답하여
사랑과 봉사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목숨팔아 산
이 생명
소중히 살겠습니다.
https://youtu.be/vQhIGhDA9uk
https://youtu.be/AYmVNmfemQc
https://youtu.be/6szx_SSMb4g
https://youtu.be/QlHFP3WzxoQ
https://youtu.be/U8ILscjAvB0?list=PLkDm9k3-yeTi-xeBCXYT06aO3gAu9gAd9
https://youtu.be/zYwdMz36G1k?si=umGlVSGDnFzLiNO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