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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총 개요
제 1 절 6.25전쟁 개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기습적인 불법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합의하기까지 3년 1개월 2일(총 1129일)간 진행된 전쟁으로, 종전이 아닌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킨 상테로 정전아닌 휴전의 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은 전쟁이 터지고 1년이 지난 '51.6월 말부터는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이 서부전선의 한강-임진강선애서 중서부전선의 와이오밍선, 그리고 중동부전선의 신캔사스선에서 '53. 7월 27일 휴전시까지 전선변화 없이 교착상태에서 서로 휴전시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한 국지적인 고지 쟁탈전만 계속된다.
전쟁 초기 1년간 공산군은 세 차례나 38선을 넘나들었다. 그 첫 번째는 전쟁 발발에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고, 두 번째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두만강선까지 밀려 올라간 상황에서 '50.10월 중순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중공군 신정공세로 '51.1.4후퇴에서 37도선인 평택-삼척선까지 내려온다. 세 번째는 다시 국군과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으로 캔사스선 이북(38선 근방)까지 밀려올라 갔다가 중공군 춘계공세('51.4월 1차, 5월에 2차)로 서부전선은 중공군이 골든선이던 서울 구파발에서 북한강-홍천강-용문산선, 중동부전선은 제천-평창부근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51.6월 중순 이후에 지금의 휴전선일대까지 밀려 올라갔다.
첫 번째 남침시는 97일 만에 인찬상륙작전('50.9.15일)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내고, 압록강 초산에서 강계, 장진호-혜산진-나진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두 번째는중공군이 개입하여 수도서울을 다시 적에게 넘겨주고(1.4후퇴) 평택-안성-삼척선까지 밀렸다(영월돒팍구 형성). '51년 1월 중순부터 위력수색작전인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작전으로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횡성-하진부리선까지 올라선 상황에서, 중공군 2월 공세로 지평리에서는 미 제2사단 23연대전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물리쳤으나,중서부 전선이 횡성에서 돌파되어 단양-제천선까지 밀리내려갔다 다시 반격하여 '51.3월 15일에 서울을 재수복하면서 38도선까지 90일 만에 밀고 올라간다.
세 번째는 중공군 4월 공세로 서부전선은 임진강에서 영 제29여단이 설마리에서 옥쇄작전으로 사수하고, 중서부전선에서 국군 제6사단이 사창리에서 돌파되어 홍천강선까지 밀리고, 동부전선은 홍천-인제-양양선까지 밀리게 된다. 이어서 중공군 5월 공세로 국군 제3군단이 오마치에서 포위되어 군단이 와해 되어 방태산을 넘어 유천리-하진부리선까지 밀린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반격작전으로 39일 만에 '51.6월 중순에 38도선을 회복(서부 개성지구는 유엔군이 회복하지 못함)하고 동부전선은 38도선보다 16~48km더 올라간 상태에서 휴전회담이개시되기 시작한다.
전쟁 기간 중에 공산군이 38도선 이남에서 머문 기간은 226일이고,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북쪽에서 머문 기간은 76일('50.10.1~'50.12월 15일)이다
전쟁 기간 3년 1개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의 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고, 북한군과 중공군은 2백만여 명에 이른다. 여기에 민간인 피해도 남한이 100만여 명, 북한이 150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시 남북한 인구 2,500만 명 중에 320만 명의 피난민과 30만 여 명의 전쟁미망인, 10만여 명의 전쟁 고아가 발생하였다.
제 2 절 북한의 남침 이후 상황 요약
1. 북한군의 전면 님침과 한강선 방어(서울 피탈)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이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200여 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국군을 밀어붙여, 6월 26일 13시경 의정부를 돌파, 6월 28일 01시경 북한군 선두가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면서 개전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게 함락된다. 이에 6월 28일 새벽 02시 30분 경에 한강교를 폭파하여, 미처 철수하지 못한 국군의 철수로가 막히고, 150만 서울 시민의 피난이 어려움을 격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국군 제6사단이 춘천과 홍천 북방 말고개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진출을 지연하여, 그들이 수원으로 진출하여 서울의 후방을 포위 차단하려는 기도를 좌절시켰다.
북한군이 수도서울에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국군은 한강을 넘어 온 일부 병력을 규합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여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함으로서 미군이 조기에 한반도에 파병되는 시간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 유엔군의 참전과 지연전
국군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한강을 넘어 온 병력을 3개 사단으로 혼성편성하여, 양화교에서-광진교상에 이르는 한강변 24KM에 한강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김포방면에는 혼성병력 6개 대대규모로 2천여 명으로 구성된 김포지구사령부가 배치된다.
북한군 제3사단이 6월 30일 새벽 신사리 방면에서 뎃목과 나룻배를 이용하여 도하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국군 혼성 제7사단이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미 제19폭격전대의 항공지원으로 적의 도하를 저지한다.노량진-동작동 방면과 여의도 방면에서도 적은 도하작전을 시도했으나 모두 아군의 수도사단과 혼성제3사단의 결사적인 방어로 실패하게 되자, 북한군은 마침내 경부선 철교를 야간을 이용하여 복구하여, 7월 3일 새벽 4시에 저타 4대가 도강하는데 성공하면서 후속부대들이 영등포 일대로 진출함에 다라 노량진과영등포 일대를 석권한다.
국군은 7월 3일까지 한강방어선과 곤지암-충주-제천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지탱한 후 수원 남쪽으로 철수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10일간의 국군의 독립작전이 오산.안성 지역에 배치되기 시작한 미군과의 연합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철수과정에도 무작정 철수만 한 것은 아니다. '50.7월7일 충북 음성-동락전전투에서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7월 21일에는 충북 보은 화령장에서 국군 제17연대와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을 ㅅ강대로 대승을 거두어 계속적인 패배로 불안감에 싸여 있던 국민들에게 이길 수 있는 신념을 불어넣었다.
한편, 6월 30일에는 채병덕 소장이 육군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고 정일권 소장이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 총참모장으로 임명되고 해임된 채병덕 소장은 이 후 영남지구 편성 관구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이후 채 소장은 미 제29연대 3대대의 고문관으로 1950년 7월 27일 하동 쇳고개에서 전투 중 전사하게 된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북한군의 기습남침 전보를 접하고 지체없이 참전을 결정하고, 미국의 요청으로 6월 26일 긴급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어 북한군을 침략자로 규저하고 이들이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28일에는 적이 계속 남침을 감행하자 북한군에 군사적 제재를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7월 7일 유엔은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을 창설하게 되고,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국의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군은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려이 맥아더 원수에게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그 사이 일본 동경에 위치에 잇는 미 극동군사령부는 남진을 게속하고 잇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 제24사단을 한반도에 파병한다. 그 선두 부대인 미 제24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 열차를 이용하여 경부국도로 진출하여 오산 죽미령에서 7월 5일 최초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 제24사단은 오산. 평택.천안 전투에서 계속 밀리면서 국군과 미군은 금강-소맥산맥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경부국도 동쪽은 국군이, 서쪽은 미군이 전담하여 방어작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도적인 전차기동과 병력의 측방기도 및 후방차단 전술에 밀리면서 국군과 미 제24사단은 금강방어선을 지키기 못하고 7월 20일에는 중부의 전략요충지인 대전을 피탈당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소장이 실종되는 국면에 직면한다.
미 제8군사령부는 극동군사령부의 명령에 의거 7월 9일 일본에서 대구로 지휘소를 옮기고, 미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 등을 한반도에 전개 시키면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7월 20일은 금강-소맥산맥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공간을 내주면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개전 35일 만인 7월 말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한다.
3. 낙동강 방어선 전투
[유엔군의 참전]
유엔의 신속한 참전 참전 결정에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영국이 해군을, 6월 29일에는 호주가 구축함과 공군을, 네덜란드가 구축함 1척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추가적인 지원 제의가 나오지 않아, 유엔사무총장이 요청 서신을 발송하여 7월 중순 이후 참전 지원 국가가 증가되어 7월 14일에 프랑스가 초게정 1척과 보병 1개 대대를, 7월 20일에는 벨깅에와 네덜란드가 각각 보병 1개 대대를 파견하게 된다. 이어서 의료지원부대를 덴마크, 스웨덴,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이 파병한다.
8월 초에는 캐나다가 1개 여단을, 8월 20일에는 양국군이 1개 여단을, 호주가 보병 1개 대대, 뉴질랜드가 1개 포병대대를 파견하게 되고, 영연방이 아닌 국가로 터어키가 1개 여단, 태국과 필리핀이 각각 1개 대대 규모를, 그리스가 수송기 6대와 병력 3,800명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어서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벨기에,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참전하게 된다.
북한군이 예상과 달리 막강한 전투력으로 계속 낙동강 전선으로 밀고 내려오게 되자, 맥아더 원수는미국 정부에 증원을 요청하여, 7월 24일 독립 제29연대, 7월 31일 제5연대전투단, 그리고 제1임시해병여단과 미제2사단이 도착하여 낙동강 방어선에 트입되게 되고, 홍콩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제27여단이 8월 29일 파병하게 된다.
[낙동강 방어선 편성]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을 잇는 방어선으로, 유엔군이 대구 북서쪽 왜관으로부터 낙동강을 따라 창녕-마산-진동리에 이르는 112KM 구간을 담당하고, 국군이 왜관으로부터 북동쪽으로 낙정리-구미동-청송-영덕을 연하는 138KM를 담당하게 된다.
국군과유엔군은 8월 3일까지 왜관의 낙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비롯한 낙동강상의 모든 교량을 폭파한 후 8월 4일새벽 낙동강까지 철수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할 수 있는 교두보란 의미에서 부산교두보라고도 하며 ,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설정한 최후 방어선이라는 의미에서 워커라인이라고 한다.
물론 철수과정에 안동의 국군 제8사단은 안동대교를 폭파하는 시기가 하급제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제2의 한강교 폭파사건처럼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오게한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6.25전쟁이후 처음으로 반격작저능로 전환하여 총반격을 실시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왜관 북쪽 작오산(303) 북단에 협조점을 설치하여그 남쪽 마산에 이르는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미군 3개 사단(미 제24, 25, 미 제1기병사단)이 책임방어 하고, 왜관에서 영덕에 이르는 중동부 산악지대는 국군 5개 사단(제1,3.6.8.수도사단)이 방어하게 된다.
한편 북한군은 충주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옮겨서, 1개 전차사단과 9개 사단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 미군 정면에는 북한군 제1군단(김웅),국군 정면에는 제2군단(무정)을 배치하여 8월공세와('50.8.4~8.25) 9월 공세('50.9.1~9.15)를 감행하였다.
다부동 전투와, 영천 및 안강. 포항 전투, 낙동강 돌출부전투(창녕.영산), 서남부지역 전투(마산-진주)에서 북한군에게 돌파될 뻔한 위기를 극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한다.
아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 끝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의 철수를 유도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총공세를 하게 되었다.
가. 다부동 전투('50.8.4~9.15)
대구 북방 22km,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에 이르는 5번도로와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으르는 908번 지방도로가 발달된 곳이 다부동이다.
국군은 임진강을 넘고 한강을 넘고, 국군과 유엔군은 마지막으로 낙동강을 넘어 더 이상 넘을 산멕도 없고 강도 없었다. 대구가 무너지면 바로 마지막 보루 부산이다.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4개 사단 (제1.3.13.15사단)을 투입하여 공격을 하게 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초기에는 국군 제1사단이 전담하다 미 제1기병사단이 전담하게 되고,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 우측으로 이동하여 대구 북방 팔공산-영천 북방 화산의 죄측을 담당하게 된다.
8월 13일, 북한군 제3사단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2연대보다 먼저 유학산을 점령하였고, 적 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으로 기동하여 674고지를 먼저 점령한다. 그리하여 국군 제1사단은 미처 방어선을 형성하기도 전에 북한군 제3,23,15사단이 공격해 옴으로서 중앙이 돌팓될 위깅에 처한다. 이에 제15연대는 3328고지에서 무려 15회 이상의 공방전을 감행하엿고, 제12연대와 제11연대는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쟁탈전을 치열하게 벌였다.
대구 정면이 위태롭게 되자, 미 제8군은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 왜관 낙동강 서쪽에 B-29 폭격기 5개 편대 98대가 26분 동안 3,234발의 960톤의 폭탄을( 5.6x12KM) 퍼붓는 융단폭격을 감행했다.
나. 영천 전투('50.9.4~11일)
영천은 대구에서 34KM, 경주에서 28KM 거리에 위치하여 영천을 중심으로 대구, 경ㅈ주, 포항, 안동, 청송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다. 따라서 이 지역이 피탈시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이 분리되고, 포항-안강-대구로 연결되는 국굱의 유일한 횡적 병참선이 차단된다. 아울러 영천에서부터 경주, 부산으로 통로가 개방되어 부산이 일겅에 함락될 수 있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북한군 제15사단이 9월 5일 공격을 개시하여 국군 제8사단의 주저항선이 무너져 9월 6일 새벽에 영천시내가 피탈된다.
영천 전투 당시에 국군 제8사단의 좌인접에는 국군 제6사단이 신령전투를 벌이며 북한군 제8사단의 진출을 신령고개에서 무려 북한군 전차 20여 대를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면서 측방엄호를 하였고 우인접에는 수도사단과 제3사단이 안강. 포항에서 적과 격전을 한다.
영천이 피탈되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국군 제1사단과 국군 제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차출하고 재편성된 국군 제7사단(50% 수준에 미달한 상태)을 투입항여 영천을 탈환하도록 하였으며,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영천을 탈환하지 못하면 국군 2~3개 사단을 포함 , 약 10만 명의 요인을 괌이나 하와이, 제주도도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정일권 총참모장 증언)
'50.9월 7일부터 국군은 반격으로 8일 영천을 탈환하고 9월 10일부터 총반격으로(북쪽에는 제19, 21연대가 적의 퇴로 차단), 남쪽에서는 5개 연대(제5,8,10,11,16연대)가 공격하여 9월 12일 주저항선을 회복하여,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다. 낙동강 돌출부 (영산.창녕, 마산 서부지역) 전투
[창녕. 영산 전투]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 방어지역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영산은 경남 창년군 영산으로, 낙동강이 굽이쳐 내려오면서 서쪽ㅇ에 돌출해, 마치 반도처럼 삼면이 강으로 둘러사인 곳이다. 이로 인해 창녕과 영산부근을 "영산돌출부 혹은 낙동강 돌출부"라고 칭하고 있다. 당시 미군은 현풍에서 남지까지 방어정면을 미 제24사단이(이후 미 제2사단, 미 제1해병여단) 국군 제17연대(현풍 배치, 8월 7일 적 도하를 저지한 후, 부대재편성 계획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고, 하이저 특수임무부대가 현풍지역 인수))를 배속받아 북한군 제4사단과 , 박진, 오항, 부곡에서 격전을 벌인다. 이 전투이후에 북한군 제4사단은 전선에서 사리졌다.
미군 전사에 유명한 오봉리 능선 전투와 클로버 고지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한때는 영산이 피탈되기도하여 마산 서측방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미 제8군은 예비이던 해병여단을 8월 15일 투입하여 낙동강 선을 회복하고 19일 마산으로 이동하여 다시 예비가 된다.
[마산 서부지역 반격작전]
낙동강 돌출부 남쪽 남지에서 마산까지의 낙동강 방어선은 급거 김천에서 마산에 도착한 미 제25사단이 담당한다. 미 제25사단은 제5연대 전투단을 배속받아 이곳의 최초 방어책임부대인 미 제24사단으로부터 책임지역을 인수받아, 국군 민부대. 김성은 부대를 작전통제하여 북한군 제6사단(제7사단도 참가)과 8월 4일부터 전투를 벌였다.
대구 서북방의 위기에도 미 제25사단이 이곳으로 전환된 것은 그만큼 부산 서측방이 위험에 처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 제8군은 미 제25사단을 이곳으로 투입하여 지연작전에서 최초의 사단급 역공격을 실시하여, 역으로 대구정면의 적의 압력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에게 미 제25사단, 제5연대 전투단, 미 제1해병여단, 제89중전차 대대, 해병 제1전차대대를 배속하여 "킨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50.8월 7일부터 공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동리 일대(야반산)와 함안지역의 서북산, 전투산, 십이당산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며 서북산 정상은 주인이 무려 19차례나 바뀐다. 토영의 원문고개까지 적이 진출하였다가 물러나게 된다. 진동에서 진주에 이르는 봉암리 계곡은 "피의 계곡 또는 미 포병의 무덤"이라 칭하게 되는데 이곳으로 진출한 제555포병대대는 사상자 180명ㅇ, 105밀리 대포 8문, 제90포병대대는 사상자 190명, 155밀리 대포 6문, 차량 28대의 피해를 입었다.
킨특수임무부대는 진주를 탈환하지는 못했으나, 7일간의 반격작전으로 마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성공하고 16일 해체된다.
라. 포항-안강.기계 전투
낙동강 방어선 형성시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은 북한군 제12사단과 맞서며,제8사단이 의성일대, 수도사단이 길안일대에서 방어하고 있엇고, 동해안에는 제3사단이 북한군 제5사단과 영덕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군의 오판인 한강대교 폭파, 안동대교 폭파에 이어 영덕대교 폭파로 많은 피해 발생, 왜관대교는 미군이 정상적 폭파]
[적이 먼저 기계와 포항을 점령]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은 8월 5일부터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적 제12사단이 먼저 기계로 8월 9일 진출하였다. 동해안의 제3사단도 8월 5일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으며 영덕대교의 조기 폭파로 많은 희생을 가져왔고,결국 장사동에서 고립되어 해상철수로 구포로 내려갔다가 북상하는 불상사를 격기도 한다. 먼저 포항에 들어온 적 1개 연대규모와 맞서, 영화 고지전에 나오는, 8월 10일~11일 어간 포항여중 전투에서 학도병 71명이 용전하여 47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화여 적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이중에 4명은 탈출하여 반격작전에 가담하게 된다. 이로인해 시간을 획득한 제3사단은 8월 17일 해상철수를 감행하게 되었으며, 민부대가 미군 전차 의지원을 받아 포항을 탈환하게 된다. 이후에 결국 제3사단이 방어하면서 형산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며 반격작전시 재탈환하게 된다.
당시 안강. 기계는 "초급장교의 무덤"이라고 불릴만큼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측방 방호로 포항 영일 비행장 방어와, 부산으로 내려오는 적을 구축해야만 했다. 먼저 적이 기계를 점령하여, 북에서는 수도사단 제18연대가 남에서는 국군 제17연대가 공격하여 일시적 탈환하게 된다. 이후에 다시 피탈되며 적은 주로 비학산일대에서 은거하며 공격을 한다.
형산강 서안의형제봉 전투는제17연대가 무려 15번의 쟁탈전 속에 대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이 거의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교체되어 현지 임관시켜 전선으로 내보낸다.
[영일 비행장 피탈위기 극복]
9월 8일에는, 적이 영일비핼장 남서쪽 옥녀봉-운제산까지 진출하여,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은 비행장 사수를 위해 부사단장인 데이비슨 준장에게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운제산 공격하고, 국군은 제18연대를 운제산 서남쪽으로 진출시키고, 제8사단에 배속되었던 제26연대를 제3사단으로 원대복귀시켜 운제산 우측방에 투입하여 영일비행장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영일비행장 피탈시 유엔군의 항공 전력과 추가전력의 증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여 미군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려가 높아지는 시기였다.
결국 아슬아슬한 싯점에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고,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은 미군과 합동으로 안강.기계. 포항을 탈환하게 되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방어작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마. 신령 전투
'50.9월 6일 북한군 제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자, 북한군 제8사단도 국군 제6사단 정면에 주력을 투입하여 신령으로 진출을 시도한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신령 북쪽의 조림산과 화산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신령고개 돌파를 시도하지만, 국군은 새로 지급된 3.5"로켓포를 이용하여 적 전차 8대를 격파하게 되고, 미 공군의 폭격과 포병화력으로 적을 격퇴헤게 된다.
북한군 제8사단(오백룡 소장)은 신령지구에서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전투력이 상실되어 영천 포위돌파에 참가도 못하고 현 전선 유지에 급급하다 철수하게 된다.
국군 제6사단은 신령지구 전투의 승리로 대구외곾을 끝까지 방어함으로서 대구를 우회돌파하려는 적의 야욕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다.
4. 인천상륙작전과 38도선 회복
북한군은 '50.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이남 지역으로 밀어 붙이며 최후의 공세를 계속한다. 그러나 북한군은 과도하게 신장돤 보급거리와 유엔공군의 막대한 공중 폭격으로 치명적인 인명 및 장비의 손실을 입어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당시에 투입된 병력의 대부분이 남한에서 강제 징집된 학도의용군 위주였으며, 지역마다 보급대를 편성하여 야간을 이용 전선에 탄약과 식량을 조달하는 실정이었다.
반면 유엔군은 유엔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고, 맥아더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준비가 완료되면서 9월 15일을 기해 미 제10군단이 주축이 되어(국군 제1해병연대, 제17연대 참여) 상륙작전이 감행되어 성공하게 된다.
이로인해 낙동강 일대에 투입된 북한군 13개 사단의 주력은 후방이 차단되어, 국군 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철수하게 되고, 그 일부는 철수를 못해 지리산과 태백산맥 속으로 숨어들어 패잔병이 되어 지방 공비와 합세하여 제2전선부대가 되어 갔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국군은 9월 말에는 38도선가지 진출하게 된다 낙동간선에서 반격작전으로 15일 만에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미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기회를 버릴 수 없기에 북진을 결정한다.
가. 덕적도.영흥도 상륙작전('50.8.`18~9.14)
인천 상륙작전의 전초전으로 '50.8.18일부터 9월 14일 어간에 상륙기동함대의 인천수로 안전항해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 해군 육전대들이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한다.
이 당시에 8월 24일 상륙한 한국 해군 첩보팀(소령 함영수)과 9월 1일 상륙한 미 극동군 첩보팀(클라크 해군 대위) 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접근 수로정보와 경인지역 적정을 수집하여 제공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한다. 또한 KLO 부대의 최규봉 부대장 등에 의해 밝혀진 팔미도 등대는 미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이 인천 해역에 진입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다.
나. 9월 14일까지 인천앞 바다에 집결
미 제 7합동상륙기동부대는 부산, 일본의 사세보, 고베, 요코하마에서 상륙군을 승선시키기 시작하여 9월 11일부터 인천을 향해 출발한다.
먼저 함대사령관 스트러불 중장이 승선한 기함 로체스터 호는 9월 12일 사세보에서, 맥아더 원수와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등이 승선한 마운트 맥킨리 호는 12일야간에 사세보항을 출항한다. 미 제1해병사단은 고베에서 9월 11일에, 미 제7사단은 요코하마에서 9월 11일에,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제1해병연대는 9월 12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 덕적도 근해에 집결된다.
다. 제1단계 월미도 상륙작전(녹색해안)
인천의 관문 월미도는 해발 105M, 넓이 0.6KMx0.6KM의 작은 섬이다. 인천부두와는 약 600M 의 둑으로 이어져 인천항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월미도에 대한 공격준비 사격은 9월 10일 해병대의 전투기 공격으로 시작하여 기동함대의 해군기가 계속하고, 13일부터는 각종 함포의 사격으로 초토화시킨다.
9월 15일 자정,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10대의 전차와 함께 새벽 02:30에 수로를 따라 진격하였다. 제1파가 06:33분에 녹색해안에 10대의 전차와 함께 상륙했다.
당시 월미도에는 북한군이 76밀리 포로 장비된 제918해안포 연대의 제2대대 및 제226연대의 예하부대들이 있었으나 이미 공격준비사격으로 초토화되어 버렸고, 상륙부대는 오전 08:00시에 월미도를 완전 장악한다.
라. 제2단계 인천항 상륙작전(적색해안, 청색해안)
국군 해병대 제3대대를 배속받은 미 제5해병연대 1,2대대는 상륙주정에 탑승하여 상륙돌격을 개시, 1파가 17:33분에 적색해안에 상륙을 시작으로 20:00시까지 주어진 목표물을 화보하였다.당시 해안벽이 상륙정 램프보다 1M 이상 높아 사다리를 놓고 해안 벽을 넘었다.
미 해병 제1연대의 상륙장갑차에 탑승항여 상륙돌격을 개시, 제1파가17:32분에 청색해안에 상륙을 시작으로 16일 01:30분까지 주어진 목표물을 확보한다.
이렇게 상륙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썰물시간대는 상륙을 대기 했다가 다시 밀물시간에 상륙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9월 16일, 국군 해병 제3대대는 15일 저녁 8시에 적색해안에 후속 상륙하여 인천 시가지에 응붕산과 도심지역의 적을 소탕하고, 경인철도 북쪽의 공장지대는 제1대대가 담당하였다.
9월 17일, 미 제1해병사단은 돌격을 계속하여, 미 제5해병연대는 19:00시에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소사에 진입한다.
9월 18일, 행주산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 싯점에 북한군 2개 연대가 왜관과 구미에서 북상하여 구로와 영등포 일대에서 저항하였으나 미미했고, 김일성은 전선사령부에 "부대를 금강과 소백산맥 선으로 후퇴시키라"고 명령한다.
마. 서울 수복작전
9월 19일,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에게 서울 공격을 명하게 되고, 미 제5해병연대와 제1해병연대는 작전지역을 후속 상륙한 미 제7사단에 인계하고 한강을 도하하여 수도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하여 9월 27일 새벽 06:10분에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게 된다.
9월 28일 아침, 미 제7해병연대 제2대대가 인왕산 북쪽 능선 일대를 확보하고, 수원 남쪽 오산에서 인천에서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낙동강에서 추격해 올라오는 미 제8군과의 연결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며 , 9월 29일 정각 12시에 환도식이 중앙청 내부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바. 후퇴하는 북한군이 남긴 만행
서울 사수가 어렵게 되자, 북한군은 남한 내의 반공투사 약 20,500여 명을 숙청하고, 유력인사 등 83,000여 명을 강제로 끌고 가고 서울을 초토화시켰다.
5. 38선 돌파와 북진
1950년 10월 1일, 동해안 인구리에서 국군 제3-23연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후 북진을 시작한다. 잉어 유엔의 결의에 따라 10월 9일, 서부지역의 유엔군도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게 된다.
국군과 유엔군 진출선('50.10.25-11.30)
온성
두만강 무산 나진
백두산 수도사 진출선(11.30)
부령 부거
중강진 11. 21 미7-17연대 점령
압록강 장백 혜산 청진
합수 국3
중공군 1차공세('50.10.25-11.5) 중공군 2차공세(9병단, 11.25-12.3)
만포진
강계
초산 국6-7연 10.26일 장진호 미해병1사
벽동 청천강
희천
신의주 온정 국6, 국8 묘향산 황초령
운산국1
미24사 미1기병 흥남
정주 덕천 영원
박천 국7 맹산
숙천
대동강
평양 원산
진남포 통천
사리원 이천
평강
김화 서화 간성
철원 화천
38도선 해주 연천 인제 양양
옹진 개성
고랑포 동두천 포천 춘천
문산 의정부 홍천 강릉
횡성
서울 옥계
인천 이천 원주 삼척
수원 영월 태백
오산 장호원 제천
중공군 진출선 '51.1.24 평택 충주 단양
천안 울진
['50.10월 26일, 국군 제6-7-1대대 압록강변 초산진 도착]
국군과 유엔군은 '50.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드디어 '50.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1대대의 선두가 압록강변 초산진에 도착하게 된다.
아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시 북한군은 18일 밤에 평양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조만식 선생 등 반공인사 500여 명을 총살하여 일부는 대동강변에 가매장하고 대부분의 시신은 그대로 방채한 채로 철수하였다.
['50.11월 21일,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혜산진 점령]
두 번째로 한.만 국경선에 도착한 부대는 미 제7사단 제17연로 원만 앞바다에서 적 기뢰를 제거하는 동안 무려 10여 일을 해상에 떠있는 "요요작전"으로 늦게 미 제10군단이 원산일대에 상륙하면서 미 제8군과의 동서연결작전은 어령워지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일대로, 미 제7사단은 갑산을 거쳐 11월 21일 국경도시 혜산진을 점령하게 된다.
그러나 '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제1.2차 공세가 전개되면서 아군은 다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다.
6. 중공군 침공과 유엔군의 재반격('50.10.25~'51.6.23. 약 8개월)
가. 중공군의 대대적인 기습공격('50.10.25~)
중공군은 무려 30만여 명으로 압록강을 도하항여 미처 방어준비를 갖추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을 밀어 붙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12월 중순에는 양양을 연하는 38도선 부근까지 철수하여 12월 말에는 임진강-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연하는 38도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맞이하게 된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 퇴로가 차단당하게 됨으로서 흥남으로 철수하여 , '50.12월 14일부터 12월 24일 어간에 부산과 삼척 등으로 해상철수를 한다.
중공군 침투로 및 1.2차 공세(50.10.25-12.3)
온성
두만강 무산 나진
백두산 수도사 진출선(11.30)
린장 27군 부령 부거
중강진 11. 21 미7-17연대 점령
압록강 장백 혜산 청진
제38-114사 합수 국3
중공군 1차공세('50.10.25-11.5) 지안 42,50군,20,26군 중공군 2차공세(9병단, 11.25-12.3)
만포진
중50 강계 중42, 26.20.27군
초산 국6-7연 10.26일 장진호 미해병1사
벽동 청천강
창텐 39-117사 희천
안둥 38,40군 중40 중38군
신의주 중66 중39 온정 국6, 국8 묘향산 황초령
북1군단 운산국1
미24사 미1기병 흥남
정주 덕천 영원
박천 국7 맹산
(1) 중공군 1차 공세('50.10.25-11.5)
중공군은 10월 중순('50.10.19일~)부터 압록강을 넘어와 묘향산맥과 동쪽의 장진호 일대로, 북한 내륙으로 깊숙히 침투하여 은거하면서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기다리게 된다.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공군 1차 공세는 제13병단 예하 6개군(제38.40.42.50.66군) 18개 사단의 31만여 명이 신의주 안동과 지안 등 압록강으로 도하하였다.
(가) 운산의 먹구름('50.10.25~11.4)
미 제1군단의 우전방 국군 제1사단은 신임사단장 최ㅏ영희 준자의 지휘하에10.23-24일 안주일대에서청천강을 도하하여 25일 운산에 도착한다. 좌인접 영 제27여단도 박천부근으로 진출햇다. 그리고 우인접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은 희천을 경유하여 벽동. 초산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중공군 제39군은 주력은 안동, 제117사단은 안동 위에서(창텐) 압록강을 도하, 운산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과 전투하여 "운산의 비극"을 연출한다(국군 제1사단 무력화,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는 연대 병력중에 1,500명 이상이 전사 또는 실종)
[한국전 최초 중공군 포로 획득, 중공군이 들어왔다!]
[국군 제1사단장, 최영희 준장에서 다시 백선엽 준장으로 교체]
[평양에 설치된 전방사령부에서 직접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미 제8군사령관과 그의 참모들이 과소평가, 별 문제 없다고 결론]
국군 제1사단은 10.25일 청산장시를 경유 수풍호로 진출할 목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38도선 북쪽으로 진출한 이후 가장 강력한 적의 저하에 부딪쳤다. 생포된 포로가 중공군이었다. 그의 진술이 운산 북방에 1만여 명, 희천 부근에 1만 여 명이 배치되어 있다고 진술한다. 이때 제2군단으로 보임되었던 백선엽 준장이 다시 사단장으로 복귀한다.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며, 27일 미 제8군은 사단을 구하기 위해 C-119 수송기 10대로 운산에 연료와 탄약을 공중 투하하였다.
미 제8군은 직접 심문한 포로의 진술을 과소평가, 경격기세를 유지하겠다고 미 제1기병사단으로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퐁호로 진격하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29일~30일까지 근접항공지원하에 기동하려 했으나 강력한 적 적진 돌파에 실패한다.
이 무렵 우인접의 국군제2군단이 온정, 희천을공격하다 중공군에 밀려 철수하게 되고, 초산으로 진출한 제6-7연대는 적 중에 고립되어 버렸다. 좌인접에서 박천을 공격 중인 미 제24사단과도 25KM나 벌어져 사단 작전지역이 돌출되었다.이에 국군 제1사단은 온정리를 경유 초산으로 , 미 제1기병사단은 삭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여, 31일 오전 진지교대를 하게 되는데, 이런 취약시기를 놓치지않고 중공군이 산에 산불을 질러 유엔군의 항공관측을 차장하고자 한다. 11월 1일 오전에 운산을 두고 좌측은 미 제1기병사단이, 우측은 국군 제1사단이 등을 맞대고 중공군과 싸우게 된다.
당시에 중공군은 제39군이 이곳에 사전 투입되어 진지를 구축하고 유엔군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11월 1일 우인접의 국군 제2군단이 철수하게 되자, 미 제1군단도 철수를 명령하게 된는데 우측바을 지키고 있던 국군 제1-15연대가 상장동에서 적 1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무력화되어 모든 장비를 유기한 채 분산 철수하게 되면서, 좌측의 미 제8기병연대가 적 중에 고립된다. 11월 2일 미제5기병연대를 투입하여 미 제8기병을 구출하려 했으나 역시 적진에 고립되어 11.월 4일에 그 이부가 포위망을 뚫고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한다.
당시 제1사단의 증언은 국군 제1사단은 53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고, 제15연대가 큰 타격을 받았다고 회고 하였다. 하지만 북진하여 북한지역에서 전투한 전사에는 아군의 피햐기록이 전무하다. 실제 제15연대 참전용사들의 증언은 연대가 와해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청천강 을 건너서 합류해 보니 연대 병력이 대대병력 수준도 안되었다고 증언한다.
(나) 온정리-희천 돌출부의 재앙
국군 제2군단(국6,8사)은 평영탈환작전을 미 제1군단이 진행하게 되자, 미 제8군의 선봉이 되어 제일먼저 청천강을 도하아여 희천으르 목표로 진격한다.
좌인접의 미 제1군단이 청천강을 도하할 무렵인 10월 23일, 군단 좌측방 제6-7연대는 희천에, 후속하는 제6-2연대는 군우리 북쪽 자작으로 진출한다 국군 제8사단은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기동하여 제16연대가 개천에, 제10연대는 맹산에서 영원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날 "추수감사절 총공세 명령"으로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국군 제6사단이 초산과 벽동으로, 우전방 제8사단이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진출하라고 명령하였다.
중공군 제40군은 안동으로 도하하여, 초산, 온정리. 희천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 국군제8사단과 전투하여 국군 제2군단을 무력화시킨다.(초산으로 진출했던 국군 제6-7연대는 3,552명 중에 2,674명 이 희생, 중대장 12명 중 6명 만이 청천강을 남쪽 개천으로 살아 돌아 왔고, 1중대원 180명 중에 복귀한 인원은 단지 21명이었다)
(다) 비호산 전투(11.1~11.6) [국군의 중공군과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전투]
당시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운산 일대에서 전투 중일 때, 군단 예비로서 영변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가 국군 제2군단의 상황이 악화되자 국군 제2군단의로 배속이 전환되었다.
당시 국군 제2군단은 제6-2연대가 온정리에서 분산 철수하게 되었고, 제7연대는 초산으로 진출 중에 적에게 퇴로가 차단되었으며 또 제19연대와 제8-10연대는 제2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역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여기에 제8-16, 21연대를 희천으로 투입하고자 했으나 중공군이 먼저 희천 남쪽을 점령하여 구출작전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2개 사단 6개 연대 중에 2개연대(8-16,21연)로 군우리 정면을 유지하는 최악의 상태였다.
이에 국군 제2군단장은 제7사단에 구장동-덕천 간의 저지진지를 점령하여 군 및 군단의 동측바을고 진출하는 중공군의 기도를 분쇄하도록 명령하였다. 따라서 제7사단장은 적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11월1일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 제3연대는 구장동 일대의 백령천을, 중앙의 제8연대는 용문산(1190)을, 좌전방의 제5연대는 덕천을 목표로 3개 연대 병진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목표 일대를 점령할 무렵, 중공군의 기습으로 제3연대는 영변으로, 제8연대는 원리로, 제5연대는 알릴령 부근 월봉산을 점령한다.
이렇게 되자 군단장은 제7사단으로 하여금, 2일 군우리 북쪽의 비호산(622)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하여, 제3연대가 비호산 일대에, 우전방 제5연대는 비호산 동쪽 760고지에 방어진지룰 구축하고, 이곳으로 진출하는 미 제24-5연대와 연결하였으며, 제8연대는 예비로 군우리 남쪽의 용현리에 대기하였다.
비호산 전투는 11월 3일부터 중공군 제38군의 1개 사단 병력이 공격하여, 무려 비호산 정상에서 3차례의 공방전 끝에 적에게 피탈된다. 4일 새벽에 결사대로 역습을 감행하여 다시 탈환하고 예비인 제8연대에 인계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5일 새벽에 공격을 재개하여 다시 적에게 피탈된다. 그리고 우전방 제5연대 징역도 적에게 유린되었다. 이 에 사단장 신상철 준장은 제3연대에게 다시 역습을 명학게 된다. 그러나 6부능선에서 공격이 돈좌되었다. 사단은 재정비를 마친 제5.8연대를 11월 6일 투입하여 비호산을 공격하여 결국 다시 확보하였으며, 이는 국군이 중공군과 대결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투였으며, 이로 인해 미 제8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게되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제38군은 주력은 안동, 제114사단은 지안으로 압록강을 도하하여 개천. 비호산 일대에서 국군 제7사단과 전투한다
제42군은 지안으로 도하하여, 황초령 일대에서 국군 제3사단. 수도사단과 전투한다.
(2) 중공군 2차 공세('50.11.24-12.3), 장진호 전투
중공군 제9병단 3개군(제20.26.27군) 12개 사단(15만여 명)이 추가 증원되어 제13병단과 합하여 총 9개 군, 30개 사단 46만여 명이 공격작전에 가담하였다.
중공군 1차 공세로 수많은 장병들이 전사한 가운데, 미 합동참모부는 "북한군의 완전 격멸"이라는 작전목표를 재검토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훈령을 내린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유화정책은 궁극적으로 유엔의 파멸을 자초하게 되며, 한국에 있는 적대적인 군대의 격멸을 중도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한국을 통일된 자유국가로 만들겠다는 유엔의 기본정책을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처사"라고 지적하면서 11월 24일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한.만 국경선까지 진격하기 위한 총진격명령(크리스마스 공세)내렸다.
(가) 중공군 제13병단
제39군은 덕천 일대에서 국군 제7사단과 전투한다
제40군은 구장동(군우리) 일대에서 미 제2사단과 전투한다.
제42군은 영원과 맹산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과 전투하여 무력화시켰고, 군우리에서 밀리는 미 제2사단과 증원되는 터어키군을 '태형의 계곡"에 몰아 넣었다.
(나) 중공군 제9병단
제20군(지안에서 도하), 제27군(증강진 부근 린장에서 도하)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2만 6천명)과 전투하여, 장진호-함흥 축선에서 50%이상의 심대한 피해를 입어, 재편성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이들은 중공군 신정공세에 참여하지 못하며 '51년도 3월이 되어서야 재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중공군 춘계공세('51.4월~)부터 다시 참여 한다.
1) 장진호 진격전
미 해병 제1사단은 원산항 일대의 기뢰소해작전으로 장기간 바다에 떠있다(요요작전)가 10월 26일에서야 제1해병연대를 선두로 상륙하기 시작한다. 장진호로 진격하는 제7연대는 주요전투장비의 양룩이 지연되어 10월 31일 에야 함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국군 제1군단은 이미 원산을 지난 19일 점령하여, 제3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원산.함흥.흥남 일대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었고, 수도사단은 24일 총공격 명령에 따라 동해안 축선과 무산가도를 따라 진격하게 된다.
국군 제3사단은 제26연대가 수도일대까지 진출하였다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마전리로 철수하여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가 11월 2일 미 제7해병연대에 진지를 인계한다.
[황초령 입구 750고지의 혈투 승리]
진지를 인수한 미 제7해병연대는 2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수동을 다시 탈환하고 4일에는 진흥리로 진출한다. 이때 적은 진흥리와 북쪽 황초령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감제할 수있는 S자형 길목을 통제하는 750고지선으로 철수하여 진지를 구축하여 5일부터 연이틀 동안 항공과 포병지원사격(박격포만 무려 1,800발 사격)으로 7일 아침 탈환한다.
미 제7해병연대는 정찰대를 투입하여 고지정상의 문고개와 황초령 일대를 정찰한 결과 적정이 없음을 확ㅇ니하여 9일 진흥리를 출발하여 황초령을 넘어 10일 10:00시에 고토리를 무혈입성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으로부터 트린 진출에 따른 질책을 받고, 12일 고토리를 출발하여 눈보라와 혹한과 싸우면서 14일 13:00시에 하갈우리에 진툴하여 바로 도로보수와 비행장 건설등 지기화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조치로 함흥 일대를 방어하던 미 제5해병연대도 차후 상륙한 미 제3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북진하여 진흥리-고토리 간을 경계하게 되고, 제1해병연대도 미 제3사단에 원산지역을 인계하고 북진을 위해 지경리로 집결하게 된다.
[공격 방향이 북에서 서쪽으로 바뀌다]
11월 23일 제7해병은 유담리, 제5해병은 유담리 북쪽의 몌물리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할 때에 공격명령이 취ㅏ소된다. 사단의 임무가 한만 국경선이 아닌 27일 유담리에서 서쪽으로 60KM 떨어진 무령리로 공격하여,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미 제8군의 진출을 지원하라는 것이덨ㄷ다.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장진호를 지나 유담리로 진출 중에 중공군에 포위된다. 미 해병사단은 "죽음의 계곡"으로 이름이 붙여진 유담리-덕동령-하갈우리-고토리 통로를 따라, 2중 3중으로 형성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한다.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 미 해병사단장 스미스 소장의 명령!]
당시 중공군은 제9병단 예하 12개 사단으로 11월 27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미 해병은 11월 27일부터 남쪽으로 공격을 개시(미 해병 사단장의 결의에 찬 명령)하여 12월 111일 밤 11시 30분에 흥남으로 철수를 완료한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은 전사 561명, 실종 182명, 부상 2,872명의 피해를 입었고, 이외의 손실로는 3,659명의 동상환자가 발생했다. 반면 중공군은 25,000~47,500여 명이 사살되고 12,500여 명이 부상하면서 미 해병대를 추격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2) 혜산진 진격전
미 제7사단도 원산 일대의 기뢰 소해작전으로 부산 외항에서 대기하다 27일 이동을 개시하여 미 제1해병사단보다 3일ㅇ 늦은 29일에야 적의 저항없이 이원에 상륙하였다.
이때 미 제7사단장은 제17연대로 북청-풍산-혜산진으로, 제31연대는 북청-함흥-오노리-신흥 축선을 따라 부전호 - 신갈파진으로진격하도록 ㅂ명령하다.제32연대는 후방경계를 담당하였다.
10월 30일, 제17연대는 1335M의 후치령을 넘어 풍산에 도착하였다. 이 당시에 이곳은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가 진출 중에 있었으며 풍산 북쪽의 적을 합동작전으로 물리친 후 국군 제1연대는 11월 2일 미 제17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동해안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이원항에 풍랑이 거세게 몰아쳐 미ㅏ 제31연대는 11월 3일에야 상륙하여, 이원-풍산 도로를 따라 부전호 방면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하며, 제18연대는 성진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과 합류한다.
미 제17연대난 풍산에서 적 2개 연대를 격퇴하고 갑산-혜산진으로 공격을 계속하고, 미 제31연대는 11월 8일 백산 동측에서 적과 교전하며 이곳에 중공군 제42군 제126사단이 침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1월 21일, 미 제17연대 혜산진 점령]
하지만 12일 풍산에 찾아온 미 제10군단장은 계속하여 북진하도록 명령하여, 미 제17연대는 협곡인 매덕령(1546)을 넘어 웅이강 도섭을 14일 완료한다. 당시 적은 북한군으로 이들은 13일 밤에 상류의 댐을 개방하여 후속하는 미군들은 익사와 많은 장비 피해를 가져왔다. 19일에는 보전협동작전으로 갑산을 점령하고 21일 10:00시에 혜산진을 점령하여 두 번째로 압록강으로 진출한 부대가 된다.
이에 미 제7사단장은 조기에 압록강변을 점령하기 위해 예비인 제32연대를 투입하게 된다. 부전호로 진출 중인제31연대보다 제32연대가 먼저 갑산에 도달하자, 사단장은 제32연대장에게 삼수륽 경유하여 신갈파진을 점령하라 명령한다. 이에 22이 ㄹ삼수를 경유하여 신갈파진을 점령하여 제17연대와 연결되었다.
3) 국군 제1군단의 진격전
당시에 국군 제1군단(제3사. 수도사)은 동해안 축선에서 주로 북한군과 전투하며, 제3사단은 동해안 축선으로 원산지역을 수도사단과 함께 점령한다. 그리고 이 지역 일대를 방어하다 뒤이어 원산에 상륙하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3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수도사단의 뒤를 이어 동해안 축선으로 진출하여 1개 연대는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점령한 혜산진으로 진출한다. 수도사단은 '50.11월 30일 청진 위 부거까지 진출하였다가 철수 명령에 국군 제3사단과 같이 흥남일대로 철수하여 해상 철수를 하게 된다.
가) 수도사단의 청진 진격전(어랑천공격에 1주일 소요)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추수감사절 공세를 시작할 무렵2,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의 주공부대인 제18연대는 부전호를, 제1연대는 풍산을, 제1기갑연대는 북청-단천-성진으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11월초에 미 제7사단이 이원에 상륙을 완료하자 작전지역을 미 제7사단에 인계하고 동해안 축선을 따라 적을 추격하게 된다.
이때 북한군은 제41사단 및 507여단 드이 길주, 명천, 어랑천 일대에 축차진지를 구축하고 국군의 진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군 제1기갑연대는 10월 30일 성진을 점령하고, 제1연대가 풍산에서 복귀하게 되면서, 사단은 길주를 공격하여 11월 4일 미 해병사단의 항공지원을 받으며 점령하고, 제1연대가 7일 명천을 확보하자, 어랑천 공격의 주공이 되는 제18연대가 도착하여 11월 10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은 12일 전차 6~7대를 동원하여 역공을 감행하여 어랑천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에 군단은 군단후방을 경계하던 제3사단을 합수지역에 투입하고, 이곳에서 작전 중인 제1기갑연대를 어랑천 공격에 투입하여 3개 연대 병진으로 19일에 공격을 재개하여 25일 제18연대가 청진으로 진출한다.
나) 제3사단의 합수.백암 진격전(제26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 장진호를 공격 중인 미 제7해병의 좌측방 엄호 중)
제3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의 우너산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20여 일을 원산. 함흥 일대에서 북한군 패잔병에 대한 평정작전을 수행하고, 11월 5일에 흥원.신포, 북청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군단의 후방경계를 담당하던 중에 군단의 주력부대인 수도사단이 성지을 점ㅂ령ㄷ하고 길주로 진격하자, 군단과 제3사단은 11월 13일 성진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수도사단이 어랑천 공격에서 돈좌되자, 군단은 16일 제3사단에 합수 공격을 명하게 되자, 이에 따라 사단은 제22연대는 길주-합수로, 제23연대는 성진-임명동-합수로 공격을 명령했다.
당시 합수 방면에는 수도사단의 제1기갑연대가 북한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북한군으이 규모는 철수하는 병력 1,000여 명과 신편된 노동여단 병력 약 4,500여 명, 후방지역 별동대 및 유격대 등 이험준한 준령을 이용하여 공격부대의 복브로 차단 등 기습작전을 기도하고 있었다.
국군 제3가단은 11월 21일 합수를 공격하여, 22일 점령하고 25일에는 백암을 무혈입성하였다.
나. 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맥아더 원수는 "현 정세는 젖혀 새로운 상황에서 전쟁을 한다는 기초적인 백지상태로 돌아가 판단할 필요가 잇다"라고 미 합참본부에 보고한다. 이후로 계속하여 중공군이 밤낮으로 공격해 오자, 공격 6일 만인 11월 29일 후퇴 명령을 내렸다.
[군우리 혈전 "태형의 계곡"]
'50.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미 제2사단이 군우리에서 순천을 잇는 협곡지대인 일명 "태형의 계곡"을 통해 철수작전을 전개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감수하고, 여기에 증원된 터키여단도 절대적인 피해를 입은 상테로 축차적인 철수작전으로 12월 15일 38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흥남철수작전('50.12.`15-24)]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벅편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당시 미해병제1사단은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약 보름 동안 후퇴하면서, 장진호에서 흥남까지 128KM에 이르는 거리를 죽음과 공포의 갈림길에서 고전하며 흥남으로 철수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피난민 3천 명을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 등이어떠한 방법으로든 피난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군함과 목선 등 195척을 동원하여, 미 제10군단 병력 105,000명, 차량 17,500대, 각종 전투물자 350,000톤 북한 피난민 91,000명 등 엄청난 규모의 철수작전을 기적적으로 완수하였다. 당시에 피난민은 부산 수용이 넘쳐나 일부는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한다.
하지만 흥남항을 떠나는 마지막 수송선이 12월24일 오후 2시 45분에 부두를 떠날 때 승선하지 못한 피난민들은 울부짖으며 몸부림 쳐야했고 후에 흥남항이 폭파될 때에 죽거나 중공군에 붙잡혀 학살당하게 된다. 또한 목선을 이용하던 피난민들 중에는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얼마 가지 못하고 그대로 바다속으로 가라앉는 경우도 많았으니, 그 비참함은 글로 표현할 수 없었다. 퍼붓는 눈보라 속에서 벌어지는 피난길은 너무 힘들고 떠난 자와 남겨진 자간의 애끓는 사연이 바로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로 실향민의 아픔과 사연을 담고 있다. 여기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쯕으로 끌려가는 유력인사와 양민들의 애닮픈 사연은 "눈물의 미아리 고개"라는 대중가요를 만들어 냈다.
[[빅토리아호의 간동적인 피난민 승선작전, 항해 중 5명의 신생아 탄생!]]
당시에 마지막으로 출항하는 "메더리스 빅토리아호"는 7,600톤급 배로 배에 탈 수있는 인원은 고작 60명이었다. 빅토리아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장비를 실어나르던 화물선다. 빅토리아 이름이 붙은 것은 화물선으로, 당시 정원 60명에 승무원이 47명이므로 13명만 더 승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고, 이에 라루 선장을 비롯한 모든 선원들이 인도주의적 사랑을 베풀어, 배에 실려있던 무기와 짐을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을 무려 1만 4천여 명을 승선시켜 28시간을 항해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지만 부산 ㅅ6ㅜ용이 불가능하여 다시 50마일을 더 항해하여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한다.
당시에 중공군은 한반도 동북부에 12개 사단을 동원하였으나, 유엔군의 항공폭격과 함포 사격(미 7함대에서 68,787발 사격, 인천상륙작전보다 많은 포탄을 퍼부었다)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당시 미군은 철수작전간 전사 3,637명, 부상 3,657명 이었다.
[38도선 확보]
◆서부전선
38도선으로 철수하는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은 김포반도에 터키여단, 개성-문산 도로를 가로지르는 임진강 하류에 미 제25사단을 , 고랑포-적성에 국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영 제29여단은 에비로 고양 신둔리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을 연천-의정부 축선의 전곡 일대에, 미 제24사단을 김화-의정부 축선의 영평일대에, 영 제27여단을 에비로 덕정에 집결시켰다. 군 에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퇴계원 일대에 배치하여 춘천방면에서 서울로 진출하는 적을 차단토록 한다. 이때 군우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 제2사단은 영등포 일대에서 충주로 이동시켜, 중앙이나 동쪽에서 적이 국군 담당지역을 돌파하면 이를 저지하도록 하고, 만약 서부전선의 미제1,9군다이 철수할 경우 우측방을 엄호하도록 하였다.
◆중부전선
국군 제3군단(배속 제9.11사단)은 12월 10일 후방지역 공비토벌 작전을 종료하고 제9, 11사단을 육본으로 원복시키고, 군단은 양평으로 이동하여 제2, 5,8사단을 배소갇아 군단창설이후 최초로 전선에 투입된다
당시 제2사단과 제5사단은 11월 27일부터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되었다가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여 철의 삼각지대에 집결하고 있는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고 있었다. 국군제2사단(제31연대는 제5사단에 배속)은 철원과, 의정부 일원에 그리고 배속된 국군 제5-35연대를 구하리에 배치하고 있었다. 국군 제5사단(제35연대는 제2사단에 배속)은 춘천으로 이동하여 가평 호명산 일대, 춘천 지암리 일대, 홍천에 배치하여 병참선을 확보하고 패잔병 소탕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제3군단장 이형근 소장은 제2사단을 가평북쪽에, 제5사단은 춘천 북쪽에, 제8사단은 춘천 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전방에서 철수하는 제8사단(사단장 이성가 준장)이 시변리 일대에 12월 5일에 도착하여 4일간 부대정비를 하고 있을 당시에 북한군의 기습으로 다수의 피해를 입고 연천-원주로 철수하여, 다시 화ㅑ천저수지 남쪽으로 이동하여 전선에 투입된다.
◆중동부전선
동부전선을 담당하게 된, 국군 제2군단은 12우러 8일 유엔군의 38도선 방어계획에 의거 화천 동쪽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 무렵 북한군 제2, 5군단 패잔병들이 평강-금화-화ㅑ천 도로를 차단하고 있어 군단은 연천을 경유 철수하여 12월 14일 원주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군단은 제7사단을 육본 직할로, 제8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전환하고, 대신 동부전선의 광정면을 방어 중인 제9사단과ㅑ, 함흥에서 구룡포로 해상 철수한 제3사단을 배속받는다.
그러나 군단이 미처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흥남에서 철수하는 국군 제1군단이 묵호에 상륙하여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게 되어, 다시 제9사단이 제1군단으로 배속 전환되어 제3사단(사단장 최석 준장)만으로 인제 남쪽의 부평리-관대리 간을 방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3사단은 제18연는 제8사단 제16연대가 방어하던 홍천고개와 하수내리-상수내리 지역을, 제22연대는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하던 음양리-수리봉 지역을 인수하여 방어하고, 제23연대는 예비로 홍천에 배치한다.
◆국군 제1군단의 동부전선 투입
12월 18일 흥남에서 철수한 제1군단은 묵호에 상륙하여 제2군단으로부터 제9사단이 방어 중인 관대리-현리-서림-양양을 연하는 방어선을 인수한다.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제9사단을 좌전방 관대리-서림에, 수도사단을 우전방 서림-양양에 배치하고, 군단 후방지역에는 3개 경비대대(제1.2.3경비대대)를 영월, 정선 및 하진부링에 배치한다
한편 제1군단 지역에는 북한군 제69여단이 양양 북쪽에서 재편성을 완료하고, 북한군 제2군단 예하 패잔병들이 인제 부근에서 활동하고 ㄹ있엇다. 특히 2,000여 명의 패잔병들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 중공군 신정공세(중공군 제3차 공세, '51.1.1-)
1950년 12월 하순, 38도선 북방에 전개를 완료한 공산군은 12월 31일을 기해 주공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지향하고, 화천-춘천-원주 축선에 조공을 지향시켜 38도선 돌파작전을 감행한다.
1950년 12월 20일경,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지역에서 철수하여 임진강 하구-연천-춘천 북방-양양을 잇는 선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12월 23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 전사]
전방시찰을 위해 차량으로 이동 중에 의정부(현재 도봉동)에서 차량 충동사고로 전사하였다. 워커는 6.25전쟁 초기부터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동 방어"로 방어선을 지켜내고, 북진작전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지휘관이었다. 후에 한국 정부는 미군 휴양시설과 호텔을 건립하면서 , 그의 공적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이라는 이름하였다 한다. ('63.4월).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 중장이 부임한다.
중공군은 '51.1월 1일 새벽"신정공세"를 개시하여 주공인 제13병단이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밀고 내려와 1월 3일 수도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게 된다. 이에 아군은 "1.4후퇴"를 단행하여 1월 7일에는 서울 남쪽 60km지점의 평택-삼척을 잇는 북위 37도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다.
1.4후퇴시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피난민이 약 220만여 명에 이르고, 전국적으로 750만여 명이 피난길에 올라 엄동설한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가) 원주-충주선에서 미 제2사단의 군우리 대치욕의 보복작전 성공, 북한군 제5군단 4,000여 명 사살
춘천북방을 돌파한 중공군과 북한군이 일사천리로 남하하는 과정에 , 국군 제2.5.8사단은 소양강변 38도선에서 무기력한 철수를 하게된다.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제8사단을, 원주에는 비행장 방어 등을 위해 미 제2사단을 배치하였다. 이때 미 제7사단과 미제2사단의 일부는 제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으며, 국군 제2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 남쪽에 집결하도록 한다.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51.1월 7일 400명의 편의대를 피난민 대열속으로 침투시켰다. 그리고 북한군 제12사단이 좌인접 국군 제8-10연대를 공격하여 조기에 철수해 버림으로써 미 제2사단의 진지가 돌출되어 버렸다. 결국 미 제2사단은 원주 남쪽으로 철수해 원주-목계동 도로를 원주 남쪽 7km 부근으로 철수해 버리자, 미제10군단장이 시가지 바로 남쪽 247고지 부근으로 진출하도록 명령하여 '51.1월 8일부터 외남성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되는데, 11일 프랑스 대대와 네덜란드 대대를 증원받아 북한군 제5군단을 무력화시키게 된다. 당시 이 전투에서 북한군 4,000여 명을 사살하여, 군우리에서 당했던 패배를 말끔히 씻고 중부전선으로의 돌파를 차단하게 된다.
(나) 단양-영월 돌파구 차단('51.1.18-22)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신정공세 첫날부터 전방과 후방에서 협공을 받아, 1월 1일에는 C방어선(홍천-원포리), 5일에는 D방어선(원주-원포리)으로 철수하게 된다.
이때 현리부근의 제9사단은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로 이동 중에 있고, 홍천의 제3사단은 홍천-횡성을 경유 4일 평창에, 홍천-춘천으로 북진했던 제7사단은 홍천-횡성-원주를 경유하여 묵계-창동 선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수정되는 방어선, D방어선에서 64KM내려간 수정된 D방어선]]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국군 제1,3군단의 방어선을 , 1월 5일 64KM 남하한, 수정된 D방어선(원주-정선-삼척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국군 제3군단의 제3사단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있었고, 제7사단은 신림리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적과 조우하게 된다. 제9사단은 장평리에서 적과 접촉하며 정선으로 철수 중에 있어 지정된 방어선 점령이 어려웠다.
또 당시에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 이동 주에 있었다.
이때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원주 일대에서 북한군 제5군단에 대비하였고, 국군 제1,3군단은 수정된 D방어선을 점령하혀 이동 중에 있어 원주-동해안 간에는 적의 진출을ㄹ 저지할 부대가 없어 공백지대였다.
바로 이곳으로 북한군 제2군단이 원주-제천-단양 도로의 동쪽 산악지대를 따라 남하, 선두인 북한군 제2,9사단이 새로운 방어선인 원주-삼척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에 남겨진 길원팔이 지휘하는 제2전선부대를 통제하여 국군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로 침투시켜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했다.
이렇게 되어 영월 일대에 대돌파구가 형성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장에게 북한군이 영월 남쪽으로 한 발짝도 넘지 못하도록 저지하라고 명령한다. 당시에 국군도, 제3군단 이형근 소장을 해임하고 육본 참모차장인 유재흥 소장을 제3군단에 보직하였다.
'51.1월 8일부터 국군 제7사단 정면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제10사단이 29번도로를 따라 제천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미 제7사단의 정찰대와 조우하면서 500여 명이 사살되는 가운데 국군 제3군단과 미 제10군단이 돌파구 차단을 위해 예측불허의 일전을 하게 된다.
북한군 제2사단이 이미 안동-의성지구로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있는 북한군 제10사단과 연결하기 위ㅐ해 원주-제천-안동 선을 진출하여 12일, 단양-춘양-영월의 삼각형 안 형제봉지역 원만혀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잔투지경선인 남한강변을 따라 침투한 북한군 제9, 31사단은 국군 제3군단의 후방지경선인 영주-봉화-춘양을 확보하기 위하여 북한군 제9사다는 영월 남동쪽 옥동리에ㅣ, 제31사단은 남대리 부근에 집결 중이었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7사단을 제천에서 여월로, 제187공정단을 제천-영주 간 29번 도로변을 ,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는 단양에서-충주에 이르는 도로변을 수색정찰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은 영주 북쪽의 군단 후방을 정찰하고, 국군 제2사단(함병선 소장) 주력은 문경새제에 배치하여 산속에 고립된 패잔병들의 단양 부근 진출을 차단하도로 하였다.
이때 국군 제3군단도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을 1월 18일 남대리 부근의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22일에는 미 제7-17연대는 북쪽에서, 국군 제7-3연대는 남쪽에서 영월을 포위공격하여 격멸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도 제5군단 제27사단읅 제천으로 투입하여저항하였으나, 22일 경에 조직이 와해되어 1월 말에 철수하게 된다. 당시에 북한군은 4개 사단(제2.9.27.31사단) 16,000여 명이 8,600명 선으로 대량 피해를 입게 되고, 안동지역까지 진출하고 있던 북한군 제10사단도 북쪽에서는 미 제10군단에 남쪽에서는 미 제1해병사단에 저지되어 고립된 상태로 18일부터 3주동안 포항-안동-영덕 일원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배병연대에 조직이 와해 되어 버린다. 결국 북한군 제2전선부대는 1월 말 소탕되면서 미 제10군단은 남한강-제천-영월 선에, 국군 제3군단은 영월-정선 선에 전선이 회복된다.
[유엔군의 유인작전으로 판단한 조.중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의 오판으로 1월 8일을 기해 추격 중지 명령]
(다) 한강선으로 재진출
[위력수색작전-썬더볼트 작전]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가 주춤하게 되자, 1월 25일 부터, 한강변에 이르는 위력수색작전에 이어 "썬더볼트"작전을 실시하여 공산군을 밀어 내면서 , 2월 초순에 김포-안양-양수리-지평리-횐성-하진부리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1) 수원-이천 진출 작전
D방어선으로 철수항여 3주 동안 부대를 정비한 미 제1군단은 1월 25일 좌전방 39번 도로와 1번 도로 사이에는 미 제25사단의 제35연대를, 우전방 55번 도로엔느 터키여단을 투입하여 공격을 재개한다, 이곳 일대는 중공군 제50군 예하 2개 사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터키여단의 신갈 151고지전투에서 군우리의 치욕을 만회,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터키여단이 이 전투에서 신갈 남쪽 151고지와 금량장리를 공격하게 된다. 26일 151고지 일대에 원형의 사주방어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한 중공군을 ,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치열한 백병전 끝에 중공군 474명을 사살(대부분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린 채 사살됨)하여 지난해 군우리에서 당한 치욕을 치유한다.
미 제1군단은 미 제3사단을 수원 동쪽 55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고 , 터키여단은 서해안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국군 제1-15연대를 미 제25사단에 배속 시킨다.
한편 미 제1군단의 우측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이 양지리 일대에서 많은 피해(28명 전사, 141명 부상)을 받으며 17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게 되자, 미 제24사단을 투입하였다.
2) 인천-서울-곡수리 진출
신정공세 이후 공산군은 유엔군이 계속적인 철수로 사기가 저하되어, 부대정비를 완료하고 2월이 되어야 총공세로 전환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그러나 유엔군이 한강변으로 진출하자 1월 27일 부대정비를 중지하고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하게 된다.
당시 생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유엔군의 공격개시를 구정인 2월 6일이나, 북한군 창설 3주년이 되는 2월 8일로 판단하고, 한강 남쪽에는 일부 부대만 배치하여 전선을 유지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라고 진술하였다.
그당시에 실제로 중공군 제13병단 주력들이 대부분 한강 북쪽에 집결되어 있다가 갑자기, 지평리, 가평 북쪽지역으로 이동이 현저히 증가된다. 이를 미 제8군사령관안 적이 한강 남쪽에 주저항선을 설정한후 병력을 증원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완강하게 저항할 징후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미 제8군사령관은 적의 북동쪽 집결은 유엔군이 D방어선으로 철수상황 흡사하다고 판단, 당시는 서부전선 부대의 우측방이 위협이 되었지만 이번엔 미 제9군단의 우측방에서 미 제10군단이 공격작전을 전개하게 ㄷ되어, 적의 병력 집중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한강진출에 자신감을 가졌다.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장에게 기갑부대로 서해안 저지대로 진격계획을 수립하고, 미 제5공군은 한강이남에 강력한 항공폭격으로 적을 고립시키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공격범위도 전 전선으로 확대하여, 중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에게 29번 도로 축선으로 집결 중인 북한군 제2, 5군단의 재편성을 저지할 수 있도록 작전계획 수립을 지시하였다.
[미 제1군단: 수리산 전투와 모락산 전투-관악산-대모산 전투, 김포공항-김포반도 진출로 한강변 진출 ]
이에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5연대(미25사 배속), 미 제25사 제35연대, 터키여단으로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 수리산-모락산을 공격한다. 미제35연대와 터키여단이 수리산 일대에서 중공군 제150사단과 공방전을 계속하다 결국 예비인 제27연대를 투입하여 탈환한다. 이때 국군 제15연대는 1월 31일부터 5일간의 백병전 끝에 모락산을 점령하고 관악산 공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렇게 하여 미 제25사단이 안양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1군단장은 "알렌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미 제25사단 전방의 적을 돌파하여 한강으로 진출, 인천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김포공항 서쪽의 적을 공격하도록 하고, 미제3사단은 검단산과 청게산을 경유하여 한강까지 진출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안양선으로 후퇴한 적도 관악산에 배치된 북한군 제47사단과 합류하여 방어거점을 강화하고, 인천에 대기 중인 제17사단도 이 지역으로 증원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에게 한강진출의 마지박 관문인 관악산을 공격하도록 독촉하면서 극동 해군사령관에게 적의 증원을 차단하고 북으로 철수를 강요하기 위해 인천 지역에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하였다.
'51.2월 9일 국군 제15연대가 관악산을 공격하여 10일 노량진-영등포 선으로 진출하여 , 우인접에서 먼저 한강선으로 진출한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미 제25사단 기갑부대도 2월 10일 인천으로 진출하였으나 적이 이미 인천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인천에 대한 위장상륙작전도 취소된다. 미 제25사단은 도로에 매설된 대전차지뢰를 제거하며 적의 저항없이 인천-영등포 도로를 점령한 후 김포공항과 김포반도로 진출하엿다. 이때 북한군 제1군단은 결빙된 한강을 도하하여 퇴각하였다. 이로서 미 제1군단은 인천-영등포-대모산으로 진출, 서울을 목전에 두고 도강 준비에 주력한다.
[미 제9군단: 경안리 지역, 남한산-양자산 일대의 적 교두보 돌파 실패로 남한산-양자산을 남겨둔 채로 종료]
한편 미 제9군단은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대에서 도로망의 결핍과 기상악화로 진출이 항공자원마자 제한되어 공격이 돈좌되자, 국군 제6-19연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시켜 2월 9~10일사이에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이곳이 강력한 적의 교도보임이 확인되었다. 서쪽으이 경안리에서 동쪽의 양평에 이르는 24KM로, 한강에서 남쪽으로 6~10KM 불거져 나온 U자형 지형이다. 교두보 전방에는 태화산, 천덕봉, 등 수개의 감제고지가 있다.
결국 유엔군의 한강진출작전은 인천-서울-양평 선을 목표로 하였으나, 남한산-양자산을 남겨 둔채 일단 종료된다.
[한국전 최초로 한만국경선 부근에서 '51.1월 23일 공중전, ,F-84E 전폭기 33대는 미그-15기 25대와 공중전에서 8대 격추]
이 무렵, 미 제5공군은 중공군 신정공세로 2개 비행단만 진해와 수영에 배치하고, 주력은 일본을로 철수하여 항속거리와 무장문제로 항공지원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유엔군이 재반격이 시작되자, 원주, 충주, 안동에 비상활주로를 건설하여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하였다.
(라) 홍천 포위공격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 및 제9군단이 한강진출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1월 중순 작 제2전선부대의 침투로 제천-영월 이남지역에 형성된 돌파구를 차단하고, 원주-평창 선으로 진출 중이었다. 이때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제2사단은 한강진출작전으이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로 지평리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하였다.
['51.1.29~ 2.1, 쌍터널 전투]
미 제2사단과 미 제24사단 합동 정찰대는 1월 29일 중공군 보급품 비축기지인 지평리 부근의 쌍터널을 목표로 정찰을 실시하게 된다. 이 당시에 중공군 제42군 제125사단이 터널을 감제하는 고지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정찰대는 항공 폭격과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증원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51. 2월 5~10일, 라운드업 작전개시~]
'51.1월 말, 입수된 정보에 적이 24번도로와 29번 도로의 교차지역인 홍천 부근에 집결하고 있엇다. 그 가운데 북한군 제5군단이 24번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지평리를 경유하여 충주로 진격하거나, 24번 도로를 따라 횡성을 경유하여 원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미 제10군단장은 전략 및 전술적 요충지인 홍천지역을 신속히 양익 포위하여 적의 증원거점을 분쇄하고, 국군 제3군단 정면에서 퇴각 중인 북한군 제2군단을 추격 섬멸함은 물론 아군이 홍천-대관령-강릉 선으로 진출하여 차기공격에 유리한 발판이 되는 홍천을 확보히기 위해 국군 제3군단과 협조된 공격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을 "몰이" 즉 포위한다는 의미로 라운드업작전이라 명명하였다.
홍천 포위공격
29번도로
홍천강 홍천 한강
29번도로 창동리
창봉리
24번도로 국5
2번도로 국8
양평 지평리 미23연 횡성 말다리
미10군단=국3군단
24번도로 국8 국5 평창
미24=미2 원주 도돈 미31연
여주 미2=미187연 미187=미7 주천리 '
미17연
미9군단=미10군단
남한강 영월 남한강
장호원 목계 주포 제천
미 제10군단은 지평리-횡성에 미 제2사단을, 횡성 남동쪽 치악산 북쪽에 제187공정단을, 평창 남서쪽 주천리 일대에는 미 제7사단을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공격제대로 좌전방에 국군 제8사단, 우전방에 국군 제5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을 포위공격하게 된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 제2사단은 1개 야포대대, 자동화기 포대, 차량화 보병부대로 제21지원부대를 편성하여 제8사단을 직접지원하고, 미 제7사단은 같은 규모로 제7지원대를 편성하여 제5사단을 지원하도록 한다.
국군 제3군단은 공격개시일인 2월 5일 공격개시선인 평창에 도착하여 북한군 제2군단을 공격하여 미 제10군단 우측방 엄호 작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을 위해 미 제2-23연대는 지평리를, 중앙의 미 제2-38연대는 횡성을 점령하였고, , 군단 예비인 미 제7사단은 원주부근으로 진출하기 위해 제천-영월에서 평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주공으로 투입될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은 제천, 영주 부근에서 후방경계 임무를 국군 제2사단에 인게하고 원주 방향으로 이동하여 , 좌측에서 제8사단이 우측에서 제5사단이 포위공격을 2월 5일 감행한다.
[국군 제8사단]
국군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3개 연대 병진공격으로, 주공인 제21연대가 벽학산-독재봉-오음산으로 기동하여 홍천을 점령하고, 중아의 제10연대는 성지산을 점령 후 상오안리-양덕원리로 진출하고, 좌전방 제16연대는 2번도로(용두리-횡성)를 따라 증안리로 진출, 화채봉을 넘어 용두리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제8사단의 공격은 8일 우전방 제21연대가 홍천 관문인 29번 도로상의 대삼미치와 오음산을 공격하면서 중공군 제66군 예하 제198사단과 치열한공방전을 펼치게 된다.
[국군 제5사단]
국군 제5사단은 존투정면이 홍천 남서쪽의 20km나 되는 광정면이고, 죽림산(640), 어답산(789), 봉복산(1028), 발교산(998), 덕구산(668) 등이 종횡으로 연결된 산악지대라 협조된 공격이 불가하였다.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우선 적저이 미약한 동측방에 제27연대로 조항리-소사리-둔방내리-화동이로 기동시키고, 주공인 제36연대로 산전리-포동리--유동리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개시 첫날부터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의 저항이 완강하여 7일 예비인 제35연대를 좌전방으로 투입하여 3개 연대 병진공격을 실시했다. 공격 5일 째인 9일 적 주력이 저항하던 방어거점을 돌파하여 섬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포동리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미 적은 철수하고 없었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예상외로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진출이 부진하게된 국군 제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29번 도로상에 국군 제3사단의 투입을 미 제8군사령관에게 요청하였다.
당시 '51.2월 8일,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 북족의 창도으로 진출 중이고, 우전방 제9사단도 정선 부근의 한강 계곡을 통과하여 하진부리 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엇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을 후속하고 있는 미 제7-17연대가 평창북쪽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7사단을 증원할 수 있게 됭어 제3사단을 미 제10군단에 임실로 배속조치하게 되었다.
[국군 제3사단]
홍천 공격부대들이 중공군과 격전을 펼치고 있을 때, 국군 제3사단(사단장 최석 준장)이 창리 부근에서 이동항여 10일 홍천포위 공격의 우전방 제대로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지역인 횡성-홍천 도로의 우측방을 인수받아 좌전방에 제23연대는 송전리, 우전방에 제22연대는 대문도으로 진출하고 제18연대는 예비로 평창리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제5사단은 제3군단과의 전투지경선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의 홍천 즈원을 차단하게 되었다.
공격제대들이 전선을 조정하는 동안 국군 제8사단의 대전차포대대(보병)가 작전지역 전방을 수색 중, 대삼마치 북쪽에 사단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여 사산에 보고 하고, 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미 제10군단장에게 보고하여 이목동-창봉리 선에서 방어를 건의 하였다.
그러나 미 제10군단장은 중공군을 과소평가하여 이 건의를 묵살하게 되어 제8사단은 제16연대를 증안리-도원리선, 제10연대를 도원리-상유동, 제21연대를 상창봉리-오음산에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한다. 국군 제3사단은 삼배리, 국군 제5사단은 유동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하게 된다. 공격 7일이 되었지만 공격은 진전이 없고, 정면에 중공군의 대병력과 북한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려는 기도를 감지하게 되었다.
(마) 대관령 확보(국군 제1군단-수도사단)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이 적 제2전선부대 소탕작전을 마치고 홍촌포위공격의 우전방을 엄호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출을 개시하자,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도 제3군단의 진출을 지원하는 동시에 경강국도의ㅐ 요충인 대관령과 강릉을 공격하게 된다.
국군 제1군단(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중공군의 신정공세 기간에 비교적 접적이 경미하여 38도선 복쪽에 진지를 고수하였다. 그러나 전선조정에 따라 1월 10일 경에 송게리-삼척선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제1기갑연대를 송게리에, 제26연대를 우전방 묵호 부근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제1연대는 에비로 사단지휘소와 삼척 부근에 위치했다.
이때 사단 정면의 적은 주문진 방면에서 철수하는 틈을 이용하여북한군 제69여단 및 길원팔 유격대 약 6,000여 명이 강릉부근까지 남하하여 강릉-구산리 선에서 방어와 유격활동을 했다.
국군 제1군단은 작명에 의거, '51.2월 3일 적에게 재편성의 재보급과 시간적 여유를 주지않기 위해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할 목적으로 좌인접의 제3군단과 연결을 유지하며 강릉과 구산리-대관령을 확보한 다음 황병산-운뎨봉 선까지 전진하는 공격을 학게 된다.
수도사단은 송게리-묵호 선에서 주공인 제26연대가 강릉을, 조공인 제1기갑연대가 대관량-구산리를 공격하게 되었다. 제1기갑연대 제1대대 는 백복령을 넘어 삽당령으로 진출하여 연대 주력의 구산리 진출을 엄호한 후 화난봉 부근 일대를 수색정찰 주에 적 유격대를 발견하여 기습 공격으로 400여 명을 사살하게 된다.
2월 7일에 제26연대는 남대천을 도하하여 강릉을 점령하고 운계봉으로 진출하고, 좌전방 제1기갑연대도 황병산-연곡천 일대로 진출하였다.
당시에 동해안에 배치된 미 제95기동전대는 1월 31일 간성-고성지역에 상륙양동작저능ㄹ 실시하고 함포 사격으로 국군 제1군단의 공격을 지원한다.
(2) 중공군 2월공세(제4차 공세, '51.2.11-18)
당시 중공군은 9일 유엔군의 전선에서 횡성 지역의 양측방이 노출되어 포위작전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자겆ㄴ 중인 국군이 미군에 비해 전력이 약하고 도 이동 주에 있기 때문에 섬렬이 용이하고 판단하여 주공(제39, 40,42,66군)으ㅏㄹ 홍천-횡성-원주 축선과 횡성-지평리 축선에, 그리고 조공(북한군 제2,3,5군단)을 평창-정선에 두어 이른바 2월 공세를 개시하게 된다.
중공군은 21개 사단을 추가 증원하여, 중동부 전선의 홍천-횡성간 삼마치과 오음산 부근과, 양평의 지평리일대에 9개 사단을 투입하여 유엔군의 우측을 돌파하여 유엔군이 수도 서울로 진격을 못하게 한다.
[지평리 전투 승전보, 미 제2사단과 프랑스 대대]
※당시 중공군은 5,500여 명이 사살되었고, 미군은 353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지평리는 철로의 교통의 요지다. 이 당시에 미 제2사단 제23연대는 프랑스 대대를 배속받아 '51. 1월 말에는 지평리 남쪽 쌍터널 전투로 중공군의 남진을 차단하고 진출하여 지평리 일대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았으나, 사주방어로 중공군의 돌파를 무력화시켰다.
당시 제23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지휘소에 떨어진 포격으로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도 지휘를 하고, 프랑스 대대는 에비역 중장 출신인 몽클라르 대대장(중령 계급장을 달고 본인이 직접 자원함)이 부하들과 함께 백병전으로 중공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드디어 증원부대인 미 제5기병연대가 전차 23대에 병력 260명을 탑승시켜, 중공군의 박격포와 로켓포 사격망을 뚫고 미 제23연대 진지에 도착하게 되면서 중공군은 패배하여 물러났다. 당시 중공군은 5,500여 명이 사살되었고, 미군은 353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하였다.
[횡성의 대재앙, 국군 제8사, 5사, 3사, 미 제21지원 부대]
※국군 제8사단 장교 323명(연대장 1명, 대대장 7명, 중대장 30명 포함), 사병 7,142명, 미 제21지원단 2,000((네덜란드 100명 포함)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
중공군 제13병단 주력이 '51. 2월 11일 어둠이 깔린 20:30분을 전후하여 횡성을 목표로,홍천-양평 간의 24번 도로 남쪽의 갈기산-매화산-오음산을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개시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중공군으이 기습공격으로 지휘통제가 무너지고, 12일 01:00시에 전후바에서 중공군에 포위된다. 모든 장병들이 각개 분산하여 철수하게 되고 , 중앙의 제10연대는 갈기산에서 연대장 권태순 대령을 포함하여 참모들 전사하게 된다. 이때 제21지원부대들이 창봉리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하다 중공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는다. 사단은 13일 주포리로 이동하여 재정비에 주력하게 되며 결국 대구로 내려가 재편성 단계에 들어간다.
그 당시에 미 제7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 대대가 횡성 북쪽 게천 남쪽에 진지를 편성(미 제10군단의 작전기지가 될 횡성을 방어하고 공격부대 후방을 엄호할 임무)하고 있었다. 이 네덜란드 대대의 엄호로 횡성교를 철수하는 부대들이 건널 수 있었다. 당시에 대대장 오덴 중령이 전사한다
어둠 속에서 분산철수하는 병력들은 우군이지 중공군인지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속에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당시에 국군제8사단은 제10연대장 권태순 대령을 포함하여 장교 323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고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 포함)사병 7,142명이 전사 또는 실종된다. 여기에 포 14문, 대전차포 5문, 트럭 68대, 무전기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정, 기관총 164정, 자동화기 102정, 카빈소총 2,389정, 소총 4,096정이 손실되었다.
미 제21지원단도 2,000여 명9네덜란드 100명 포함)의 손실이 발생한다.
[평창 부근의 혼전, 국군 제3사단, 제5사단]
홍천 우측방 제29번도로(홍천-횡성-원주-제천) 동쪽에서 공격 중이던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도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공산군은 처음에는 국군 제3사단의 진출을 알지 못해 11일 지나서야 공격의 폭을 29번도로 동쪽 8km까지 확대하여 중공군 제197사단이 국군 제3사단을 공격하고, 2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2군단이 태기산(1261)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을 견제하는 동안 북한군 제3, 제5군단이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12일 09:00시경 중공군 제197사단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13:00시경 오히려 포위되면서 횡성으로 철수하기 시작한다. 이때 중공군 제66군은 신속히 기동하여 횡성 후방 곡교리-덕고산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으나 국군 제3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퇴로 차단에 실패하여 공산군의 공격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국군 제3사단의 제23연대는 마옥리 일대에서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제18연대는 미 제187공정단에 배속되어 횡성 북쪽의 섬강에 진출하여 창봉리에서 철수하는 미 제21지원부대를 엄호하였다.
우인접, 국군 제5사단은 12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나고자 철수를 단행해야 했다.
미 제10군단장은 한국군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7-31연대를 평창 남쪽 도돈리에 배치하게 되며, 국군 제3,5사단을 통제하기 위해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사령부를 배속시켜 줄 것을 미 제8군에 요청하고, 미 제8군은 이를 승인하여 국군 ㅈ네1군단 사령부가 이동하게 되고, 수도사단은 국군 제3군단이 통제하여 계속 동해안을 방어한다.
국군 제3, 5사단은 13일 원주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 제5군단이 14일 양 사단을 계속공격하여 원주-평창 선보다 훨씬 남쪽으로 철수하여 제3사단은 원주 남동쪽에, 제5사단은 제천 북쪽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적의 추격으로 포병대대만 손실이 없고, 공용화기는 절반 정도, 병력은 4개 대대만 남았다.
이 무렵 중공군은 더이상 원주 방면으로 공격을 하지 않았ㄷ다. 미 제10군단장은 원주 고수를 강조했으나 , 14일 공격에서 기세가 꺽인후에는 16일 이후에는 별다른 접전이 없었다.
그러나 북한군 제5군단 예하 3개 사단(6,7,12사)는 신정공세시 북한군 제2군단이 사용한 통로를 이용하여 제천을 목표로 돌파구를 확대하려 진출하고 있엇다. 신정공세의 전철을 우려한 미 제10군단장은 2월 15일 강릉에서 이동한 국군 제1군단장에게 원주-평창 선의 방어를 명령하고, 제1군단은 14:00시에 국군 제3, 제5, 제8사단의 작전 통제권을 인수하였다.
이때 군단의 좌전방 제3사단은 성남리에, 우전방 제5사단은 주천리 부근에, 제8사단은 에비로 주포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군단의 최우선 목표는 전방사단의 배치 공간에 제8사단을 신속히 투입, 적의 돌파구를 차단하는 것이였지만 사실 국군 제8사단은 방어할 병력이나 전투력이 없었다.
제천을 목전에 둔 북한군 제5군단은 16일 아침에 국군 제3, 제5사단을 공격하여, 국군 제3사단은 일부 돌파되었으나 책임지역을 방어하였으나 제5사단은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8km를 철수하였다.
이렇게 되어 제3, 5사단이 철수하면서 국군 제3군단의 좌전방에는 30km에 달하는 공백지대가 발생하게 되고, 이에 국군 제3군단은 횡성 동쪽의 창동링 선에 배치된 제7사단과 제9사단을 군단 후방지역에 배치된 미 제7-31연대 진지가 있는 평창 남쪽 도돈리 연결하여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20~30km를 철수시켰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 에하 제9, 제27사단이 평창을 점령한 후 영월을 점령하려 공격을 기도하여 2월 15~18일까지 영월 북쪽 13km까지 진출한다.
◆제천지역 돌파구 형성, 미 제8군사령관 조치 : 미 제7-31연대 투입, 공백지대 투입 및 북한군 격퇴명령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영월 간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북한군 제2군단을 방어할 여력이 없었다. 이에 미 제8군은 17일 미 제10군단장에게 이 지역으로 미군을 투입하여 북한군을 격퇴하여 국군 제3군단과 연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미 제7-31연대가 이 공백지대로 투입되면서 국군 제1, 제3군단 간의 노출이 해결되엇고, 국군 제3군단은 17~18일 양일간 계속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도돈리-정선 간의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이후에 북한군은 지금까지의 전투로 지친 전력으로는 더이상 공격하기 힘들ㅇ에 되어 , 국군의 역습으로 퇴각하기시작한다.
(3) 재반격 속개와 서을 탈환 작전
(가) 제천지역 돌파구내 적 격멸작전(킬러 작전)
제천부근 격멸전
29번도로
홍천강 홍천 하진부
29번도로 창동리 국9사
중42군 창봉리
24번도로 국7사
2번도로 북2군단
양평 지평리 미23연 횡성 말다리
미1기병 중39군 중 40군 미10군단=국3군단
24번도로 주암 미2사 북5군단 평창
영27여 국6사 미187 원주 국3-18 도돈 국7 국9
미1=미9(2.17)
여주 미2=미187연 미187=미7 주천리 '
미31연
미1군단=미9군단(2.18) 국5
남한강 미32연 영월 남한강
장호원 목계 주포 제천
국8
1951년 1월 25일 제반격작전으로 전환한 국군 과 유엔군은, 서부에서는 한강선을 확보하고 중동부에서는 양평-횡성-강릉으로 진출한 다음 홍천을 목표로 공격(라운드업 작전) 도중에 중공군 제4차공세 92월공세)로 제천지역에 대돌파구를 허용한 상태에서 2월 18일경 양평-원주-제천-영월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하였다.
이때 중공군의 2월 공세를 직접 받지 않은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이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은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서쪽의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방어한다.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이 중공군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 영제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관대리 부근으로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중동부전선의 미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 서쪽 섬강, 미제187공정단(국3-18연 배속)이 원주, 국군 제3사단이 성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 일대의 차단진지를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이, 제7사단은 마차리, 제9사단은 정선, 수도사단은 삽당령에서 강릉에 이르는 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미 제8군은 중공군의 2월공세가 불과 며칠 만에 끝나고, 유엔군이 다시 작전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적에게 새로운 공격을 준비할 여유를 주지않을 뿐만 아니라, 제천 북쪽 부근에 돌파구를 형성한 적을 격멸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번 작전의 명칭은 작전목적이 적 병력 말살에 있음을 강조하여 "격멸작전(킬러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8군은 남한강 동쪽의 양옆-횡성-평창을 연하는 아리조나선 남쪽에서 철수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홍천 도로를 따라, 미 제10군단은 제천-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도록 하고 전투지경선을 일부 조정하였다.
이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서측방의 미제1군단과 미 제9군단 예하 미 제24사단은 한강 남쪽에서 이들의 진격을 엄호하도록 하고, 우측방의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 제7사단이 60번도로 동쪽의 산악지대로 진출시켜 미 제10군단의 진출을 지원하고 속사리-하진부리-유천리간 도로를 방어하도록 한다.
그리고 안동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완료한 미 제1해병사단을 미 제9군단에 배속하고, 제187공정단은 차후 서울탈환작전시 필요지역에 공수작시 투입을 위해 대구로 내려가 낙하훈련을 하게 조치했다.
격멸작전은 '51.2월 21일 미 제9군단이 원주-횡성, 제10군단이 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작전을 재개하며, 크게 횡성점령, 강림-안흥-봉화산 진출,속사리 설한지 전투로 구분된다.
1) 횡성 점령
미 제9군단은 2월 21일 좌전방 미 제24사의 엄호하에 미 제1기병(영27여 배속), 국군 제6사, 그리고 군단의 주공으로 미 제1해병사단으로 4개사단 병진공격을 감행했다.
이 무렵 적은 3일간 계속하여 철수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횡성-평창 선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철수를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퇴각하는 적을 격멸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진격을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작전 초일부터 기상이 급상승하여 , 21일에는 1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도 0도에 머무는 고온현상이 나타나고, 그후 3일간은 간헐적인 비까지 내려 노면상태 악화와 항공정찰 및 항공지원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고, 하천이 녹는 유빙으로 범람하고 교각이 떠내려가는 등 곳곳에서 산사태로 도로 및 철도가 두절되는 사태가 속출하여 군수지원에도 많은 차질을 빚게 한다.
미 제1기병사단은 24일 양평-홍천 도로를 따라 북족의 469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한편 군단의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은 적은 경미하였으나 기동로가 제한되고, 설상가상으로 2월 24일 전선을 정찰하던 미 제9군단장 무어 소장이 헬리곱터가 한강 탁류에 추락하여 전사함에 따라 사단장 스미스 소장이 임시로 군단을 지휘하고, 부사단장이 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51. 2월 25일 미 제1해병사단이 횡성을 공격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해병사단이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우전방 제5해병연대 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게하고, 좌인접 국군 제6사단 지역을 미 제7해병연대가 인수하여 공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상이변과 중공군의 치열한 포격으로 3월 2일에야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 제7해병연대가 다소 피해를 입으면서 3월 4일 횡성을 점령했다.
2) 강림-안흥-봉화산 진출
미 제10군단은 2월 21일 우전방 미 제7사단이 주공으로 영월-평창 도로를 따라 공격하고, 좌전방 국군 제3사단이 조공으로 원주-횡성 축선으로 공격하는 미 제9군단 주공인 미 해병 제1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면서 원주-방림리 도로 북쪽의 강림-안흥-봉화산에 배치된 적을 공격하게 된다.
국군 제3사단의 공격로는 서쪽으로는 매화산-치악산-남대봉으로 연결되는 치악산맥이 남북으로 발달되고, 동쪽으로는 주천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지역으로 도로망이결핍되고, 산간도로에 적설이 1m에 이르는 기동이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국군 제3사단은 지난 중공군 2월공세시 피해를 입고, 신병 2,000명을 보충받았다. 좌인접 미 해병사단이 공격이 지연되어 사단은 23일에야 좌전방에 제18연대, 우전방에 제23연대, 그리고 제22연대를 예비로 공격하여 26일 횡성-안흥-평창 선으로 진출하여 좌로는 미 제1해병사단과 연결하고, 우전방 제23연대는 미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작전지역 중앙으로 투입된 미 제2사단과 연결하였다. 사단은 적의 완강한 저항에도 30km이상을 진출하여횡성-평창 간 도로를 확보하여 차후 작전의 발판을 확보하였다.
2월 28일 미 제8군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군단전투지경선이 좌측으로 확장되면서 미 제9군단의 우전방 연대인 미 제5해병연대의 지역을 제23연대가 원주로 이동하여 정암리 부근에서 인수한다. 이때 사단 정면으이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6, 제12사단의 5,000여 명이 안흥리 북쪽의 봉화산과 덕어산 일대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3월 1일, 사단의 공격은 수류탄과 총검이 난무하는 백병전이 계속되면서 3월 4일까지도 적진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고, 우인접의 미제2사단도 언주-방림리 도로 전방의 고지를 공격하다가 공격이 돈좌되었다.
그러나 3월 5일 밤에 북한군이 진지를 버리고 철수하게 되면서 7일 원주-방림리 도로 북쪽의 감제고지를 점령항여 목표선인 아리조나선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사단은 국군 제3군단으로 복귀하게 되어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인게하고 마차리-정선 일대로 복귀하였다.
강림-안흥-봉화산 전투
홍천 유동리 장평
게천 마옥 포동리
미1해병=국3 둔방내리
횡성 두곡리
▲479 ▲봉화산
정암리 ▲덕어산 국3=미2
국23연 음달말
▲풍치산 국18연
▲매화산 국18연 안흥리 국23연 방림리
미1해병=국3 율목동
▲치악산 강림
원주 미9=미10 갈곡리 국18, 국23
충주 남대봉 주천강
제천 영월
3) 속사리 설한지 전투
횡성 ← 속사리 발왕리 유천리 차항리 횡계리 → 대관령. 강릉
국군 제3군단은 태백산맥의 서쪽 산악지대를 공격하게 되는데, 오대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수도사단이, 서쪽은 제7사단이 공격 준비를 하고 제9사단은 예비로 송계리에 집결하고 있엇다. 군단은 킬러작전이 개시되자, 우전방 수도-26연대가 횡게리에, 제1연대가 강릉에 배치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좌안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해 2월 25일 좌전방 제7사단으로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한다.
제3군단은 공격이 순조롭게 되자, 미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3일간이나 게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 도로가 차단되어 공격이 지연된다. 결국 제설작업 끝에 3월 1일에야 2개 대대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영월 부근에서 철수하는 적은 발왕산, 속사리, 월정사 부근에 진지를 편성하여 국군 제3군단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일부는 유엔 해군의 함포사격으로 동해안 기동로를 사용못하게 되자, 게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선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가도한다.
'51.3월 1~3일, 제1기갑연대가 속사리로 향하고 있을 무렵 국군 제7-5연대가 거문리 일대에서 적과 격전 중이라 제3군단장은 1일 중으로 속사리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하지만 제설작업이 늦어져 2일 하진부리로 진출하여 접적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핮진부리와 속사리의 중간지점인 발왕리에 진출할 무렵 야음으로 야간방어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22:00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책임지는 제26연대 제3대대와 기갑연대의 퇴로를 찯간하려는 적이 3일 새벽까지 유천리 부그에서 격돌하여 백병전을 시행했지만 적에게 패하여 08:00시경 차항리로 철수하게 되면서 제1기갑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이로써 혹한 속에서 밤을 세운 기갑연대가 공격을 재개하게 되지만 적에게 포위되어, 결국 사단은 철수를 명하게 되고, 이를 지우너하기 위해 제26연댁가 유천리로 재진출하게 되지만 기갑연대는 4일 자정경 적의 추격에서 벗어나 대관령 서쪽 입구의 가사두에 집결하게 된다.
연대는 철수작전에서 3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지만 전사 59명, 부상 119명에, 실종 802명이었다. 물론 실종자 다수는 대부분 다음날 복귀하게 되지만 다수의 동상환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14일 동안(2.21일~3월 6일) 추격전으로 미 제9군단과 제10군단은 횡성-평창의 목표선인 아리조나선까지 진출하고, 적 살살 7,918명, 부상 1,469명, 포로 208명의 전과를 올렸다.
(나) 중부전선 절단 작전(리퍼작전)
1) 유엔군의 작전방침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분쇄하고 킬러작전으로 '51.3월 초에는 한강 남안-횡성-강릉을 잇는 썬까지 일직선을 확보한다.
이 당시에 미제8군은 서울 수복작전이 갖는 정치. 심리적 의미는 크지만 유엔군의 증원이 없이 서둘러서 무리한 희생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군사적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현 전선에서 중앙징녁에 대 돌파구를형성, 적의 전선을 양단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으로 분리시킨 다음 , 남쪽과 동쪽에서 서울을 양익포위한다는 전략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전을 전선 절단과 분리라는 작전 목적을 고려하여 "전선 절단작전"이라 명명한다.
이 무렵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한 산악과 하천을 이용하여 방어중심을 유지하면서 유엔군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병력 배치는 "전경후중", 중화기 배치는 "전중후경' 원칙을 유지하도록 하고, 종심깊은 저지진지를 준비하도록 한다.
반면 아군은 격멸작전(킬러작전)으로 양평-횡성-강릉 선(아리조나 선)으로 진출하여 다시 2월공세 이전의 전선을 회복한다. 서부전선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 미 제3사, 미 제25사(터키여 배속)이 한강을 따라 강 남쪽으 김포반도-노량진-잠실-수청리를 점령 중이고,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 미 제24사, 미 제1기병(영 27여배속), 미 제1해벼이 양평-용두리-풍수원-횡성을 점령한다.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 미 제2사, 미 제7사단으로 추동리-안흥리-하송빈을 점령하고, 국군 제3군단은 제7사(해병 1연대 배속)이 형제봉-박지산-용산리를 점령하고, 동부전선 제1군단은 제9사단, 수도사단으로 간평리-차항리-강릉 선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제8군은 전 군단이 참여하되,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을 이루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 북방-한계를 연하는 목표선(아이다호선)까지 진출하여 적을 양단함은 무론 적의 병력과 보급물자의 비축 장소로 판단되는 홍천과 춘천을 점령하여 동측으로부터 수도권에 대한 압력을 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격간에 중공군의 기습공격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3개의 통제선을 두어 부대간의 상호협조를 중요시 하게 하엿다.
[리퍼작전간 3개의 통제선 : 알바니선, 버팔로선, 카이로선]
● 알바니선 : 미 제1,제9, 제10군단 전방의 8~20km 북쪽의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를 연하는 선으로 홍천을 통제하기 위한 선
● 버팔로선 :미금리-진벌리-홍천 북쪽-한계리를 연하는 서능로 이는 미 제1군단, 미 제9군단지역에만 설정하여, 미 제1군단의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버팔로선까지 진출하여 서울에 대한 포위망을 확대하고, 미 제9군단은 홍천을 점령하는 선이다.
● 카이로선 : 미 제9군단 지역에만 국한되 ㄴ선으로 가평-춘천 남쪽-한계 북쪽을 연하는 선으로 제9군단이 춘천을 목표로 북진하는선(아이다호선)이다.
제8군사령관은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여 적의 전선을 차단하고 서울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주공인 미 제9군단(신임 군단장 호지 소장)이 춘천 홍천을 공격하고, 조공인 미 제10군단은 풍암리-태기산-운두령을 공격하여주공의 우측방을 엄호하게 하였다. 미 제1군단은 한강선에서 적을 고착견제하고, 일부는 에봉산-천마사느로 공격하여 주공의 좌측방 엄호와 포위 준비를 하도록 한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측바인 국군 제3군단은 산악지역인 운두령-황병산을 공겨하고, 이미 주문진에서 서쪽으로 연곡천을 따라 최종목표선까지 진출한 국군 제1군단은 점령 중인 진지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미 제8군은 이 킬러작전의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아군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적에게 최대의 손실을 강요하는 것이므로 만약, 적의 공격징후가 현저하면 이 절단작전을 취소할 계획이었다.
[상륙 양동작전, 대동강 하구와 원산항 지역 일대]
이에 미 제8군은 적의 예비대가 중부내륙지역으로 지;ㅂ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서해안과 동해안에 상륙 양동작전을 계획하여, 미 해군 제95기동함대의 소해정이 서해안을 따라 기뢰를 제거하는 행동을 취하며 진남포 외꽉의 대동강 입구로 진입하기도 하고, 수송선들ㅇ이 인천항에서 출항하여 북쪽으로 항해하는 등 3월 5일에도 반복되어 상륙작전이 임박하였음을 과시하였다. 동해안에서도 2월부터 원산지역에 함포사격을 집중하고, 국군해병 제41중대가 원산 근해 도서를 점령하기도 한다.
미 극동공군도 주요철도와 교량파괴에 역점을 두어 북이 이용할 수 있는 철도 길이는 48km 정동에 불과했다.
미 제8군은 미 제10군단의 작전통제를 받아온 국군 제1군단과 국군 제3사단을 원대복귀시키고, 육군은 국군 제3군단의 우전방 제9사단을 1군단으로, 제3사단은 제3군단으로 , 그리고 홍천 공격에 실패한 후 재편성을 완료한 제5사단을 미 제10군단에 배속전환시켰다.
2) 홍천-춘전 진격전
킬러작전의 주 목표는 미 제9군단이 목동리-춘천북쪽-내평리-한계를 연하는 아이다호선으로 진격하여 홍천과 춘천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이번 작전의 중공인 미 제9군단은 4개 사단 병진공격으로, 좌전방 미 제24사(배속:국군 제19연대)가 용문산으로,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영 27여 배속)과 국군 제6사(-)이 29번도로 서쪽의 홍ㅇ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은 홍천을 목표로 공격할 게획이었다.
[제1단계 알바니선 점령]
'51.3.7~13일, 주공인 미 제1해병사는 3월 7일 오음산 북쪽의 알바니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9일 알바니선을 점령하였으나, 우인접 미 제10군단의 미제2사단과 좌인접 미 제1기병사단의 진출이 지연되어 13일에야 제1단계작전이 종료되었다.(국군 제6사단은 진출지연)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제2, 제7연대로 풍수원 도로 남쪽에서 7일 공격을 개시하여, 제2연대 수색대가 횡성서북 초원리에서 지난 2월공세에서 국군 제8사단이 유기한 대전차포 7문과 105밀리 곡사포 5문을 회수하였다., 사단은 11일 풍숭둰 북쪽 갈기산-성지봉으로 공격중 군단의 부대 재배치 계획으로12일 작전지역을 좌인접 영 제27여단과 미 제1-7해병연대에 인게하고, 제1기병사단의 좌전방 제8기병연대의 장락산-용수리 지역을 인수하였다. 이때 3월 4일부터 미 제24사단에 배속된 제19연대가 복귀하여, 사단은 14일 좌전방에 제19연대, 중앙에 제7연대, 우전방에 제2연대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에는 미 제2사단에서 파견나온 전장 정리조가 동행하는데, 이들은 지난 2월 중순 홍천 포위공격(라운드업 작전)시 중공군 2월 공세로 횡성계곡에서 피해를 입은 미 제21지원부대원으로 보이는 시체 250구 이상과, 155밀리 곡사포 5문, M-5견인차 6대, 분실ㄷ된 전차 6대 중에 4대를 회수하는 등 다수의 트럭을 수거한다.
[2단계 버팔로선 공격:3.13~19일]
'51.3. 13일 미 제9군단은 미 제1기병을 좌측, 미 제1해병을 우측으로 홍천을 양익포위할 계획하고, 좌전방의 미 제24사와 국군 제6사단은 북한강 계곡의 청평호에서 홍천강 남쪽으로 진출하도록 한다.
공격개시 이틀만에(15일) 미 제24사단은 청평호에, 국군 제6사단은 홍천강 남쪽의 고지군을 확보하고, 홍천을 좌측에서 공격 중인 미 제1기병도 홍천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미 제1해병의 진출을 기다렸다.
진출이 지연되는 미 제1해병의 공격을 지우너하기 위해 미 제9군단장은 홍천강을 연하여 중간 통제선인 "버스터선"을 설정하여 홍천 북ㄷ방의 버팔로선과 연결하고, 국군 제6사, 미 제24사, 미 제1기병도 이 선을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해병이 홍천시내로 진입하면서 군단은 17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게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 지역에서 적의 저항이 강력하였다. 19일 전 사단이 목표선에 도달한다.
이당시 국군 제6사단 제2-2대대가 홍천강 북쪽 구은동에서 적을 포위공격하여 231명을 사살하고 75밀리 야포 7문, 60밀리 박격ㅍ포 6문, 82밀리 박격포 4문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3단계 카이로선 점령: 3.1~24, 춘천 22일 미 제7기병연대가 점령]
미 제8군은 미 제9군단이 카이로선에 도달하면 대구에 대기 중인 제187공정단을 22일 충천 북방에 투입하여 춘천호에서 내려오는 적을 차단하여 제9군단과 연결하는 작전을 계획한다. 그러나 적이 의외로 빠른 속도로 철수해 나가 이 작전을 취소하게 된다.
미 제1기병 특수임무부대가 21일 춘천시내로 진입하고, 22일에는 제7기병연대가 춘천을 점령하면서 절단작전의 목표는달성된다. 한편 우전방 미 제1해병도 18일 동부전선 여량리에서 배속되어 들어온 국군 제1해병연대를 가장 험준한 산악재인 중앙에 투입하여 24일 적의 방어거점인 가리산을 확보하였다.
3) 서울탈환작전
적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의 주 목적의 하나는 서울을 적이 강력하게 방어할 것으로 판단하고 중부전선에종심깊은 돌파구를 형성하여 동측방으로부터 서울을 포위할 지형을 확보하거나, 이를 통해 서울의 방어부대의 철수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의 주공 미 제9군단이 돌파작전을 전개하는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한강남쪽의 저지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미제1군단은 좌전방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인천지역 경계와 한강남쪽의 저지진지를 방어하고, 우전방 제2사단(터키여단 배속)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지역으로 도하, 한강이북으로 진출하여 북한강을 기고 있는 고지군을 점령하도록 하여 미 제9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면서 서울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미 제25사단은 '51.3월 7일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별 다른 저항없이 대안상으로 진출하였다. 공격개시 4일째인 10일부터는 적의 저항이 현저하게 감소되어 15일 저녁 무렵 서울-춘천도로가지 진출하였고, 배속된 터키여단은 국도보다 23마일 더 진출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의 제24사단이 확보한 진지에 도착하면서, 제25사단은 예봉산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동측방에서 위협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미 제9군단이 홍천을 탈환할 무렵 적이 서울을 포기하고 대규모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에 미 제3사단 정찰대와 국군 제1사단 정찰대가 14일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을 정찰하게 되었으며, 이 당시 적의 저항은 없었다. 이때 1개 정찰팀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당시 적은 서울-의정부 중간지점으로부터 3번 도로 주변에 광범위하게 병력과 진지를 구축하고 있엇다.
미 제8군사령관은 서울에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51.3월 15일 미 제1군단으로 하여금 서울을 점령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위해 서울 북서쪽 한강변에서 북한산을 경유하여 용마봉을 거쳐 버팔로선과 연결하는 통제선인 "링컨선"을 설정하여 전진한계선으로 하였다.
이에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은 북한산을, 미 제3사단은 용마산을 목표로 전개하도록 하여, 국군 제1사단은 지난 2월 16일 미미 한강변으로 진출하여 1달 여를 서울을 목전에 두고 한강철교-영등포, 염창-김포일대에서 잔적소탕 중에 있었다. 미 제3사단도 잠실 일대에서 서울 동북방의 상문동-퇴게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수복되는 서울, '51.3월 15일~16일]
서울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3월15일에 제6중대의 도하를 시작으로 16일에 시내 전역을 서울 전역으루 확보한다. 미 제3사단도 용맙봉을 점령하였다.
당시 서울 인구 150만이 남아있는 인구는 20여만 정도였으며 이들에게 줄 식량도 없는 없는 완전 페허된 모습이었다.
4) 동부전선 작전
가) 태기산 전투
'51.3월 17일 : 검산리 부근 고지에서 적을 식별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 생포, 각종 기관총과 박격포 22문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미 제10군단은 전선 절단작전(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미 제10군단장은 좌측지역의 횡성-풍암리 간의 소로와 우측 평창-방림리-속사리간의 도로를 따라 진격하는데 역점을 두고, 이 도로 축선에 미 제2사단과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은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도록 한다.
이 당시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를 받은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 간의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 중에 3월 3일 다시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5일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 좌전방에 지구리에 제36연대를, 우전방 월암동에 제35엳대를, 배치하여 절단작전을 준비하였다. 국군 제5사단의 작전지역은 대부분 900~1,000m고지군이 연결된 산악지역으로 공격에 불리한 지역이었다. 이지역은 지난 2월 초에 작전을 펼친 바 있어 다소 익숙한 지형이었고, 정면의 적도 사단과 일전을 벌인 북한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1개 연대를 지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된 고지군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태기산 전투
홍천 풍암리 검산리
국35연
▲ 흥정산 1277
국27연
발교산 ▲ 운무산980
미2=국5
▲봉복산 1082
▲ 태기산 1261 백운동 창동리
신대리 국5=미7
갑산리 국27연 방림리
횡성 제35연
▲ 685 ▲자주봉889
포동리 둔방내리 ▲대미산 미7-17연
지구리 국36연 국35연 월암동
원주
안흥리 운교리 말달리
군단은 '51년 3월 7일 발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좌전방에 미 제2사, 중앙에 국5사, 우전방에 미 제7사로 3개 사단 병지ㅐㄴ 공격을 개시한다.
'51.3.7-12일 : 산악지역에서 백병전으로 진출하지만 적의 완강한 저항에 진출이 지연되고, 10일 주간공격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야간공격으로 적을 기습으로 적을 공격하여 둔방내리 685 거점을 확보하고, 야간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자주봉을 확보한다.
이 당시에 생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적이 조직적으로 철수하기 위해 엄호작전을 하고 있으며, 적 주력은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정비하여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3일 을 전후하여 적은 전섲ㄴ에서 물러나기 시작햇고, 사단은 예비인 제27연대를 제36연대와 교대하여 적을 추격하도록 하면서 우인접 미 제7-17연대의 대미산 지역을 인수항여 동측으로 작전지역이 확장된다.
14-15일 : 사단은 태기산을 점령하여 신대리 백운동 선으로 진출하여 15일에는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한다.
17일 : 검산리 부근 고지에서 적을 식별하여 425명을 사살하고, 57명 생포, 각종 기관총과 박격포 22문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미 제10군단도 17일을 기해 알바니선으로 진출하여 최종목표선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여 절단작전을 종료한다.
나) 하진부리 부근전투
전선 절단작전의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공격 목표인 게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는 16km 남짓 남아 있었지만 험준한 산악지형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제3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군단 후방지역에 공비들이 출몰하는 것을 고려하여 제7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를 공격제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은 예비가 되어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되는 제9사단의 정선 일대 진지를 인수하도록 조치하였다.
군단은 속사리-강릉선을 조속히 점령하라는 육본의 명령에 제7사단은 좌전방 제3연대를 상대화에서 백적산(1141)-잠두산(1241)를 경유 하여 속사리를, 우전방 제5연대는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 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공격하고 제8연대는 예비로 제3연대를 후속하도록 한다.
당시에 적은 북한군 제9사단이 백석산을 고수하기 위해 속사리에서 남ㅎ하 중이고, 하진부리에서 정비 중이던 제27사단도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하여, 사단의 우측방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국군 제1해병연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해병연대는 적이진출하기 전에 방어거점ㄷ인 봉산리와 발왕산(1458)을 점령해야 하므로, 제2대대가 '51.3월 5읽 오장산(735)를 경유 발왕산으로, 좌전방 제3대대도 상원산(1421)를 경유하여 봉산리로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제7사단은 백적산 공격에 3개 연대를 투입하여 탈환하지만 적의 저항이 거세고, 사단 후방의 백석산을 목표로 진출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군단은 제3사단 18연대를 증원하였으며, 적은 3월 10일 2개 연대규모로 공격하였으나 국군은 보전공 협동작전으로 적은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하였다.
이어서 11일 사단이 하진부리를 감제할 수 있는 백적산을 확보하자 적의 공격기세는 현저히 둔화되고, 12일 최종목표인 하진부리와 속사리를 점령하여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당시 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해병연대는 3월 7일 좌인접 제7-5연대가 일시 철수하면서 봉산링에 제3대대가 적 중에 고립되어 9일 제3사단 제18연대가 우전방으로 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로 보급을 받으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격퇴한다. 이후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13일 공격을 재개하여 최종목표인 외래차지에 도달하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 22연대에 인계하면서 16일에는 미 제9군단으로 배속전환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여 가리산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다) 북한군 침투부대 섬멸작전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미 제10군단에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여 제3군단으로부터 수도사단을 배속받아 대관령-강릉(연곡천)을 방어하게 된다. 이때 제9사단과 제1, 제10경비 대대도 함께 군단에 편입되었다. 군단이 제3군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할 무렵, 서부전선에서는 서울을 탈환하고 중부전서네서도 아군이 38도선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이미 리퍼작전의 최종목표인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해 있었다.
이 무렵 북한군 제10사단이 다시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들을 규합하여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한 후 안동 동북방 일월산으로 북상하였다. 이 사단은 신정공세 때에 제ㅔ천남쪽으로 침투하였다가 안동-영덕선에서 퇴로가 찯나되어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1해병연대의 공격을 받아 결정적인 피해를 입고, 국군 제2사단의 소탕작저능로 붕괴되었던 부대였다.
이에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수도사단으로 전방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좌전방 연대는 좌인접 제3군단의 공격을 지원하도록 하고, 제9사단(수도-26-1개 대대 배속)으로 하여금 후방지역에서 북상중인 북한군을 소탕하도록 한다.
제9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북한군 제10사단의 병력 2,000~3,000여 명이 두타산 북쪽의 삼화리를 경유하여 북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붕에 따라 12일 석이암산(972)-자병산(872)에 차단진지를 편성한다. 하지만 적이 아군의 기도를 간파하고 일부 병력으로 차단진지 돌파를 시도하면서 주력이 청옥산 부근의 고적대로 이동하면서 산계리로 집결하였다.
사단은 산악지형으로 적의 포위에 실패하자 , 예비인 제28연대(송계리에 집결)를 16일 투입한다. 이대 적 600여 명이 17일 석병산 서쪽의 기수문동에 집결하게 되자. 완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적이 저항하며 18일 새벽에 포위마을 탈출하여 북쪽의 목계리로 도주한다.
이때 미 제8군사령관이 북한군 제10사단의 조속한 격멸을 육군에 요구하게 된다. 당시에 적은 소규모로 분산되어 태백산맥을 타고 계속북서방으로 탈출을기도하였다. 제1군단 지역을 탈출한 적이 3월 17일 경에는 좌인접 제3군단 지역의 화난봉(1069)-석두산(1001) 부근으로 이동하여 이때부터 제3군단이 북한군 패잔병 소탕작전을 하게되었다.
국군 제군단장은 우전방 제3사단에 황병산-노인봉-오대산 일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면서 북상하는 적을 격멸하도록 명령하여, 제3사단은 좌전방 제18연대는 오대산 남쪽 1301고지와 경강국도 남쪽의 병두산(988)을, 중앙의 제22연대는 동대산(1433) 우측 능선 백일동과 발왕산에 침투한 적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발왕치에 배치하고 , 우전방 제23연대는 황병산 남쪽진지와 사단의 후방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그리고 제7사단의 제5연대가 배속되어 광천리 일대로 집결 중에 있었다.
[사단 주력이 재배치 중에 사단장 교체 : 최석 준장이 전방지휘소 소장으로 2전임되고 김종오 준장이 부임]
북한군 제10사단은 18일 광천리에 집결 주인 국7-5연대를 기습하여 보급품을 약탈하여 장군암으로 진출하였으나 제3-22연대에 격퇻되었다. 당시 적 제1제대는 봉산리-발왕산-용산-백일평-노인봉 축선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으나 아군의 계속적인 추격과 노인봉 일대에서는 아군의 항공폭격에 큰 피해를 입는다.
이어서 적 제2제대인 사단직할부대 및 포병부대로 편성하여 북상 중에 동대산 동쪽의 식당동-황병산선을 돌파하여 노인봉일대로 분산도주하면서 심대한 피해를 입고 국군 제3사단 지역을 통과하여 인제 지구로 퇴각하면서 그들의 숫자는 1,000여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5) 임진강 진출 작전
가) 문산 공수투하 작전(용진 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또 다른 공격지역을 물색하던 중에 북함군 제1군단과 중공 군 제26군이 의정부를 연하는 선과 그 북쪽지역에 전개해 있음을 발견하고, 이들이 임진가을 건너기 전에 차단하여 섬멸하기로 판단한다. 이를 위해 대구에 집결 중인 제187공정단을 이들의 후방지역인 문산에 공중 투하하고, 미 제1군단이 압박격멸한다는 개념의 "용진작전"을 구상하였다.
이번 작전은 제1단계에서는 중부전선의 카이로선을 미 제1군단 전방의 행주-의정부 부근까지 연장한 후 미 제1군단이이 선으로 진출하여 공격준비를 하고, 제187공정단이 문산 일대에 투하하여 1번국도를 봉쇄하면 군단이 즉시 공격하여 양 부대가 연결 후, 임진강 하구-문산북쪽-의정부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한다. 그후 2단계로 임진강을 연하여 설정된 "벤톤 선"을 점령할 계획ㅇ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미 제1군단의 3개 사단(좌전방에 국1사, 중앙에 미3사, 우전방에 미25사)이 3월 22일 10~16,km 전방의 카이로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로우던 특수임무부대 편성: 미제9군단 제24사 제6전차대대(대대장 그루우던 중령). 미3사7-2대대. 제58기갑 야전포병 대대 1개 포대. 제999기갑야전포병 1개 대대, 제14전투 공병대대 A중대로 편성]
미 제1군단장은 신속한 진출을 위해 그로우던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23일 기해 공정작전을 개시하기로 하여 제187공수낙하부대가 3월 23일 07:00시에 대구 비행장을 이륙한다.
먼저 낙하지역을 경계할 유격중대가 투하되고, 이어서 낙하부대인 제1대대가 탑승한 비행기가 엔진고장으로 대구로 회항하게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격으며 봉ㄴ서산에 배치된 적을 격퇴하며 목표지역을 확보한다. 낙하중 84명이 부상하여 19명만 후송되고 나머지는 가벼운 치료훙에 원대 복귀하게되고 적을 136명 사살하고 ,149명을 생포한다.
생포된 포로의 진술로 당시 이곳의 적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로 300~500명이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주력인 북한군 제1군단은 훨씬 이전에 임진강 이북으로 철수했다고 했다.
문산지역에 공수작전이 개시되자, 미 제1군단장은 글로우던 특수임무부대에 23일 카이로선에 배치된 국구 ㄴ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국도로 신속히 진출하여 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고, 국1사가 문산, 미3사가 동두천, 미 25사가 포천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그로우던특수임무부대는 도로상에 매설된 지뢰때문에 150여 개의 지뢰를 제거하며 23일 18:30분에 문산에 도착, 공수부대와 연결된다.
결국 문산공수작전은 시기가 늦었으며 연결작전도 지연되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나) 문산-동두천-포천 진격전
미 제1군단의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은 그로우던특수임무부대를 후속하여 미 제64전차대대 C중대, 국군제1사 대전차공ㄷ격대대, 공병 2개 소대로 편성돈 특수임무부대를 선두로 1번국도를 다라 별 저항없이 동거리-금촌을 경유하여 24일 저녁무렵 문산-법원리까지 진출하여 문산지역의 제187공정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한다.
중앙의 미3사는 제15연대와 미 제64전차대대, 제65연대의 전차소대로 "호킨스특수임무부대"를 선두로 의정부로 진출하던 중에 의정부 북서쪽 468고지와 북동쪽 천보산에서 중공군의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출이 지연되자, 미 제1군단장은 제187공정단을 덕정리 북쪽의 228고지를 점령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폭우와 도로 노폭이 협소하여 진출이 지연되어 25일 아침에 228고지를 공격하게 되었지만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나 미 제3사의 정면의 적은 저항이 줄어들었고, 27일 오전에 228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상와 연결하게 된다.
한편 우전방의 미 제25사는 좌전방 제24연대가 소리봉-해룡산을, 중앙의 제27연대가 죽엽산-왕방산을, 배속된 터키여단이 주금산-국사봉을 목표로 경춘국도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소리봉-죽엽산-주금산 일대에서 적의강력한 저항을 받으며 28일 포천을 점령한다.
중공군 제26군은 의정부-죽엽산을 탈환하기 위해 최후의 반격까지 실시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포천 북쪽 종현산 부근으로 철수하고, 낙오된 병력들이 국사봉(764)과 소요산 일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6) 양양 진격 작전
미 제8군은 절단작전으로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이 최종목표인 아이다호선을 확보하게 되자,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ㅇ이 춘천을 중심으로 반원형을 이루게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전선의 균형을 위해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한강 남쪽에서 임진강변으로, 동부전선의 국군 제1,3군단은 경강국도에서 현리-양양을 연하는 카이로선으로 진출하도록 명령한다.
이 무렵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군단 후방지역으로 접근하겓되어, 먼저 이 적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전개하여 3월 18일을 전후하여 소탕작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국군 제1군단장은 양양을 공격하기 위해 수도사단에게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명령한다.
이때 군단정면의 북한군 제69여단도 북으로 철수한 북한군 제10사단 일부를 증원받아 양양을 방어하기 위해 산악으로 연결된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구축하여 저지하고자 하였다.
북한군은 극렬하게 저항하고자 했으나 강력한 함포사격에 병력소실과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이에 수도사단장은 제26연대가 방어 중인 경강국도변의 유천리-차항리 진지를 제9사단에 인계하고, 연대를 양양 남쪽 인구리로, 사단 에비인 제1기갑연대를 주문진으로 이동시킨다.
3월 25일, 미 제8군으로부터 신속히 카이로선을 3월 25~26일 양일간 점령하라는 명령에,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3월 26일 공격으 개시하여 남대천 남쪽의 우암리-노고봉 일대에서 강력 저지하는 적을 돌격으로 제압하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자, 적은 한게리-인제로 통하는 설악산 입구로 철수하게 된다. 27일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을 점령하게 된다.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 비행기 추락으로 전사]
이 무렵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수도사단의 좌인접에서 엄호 중인 국군 제9사단의 전선을 시찰하고 L-5기로 14:40분 출바랗여 강릉의 군단지휘소로 복귀하던 중에 추락하여 전사하게 된다.
양양에서 철수한 적은 설악산 입구 387고지 일대에 강력한 저지진지를 구축하여 수도사-제1연대의 공격이 실패하기도 하지만 30일 공격을 재개하여 적 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한다.
한편 제1군단이 동해안 축선을 따라 공격하는 동안에 좌인접 제3군단도 3월 25일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다느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 목표로 3월 26일 공격을 하여, 제18연대가 오대산에서 설악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으로공격하여 27일 하서림을 확보하고, 제23연대도 27일 월정동을 경유하여 30일 조개동으로 진출하여 카이로선상의 현리-서림과 동해안의 전술적 요충지인 양양을 확보한다.
(4) 38도선 확보 작전
전선 절단작전으로 중부의 제9군단이 춘천을 확보하고, 서부의 제1군단이 문산을 점령하고, 동부의 국군 제1군단이 양양까지 진출하자, 미 제8군은 서부의 진출통제선인 벤톤선과 중부의 카이로선을 연결하고 모든 군이 이 선가지 진출하기로 결정한다.
이 선은 서부의 문산에서 임진강 상류지역을 거쳐 동두천-춘천-현리를 거쳐 양양 북쪽의조산리에 이르는 선으로 , 서부는 38도선에 이르고 중부는 조금 못 미치지만 동부는 이 선의 북쪽으로 그어져 사실상 38도선을 통제할 수 있는전술적 지형을 연하는 선이다.
이 무렵 적도 이미 38도선 북쪽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정비 중에 있어 아군은 별로 저항없이 3월 말까지 이선에 도달한다. 이와같이 재반격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진출할 무렵 유엔군측에서는 이후 작전과 관련하여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고 이에 다라 38도선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가) 유엔군의 군사전략
유엔군측은 '51년 1월 하순 반격작전으로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ㄴ을 펼치게 되자, 지난 12월에 심각하였던 철군문제 논의는 일단락되고, 지난해 10월 38도선을 돌파하기 직전처럼 다시 38도선에 관한 진쟁지도전략을 다각도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미 행정부와 합참은 3월 15일에 "한국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 가기 노선에 따라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정치적으로는 통일 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여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의한다.
그 세부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 유엔군은 적에 대해 계속하여 최대의 손실을 가하고 38도선 남쪽 영토의 통제를 회복하고 한국군의 방위력도 증강되어야 한다
둘째 : 지상군 작전은 38도선 북쪽 16~32KM 내에서는 "공세적 방어작전"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아군이 38도선에 도달하면 미국은 '50년 12월 유엔휴전위원회에 통보한 그 선에 따라 휴전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 만일 적이 협정을 거부하면 유엔군은 적에게 계속 손실을 가해야 한다., 이를 위해 38도선 북으로 제한된 기습을 가할 수는 있으나 전면적인 진격으로 북한 영토의 확보를 시도해서는 안된다.
미 합참은 3월 20일 극동군사령관에엑 대통려이 휴전을 기꺼이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유엔군을 파견한 국가의 동의를 얻어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안된다는 유엔의 일반적인 견해를 전달하면서 차후 적과 협상이 개시될 때 유엔군의 안전과 협상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조언을 요구하였다.
[맥아더 원수의 미 행정부의 휴전이행 조건에 대한 강한 거부 성명]
이에 맥아더는 3월 24일, 미 행정부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중공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고 지적하는 등 중공군의 군사력을 경시하고 또한 "교전이 지속될 경우 중공을 공격할 수 있다"는 등 위협성을 내포한 성명을 발표하여 미 정책과 유엔의 정책에 고의적이고 사전에 계획된 도전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유엔군을 파견한 국가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진실성을 의문시하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되어 미 행정부는 트루먼의 선언문 발표를 유보하게 된다. 결국 미 태통령과 맥아더는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되고 대통령의 휴전계획 발표를 취소시키는 파문을 초래한다.
["캔사스선 도달 작전: "러기드 작전"]
이때 미 제8군은 개성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임진강을 도하하여 철수 중인 북한군 제1군단을 공격하며,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미 적이 에성강 북쪽으로 철수하였고 중공군의 포위가우려되어, 전투정찰대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군사령관은 그 대안으로, 중부전선의 적의 병참 중심지인 중부전선의 평강-철원-김화, 일명 "철의 삼각지대"(극적이느 표현을 묘사)를 공격하기로 한다.
이때 선정된 방어선이 임진강 남쪽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로 연결된 후 동해안의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이를 "캔사스선"이라 명명하고 모든 부대가 이 선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러기드 작전"이라 이름 붙엿ㄷ다.
[와이오밍선 도달 작전:불국작전]
그후 군은 다음단계로 미 제1,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우타선과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화ㄲ자지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만일 공격 중에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양개 군단을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이 작전을 "불굴작전(돈트라스작전)"이라명명한다.
이때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에게 아군이 이 선으로 진출하면 그 북쪽의 작전을 대대급 규모이하의 전투정찰로 제한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공산군의 군사력 증강
공산군은 '51년도 초에 유엔군이 재반격으로 38도선으로 후퇴하고 있었지만 만주에서 재편성한 북한군이 전방으로 진출하는가 하면 중공군이 추가로 압록강을 도하함에 따라 그들의 전력이 증강된다.
북한군 제6군단(제18,19,36사)이'51년 1월에 압록강을 건너 청성진으로 입국하여 2월경에는 해주지역의 방어임무를, 제7군단(제13.32.37사)이 압록강을 건너 사단별로 남하하여 2월 말경 원산지역에 도착한다. 같은 시기에 제8군단(42.45.46사)도 만포진으로 들어와 흥남지역으로 들어왔다. 이중에 제45사단은 인제로 남하하여 제3군단에 합류하여, 원산-흥남 간의 예비 병력이 2개 군단 8개 사단 1개 여단이었으나 미 제8군은 적병력을 2개 사단, 1개 연대로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만주에서 복귀한 제6군단과 지난 연말 동북부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여 진남포-신안주 사잉에 배치된 제4군단(제4.5.사, 제104기갑여단, 제26여단)도 주둔하고 있었는데 미 제8군은 3월 중순까지도 이들의 위치와병력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3월 초순에 북한군 총 병력은 8개 군단27개 사단 4개 여단 규모였다.
중공군도 '51년 1~2월에 새로운 부대가 대거 만주로부터 입한하기 시작한다. 2월하순에는 중공 제19병단(제63.64.65군)이 신의주로 들어와 3월 초순에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곡산-신계-이천 지역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9, 제11포병연대도 함께 입한하였다. 이 무렵 원산지역에서 재편선 중인 제9병단(미 해병에게 장진호 전투에서 무력화된 부대)도 어느 정도 전력이 부충되어 제26군이 3월 추순에 38도선 부근의 중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햇다. 미 제8군은 제26군의 이동은 조기에 포착햇으나 제19병단에 대해서는 3월 중순까지도 알지 못했다.
중공 제26군은 3월 10일 미 제24, 미 제25사와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38, 제50군과 임무를 교대하였고, 유엔군의 전선절단작전이 개시 되기 전에 홍천에 집결하고 있던 중공군 제39, 40군은 제42, 제66군과 교대되어 전선의 중앙부로 투입된다. 이 외에도 중공군 제47군이 3월에 입한하여 제13병단에 배속되어서 비전투부대로 순안, 순천, 남양리의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고, 이 무렵 노새로 장비를 운반하여 노새사단이라 호칭된 제5포병사단도 입한하였다.
중공군의 이동이 3월에 완료되었을 때 총병력은 3개 병단 14개군 42개 사단, 4개 포병사단과 2개 독립포병연대이었다. 이어서 제3병단도 인동, 봉성지구에서 집결하여 입한을 준비 중이었다.
중공 지원군사령부는 이미 3월 14일 반격개시선을 장연-신원리-백천리-주천리-삭령-화천-양구-인제-양양 선으로 결정하고, 새로 투입되는 부대에 공격준비 시간을 부여하기 위해서 전선의 각 부대는 의정부ㅡ-주금산-청우산-홍천강 북쪽-풍암리를 연하는 제2방어선과 38도선 사이에서 4월 초까지 , 또 38도선과 공격개시선 사이에서 20~30일 동안 국군과 유엔ㄱ둔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 캔사스선 진출
국군과 유엔군은 캔사스선 진출을 위한 러기드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군단간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학도, 주요 전투부대도대폭적으로 이동 또는 교체하였다.
서부선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미 제3사단(영 29여 배속0, 미 제24사단 및 미 제25사단을 전선에 배치하고,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및 영 제27여단, 그리고 중동부 저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 국군 제5사단, 미 제7사단을 전선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 제3사단을 공격제대로 제7사단을 예비로 하고,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공격제대로하고 제9사단을 에비로 하여, 각 군단은 4월 3일 캔사스천 진출을 위한 요철작전을 개시하였다.
가) 중서부전선 진출전
러기드작전에서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은 임진강과 화천저수지 사이를 공격하게되었다.
미 제1군단장은 이미 캔사스선으로 진출한 좌정방 국군 제1사단과 중앙의 미 제3사단은 임진강을 따라 방어에 전념하고, 우전방 미 제24사단과 제25사단은 3번도로(의정부-포천-김화)를 따라 공격하도록 한다. 4월 3일 도로 서쪽의 미 제25사는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의 계곡으로, 미 제24사는 도로 동쪽의 관음산-국망봉으로 진격하여 6일 군단은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연한 캔사스선에 도달한다.
미 제9군단장도 좌전방에 영 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 우전방에 미ㅏ제1기병사를 공격제대로 게획하였다. 4월 3일 공격을 개시항여 좌전방 영27여단과 국군 제6사는 6일 캔사스선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전방의 미 제1기병사는 중공구 ㄴ제39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남쪽 화천저수지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화천댐의 목표선정 검토 난항]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은 아군이 춘천으로 진출시 화천댐이 작전에 미칠 영향을고려하여, 적의 수공작전을 고려하여 댐의 파괴를 고려했으나, 미 제8군 공병참모는 댐의 저스량이 절반도 안되고 수문 18개가 닫혀 있고, 재래식 포탄으로는 댐으르폭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8군사령관은 이번 작전의 목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러기드작전이 시작되면서 제9군단 공병부대장이 상반되는 견해로, 화천댐의 수위가 최고일 때 적이 수문을 개방하면 북한강 수위가 3~4m 상승되어 캔사스선 주변이 범람되고, 춘천지역이 큰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하엿다. 이럴ㄹ 경우 제9군단의 주보급로인 가평-춘천-화천 도로 이용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다시 화천댐을 공격목표에ㅐ 포함하고 이 작전임무를 미ㅏ 제9군단에 부여하기 위해 전투지경선을 약간 동쪽으로 이동시킨다.
미 제9군단장은 미 제4유격중대가 7일 군다에 배속되자,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시켜 화천댐을 확보하도록 한다. ㅡ그러나 미 제1기병사단은 군단장의 의도와는 달리 유격중대에 의한 기습공격을 준비하지 않고 댐 바러 남쪽의 캔사스선 점령에만 주력하엿다.
군다니 우려했던 대로 중공군 제39군은 8일 자정경 4개의 수문을 완전개방하고 6개는 부분적으로 개방하였다. 군단은 이때 이런 상화에 대비하여 하류자역에서 대피함으로서 별 피해는 없었으나, 방류가 계속되면서 북한강 수위가 22m 정도 상승하여 춘천부근의 가교들이 떠내려가고 피해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9일 아침에 중공군 제39군의 일부는댐에 이르는 능선을 점령하고 주력은 범람으로 인한 고립을 피하기 위해 철수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 제1기병사단은 용이하게 캔사스선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미 제9군단장은 기병사단에 부대교대 이전에 화천댐을 확보할 것을 명령하였다.
미 제7기병연대가 9일부터 11일가지 3차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도도망의 결빕과 화력지원의 부족, 도하장비 부족 등으로 화천댐 탈취에 실패하였다.
미 제9군단장은 12일 곧 있을 예정인 "불굴작전(돈틀라스 작전)"으로 이 댐을 확보하기로 하고 메 제7기병연대와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있는 국군 제1해병연대의 교대를 승인하였다.
이로써 미 제9군단은 석룡산-화악산-지암리-신포리-용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점령하고 차기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나) 중동부전선 진출전
미 제10군단은 작전지역내 도로망이 제한되고 지형이 험준하여 중서부지역보다 진출이 다소 지연되었다. 4월 7일 부대배치를 조정하여 조공인 좌전방 미 제2사단이 화천저수지 남쪽을, 중앙의 미 제7사단이 양구를, 주공인 우전방 국군 제5사단이 인제를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태기산 전투 종료후에 부대정비 중에 4월 7일 소양강 남쪽의 남전리-원대리로 진출하여 인제공격을 준비하였다. 당시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2사단이었고, 이들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 및 제45사단의 1개 연대가 소양강변에 배치되어 있엇다.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사단의목표인 인제 북쪽 장평-봉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하는데 장에물은 소양강 도하임을 예상하고, 먼저 좌전방 제35연대가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면 우전방 제36연대도 후속 도하하여 인제를 공격할 방침이었다. 선봉에 나선 제35연대는 강력한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9일 23:00시에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관대리 부근의 감제고지에 배치된 적 2개 중대를 격퇴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때 제36연대의 선봉인 제6중대는 은밀 기동하여 10일 01:00시경 가로리로 도하하여 소양강변에서 인제로 통한은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를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도 완강히 저항하여 피아간에 공방전이 계_속되자 연대장 황엽 대령은 제2대대 주력을 도하시켜 490고지와 인제를 감제할 수 있는 539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여 12일 인제와 서쪽 고지군을 확보하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양구와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잇는 개운리 서쪽의 542-637-711-742고지의 종격실 능선에 구축된 적을 구축하는데 13일까지도 실패하였다.
우전방 제36연대가 14일 원통을 목표로 공격하자, 이번에는 적이 인제-원통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합강리 서쪽의 548고지와 664고지에서 강력히 저항하여 진출이 돈좓된 반면 제35연대 정면의 적은 의외로 저항이 경미하여 3일동안 혈전으로 적의 방어거점을 확보하였다.
[적의 암구호, 밤나무-소나무]
4월 15일 하루종일 인제 북쪽의 640, 548, 664고지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540고지로 공격하던 제36-2대대가 북핝군 1명을 생포하여 적의 암구호(밤나무-소나무)를 알아내 540고지를 기습하여 적 100여 명을 사살하는 대성과를 거둔다.
사기가 오른 공격연대들은 16일 여명과 동시에 공격하여 제35연대가 작전지역내 최고봉인 940고지를 탈취하고, 양구-인제 간 산간도로를 통제하는 586-567고지로 진출하였고, 우전방 제36연대도 3일 동안 고지쟁탈전을 벌인 적의 방어거점인 548-664고지를 확보하고 서호리로 진출하여 사단은 캔사스선 점령을 목전에 두게 된다.
우전방 제36연대는 공격개시 7일 만인 17일 원통 북쪽의 481고지와 봉화봉을 확보하여 갠사스선을 확보하고, 좌전방 제35연대는 586고지 일대의 적을 구축하고 월하리로 진출하여 사단은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로, 미 제7사단은 양구로 진출하기 위해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ㅜ벌이며 북쪽으로 진출 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대부분의 부대가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하게 되자 유엔군은 휴전을 모색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이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4) 철의 삼각지대 공격
중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캐사스선으로 진출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지상 및 항공정찰과 포로 심문으로 공산군의 공세징후가 전 전선에 걸쳐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을을 간파하였다. 그는 그들의 병력과 장비 및 보그물자가 집중ㄷ되고 있는 전략적 요충인 철의 삼각지대를 점령하여 중부전선에서 캔사스선의 방어종심을 강화하고, 공산군의 공격준비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하였다. 이에 전곡-철원-김화-화천을 연하여 설정한 와이오밍선을 확보하기 위한 선제공격을 결심하였다.
이 목표선에 이르기 위한 1단계 목표선인 "우타선"은 전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으로 연결되며 활처럼 굽어진 선이었다. 이 작전에는 미 제1군단의 미 제3, 제24, 제25사단이 참가하고 제9군단의 좌전방 영 제27여단도 단거리 진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불굴작전 개시, 4월 11일, 전격적인 미행정부의 맥아더 원수 경질, 리지웨이 대장이 승계]
이 계획에 의거 공격제대들은 4월 11일 불굴작전을 개시한다. 그런데 이날 트루먼 미 대통령은 맥아더원수를 해임하고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를 임명하고, 제8군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을 4월 14일부로 임명하였다. 벤플리트는 제2차 세게대전시 노르망디 작전에 연대장으로 참가하고 이후 9개월 동안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으로 발탁ㄷ된 유능한 지휘관이엇다. 그는 1948년 중장 승진과 더불어 그리스의 미 합동고문단장직을 수행하며 그리스 정부를 도와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는 반정부 활동을 점재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지난 해 '50.7월 8일에 유엔군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그동안 북진작전과 관련하여 중공군의 침략에 대한 상황판단의 착오와 그들의 인해전술로 다시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재반격으로 38도선에 이르는 과정에 미 행정부와 전쟁지도상 몇 번의 마찰이 있었다.
불굴작전 1단계(돈틀라스작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리지웨이 장군은 14일 한국에서 마짐박 군단장 회의를 소집하여 적이 공격시 캔사스선 남쪽으로 철수하는 우발계획을 토의하였다. 이 계획에는 3개의 통제선이 설정되었는데 이 선은 중공군의 신정공세시 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하였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 교두선과 흡사하였다.
첫 번째 선인 "델타선은 춘천을 중심으로 동서해안에 이른 선"이며, 두 번재 선은 "네바다 선으로 서울 남쪽의 한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이었다. 그리고 서울 방어를 위한 "골든선은 서욹 서북쪽 10KM의 행주에서 네바다선상의 양평을 반원형으로 연 결한 선"이었다.
리지웨이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지휘권을 인계하며, 유타선 이북으로 군대를 진출시킬 경우 사전에 통보하고 또 와이오밍선 이북으로 군대를 이동시킬 경우에는 사전 승인을 받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전선에서 제1단계 돈틀라스작전(불굴작전)을 전개한 공격부대들은 철의 삼각지대로 접근하면서 공산군의 저항이 거세고, 여깅에 폭우로 도로상태마저 불량하여 진출이 매우 느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4월 20일을 전후하여 미 제3사단은 연천을, 미 제25사단은 금학산을, 미 제24사단은 문혜리를 , 그리고 영 제27여단은 사창리로 진출하여 우타선을 점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우타선과 캔사스선에 도달하고 잇음에도 적의 공격이 즉각 개시될 징후가 보이지 않아, 벤플리트 장군은 4월 21일 와이오밍선으로 제2단계작전을 개시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와 미 제1해병사단이 김화-화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은 적과의 접적이 없이 캔사스선 북쪽으로 3.2~8km를 진출하였다. 그러나 미 제1군단의 우전방에서 광덕산으로 진출한 미제24사단은 우인접 국군 제6사단과 연결을 위해 의도적으로 접적을 회피하였지만, 좌전방 보개산에서 철원을 공격한 미 제25사단(배속 터키여단)은 적의 포격으로 공격이 돈좌되었다.
이때 4월 21일, 적의 저항이 한층 강화되고 또 공격징후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항공정찰결과 북쪽과 북서쪽에서 적의 대규모 진출이 감지되고 임진강변에는 도하준비를 위한 정찰활동이 증가되었으며 생포된 포로들의 진술이 야간에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것이라 진술하기도 하였다.
이런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다섯 번쩨 공격인 춘계공세를 개시하였다., 이때 공산군은 6.25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대규모인 3개 병단 11개군 35개사단의 중공군과 북한군을 총동원, 4월(4.22-30)에는 서부전선(개성-화천)에, 5월(5.16-22)에는 동부전선(양구-인제)에 각각 주공을 지향하여 총공세를 취하였다.그 결과 공산군의 일부 부대가 중동부 전선에서 하진부리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역시 가요ㅕㅇ전력을 총동원하여 공산군에대응하였고, 결국 공산군의 공격은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 손실을 입고 구파발-홍천-하진부리-강릉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5월 말에 세 번재로 38도선을 회복하고, 6월 중순에는 문산-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 지역을 점령한 다음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선은 휴전협상 테이블에서의 설전과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한 고착된 전선에서 소모적인 국지전 양상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전략도서 확보작전과 공비토벌과 유격작전에 대해 간략하게 먼저 소개하고 중공군 춘계공세에 대한 총평를 하도록 하겠다.
5) 전략도서 확보 작전
'51년 초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작전을 전개하고 잇엇으나, 전선이 38도선 이남에 형성됨으로서 해상에서는 적의 항만을 봉쇄하고 해상로를 차단하여 적의 해군활동을 저지하고 재해권의 계속적인 확보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적 후방의 연안도서를 점령할 필요성이 대두되엇다.
그 밖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한 이후 적 지역에서 유격대ㅐ 활동이 증가되고 피난민들이 해안에 집결하여 월남을 기다리고 잇엇다. 해군은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해상수송작전의 안전선을 확보할 목적으로 38도선 이북 지역에 잇는 전략도서를 확보히기로 결정하였다.
가) 동해도서 상륙
신편된 제42중대는 1951녅 2우러 7일 지해에서 LST801함에 승선하여 영흥만으로 출항하여 적의 전략적 요충인 원산항을 통제할 수 있는 여도, 신도 소도, 대도, 황토도 순으로 상륙작전을 전개, 1개월여 동안 점령도서에 분산배치 되어 적정을 탐지하게 된다.
적은 해병대의 여도상륙을 간파하고 신도와 갈마반도에서 간헐적인 포병화력으로 여도를 포격하였다.
나)서해도서 상륙
제41중대는 3월 28일 801함편으로 서해로 출동하였다. 이 무렵 서해도서에는 적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 의용청년들로 편성된 유격대와 이를 통제하는 육해군 첩보기관이 활동하고 있엇다. 중대는 교동도-백령도-석도 순으로 상륙하게 된다. 중대는 5일간의 항해 긑에 4월 2일 교전업시 교동도에 상륙하엿다,. 당시 교동도에는 700여 명의 피난민이 집결되어 있엇는데 , 중대는 이들 중 지방청년 100명을 훈련시켜 유격대를 편성하여 해주 부근으로 침투하여 정보수집과 적 후방 교란작전을 계속하였다. 이어서 4월 23일에는 백령도에 상륙하여 이 섬의 군사시설을 방호하기 위해 바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때 백령도는 서해안 해상작전과 정보활도으ㅟ 중심지였음벼 육균과 해군정보대, 미 육군항고대도 주둔하고 있엇고, 피난민 8000명도 거주하고 있었다. 피난민 중 300명을 훈련시켜 섬읋 자체방어하도록 한다.
중대는 5월 7일 백령도 북쪽의 석도에 상륙하여 지역청년 100명을 선발하여 유격대를 편성하여 지역을 방어하였다.
해병독립중대의 적 후방 도서 확보작전은 정부수집과 감시할동을 통하여 아군 해군작전을 방해하는 적의 기뢰부설과 해안포대의 활동을 억제하고 내륙으로 기습상륙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효과를 가져와 해병대는 1951도 8월에 다시 독립 제43중대를 신편하여 동해안에 투입하게 되는데, 이 부대들은 다시 대대급으로 개편되어 후일 해병 도서부대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6) 공비토벌과 유격작전
가) 공비토벌작전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읋 퇴로가 차단된 패잔병들이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호남지역과 경북내륙지역에서 아군의 병참선 차단과 ,식량 약탈, 관공서 습격, 살인,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여, 이에 군이 1950년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토벌적전을 벌여 일부 공비는 지리산으로 도주하고 대부분 소탕되어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1월 말 중공군 신정공세시 제천 남쪽으로 진출하려던 인민군, 특히 안동으로 진출하였던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이 주변산악으로 도주하여 지방공비들과 합류하면서 이들에 의한 후방지역 교란활동이 재연되기 시작하였다.
▶호남지역 소탕전[국군 제11사, 이어서 제8사단이 공비토벌]
중공군 참전ㄴ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히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일대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둔 공비들이 , 다시 6.25와 같은 상황이 도해할 것으로 믿고 1950년 1우러 말에 대대적인 조직을 와료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북한군 창설 기념일(2월 8일)을 계기로 가일층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만행을 저지지르며, 특히 2월 중순이후 100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으로 집단적으로 출몰하기 사작했다.
이 ㅇ레 이 지역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전개해온 국군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제9연대를 전남지역에, 제13연대를 전북지역, 제20연대를 지리산 지구에 분산배치하였다. 배속된 일부 경찰과 청년방위대를 주보급로와 통신망 확보 임무를 부여하고 본격적인 공비토벌적전을 벌이게 된다.
제9연대는 1월 초순 지리산 북남동부의 내외공리와 덕산 일대에서 700여 명을 포착하여 35명 사살에 70명을 포로로 잡았다. 지리산으로 도주한 이들은 2월 초에는 북동부에 출몰하여 함양 마천면 가흥리, 산청 냉천면 사동, 함양 유리 일대에서 12명 사살과 180명을 생포한다.
제20연대는 담양,순창,장성,나주 일대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전북 회문산에 1,350여 명의 공비가 준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연대장인 박기병 대령은 2웛 9일부터 소탕작전으로 이들을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2월 20일에는 영광 불갑산에 350명을 포착하여 섬멸하고 그 일부가 대청산으로 잠입하자 3월 3일에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제13연대는 정읍 칠보, 운암발전소를 위협함에 따라 경찰과 합동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2월 하순 대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한동안 뜸하던 공비들이 다시 3월 중순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집단별로 이동하며 국군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물품약탈에만 주력하여 대략 23,000여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공비들의 활동은 제9연대 지역에 집중되어, 3월 13일 화순 백아산 지역에 160명이 출현하여 7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한다. 3월 17일에는 화학산에 250여 명이 출현하여 86명을 사살하고 16명을 생포한다. 이곳에서 남해여단장과 중앙감찰부장등 거물급ㅇ이 사살되었다. 이어서 3월 22일에는 순천에 500여 명이 출현하여 격퇴된다.
국군 제11사단은 '50년 10월 4일부터 '51년 4월 6일까지(제8사단에 임무인계)호남지구에서 공비사살 1,950여 명, 생포 및 귀순 2,178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531명, 실종 85명, 부상 843명이었다.
[거창 신원리 사건]
'51년 2월 10~11일 간에 거창 신원면에서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공빋글과 내통햇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함으로서 사회적인 물의를 빚어 국회현장 조사단의 조사로 관계자들의 의법 처리된다
[제11사단에서 제8사단으로 교대]
이에 따라 육군은 제11사단을, '51년 2월 횡성지구에서 중공군에 무력홛되어 대구에서 재편성 중인 국군 제8사단으로 교체한다. 제8사단 주력은 4월 3일 전주로 이동하며, 제16연대는 진주로 이동하여 백운산, 덕유산, 지리산 중산리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한다.
4월 16일 금산 대둔산 지역에 1,380여명이 준동항여 제21연대 제1대대, 공병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 등이 대둔산, 운암산, 원등산 지역에서 , 5월에 들어서는 제10연대 제1대대, 공병대대, 수색대대, 제1경비대대, 제18전투경찰대대, 제153청년방위대가 국사봉, 회문산 등지에서 1,200여명을 토벌하여 이들은 백양산, 내장산, 변산반도로 분산 도주한다.
국군 제8사단은 4월 15일부토 5월 15일까지 1개월 동안 호남지구에서 공비 사살 535명, 생포 624명의 전과를 올리고, 사단은 전사 12명, 부상 21명의 패해를 입었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실제 유해발굴과정에서 그 숫자의 허실이 밝혀지는데 화순 이양초등학교 뒷산에서만 21명이 기습을 받아 전사하여 너릿재 고개 하단에 가매장된 것을 발굴하여 무려 15명 이상의 신원이 확인되고 유가족을 찾았다.
이후 제8사단은 전선이 불안해지면서 5월 19일 전선으로 투입된다.
나) 태백산지역 소탕전
태백산지구 공비들은 '51년 12월 말부터 동부산악지역을 따라 침투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들이 주류엿다. 제10사단은 '51녅 1월 중순 태백산맥으르연한 안동, 의성 부근까지 남하하였다가 아군의 공격으로 퇴로가 차단돠어 철수가 불가능해지자 주변 산악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고 게릴라 부대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이미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남부군, 경북도당의 안동, 영덕, 영주, 봉화군당 유격대와 함세하여 태백산, 일월산,속리산을 위시하여 형제봉,보현산,동대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 제10사단의 후방활도이 증가하게 되자, 지난 중공군 신정공세시 피해를 입고 미 제10군단 예비사단이 되어 풍기에서 재정비 중이던 국군 제2사단이 육군본부에 직할부대로 전환하여 2월 13일부터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사단은 육군 전방지휘소로부터 제5,제6, 제7경비대대, 국민방위군 제1사단 제1연대, 전투경찰 2개 대대를 배속받아 1개월 동안 영천-포항, 영천-안동, 안동-영덕 간의 주보급로를 확보하면서 보현산 일대의 공비들을 소탕하게 되었다.
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2월 16일부터 제31연대는 주보급로를 경비하고, 제17, 제32연대로 보현산 일대의 개산동, 하수동, 용수동, 조락동 조림산 일대에서 공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제31연대장 박노규 대령,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일월산지구에서 전사]
'51년 2월 28일에 청송 방면의 북한군 제10사단이 북상 중이라는 정보에 에상통로인 일월산 부근을 차단하여 3월 1일 적 1,500여 명을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에 적은 800명, 400명으로 2개조로 편성하여 차단선을 돌파하려고 하여, 사단은 5일동안 전병력으로 일월산-통고산으로 적을 추격하여 사살 460여 명, 포로 40명의 전과를 올린다. 특히 일월산 소탕작전에서 제31연대장 박노규 대령과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전사한다.
북한군 제10사단이 분산되어 북상 도주하여 이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은 일단락되는 듯하였으나, 북한이 3월 초순에 유격전에 능숙한 1,700여 명으로 편성된 제1지대와 제3지대를 다시 이곳으로 남파하게 된다.
후일 판명된 바에 의하면 이들 제1, 3지재는 최초 '50년 11월 초에 맹산에서 북한군 직할 3개 유격여단(2,500명)으로 창설되어 111월 중순 동부전선의 북한군 제2군단의 엄호하에 양구-인제-오대산으로 침투 중 정선 북쪽에서 제2여단이 괴멸되어 제1, 제3여단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이동 중에 단대호를 조선 인민유격대 제1, 제3지대로 개칭하였으며, 중앙당의 직접 통제하에 팔공산에 거점을 확보할 목적으로 침투하였다.
적 제1, 제3지대가 3월 14일 봉화군 소천면 일대로 남하하자, 육군본부는 이 적을 선제 공격하여 섬멸하기로 하고 북한군 제10사단의 추격 임무를 제1군단에 배속 중인 국군 제9사단에 인계하고 제2사단은 적 제1, 제3지대 섬멸ㅇ에 주력하게 되었다.
적 제1지대 격멸작전에 나선 제17연대는 통고산 , 오미산, 석포리 일대에서 적 400여 명을 발견하여 정밀 추격하게 되자 적은 23일부터 오미산 북쪽으로 도주한다. 연대는 이들을 추격하여 정선 의 고양산까지 추격하여, 26일 고양산과 낙동리 일대에서 제1지대를 격멸하였다.
적 제3지대를 추격한 제32연대는 18일 새벽에 배속된 제7경비대대가 영양 남서쪽 양구동 일대를 정찰 중 808고지 일대에서 발견하여 강영훈 소령은 야간공격으로 25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한다.
연대장 조재미 대령은 제1대대를 신령, 제3대대를 군위를 경게토록 하고 제2대대가 삼의동으로 이동하여 제3지대를 격멸하도록 하였다. 제7경비대에 기습을 당한 제3지대는 포도산으로 잠입하게 되고 국민방위군 제3연대도 명동산을 공격하여 제3지대 참모장과 제1중대장을 사살하였다. 이에 적은 분산하여 23일부터 부ㅗㄱ으로 , 금장산-통고산 방향으로 북상하게 된다
이에 연대는 주산에서 일망타진할 계획으로 포위망을 압축한다. 하지만 주산이 엄폐물이 많아 백병전을 벌이며 격퇴하게 되고, 사단장은 3우러 29일 150명 규모의 적이 통고산-오미산-연화산을 따라 북상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제1단게작전을 종료하였다.
이후 사다능ㄴ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제17연대를 주축으로 한 제2단계작전을 전개하여 통고산 북쪽 평전지구에서 120명을 사살, 36명을 포로로 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작전지역 위치도
반론산1010
고양산1152 청옥산1402
문래산1081
민둥산1118
면산1245
응봉산999
묘봉 1169
삿갓봉 1084
백방산1154
오미산 1072
비룡산 1129
통고산1086
금장산 849
장군봉1129
일월산 1217
백암산 1004
오십봉 826 칠보산 810
주산 677
포도산 748 명동산 812
안동 청송 영덕
나) 유격대 활동
중공군의 참전과 1.4후퇴로 한때 잠잠하던 공비들의 활동이 다시 고개를 처들어 군이 후방지역 공비토발작전을 벌일 무렵 국군과 유엔군도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 후방지역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적 부대의 분산으르강요하여 전선으로 집중되는 적의 충격력을 조금이라도 원화시켜 중공군의 공세로 맞은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 주 목적이 있었다.
▶ 육군 통제 유격활동
국군이 중공군의 침략이라는 새 국면을 맞아 유격대를 편성한 것은 전선이 38도선으로 다시 남하한 '50년 12우러 중순이다. 이 무렵 육본의 정부참모부 공작과가 중신이 되어 극비리에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청년단체들의 협조를 얻어 주로 황해도, 평안도의 피난 청년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대대규모의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시켜 적의 복장과 장비를 지금한 다음 12월 말경 적지에 팀투시켰다. 이들은 문산에서 임진강을 건너 적지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했으나 곧 적의 신정공세로 1.4후퇴를 맞아 전선이 남하함으로써 통신소통의 결여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여 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없었다.
● 육군본부 결사유격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