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28-29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사실 저의 목회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와 함께 해 주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 지금은 나이가 들어 현장 목회 사역을 하지 않고 시골농촌에 살면서 이런 저런 세상 삶에 부딛힐 때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지 순간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는 것에 대하여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함께 할 수 없어 함께 못하시는 것인지에 대하여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하나님께서 주님과 함께 하셨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기뻐하는 일을 항상 행하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삶은 하나님이 함께 아니할 수 없도록 하시는 삶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님에게 보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만 항상 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 두고 혼자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이냐? 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보면, 노아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했을 뿐이고,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 기뻐하는 일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역시 홍수도 하나님 작정대로 집행되었을 뿐이고 사람들은 예정된 홍수에 죽은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노아에게 지시하신 것뿐이고, 노아는 그 일을 말씀대로 준행했을 뿐이었습니다(창 6:22).
노아가 특별히 잘한 것도 없고, 사람들이 사람들 입장에서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그들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만 하시고 또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역시 사람 입장에서 기뻐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고 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사람의 기뻐함」을 능가하고 이기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손해 보는 것은 사람 편입니다. 다만 사람의 기뻐함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일치되는 자만 살아남을 뿐입니다.
바벨탑 사건도 보면, 바벨탑은 「사람의 기뻐함」의 결정체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해서 손해나고 실패할 짓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한 번도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필요조차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공로를 인정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훈장 결제서류를 들이밉니다(롬 10:3).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두 가지 사건이 뒤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고, 나중 나오는 이야기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건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강도 만난 자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아 주는 것이고, 마르다 사건은 마르다가 주님을 공궤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자비를 베풀라”(37절)가 마르다의 공궤로 이해하고 있고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한(?) 마르다를 주님은 힐책하시며 오히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은(39-40절) 마리아에게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칭찬하시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는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35절)라고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바로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차이점의 노출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항상 자비를 베풀어야 할 사람은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왜「자비 베풂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은 못하는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강도들로부터 처절하게 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는(요10:10), 즉 「자비 베풂을 받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 상식으로도 강자는 약자를 도와주므로 기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강도 도적들의 만행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을 심히 기뻐하십니다(눅 15:7).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조차 잊고 주제 파악도 못하고 지금도 「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부담을 가지고 삽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공궤하므로 기쁘시게 할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공궤를 받아야 할 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20:28).
요한복음 4장 31절 이하에서 제자들이 행로에 곤하신(6절) 주님께 “랍비여 잡수소서” 하시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시고 밝히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궤할 필요가 없느냐? 아닙니다. 다만 공궤는 공궤요 「말씀 듣는 것」은 말씀 듣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먼저 할 것이냐의 선후 문제입니다.
주님은 분명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나라 그 의」는 관심이 없고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는 체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 그 의가 내 것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참으로 절대로 「이 모든 것」은 더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해질 수도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 더 이상의 헛수고는 아니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 나라 그 의」와 함께 오는 「모든 것들」이라는 사실, 새삼 명심해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끝으로 주님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28절은 분명히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하셨습니다.
적어도 주님은 아버지의 제자이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신 대로 말하고 전했습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셨다는 말입니다.
요 8:26에서도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4장의 다락방 강화에서는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하시면서 계속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실 뿐만 아니라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 7:17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계속해서 18절에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 라고 단정지어 언급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2:2-3절에서 실제로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그 다음절(요 8:31-32)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참 내 제자란 어떤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까?「내 말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요 8:37절은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현대식으로 풀면 “나도 너희가 기독교 교인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사람일 때 함께 하심을 꼭 기억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