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정
김춘리
신문을 들고 있다 속옷을 벗는다 지나간 길을 다시 지나간다 압정을 쏟아서
압정의 암수를 구별하는 일
압정의 목을 뒤집는 일
인조 손톱 대신 압정을 붙이기로 한다 압정이 누르는 방향으로 손가락이 휘어진다
좁쌀보다 작은 반짝임
압정이 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진 압정을 심장에 고정시킨다 꽂아도 아픈지 모르는 벽 어디쯤에서 따끔따끔한 얼룩이 생긴다
반짝이는 손톱을 너에게 보여준다 네가 웃어서
압정이 흘러내린다 무엇이든 찌르고 싶어지지만 압정은 휘어진다 압정이 휘어져 있다 언제 펴질까 벽에다 압정 꽂는 연습을 한다 벽에서 압정이 자라기 시작한다 편의점을 지나
지나간 길을 다시 지나간다.
시집 『모자 속의 말』2017. 문학수첩 시인선.
광장
김춘리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지만 광장은 발목처럼 밤새 흘러내렸다
춥지도 외롭지도 않았지만 웅크리기로 했다
두 손을 비비면 기적 소리가 들렸고 뜨거워진 손에서 무릎을 꺼낼 수 있었다
광장에 벗어 놓은 신발로 불꽃놀이를 할 수 있을까
야간열차의 통로는 비좁았다 침대를 오르내릴 때 들리는 소리가 좋았다 유리창에 붙은 도마뱀이 되기로 했다
차창은 모두 나무를 등지고 있어서 조바심이 났다 밀착되려는 힘과 떨어지려는 감정 터널을 지날 때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꼬리가 나무처럼 흔들렸다
코르도바를 지나는 중일 것이다 렌페역 광장을 지나는 중일 것이다 도마뱀 곁을 지나는 중일 것이다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지만
올리브 나무는 여전히 바람에 흔들렸다
시집 『모자 속의 말』2017. 문학수첩 시인선.
김춘리(金春里) 시인
강원 춘천 출생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모자 속의 말』
천강문학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