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권석천 <제이티비씨>(JTBC) 보도국장의 2017년 ‘제16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소감입니다. '송건호 언론상'은 고 청암 송건호 선생의 언론 정신을 기리고자 제정된 언론상으로, 2002년에 발족한 청암언론문화재단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한겨례신문>도 이 언론상 심사와 시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지키는 일과 관련해 함께 이야기 나눌 거리가 많은 것 같아서, 이 글을 교육문화연구학교 전에 미리 공유합니다.
<진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권석천 JTBC 보도국장
개인적으로 1975년 동아 사태와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지난해 11월 저는 논설위원으로 안종필 자유언론상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안 선생께선 해직 사태 후 동아투위 위원장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하다 투옥 중 얻은 병으로 40대, 저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제가 JTBC 뉴스룸을 대표해 받는 송건호 언론상은 송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송 선생은 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해직 사태에 분연히 사표를 던진 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말지를 만들어 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냈습니다. 나아가 한겨레신문 창간을 주도했습니다.
저는 송건호 선생도, 안종필 선생도 그 참혹한 야만의 시대를 언론인의 자존심 하나로 버텨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권력과 자본에서 자유로울 때 제 노릇을 다할 수 있다는 것,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의 불합리한 개입과 간섭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 힘과 돈의 논리로 진실을 가리거나 흐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청암 선생의 정신은 언론이 ‘기레기’ 소리를 듣는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제16회 송건호 언론상 수상자로 저희 JTBC 뉴스룸을 선정해주신 이유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한 일련의 특종 보도에 머물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물론 최순실 국정농단과 그 농단을 뒷받침한 박근혜 정부의 일탈과 범죄를 집중 보도해 한국 사회를 변화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권력과 자본에서 독립하여 성역 없는 보도, 오직 시민 사회에 복무하는 보도를 이어가라고, 분발을 촉구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저희 뉴스룸은 지난해 10월24일 태블릿 PC 보도 전부터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비판의 날을 세워왔습니다. 그 과정은 박근혜 재판에서 드러나고 있듯 정치권력의 노골적인 위협과 자본의 은밀한 압박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태블릿 PC 보도 후에는 이른바 친박 세력과의 싸움에서 전면에 서야 했습니다.
지난 한해 태블릿PC 조작설 같은 가짜뉴스의 망령들과 싸우며 저희가 깨달은 건 ‘진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기득권을 지키고 자기 밥벌이를 하려는 이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지능적입니다. 그들은 작은 빈틈도 놓치지 않습니다. 아니 빈틈을 만들어내서라도 여론을 오도하고 시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려고 합니다.
진실을 지키는 문제는 여전히 당면 과제입니다. 과거엔 폭력적이고 가시적이었다면 지금은 더 간교하고 내밀해졌습니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선 기자의 자존심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와 용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역사의식과 전문성, 그리고 실력까지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언론은 위기입니다. 비단 산업이나 경영의 위기만이 아닙니다. 진짜 자신들이 할 일을 외면한 채 생존을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했다고 합니다. ‘기자들은 개와 비슷하다. 뭔가 움직이기만 하면 짖어댄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와 국정원이 사이버 전쟁, 특수활동비 착복, 블랙리스트 공작을 벌이고 있을 때, 우린 움직이는 것을 향해 짖어대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팩트가 어그러지고 진실이 뒤엉키는 사이 정치부 기자들은 자신들을 유능한 줄 착각했고, 경제부 기자들은 스스로를 유식하다 자랑했고, 사회부 기자들은 권력이 흘린 정보를 팩트라고 맹신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나 비서실장, 청와대 수석, 언론사 사장, 국장 같은 몇몇 인물들이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론인 모두가 방관하고 침묵한 결과입니다.
이제 한국 사회는 변화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새로 태어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오지는 않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들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정부, 국회, 법원, 검찰, 언론엔 과거 정부의 여전히 같은 얼굴,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일상이 바뀔 때 그제야 우리는 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언론은 경쟁하고, 비판하고, 서로를 견인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에 개인을 넘어 프로그램에 상을 주신 의미는 뉴스룸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뉴스룸은 지난해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이 보여주셨던 뜨거운 변화의 목소리들이 배반당하는 일이 없도록 늘 깨어 있겠습니다. 다시 “이게 나라냐” “이게 언론이냐”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언론의 역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겠습니다.
손석희 보도부문 사장부터 부장, 막내 기자, PD, 작가, AD까지 우리 뉴스룸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땀 흘리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수고해주십시오.
이 상과 행사를 공동 주최하는 청암언론문화재단과 한겨레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70, 80년대 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낸 유족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또한, JTBC 뉴스룸을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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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823696.html#csidxf758c492252edc49c482d14f68e46f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