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해설] 빈 손의 기억 / 강인한
빈 손의 기억
강인한
내가 가만히 손에 집어든 이 돌을
낳은 것은 강물이었으리.
둥글고 납작한 이 돌에서 어떤 마음이 읽힌다.
견고한 어둠 속에서 파닥거리는
알 수 없는 비상의 힘을 나는 느낀다.
내 손 안에서 숨쉬는 알,
둥우리에서 막 꺼낸 피 묻은 달걀처럼
이 속에서 눈뜨는 보석 같은 빛과 팽팽한 힘이
내 혈관을 타고 심장에 전해온다.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내 손에서 날아간 돌의 의지가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물의 언어를
나는 알지 못한다.
빈 손아귀에 잠시 머물렀던 돌을 기억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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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피는 꽃
소년시절부터 저수지나 냇가에서 나는 물수제비 뜬 기억이 많다. 서귀포의 쇠소깍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기도 했다. 동글납작한 돌,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그런 돌을 손에 들고, 수면에 스칠 듯 말 듯 돌을 내쏘아야 하므로 알맞은 돌을 고르는 게 중요했다. 창던지기 자세처럼 왼 팔을 건너편 언덕을 향해 뻗고 오른손으로 힘껏 수면을 비스듬히 끌어당겨 던진다. 햇빛이 눈부신 가을날 오후였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를 돌아보고 오는 길.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매죽리. 웃매대 산허리에 묘소가 있고 아랫매대를 거쳐 칠보 방향의 차도로 올라서야 했다. 아랫매대 개울에서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다슬기를 잡고 아이들은 신바람이 났다. 나는 허리 굽혀 물수제비 뜰 돌을 찾는다. 추석 무렵 아직 따가운 햇살에 달궈진 돌이 뜨겁진 않아도 온기가 넉넉하였다. 파팟팟팟… 힘껏 내쏜 돌멩이는 날아서 수면 위를 담방 담방 담방, 몇 차례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다가 스르르 잠긴다. 그 순간의 은빛 물방울들. 수정의 꽃이 핀다고나 할까 찰나의 환호성이 들릴 듯한 광경이다.
손아귀에 쥐며 느낀 돌의 온기를 나는 둥우리의 갓 낳은 달걀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다. 어떤 달걀은 살짝 핏기가 스친 것도 있었다. 알은 생명체다. 비록 돌은 무생물이며 광물일 터이지만 수면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물을 만나 수정 왕관 같은 꽃, 영원한 생명을 피운다고 생각했다. 하나, 둘, 셋, 넷…. 그 찬란하고 가슴 떨리는 순간의 은빛 개화를 어떻게 말로 다 그려낼 것인가. 존재에 대한 순간의 자각. 그러나 너무나 짧게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 아름다웠던 존재의 허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정 꽃송이의 현현을 나는 시에서 어떻게 표현하나 고심하다가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라고 써내려갔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을 또한 아름다운 물의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유장한 물의 흐름에 비하면 그 수면에 나타날 수 있는 황홀의 극치는 얼마나 짧은 순간의 섬광일 것인가.
내가 가장 애착하는 이 시는 2005년 9월 12일 초고를 썼고, 그해 《현대시학》 10월호에 발표했다. 2017년 한국시인협회는 2017년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3박 4일간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을 기원하는 문화올림픽의 일환으로 “2017 한중일 시인축제”를 개최하였는데 그 3개국 합동 시집에 나는 이 시를 냈다. 일본 시인들 너댓 명이 합동 시집을 읽은 그날 저녁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매력적인 시라고, 환상적인 시라고 반겨줬고 후쿠오카의 시인 야치슈소(谷內修三)는 귀국한 다음 이메일로 그 시에 대한 에세이를 내게 보내줬다. “2017년 9월 14일~17일까지 서울과 평창에서 〈한중일 시인 축제〉가 열렸다. 그것을 기념해서 『2017 한중일 시인 축제 시선집』이 발행되었다. 그 책 속에 아주 매력적인 시가 있다. 강인한의 「빈 손의 기억」이다.”라고 소개한 “아름다운 감동과 눈부신 무음 교향악의 매력 -강인한「빈 손의 기억」”이란 제목의 에세이(원고지 29매)다. 나는 카페 〈푸른 시의 방〉에 우리말로 옮긴 그 에세이를 올렸다. (*)
첫댓글 왼팔을 창처럼 길게 뻗어 건너편 언덕을 향하고
오른손을 잠시 굽혔다가
힘껏 내쏘면
수면은 가볍게 돌을 튕기고 튕기고 또 튕긴다.
보라, 흐르는 물 위에 번개치듯
꽃이 핀다, 핀다, 핀다.
돌에 입술을 대는 강물이여
차갑고 짧은 입맞춤
수정으로 피는 허무의 꽃송이여.
-강인한
물수제비에 생명을 불어넣고 아주 아름답게 표현했네요.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