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노무현 조부: 일본군 앞잡이 부친 노판석: 인민군 앞잡이 노무현 조부는 일제때 친일행위를 하다가 해방 후 동네주민 들에게 괄시를 받았다. 그 아들 노판석(노무현 부친)은 6.25 때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인민군에 가세하여 사람들을 죽였 다.
<노판석의 정체>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은 6.25 당시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노무현의 고향은 전남 강진, 1953년 노무현이 5살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약 20~30명 가량의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 했다.
노판석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 산 활동을 했다.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가 철천지원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은 좌 익들 노판석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 산 활동을 했다. 노판석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가 철천지원수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은 좌 익들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할 때 못 본 체 했다.
노판석은 왜 빨치산이 되었나? 노무현의 조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 문이라 한다. 해방이 되자 동네 주민들로부터 엄청난 괄시와 무시를 당하게 됐다.
이에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큰 앙심을 갖고 있다가 6.25 가 터지고나서 괴뢰군이 전남 강진을 점령하자 괴뢰군의 앞 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철저한 앙갚음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
1953년 아군이 괴뢰군을 격퇴하고 남한 전역에 치안과 질서 를 확립해나가자 노판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무현(5살)과 노건평을 데리고 목 포항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야반 도주를 했다. 동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한 것.
가족을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한 노판석은 산골 오지인 경남 진영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그곳서 호적을 새로 만들었다. 당 시에는 전란 직후의 혼란기로 호적을 새로 만들기가 매우 쉬 웠다. 그 후 다시 김해로 도주를 했고, 이후부터 노무현 집안 은 경상도 출신 행세를 해온 것이다.
노무현은 김해에서 역시 6.25 당시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하 던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을 하게 된다. 권오석은 6.25 때 인민군 앞잡이로서 지역 주민 11명을 살해한 경력이 있다 .
이후 노무현은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 일을 채 1년이 못되게 하고 난 후 변호사 개업을 한다. 이때 노무현을 도와준 이가 김광일 변호사다. 김광일 변호사는 수습 변호사로 자기 사무 실에 온 노무현에게 돈까지 빌려주면서 노무현의 변호사 개 업을 도와준다. 이 때 빌린 돈은 불과 3개월 만에 다 갚았다. 김광일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시국사범들에 대한 인권 변론 을 하는데, 노무현과 문재인을 참여시키기도 했다. 김광일 변 호사 덕에
시국변론을 몇 번 하던 노무현은 김광일 변호사 덕에 김영삼 민주당 총재를 알게 되고 김영삼의 추천으로 공천을 얻어 국 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지 훨 씬 지난 후 책을 출간했다. 책에서 노무현은 "YS로부터 봉투 를 많이 받아서 원도 없이 써봤다" 라고 썼다.
그리고 5공 청문회가 열렸다. 노무현은 이때 전두환 전 대통 령에게 명패를 집어 던졌고 이 덕분에 호남지역사람들과 김 대중의 눈에 들게 됐다. 얼마 후 민자, 민주, 자민의 3당 합당 반대에 나서면서 이를 명분으로서 합당을 극렬 반대했고, 꼬 마 민주당에 잠시 머물다 DJ 진영에 합류했다. 이후 DJ와 노 무현의 관계는 양부, 양자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13.권오석 (노무현 장인, 권양숙 부친) 일제때 시험 봐서 공무원이 되었음. 당시 공직에 나서려면 신 원조회 필수였는데 골수 친일집안이 아니고는 일제가 공무 원 시켜줄리 없었음. 권오석은 6.25때는 인민군 쪽에 붙어서 동네사람들 죽임.
권오석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들의 유족 중에 변재환 박사(58 세)가 있다. 그는 권오석에 의해 살해된 유족회의 대표다. 그 는 권오석에 대해 이렇게 털어놨다.
"권오석은 태생부터 맹인은 아니었다. 막걸리를 공업용 알콜 에 섞어 마시다가 실명된 것이다. 실명한 권오석은 6.25가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남로당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 숙부님인 변백섭은 면장이었고 권오석은 면서기 였다. 권씨는 사상관계로 의심을 받아 다른 면에 있다가 쫓겨 와, 변백섭 면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6.25가 나자, 권오석은 창원군 진전면의 치안대장이 되 었다. 눈이 먼 권오석은 동네사람들의 손바닥을 만져보고 죽 일지 살릴지를 등급별로 판정했다. 왜냐하면 손바닥에 굳은 살이 많이 배겨있으면 순수한 농민이고, 아니면 공무원 또는 부자이기에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6.25당시 북한군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원서을 근거로 양민을 학살했는데, 세계최초의 맹인 살인마 권오석의 손바닥 검사 살인도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권오석의 경우에는 사살대를 동원한 살해는 지양하고, 아들 이나 딸이 있는 경우 그 아들과 딸에게 죽창을 쥐어주고 부모 를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권오석이 인민재판 으로 살해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가족, 특히 자녀들에 의해 대부분 살해 되었다. 패륜범죄를 양성시킨 장본인이 바 로 노무현의 부인이자, 대한민국 영부인이었던 권양숙의 아 버지인 권오석이었다.
부모가 자신의 아들 그리고 딸의 죽창에 의해 몸이 관통당하 며 서서히 숨통이 끊어질 때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당장 죽 는다는 고통이 먼저였을지, 아니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 는 그들 자녀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을지, 그때 그들 부모들이 느꼈을 고통과 고뇌를 생각하면 우울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