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소사
소정리 넉바위에서 남관리의 딸만 일곱인 집의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는 1905년 3월 18일생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11월 17일에 있어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해간 해에 태어나셨습니다. 할머니는 1907년 6월 22일생으로, 헤이그 밀사파견을 문제삼아 일본은 고종을 폐위하고 사법권과 행정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7조약을 7월 24일에 맺는 해에 태어나셨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나라가 망해가는 시기에 조부모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시대에 자라고 혼인하셨습니다. 1925년 할아버지가 20세에 장자를 낳고 둘째를 1928년에 낳고 이후 세 아들과 두 딸을 얻어 6남 2녀를 갖게 됩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23세-25세 사이인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일본으로 가 노동일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일본에 계실 때 둘째 아들이 고모 등에 업혀 사고를 입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사고를 전해 듣고 한국에 오지 않으려 하셨다는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책무를 다하지 못함을 서러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노동일로 번 돈으로 용머리 땅을 사서 둘째의 몫으로 하신 것입니다. 둘째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한번은 아버지께 천안의 고모가 “미워요?”라고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 물음에 “아니다.”고 차분하고 부드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시는 아버지가 제가 알 수 없는 커다람으로 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45세인 1950년에 전쟁이 일어났고, 가장 믿음직스럽고 똑똑한 21세인 장자가 전쟁중에 면에서 일을 하다가 1926년생인 백모와 1948년생인 4살 아들인 장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나셨습니다. 사상의 잣대가 무성한 전쟁 후에 장손이 사는 길을 하느님은 안내해 주셨습니다. 장손을 살리려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고향 남관리를 지키십니다. 할아버지가 55세인 1960년에 1942년생인 넷째가 육사에 갔다가 시험성적은 됐는데 연좌제로 떨어졌다고 장손을 미워하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의 속이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59세인 1964년에 큰집에 불이 일어나 다 타니 할아버지의 그동안 쌓아놓았던 것이 재가 되었다는 것에 큰 실망을 하신 듯합니다. 믿었던 장손과 영민했던 둘째가 바라던 대로 살지 못하고 넷째가 이로 인해 육사에 진학을 하지 못해 좌절하고 집이 불타니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겼을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넉바위를 보고 지나치시고 자신의 흐르는 삶을 보시며 차령고개를 한걸음씩 오르셨을 것입니다.
1928년 무진생이신 둘째가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1935년 10월 19일생의 장녀(3남 5녀)로 성환의 방개울에서 남관리로 시집오신 어머니이십니다. 성환댁으로 어머니를 집안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전쟁 통에 어머니의 큰 오빠(제게 큰외삼촌)가 국방군으로 가서 전사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말씀이 없이 속에만 담고 무거운 얼굴로 사셨고 외할머니는 무진장 단아하게 자신을 묶으면서 사셨습니다. 저는 3남 2녀 중 위로 누나가 있고 장남으로 동생들과 함께 남관리에서 자랐습니다. 1957년생인 누나는 장녀이기에 공부를 중단하고 서울 가서 돈을 버셨고 동생들을 지금도 돌보십니다. 지금도 누나는 우리 집에서 최고의 아름다운 삶으로 복의 근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9남매의 장자인 자형과 함께 귀향하셔서 제천 곰바위에 사시고 홍콩에 사는 조카와 원주에 사는 조카가 복있게 삽니다.
소정리 큰 할아버지 집에는 교장선생님이 네 분과 학교선생님이 많았지만, 남관리로 오신 둘째인 우리 할아버지 집에는 선생으로 나갈 수 없기에 개인 사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본의 식민지시기에 농촌에 봉사활동을 온 대학생으로부터 한글을 익히셨고 제 책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위암으로 2년간 엄마의 돌봄을 받으시다가 1975년 제가 중학교 일학년때 1975년 4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을잔치가 오면 아버지는 자신의 즐거움을 물구나무서기로 도는 행위로 흥을 돋구우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흥겨움이 제 흥겨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살 많은 형이 공부해야 하기에 1962년생인 동생은 공부 대신에 일을 하였고 은퇴한 작년에 9개월만에 고검과 대검을 다 합격해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공부를 하고 싶었는지가 제게 전해져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어머니와 가까이 살고 늘 어머니를 챙기는 제수씨의 신심이 아름답습니다. 동생을 보면 아버지 얼굴이 떠오릅니다. 잘 성장한 두 조카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커 기쁩니다. 에비오제를 먹는 모습으로 기억되는 1965년생인 둘째 동생은 균형감각을 갖고 살아 제가 많이 인생을 배웁니다. 틈이 날때마다 아버지 산소 앞에 두 평의 밭을 일구며 아버지와 늘 가까이 지냅니다. 두 조카가 대학생이어서 가장 바쁜 집입니다. 넉넉한 마음씨를 가진 제수씨입니다. 1967년생인 막내 여동생은 해금연주로 전국의 메달도 받았고 이대 정도는 다녔을 실력이었습니다. 큰오빠가 운동한다고 집을 챙기지 않아서 대학가는 대신에 일을 하여 제게는 평생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마음 착한 덕산출신의 정서방과 소중한 세 조카와 삽니다.
제가 가장 학교생활이 행복했던 때는 봄이면 개나리꽃이 넘치게 피는 계광중학시절입니다. 대전고를 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가지 못하고, 국비로 공부한다니 국악고를 다니게 되었고 해금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과 삶을 나누는 좋은 동료인 한기온, 강남원, 최영석, 김완수, 원남연, 권병웅, 최덕선, 이수금, 박용운과 정부영, 강희창, 이후영, 임무열, 고철영, 김선도, 손창규, 김순신을 만났고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고, 후에는 공장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여성운동을 하는 1960년생인 허성우여성을 만나 대전주교좌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고 딸 보리 테레사와 아들 동욱 제레미를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으로 받은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허성우가 영국 세섹스에서 공부하던 중에 두 아이를 돌보신 장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보리를 보면 장모님이 보입니다. 대학에서 가르친 세 처남과 약국을 하는 동서 형 덕분에 사는 지혜를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성당에서 신앙을 갖고 신학교를 다녔고 부제와 사제가 되었고 전주교회와 광혜원교회에서 하느님의 품을 잠깐 꿈처럼 지냈고, 달동네인 성남동에 들어가 나눔의집을 기도로 하여 성남동교회가 세워졌고, 쌀집 이층으로 올라가 들어가니 유성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때 아내 허성우막달라마리아 박사는 대학교에서 여성학교수로 재임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샌 앤드류대학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아들이 하늘로 간 것입니다(2014.4.22). 보이지 않게 된 아들로 인하여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가치가 더 궁극적인데로 들어갔고 삶의 방향이 더 근본적인 것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무한한 시간과 자신이 하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했습니다. 피선주교가 됐고(2014.8.30) 주교성품식이 일어났고(2014.12.6), 대주교(의장주교)로 세계를 다니게 되었고 대전교구장 주교직을 내려놓고(2023.4.30.) 이제는 영국 런던 댐즈강 남부의 서덕교구로 가서 개척교회로 뉴몰든에 사는 한인들을 섬길 것입니다. 젊은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나이 들어 귀국할 나이에 선교사제로 하느님이 파송하심을 믿습니다. 2년 일찍이라도 젊어야 선교의 역할을 제대로 할 듯하여 먼저 사임서를 제출하니 교구신도들과 교구사제들에게 가장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더 하느님께서 우리 교구민들과 함께 해 주시길 기도드리게 됩니다. 믿음의 가족이 확장된다고 믿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