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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호세 8,4-7.11-13
복 음 :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대학을 다니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이 학생들은 남들을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일반 학생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니라 63%였지만, 일반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이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도움을 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요? 63%에서 10%로 도움을 주는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근본적으로 착한 성향을 보여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방송에서 난처한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듯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무관심하다고 악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대처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역시 잘못이 아닐까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냈고 이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반대의 뜻을 취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반대하는 모습, 어쩌면 앞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수확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의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 됩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취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합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태오 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 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두고는 차마 못 배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 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 있는 이들',
인정해 주지 않아서 고용해 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 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3박 4일’의 교구사제모임을 마치고 신부님들은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날에 신부님들은 교구장님과 대화 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미주지역에도 ‘미사 도우미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작년부터 ‘미사 도우미 사제’라는 직책을 신설했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은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에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피정이나 휴가를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 겁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거나, 대도시에 있는 신부님들은
그나마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소도시의 작은 규모의 성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도움을 청한다하더라도 한 달 가까이 미사를 도와준다면
그에 대한 사례비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있다면, 해외 교포 사목의 경험이 있는 사제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는 신부님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원하면 고백성사를 줄 수 있습니다.
교구장님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다면
미사 도우미 사제의 파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장소에 대한 의견도 있었습니다.
현행의 장소 선정은 4개 본당이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홀리 엔젤스 성당, 워싱턴 DC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4곳 모두 성당의 규모가 큰 편이고, 보좌 신부님이 있습니다.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성당입니다.
신부님들은 규모가 작은 성당에서도, 남미에서 선교하는 성당에서도
교구사제모임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공항에서의 이동을 대중교통이나 우버를 이용하고,
피정의 집을 숙소로 정하면 본당의 규모와 상관없이 개최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하루는 피정의 집에서 성체조배와 피정을 하고, 하루는 교구사제들이 친교를 나누고,
마지막 날에는 사목의 체험을 공유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포 사목 성당도 고령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봉사와 도움을 받기보다는 사제들이 스스로 모임을 꾸려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사제들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2026년의 교구사제모임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선교 사제들, 유학 사제들, 본당 재정이 힘든 사제들에게 특별히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대표를 교구장님이 임명하고, 공문을 보내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표가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을 하나의 지구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에 있는 지구장 제도를 미주지역에도 도입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미주지역이 워낙 이동 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당 사목을 하면서
지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지구장과 대표를 겸임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재정지원을 받기보다는 미주지역의 본당에서 재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주지역에서 고백성사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각 교구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지구장 제도의 도입과 재정지원은 다른 지역(유럽, 아시아, 호주)과의
형평성도 있기 때문에 검토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현임 대표신부님이 내년에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에 새로운 대표를 선출해야 했습니다.
관례상 서품 연도가 가장 빠른 사제가 대표가 되었기에 제가 대표로 추대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는 경쟁과 성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위해서는 양심을 속이기도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할 가족들마저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 토마 신부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원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도 악평에 대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시다시피 마태오복음은 5-7장이 산상수훈,
곧 율법과는 다른 주님의 가르침 모음입니다.
그리고 8-9장은 주님의 갖가지 치유 모음인데
오늘 복음은 치유 얘기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구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군중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정반대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지요.
어떻게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오는지.
그것은 겸손한 군중과 교만한 바리사이들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만 선하기에
자기 밖의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악하다고 단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군중에 대해서는 율법도 모르는 족속이라고 곧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주님께 대해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졸개일 뿐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악평합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이렇게 간단하게 악으로 평가하니
그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을 자들이다.”라고 저주하고,
안식일 법과 정결례 법을 어긴다고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니
오늘 주님께서 한탄하시듯 군중은 그들 밑에서 다 기가 꺾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한편으로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를 보며 저도 주님처럼 가엾은 마음도 가집니다.
정말 저 자신에 깨어있지 않으면 저도 악평의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도 깨어있어야 하지만
제가 얼마나 뼛속부터 교만한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가엾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 안에서 모든 사람이 기가 꺾여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할 때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그런데 그것이 상처를 줘야겠다고 작심하고 주는 것이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경쟁 사회의 부지불식의 교만 때문입니다.
부지불식이란 알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겁니다.
경쟁 사회 안에서는 남을 깎아내리고 내리누르고 악평해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안에 박혀 있고,
그러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우월감과 교만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악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지불식의 교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서로 기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기를 살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들에게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때 이른 폭염과 장마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특히 농사짓는 분들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불볕더위와 과도한 비바람에 농작물들도 힘겨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예초를 한다고 잠깐 나갔었는데 사우나가 따로 없습니다.
잡초들을 바라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다!’ 어찌 그리도 생명력이 왕성한지요. 뽑아도 뽑아도 또 자라납니다.
한바퀴 예초를 쭉 하고 돌아서면 벌써 저쪽 끝에서는 또 다른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뿌리는 얼마나 튼튼하고 깊이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방심했다간 피정 센터 전체가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이게 됩니다.
잡초 제거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는 정작 원하는 농작물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왕성한 식욕을 지닌 잡초들이 모든 영양분들을 다 흡수하다 보니
농작물들은 시들시들, 삐쩍 말라 휘청거리다가 결국엔 죽어버립니다.
좋은 결실을 기대한다면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꾸준히, 일상적으로 잡초를 뽑아줘야 합니다.
그것이 농작물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도 일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당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던 사람들,
가장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사람들만을
우선적 사목 대상으로 선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일 지금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인 교세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신축 부지 마련이나 신축도 중요합니다.
성지의 개발도 중요합니다. 신자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각종 단체의 활성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시대 살아있는 교회이자 성지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